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이 성혜인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받지 않아 바닥으로 모두 떨어졌다.윤선미는 더 난리 쳤다.“언니 가방이 얼마인 줄 알기나 해요? 한정판이라 몇십억 한다고요! 당신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고!”성혜인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선미 씨, 저는 도우미가 아니라 디자이너예요. 같이 갈 생각 없으면 회사에서 기다리셔도 돼요.”“뭐라고요?!”성혜인에게 한 방 먹었지만 윤선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하지만 윤단미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쿨하게 주우면서 윤선미의 것도 함께 챙겼다.“페니 씨는 승제가 고용한 디자이너인데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 집에서는 그렇다 쳐도 밖에서 이러지 마.”이미 충분히 골탕 먹였다고 생각했다. 윤단미가 반승제의 와이프가 될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 것으로 충분하다.정말 대놓고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었다. 격 떨어지니까.그녀의 말에 윤선미는 급히 자기 가방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언니.”윤단미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아직 철이 안 들어서요. 미안해요. 갈까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윤단미가 여우 같다고 생각했는데, 꽤 격식을 갖춘 여우짓이었다. 윤선미가 바로 그런 윤단미의 총알받이 역할이고 말이다. 세 사람은 함께 로비 프런트를 지나쳐 갔다. 성혜인을 발견한 최효원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하지만 윤단미를 보는 순간 아주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아가씨, 가시려고요?”밖에서는 겸손을 유지하는 윤단미는 공손히 웃으며 답했다.“네. 디자이너님과 같이 승제 집 보러 가요.”“축하드려요. 다음에 또 오세요.”최효원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성혜인을 쳐다보는 순간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성혜인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 차를 타려 했다.하지만 성혜인의 차를 본 윤선미는 또 소리쳤다.“이 차, 1억도 안 하겠는데요?”이 차는 성혜인이 스스로 구입한 것이었다. 비싸지 않지만 핸들링이 좋고 성혜인의 첫 자가
그렇게 30분을 달려 네이처 빌리지에 도착했다.성혜인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도착한 윤단미와 윤선미가 차에서 내리자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이쪽으로 오세요.”성혜인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윤단미는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300평 규모의 정원이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네이처 빌리지의 구조는 초반에 큰 인기를 끌었다.별장 독채로 되어 있지만 지금은 정원이 황무지처럼 비어 있어 이곳도 성혜인의 손길이 필요했다.성혜인은 두 사람을 데리고 문제의 기둥 앞으로 갔다. 시공 중인 내부는 시끄럽고 먼지가 자욱했다.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 앞을 휘저었다. 윤선미 역시 먼지를 마시지는 않을까 입을 막았다.성혜인은 앞으로 가 기둥을 없앤 곳을 가리켰다.“여기예요.”해가 떠 있는 시간에 도착한 덕분에 햇빛이 건물 안으로 쏟아졌다. 햇빛을 가리는 기둥을 없애니 채광이 좋았다.하지만 네이처 빌리지는 구조 자체가 좋아 일조량이 충분했다.윤단미는 사방이 온통 먼지투성이인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여기에 20평 정도 되는 반려동물 놀이터를 하나 만들죠. 햇빛도 잘 들겠네요.”성혜인은 흠칫했다.“단미 씨, 대표님은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는걸요.”“알아요. 전 고양이 키워요. 랙돌이랑 골든 친칠라인데, 승제도 본 적 있고 좋아해요. 여기 채광도 좋은데 쓸 만한 용도가 없다면 여기에 고양이방을 만들면 되겠어요.”생각하지 못한 윤단미의 아이디어에 성혜인은 반승제의 의견을 물으려 휴대폰을 꺼냈다.그러자 윤단미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지금 승제한테 전화하려는 거예요? 승제가 저한테 아이디어 내라고 했잖아요.”하지만 성혜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여기 단미 씨 명의로 되어있나요?”윤단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무슨 뜻이죠?”“죄송하지만 전 디자이너고 부동산 소유자가 제 고객이어서요. 소유자가 나중에 트집이라도 잡으시면 단미 씨가 책임지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지금
반승제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윤단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윤단미는 귀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짤막했다.“회의 들어갈게.”“알았어, 승제야.”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윤단미는 성혜인에게 시선마저 따뜻해졌다.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다. 반승제가 결혼한 여자에게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다.과격한 말이지만, 이미 남편과도 꽤 잠자리를 했을 텐데 깔끔한 반승제라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윤단미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제 말대로 진행하세요. 그리고 벽면과 바닥은 칠보 장식품으로 깔아 주세요. 제가 칠보 스타일을 좋아하거든요. 해외에서 유행이기도 하고요.”성혜인은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칠보는 최근 수십억에 호가할 만큼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재료였다. 칠보 기법에서 볼 수 있는 푸른색은 사실 디자이너들에게 ‘매혹적인 푸른빛’이라 불릴 정도로 사랑받는 색상이기는 하다.고급 저택에서 꽤 인기 있는 석재이기 때문에 성혜인도 칠보 스타일의 석재를 후보로 꼽았었지만, 집 전체를 칠보 스타일로 깔아버린다면 오히려 칠보 스타일이 주는 우아한 느낌을 해칠 수 있다.“단미 씨,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바닥에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윤단미는 거절당한 게 불만이었는지 얼굴을 구겼다.“제가 방금 한 말 잊었어요? 이 집은 제가 앞으로 살 곳이니까 제가 말한 대로 디자인해야죠. 승제도 허락했는데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왜 참견이에요?”성혜인은 깊게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이 좋아하시는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칠보 스타일로 전부 깔아버리면 비싼 느낌만 부각될 뿐 멋이 없어요.”윤단미의 요구는 반려동물 놀이터에서 그칠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바닥 전체를 칠보 스타일로 깔겠다니. 성혜인이 생각한 디자인과 너무나도 다른 길이다. 설계도를 완전히 엎게 생겼다.게다가 이렇게 한다면 디자인이 촌스러워질 게 분명했다. 반승제가 예
