가방이 성혜인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받지 않아 바닥으로 모두 떨어졌다.윤선미는 더 난리 쳤다.“언니 가방이 얼마인 줄 알기나 해요? 한정판이라 몇십억 한다고요! 당신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고!”성혜인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선미 씨, 저는 도우미가 아니라 디자이너예요. 같이 갈 생각 없으면 회사에서 기다리셔도 돼요.”“뭐라고요?!”성혜인에게 한 방 먹었지만 윤선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하지만 윤단미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쿨하게 주우면서 윤선미의 것도 함께 챙겼다.“페니 씨는 승제가 고용한 디자이너인데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 집에서는 그렇다 쳐도 밖에서 이러지 마.”이미 충분히 골탕 먹였다고 생각했다. 윤단미가 반승제의 와이프가 될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 것으로 충분하다.정말 대놓고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었다. 격 떨어지니까.그녀의 말에 윤선미는 급히 자기 가방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언니.”윤단미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아직 철이 안 들어서요. 미안해요. 갈까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윤단미가 여우 같다고 생각했는데, 꽤 격식을 갖춘 여우짓이었다. 윤선미가 바로 그런 윤단미의 총알받이 역할이고 말이다. 세 사람은 함께 로비 프런트를 지나쳐 갔다. 성혜인을 발견한 최효원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하지만 윤단미를 보는 순간 아주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아가씨, 가시려고요?”밖에서는 겸손을 유지하는 윤단미는 공손히 웃으며 답했다.“네. 디자이너님과 같이 승제 집 보러 가요.”“축하드려요. 다음에 또 오세요.”최효원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성혜인을 쳐다보는 순간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성혜인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 차를 타려 했다.하지만 성혜인의 차를 본 윤선미는 또 소리쳤다.“이 차, 1억도 안 하겠는데요?”이 차는 성혜인이 스스로 구입한 것이었다. 비싸지 않지만 핸들링이 좋고 성혜인의 첫 자가
그렇게 30분을 달려 네이처 빌리지에 도착했다.성혜인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도착한 윤단미와 윤선미가 차에서 내리자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이쪽으로 오세요.”성혜인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윤단미는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300평 규모의 정원이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네이처 빌리지의 구조는 초반에 큰 인기를 끌었다.별장 독채로 되어 있지만 지금은 정원이 황무지처럼 비어 있어 이곳도 성혜인의 손길이 필요했다.성혜인은 두 사람을 데리고 문제의 기둥 앞으로 갔다. 시공 중인 내부는 시끄럽고 먼지가 자욱했다.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 앞을 휘저었다. 윤선미 역시 먼지를 마시지는 않을까 입을 막았다.성혜인은 앞으로 가 기둥을 없앤 곳을 가리켰다.“여기예요.”해가 떠 있는 시간에 도착한 덕분에 햇빛이 건물 안으로 쏟아졌다. 햇빛을 가리는 기둥을 없애니 채광이 좋았다.하지만 네이처 빌리지는 구조 자체가 좋아 일조량이 충분했다.윤단미는 사방이 온통 먼지투성이인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여기에 20평 정도 되는 반려동물 놀이터를 하나 만들죠. 햇빛도 잘 들겠네요.”성혜인은 흠칫했다.“단미 씨, 대표님은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는걸요.”“알아요. 전 고양이 키워요. 랙돌이랑 골든 친칠라인데, 승제도 본 적 있고 좋아해요. 여기 채광도 좋은데 쓸 만한 용도가 없다면 여기에 고양이방을 만들면 되겠어요.”생각하지 못한 윤단미의 아이디어에 성혜인은 반승제의 의견을 물으려 휴대폰을 꺼냈다.그러자 윤단미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지금 승제한테 전화하려는 거예요? 승제가 저한테 아이디어 내라고 했잖아요.”하지만 성혜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여기 단미 씨 명의로 되어있나요?”윤단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무슨 뜻이죠?”“죄송하지만 전 디자이너고 부동산 소유자가 제 고객이어서요. 소유자가 나중에 트집이라도 잡으시면 단미 씨가 책임지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지금
반승제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윤단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윤단미는 귀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짤막했다.“회의 들어갈게.”“알았어, 승제야.”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윤단미는 성혜인에게 시선마저 따뜻해졌다.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다. 반승제가 결혼한 여자에게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다.과격한 말이지만, 이미 남편과도 꽤 잠자리를 했을 텐데 깔끔한 반승제라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윤단미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제 말대로 진행하세요. 그리고 벽면과 바닥은 칠보 장식품으로 깔아 주세요. 제가 칠보 스타일을 좋아하거든요. 해외에서 유행이기도 하고요.”성혜인은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칠보는 최근 수십억에 호가할 만큼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재료였다. 칠보 기법에서 볼 수 있는 푸른색은 사실 디자이너들에게 ‘매혹적인 푸른빛’이라 불릴 정도로 사랑받는 색상이기는 하다.고급 저택에서 꽤 인기 있는 석재이기 때문에 성혜인도 칠보 스타일의 석재를 후보로 꼽았었지만, 집 전체를 칠보 스타일로 깔아버린다면 오히려 칠보 스타일이 주는 우아한 느낌을 해칠 수 있다.“단미 씨,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바닥에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윤단미는 거절당한 게 불만이었는지 얼굴을 구겼다.“제가 방금 한 말 잊었어요? 이 집은 제가 앞으로 살 곳이니까 제가 말한 대로 디자인해야죠. 승제도 허락했는데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왜 참견이에요?”성혜인은 깊게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이 좋아하시는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칠보 스타일로 전부 깔아버리면 비싼 느낌만 부각될 뿐 멋이 없어요.”윤단미의 요구는 반려동물 놀이터에서 그칠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바닥 전체를 칠보 스타일로 깔겠다니. 성혜인이 생각한 디자인과 너무나도 다른 길이다. 설계도를 완전히 엎게 생겼다.게다가 이렇게 한다면 디자인이 촌스러워질 게 분명했다. 반승제가 예
