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수건만 걸친 상태라 안에 옷도 없었고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으로 반승제와 마주치다니 온몸이 화끈거렸다.반승제의 손에는 약이 들려져 있었고 와이셔츠만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어놓아 쇄골이 드러났다.그 아래로 붕대가 보일락 말락 했다.성혜인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마도 약을 발라달라고 온 듯했다.그들의 방도 가까웠고 저번에도 성혜인이 붕대를 감아줬었으니.게다가 심인우의 방은 어디인지 몰랐기에 반승제는 그저 가까운 성혜인을 찾아왔다.반승제가 그녀를 쓱 훑어보았다가 몸을 돌려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하지만 성혜인은 약을 바르지 않으면 그의 상처가 깊어질까 봐 약을 발라주고 싶었다.채찍질을 당한 데에는 성혜인의 이유가 적지 않으니까.“약을 발라 드릴까요? 들어오세요.”성혜인은 옆으로 비켜섰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차림을 하고 그더러 들어오라고 했다면 그는 그런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성인 남녀사이에 일어나는, 뭐 그러한 일들 말이다.하지만 상대는 성혜인이었다. 그날 그녀에게 넘어간 것도 그녀의 눈망울이 너무 순수해 보여서였다.이렇게 자기한테 들어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저 그의 상처가 걱정되어서일 것이다.반승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듯했다.“승제 씨!”방이서의 목소리를 들은 반승제는 미간을 팍 찌푸리고 바로 성혜인의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밖의 발걸음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가 그의 문밖에 우뚝 멈춰 섰다.“승제 씨, 과일 먹을래요? 우리 아빠가 직접 심은 딸기인데, 엄청 커요.”이렇게 늦은 시간에 고작 딸기 때문에 온 건 아닐 것이었다.성혜인도 알고 있었다. 반승제의 아름다운 외모와 그의 고귀한 신분 때문에 거의 모든 여자가 반승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잘 대해준다는 것을.하지만 서류상 부부인 그녀는 반승제를 피하기만 급급했고 게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의 피부가 뜨겁게 느껴졌다.반승제의 호흡마저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은 그저 열심히 약을 바르고 빠뜨린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 후 붕대를 가져와 다시 감으려고 했다.하지만 이 붕대를 감아주는 동작이, 그전에도 그랬지만, 몸을 숙여야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거리가 또 어쩔 수 없이 좁혀졌다. 숨결이 얽혀들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리고서 미간에 힘을 주었다.그가 이성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 성혜인은 빨리 붕대를 감기 위해 노력했다.마지막 바퀴를 다 감고 나서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숨이 반승제의 피부에 닿아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반 대표님, 다 되었습니다.”성혜인은 어색함에 빨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꽉 쥔 반승제의 주먹 속에 성혜인의 몸을 감고 있던 수건의 한 귀퉁이가 들어갔다. 그래서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수건이 그대로 풀려버렸다.반승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저 수건 한 장이 그의 머리를 덮은 후였다.성혜인은 놀라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일단은 수건으로 그의 시선을 가릴 생각이었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울대를 움직였다.“페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성혜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수건이 반승제의 눈을 가려서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하지만 반승제의 물음에 그녀는 몸이 확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그래서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건을 잡고 계셔서...”급한 마음에 수건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의 몸을 감쌌던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다니 무례했다.하지만 그녀의 옷은 씻기 위해 불려놨었다. 전혀 입을 옷이 없어 성혜인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머리 위의 수건을 걷어냈다.“반 대표님, 안...”성혜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가 눈을 감고 수건을 건넸다.굳어버린 성혜인의 귀에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렸다.“싫어?
성혜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반승제는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칫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옷을 적게 입은 데다가 마침 분위기도 좋아서 그랬던 건가?’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깃털같이 가벼운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자, 몸이 또다시 화르르 달아올랐다.이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성혜인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비척비척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목까지 새빨개진 자신이 보였다.‘나 진짜 왜 이러는 거야...’성혜인은 차가운 물을 틀어 놓고 세수를 했다.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말이다. 차가운 물이 뜨거운 얼굴에 닿자,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반승제 때문에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설마... 설마 반승제도 세속적인 욕망이 있었던 건가?’꼬리에 꼬리를 문 기억은 두 사람의 첫날밤까지 이어졌고, 성혜인은 덕분에 완전히 잠이 깨어버렸다. 막연하게 옷을 씻고, 막연하게 옷을 말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 시가 되었다.성혜인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암시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갈 데까지 가본 사이이고, 분위기 좋은 타이밍에 뽀뽀 정도 하는 것은 반승제의 입장에서 가벼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생각하며 금세 진정한 성혜인은 스르르 잠들었다. 어젯밤에 이어 오늘 밤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면 아침에 차를 타고 이동하기 힘들게 뻔했다. 다행히 성격이 무딘 편이었던 성혜인은 쉽게 잠들었다.4시간 정도 자고 7시 정각에 일어난 성혜인은 어젯밤 씻었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몇 시간 동안 머리를 비우고 나자, 어젯밤 일어났던 일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곧 이혼할 사이에 신경 쓸 건 없지.’성혜인은 문을 벌컥 열고 어제 걸어왔던 길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이미 밖에 나와 있던 반승제는 방태주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이서의 말에 현장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반승제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성혜인은 약간 당황하다가 금세 진정하고 시선을 떨군 채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비슷해요. 근데 외간 남자는 아니고 남편이 걱정되는지 전화가 와서 통화를 좀 오래 했어요.”성혜인은 방이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남편이라는 말에 방이서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어젯밤 내내 세운 계획이 약간 우스워지기도 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마른기침을 할 때, 방태주가 입을 열었다.“이서야,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얼른 사과하지 못해? 페니 씨가 성격이 좋아서 망정이지, 너 그러다 밖에서 다른 사람한테 미움을 사면 어떡하려고 그래?”방이서는 이제야 경계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페니 씨. 벌써 결혼한 줄 몰랐어요.”