성혜인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누군가 의구심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화가 났다.이건 자신의 면전에다 욕을 한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이었다.성혜인은 웃음기 없는 얼굴에 유리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그럴 리가요. 단미 씨가 전화하는 걸 들어서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반승제는 한참 동안 성혜인을 쳐다보다 목젖을 들썩였다.“결혼한 사람이 이렇게 호텔에서 오래 묵으면 집에서 뭐라 안 하나?”성혜인은 반승제가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는 게 의아했지만 성실히 답했다.“가족한테 일이 생겨서요. 이곳이 병원에서 더 가까워요.”“왜 나랑 같은 층에 묵는 거야?”반승제는 여전히 방문을 열지 않은 채 성혜인을 쳐다봤다.여유롭게 서 있는 그에게서 무심한 듯한 잘생긴 아우라가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반승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마치 성혜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예약했던 방에 문제가 생겨서 호텔이 보상 차원으로 스위트룸을 줬어요.”성혜인은 빙긋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BH 그룹의 호텔답게 서비스가 정말 좋네요.”하지만 그 순간 주변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무심해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반승제의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검게 변했다.“그 이유 때문에?”성혜인은 순간 반승제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BH그룹을 칭찬하면 안 되는 건가?’머리를 굴리던 성혜인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반승제는 픽 웃었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화가 나는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그는 시선을 거두며 문을 열었다.“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성혜인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네이처 빌리지 디자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요.”반승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반승제가 불을 켜지 않으니 성혜인 역시 굳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성혜
성혜인의 얼굴 앞을 가로지르는 반승제의 손.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기다란 손에 시선을 빼앗긴다.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숨어있는 야수가 그의 손끝에서 요동친다. 차가우면서도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진다.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바로 그때, 반승제는 반대 손으로 성혜인을 잡아당겨 벽으로 밀쳤다.빠져나갈 곳이 없었다.성혜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벽에 바짝 붙었지만 반승제와의 거리를 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반승제는 양팔로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다.성혜인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차마 그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성혜인이 반승제의 품속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분위기에 혼을 빼앗길 것 같았지만 상대가 반승제였기 때문에 성혜인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반승제와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때마침 성혜인의 휴대폰 벨 소리가 간지러운 분위기를 내쫓았다. 성혜인은 왜인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성혜인은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 보았고 바로 서민규였다.평소에는 제멋대로 전화를 거는 서민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반승제 역시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꾹 물며 기뻐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는 성혜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심지어 성혜인은 전화 덕분에 살았다는 듯이 뻣뻣하게 굳었던 몸도 풀어졌다.반승제는 천천히 손을 풀며 성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승진했어? 응, 알겠어. 곧 갈게.”서민규는 정말 승진을 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이 그의 체면을 살려주려 직접 로비에서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더라면 승진의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기에 성혜인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다.서민규는 사실 다른 생각도 품고 있었다. 성혜인과 진지하게 잘해보려는 생각.성혜인이 흔쾌히 승낙하자, 서민규는 곧바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성혜인은 레스토랑 이름을 한 번 읊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을 막고 있던 커다란 팔뚝은 사
등 뒤에서 마치 호랑이가 달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번쩍 안아 현관 수납장 위에 올렸다.“대표님!”성혜인은 놀란 나머지 목이 메었다. 수납장 위에 올라앉으면서 188cm의 반승제와 눈높이가 같아졌다.성혜인이 깜짝 놀라 벽으로 바짝 붙었지만 반승제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성혜인은 알고 있다. 그날 밤, 침대에서 괴력을 보여준 반승제는 평상시 냉랭한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곧바로 병원에 가야 할 정도였다.턱을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성혜인의 눈동자에서 물보라가 일었다.반승제는 그런 성혜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는 곧바로 입을 맞췄다. 성혜인이 거절할 틈도 없이 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놀란 성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승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하지만 반승제의 입술은 숨 쉴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성혜인은 아찔한 기분에 다리 마저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문득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마치 수많이 손이 그녀를 수렁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기분이었다.반승제의 입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다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바로 그 순간, 성혜인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반승제를 그대로 밀쳤다.강한 힘에 반승제 역시 힘쓸 새 없이 뒤로 밀려났다.성혜인은 황급히 수납장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하지만 너무 경황이 없던 나머지 문을 열자마자 넘어지고 말았다.손에 쥐고 있던 자료들이 공중 위로 날아 사방에 흩뿌려졌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을 쓰기도 전에 성혜인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성혜인은 다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뒤로 하고 자료 더미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자료들을 한 장 한 장 줍기 시작했다.반승제 역시 허리를 숙였다. 성혜인이 고개를 들지 않자 손가락으로 마지막 종이 한 장을 꾹 눌렀다.다급하게 종이를 줍다 마지막 한 장에 손을 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반승