성혜인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누군가 의구심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화가 났다.이건 자신의 면전에다 욕을 한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이었다.성혜인은 웃음기 없는 얼굴에 유리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그럴 리가요. 단미 씨가 전화하는 걸 들어서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반승제는 한참 동안 성혜인을 쳐다보다 목젖을 들썩였다.“결혼한 사람이 이렇게 호텔에서 오래 묵으면 집에서 뭐라 안 하나?”성혜인은 반승제가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는 게 의아했지만 성실히 답했다.“가족한테 일이 생겨서요. 이곳이 병원에서 더 가까워요.”“왜 나랑 같은 층에 묵는 거야?”반승제는 여전히 방문을 열지 않은 채 성혜인을 쳐다봤다.여유롭게 서 있는 그에게서 무심한 듯한 잘생긴 아우라가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반승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마치 성혜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예약했던 방에 문제가 생겨서 호텔이 보상 차원으로 스위트룸을 줬어요.”성혜인은 빙긋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BH 그룹의 호텔답게 서비스가 정말 좋네요.”하지만 그 순간 주변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무심해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반승제의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검게 변했다.“그 이유 때문에?”성혜인은 순간 반승제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BH그룹을 칭찬하면 안 되는 건가?’머리를 굴리던 성혜인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반승제는 픽 웃었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화가 나는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그는 시선을 거두며 문을 열었다.“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성혜인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네이처 빌리지 디자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요.”반승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반승제가 불을 켜지 않으니 성혜인 역시 굳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성혜
성혜인의 얼굴 앞을 가로지르는 반승제의 손.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기다란 손에 시선을 빼앗긴다.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숨어있는 야수가 그의 손끝에서 요동친다. 차가우면서도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진다.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바로 그때, 반승제는 반대 손으로 성혜인을 잡아당겨 벽으로 밀쳤다.빠져나갈 곳이 없었다.성혜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벽에 바짝 붙었지만 반승제와의 거리를 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반승제는 양팔로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다.성혜인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차마 그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성혜인이 반승제의 품속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분위기에 혼을 빼앗길 것 같았지만 상대가 반승제였기 때문에 성혜인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반승제와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때마침 성혜인의 휴대폰 벨 소리가 간지러운 분위기를 내쫓았다. 성혜인은 왜인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성혜인은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 보았고 바로 서민규였다.평소에는 제멋대로 전화를 거는 서민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반승제 역시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꾹 물며 기뻐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는 성혜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심지어 성혜인은 전화 덕분에 살았다는 듯이 뻣뻣하게 굳었던 몸도 풀어졌다.반승제는 천천히 손을 풀며 성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승진했어? 응, 알겠어. 곧 갈게.”서민규는 정말 승진을 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이 그의 체면을 살려주려 직접 로비에서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더라면 승진의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기에 성혜인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다.서민규는 사실 다른 생각도 품고 있었다. 성혜인과 진지하게 잘해보려는 생각.성혜인이 흔쾌히 승낙하자, 서민규는 곧바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성혜인은 레스토랑 이름을 한 번 읊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을 막고 있던 커다란 팔뚝은 사
등 뒤에서 마치 호랑이가 달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번쩍 안아 현관 수납장 위에 올렸다.“대표님!”성혜인은 놀란 나머지 목이 메었다. 수납장 위에 올라앉으면서 188cm의 반승제와 눈높이가 같아졌다.성혜인이 깜짝 놀라 벽으로 바짝 붙었지만 반승제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성혜인은 알고 있다. 그날 밤, 침대에서 괴력을 보여준 반승제는 평상시 냉랭한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곧바로 병원에 가야 할 정도였다.턱을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성혜인의 눈동자에서 물보라가 일었다.반승제는 그런 성혜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는 곧바로 입을 맞췄다. 성혜인이 거절할 틈도 없이 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놀란 성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승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하지만 반승제의 입술은 숨 쉴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성혜인은 아찔한 기분에 다리 마저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문득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마치 수많이 손이 그녀를 수렁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기분이었다.반승제의 입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다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바로 그 순간, 성혜인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반승제를 그대로 밀쳤다.강한 힘에 반승제 역시 힘쓸 새 없이 뒤로 밀려났다.성혜인은 황급히 수납장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하지만 너무 경황이 없던 나머지 문을 열자마자 넘어지고 말았다.손에 쥐고 있던 자료들이 공중 위로 날아 사방에 흩뿌려졌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을 쓰기도 전에 성혜인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성혜인은 다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뒤로 하고 자료 더미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자료들을 한 장 한 장 줍기 시작했다.반승제 역시 허리를 숙였다. 성혜인이 고개를 들지 않자 손가락으로 마지막 종이 한 장을 꾹 눌렀다.다급하게 종이를 줍다 마지막 한 장에 손을 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반승
성혜인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아닌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안녕하세요, 시환 씨.”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그를 지나쳐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두 군데가 온시환의 눈에 띄었다. 몸에 난 흔적과 손에 들고 있던 네이처 빌리지의 설계도. 옅게 붉어진 눈시울과 작게 떨리는 손끝만 봐도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페니 씨.”온시환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린 성혜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날렸다.“승제가 꽤 과격했나 봐요.”성혜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이곳을 벗어났다.온시환은 씩 웃으면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꼭대기 층에서 내린 그는 반승제 방의 방문을 두드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온시환은 슬쩍 방 안 냄새를 맡았다. 일을 치른 이후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지금 애들 불러서 얘기해. 결혼한 여자랑 한 판 놀았다고.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그 사이 반승제는 실크 재질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덕에 손과 발이 더 길쭉해 보였다.온시환은 반승제가 반응이 시큰둥하자 더 흥미로워졌다.“방금 엘리베이터에서 페니 씨 봤어. 귀신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데.”그 말에 볼펜을 쥐던 반승제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온시환은 마음속으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짜 한 거야? 엥, 자고 싶으면 바로 잘 수 있는 윤단미가 떡하니 있는데, 다른 남자랑 잔 적 있는 여자와 자는 건 더럽지 않아?”굳이 남자친구나 남편이 있는 여자를 골라 만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비웃음을 사게 되는 취향이다.반승제는 말없이 눈앞에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고 앞으로 밀었다.“이거 갖고 꺼져.”오늘의 약속 상대는 온시환이었다. 국내 최고 극작가인 온시환은 지금 극본을 하나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다분야 경영을 하고 있는 BH그룹은 명품점, 호텔, 자동차, 놀이공원, 여행지 등 십여 종의 다양한 분야를 산하에 두고 있다.하지만 가장 핫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는 줄곧 투자를 아껴왔었다.오늘
온시환은 서류를 들며 침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나 간다. 오늘 일,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윤단미한테도.”현관문이 닫히고, 방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침실 창가에 서 있던 반승제는 창밖을 쳐다봤다.도시 전체에 내려앉은 네온사인 불빛이 한눈에 담겼다.하지만 반승제는 무심하게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바라봤다.부드럽고 따뜻한 온기, 그리고 향기. 모든 게 손끝에 남아 모공을 뚫고 사지 전체로 퍼져 나간다.온시환의 말이 맞았다.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사슴처럼 공포에 떨고 있는 여자를 보고 참지 못해서 달려들었던 걸까.입술을 삼키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뼛속까지 파고들고 싶었다.욕구를 너무 오래 방치한 탓일까.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너무 오래 참아서 그런 걸까.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그때, 마침 윤단미에게서 전화가 왔다.“승제야, 회의 끝났어? 과일 좀 준비해서 갈까 해. 심 비서가 오늘 밤에 해외 회의가 있다고 알려줬어. 늦게 끝날 거라고.”윤단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윤단미는 그사이 도우미를 시켜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쯤 혼자 있을 것이라는 온시환의 문자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반승제 앞에서 늘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그의 뒤를 쫓아 다니는 다른 여자들과 차별점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반승제가 유일하게 허락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조급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야 했다.온시환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지금 반승제에게는 여자가 필요할 것이다.윤단미는 얼굴을 붉히며 도우미를 재촉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거절하지 마. 우리 제대로 대화 나눈 지 정말 오래됐잖아.”그사이 반승제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놀랄 만한 자제력이었다.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켰다. 해외 회의 연결까지 30분 남았다.“알았어.”미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한편 윤단미는 눈을 반짝이며 빙긋 웃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