성혜인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아닌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안녕하세요, 시환 씨.”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그를 지나쳐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두 군데가 온시환의 눈에 띄었다. 몸에 난 흔적과 손에 들고 있던 네이처 빌리지의 설계도. 옅게 붉어진 눈시울과 작게 떨리는 손끝만 봐도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페니 씨.”온시환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린 성혜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날렸다.“승제가 꽤 과격했나 봐요.”성혜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이곳을 벗어났다.온시환은 씩 웃으면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꼭대기 층에서 내린 그는 반승제 방의 방문을 두드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온시환은 슬쩍 방 안 냄새를 맡았다. 일을 치른 이후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지금 애들 불러서 얘기해. 결혼한 여자랑 한 판 놀았다고.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그 사이 반승제는 실크 재질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덕에 손과 발이 더 길쭉해 보였다.온시환은 반승제가 반응이 시큰둥하자 더 흥미로워졌다.“방금 엘리베이터에서 페니 씨 봤어. 귀신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데.”그 말에 볼펜을 쥐던 반승제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온시환은 마음속으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짜 한 거야? 엥, 자고 싶으면 바로 잘 수 있는 윤단미가 떡하니 있는데, 다른 남자랑 잔 적 있는 여자와 자는 건 더럽지 않아?”굳이 남자친구나 남편이 있는 여자를 골라 만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비웃음을 사게 되는 취향이다.반승제는 말없이 눈앞에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고 앞으로 밀었다.“이거 갖고 꺼져.”오늘의 약속 상대는 온시환이었다. 국내 최고 극작가인 온시환은 지금 극본을 하나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다분야 경영을 하고 있는 BH그룹은 명품점, 호텔, 자동차, 놀이공원, 여행지 등 십여 종의 다양한 분야를 산하에 두고 있다.하지만 가장 핫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는 줄곧 투자를 아껴왔었다.오늘
온시환은 서류를 들며 침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나 간다. 오늘 일,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윤단미한테도.”현관문이 닫히고, 방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침실 창가에 서 있던 반승제는 창밖을 쳐다봤다.도시 전체에 내려앉은 네온사인 불빛이 한눈에 담겼다.하지만 반승제는 무심하게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바라봤다.부드럽고 따뜻한 온기, 그리고 향기. 모든 게 손끝에 남아 모공을 뚫고 사지 전체로 퍼져 나간다.온시환의 말이 맞았다.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사슴처럼 공포에 떨고 있는 여자를 보고 참지 못해서 달려들었던 걸까.입술을 삼키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뼛속까지 파고들고 싶었다.욕구를 너무 오래 방치한 탓일까.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너무 오래 참아서 그런 걸까.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그때, 마침 윤단미에게서 전화가 왔다.“승제야, 회의 끝났어? 과일 좀 준비해서 갈까 해. 심 비서가 오늘 밤에 해외 회의가 있다고 알려줬어. 늦게 끝날 거라고.”윤단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윤단미는 그사이 도우미를 시켜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쯤 혼자 있을 것이라는 온시환의 문자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반승제 앞에서 늘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그의 뒤를 쫓아 다니는 다른 여자들과 차별점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반승제가 유일하게 허락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조급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야 했다.온시환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지금 반승제에게는 여자가 필요할 것이다.윤단미는 얼굴을 붉히며 도우미를 재촉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거절하지 마. 우리 제대로 대화 나눈 지 정말 오래됐잖아.”그사이 반승제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놀랄 만한 자제력이었다.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켰다. 해외 회의 연결까지 30분 남았다.“알았어.”미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한편 윤단미는 눈을 반짝이며 빙긋 웃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이전에는 연승혁의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원아정 한 명뿐이었다. 원아정과는 단순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던 거라서 그녀와의 경험은 그저 상쾌함만 느껴졌고 내면의 만족감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지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연승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피부를 만지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기대어 있는 공지민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연승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공지민이 다 씻은 후 옆에 있던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침대에 누운 공지민은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연승혁은 욕구를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무해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고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이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쓰다듬을 때 공지민은 가끔 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승혁은 더욱 불타올랐지만 그녀가 현재 아픈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연승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고 공지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후 그한테 물었다.“오빠, 우리 정말 약혼한 사이에요?”그녀의 질문에 연승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공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요.”연승혁이 그녀의 목을 힘껏 깨물자 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연승혁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순수해 보여? 오늘 밤, 네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줄게.”공지민의 볼이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연승혁은 그냥 말해본 거였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그가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연승혁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고 자신이 지금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흔적을 하나하나 남길 적마다 그의 이성은 사라졌고 오늘 밤만은 그녀
공지민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은 온시환이 차를 세워둔 위치였다.오후부터 그녀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온시환이라는 걸 알았다. 온시환은 열 몇 시간 동안 은밀한 곳에 숨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지민은 연승혁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연승혁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차로 돌아간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덮어줬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공지민을 안고 안방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악몽을 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가지 마요.”“날 괴롭히지 마요.”그런 공지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중간에 공지민이 눈을 떴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도우미가 몸보신하는 죽을 들고 오면서 물었다.“도련님, 제가 지민 씨 먹여드릴까요?”연승혁은 손을 들어 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제가 할게요.”도우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연승혁은 공지민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지민아, 얼른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너 지금 열도 나고 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공지민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오빠 돌아왔네요.”연승혁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한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공지민은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근데 또다시 나갈 건가요?”연승혁은 늦어도 날이 밝은 후 일 보러 다시 나가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민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고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그렇다고 이상우를 불러 공지민의 기억을 되돌리고 온시환 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만 해도 연승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한테 죽을 먹여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염정아는
염정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지민은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그다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회가 끝나갈 무렵 염정아는 갑자기 공지민한테 다가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지민 언니,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공지민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눈이 따가워졌다.염정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경찰을 따라 다시 들어갔다.홀로 남은 공지민은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는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서 문 앞까지 나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복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마침 연승혁의 전화가 걸려 와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공지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연승혁은 드디어 도망간 사람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어 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공지민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거였다.“나 지금 경찰서에요. 내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오빠, 나 걔랑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고등학교 때 우린 둘 다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근데 우리를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연승혁은 그녀들을 괴롭힌 사람이 이미 죽은 원아정이란 걸 알고 있었다.그가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공지민이 울기 시작했다.“오빠, 보고 싶어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 연승혁의 심장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원래는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러 가야 했지만 그녀가 걱정되어 조종사한테 목적지를 바꾸라고 말했다.“우린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추적하라고 해.”조종사는 조금 놀랐다. 보스가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고 이제 겨우 단서를 얻었는데 제국으로 돌아간다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