성혜인이 결혼한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어젯밤 그렇게 못되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나저나 꽤 젊은 나이에 결혼했네요? 남편이 좋은 사람인가 봐요.”성혜인은 방이서의 말에 동의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다들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나이가 아직 어렸던 방이서는 대화의 기술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계속해서 캐물었다.“그렇다는 건 페니 씨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네요?”성혜인은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에 앉아 있던 반승제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관심 없는 듯한 자태로 컵을 만지작댔다.방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아~ 알겠다. 페니 씨한테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 있는 거죠? 남편이 있는 데도 계속 생각나는 첫사랑, 그런 거 맞죠?”이때 방태주가 끼어들어 말했다.“이서야, 너 그만 좀 떠들어. 애가 어쩌면 말을 가려 할 줄도 모르니? 페니 씨, 미안해. 우리 애가 철들지 못해서 이래.”성혜인은 방태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솔직한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이 말머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방이
‘나는 뭐 잘못한 거 없는데?’성혜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반승제는 벌써 뒷좌석에 앉아 서류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와 다른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완벽히 어울린다는 것만큼은 언제나 똑같았다. 한 줄기의 햇살이 그의 얼굴에 비쳐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차 안에 올라탄 성혜인은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이때 방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가방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갔다.“저 등교해야 하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줘요.”반승제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머리를 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서천에 있을 거야. 서울로 가는 게 아니라.”방이서는 이미 차에 올라타서 반승제와 착 달라붙었다.“괜찮아요. 그럼 저도 서천에서 놀죠, 뭐.”보다시피 방이서의 목적은 차를 얻어타는 것이 아닌, 반승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다정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의 신분이 우스워졌던 성혜인은 말없이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반승제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승제를 방해할 용기가 없었던 방이서는 만만한 성혜인을 방해하기 시작했다.“페니 씨가 다른 남자랑 같은 차를 탄 걸 알면 남편이 질투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 올 때도 같은 차를 타고 왔잖아요.”“제 남편은 일에 간섭한 적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냥 페니 씨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에요?”이렇게 말한 방이서는 머리를 돌려 적나라한 눈빛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아내가 이렇게 훌륭한 남자랑 같이 있다는데 위기감이 들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어요? 얼른 전화라도 해봐요.”방이서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말했다. 성혜인이 결혼했다는 것을 안 뒤로 그녀의 적개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승제가 아무리 어째도 유부녀와 데이트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그래도 서로에게 존중과 믿음을 주는 게 건강한 혼인이 아닐까요?”이 말을 들은 반승제는 사인하던 동작을 멈췄다. 머릿속에는 서민규가 다른 여자와 공공연히 키스하
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네, 또 봐요.”성혜인은 바로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반승제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때 방이서가 그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승제 씨, 뭘 봐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큼성큼 하늘에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택시를 타고 임동원의 집 앞으로 왔다. 주변에는 이웃을 포함한 구경꾼이 잔뜩 모여서 손가락질하고 있었다.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임동원과 이소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집 밖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연장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화 건너편에서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인 듯했다.성혜인은 그중 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불끈불끈한 근육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실례합니다. 임남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성혜인을 발견한 남자는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 줄 몰랐다는 듯 흔쾌히 답했다.“높으신 분의 아들이 임남호 그 자식한테 맞아서 머리를 스무 바늘이나 꿰맸어요. 우리 서기관님께서 반드시 해결 방안을 받아오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 쫄보들이 집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거 있죠? 쫄보 뿌린데 쫄보가 난 격이죠, 하하.”성혜인은 임동원과 이소애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들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이렇게 된 것이니 말이다. 지나친 사랑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구시대 사상이 존재하는 서천에서는 아들이 한 집안의 전부였다. 아들로 태어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변함없는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서천 사람은 하나 같이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편애를 줬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요구는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딸에게는 아주 각박한 편이었다.성혜인은 차분한 자태로 남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여러분 진정하세요. 제가 한번 불러볼 테니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될까요? 서기관님도 해결 방안을 받아오라고 했지 폭력을 쓰라고는 안 했잖아요.”남자는 콧방귀를 뀌
임동원과 이소애는 성혜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해결 방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임남호가 성혜인의 뒤에 숨어 있는 꼴은 아주 우스웠다. 구경꾼들이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고 임동원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지난번 집을 사들인 일로 인해 이미 관계가 끝장났던지라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이 동네가 아무리 곧 철거한다고 해도 서천군청에서 아직 말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과 얼굴을 붉혀서 좋을 게 없었다.남자들은 임남호의 비굴한 모습에 소리 내어 비웃기 시작했다.“꼴에 사람 팰 용기는 있었나 봐?”임남호는 잔뜩 경직된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때 성혜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난 그냥 돌아갈래. 어차피 이 사람들은 오빠를 찾으러 온 거고, 나는 삼촌이랑 숙모가 무사한 것만으로 충분해. 이참에 한 번 맞고 정신 좀 차려.”임남호는 성혜인의 팔을 꼭 잡았다. 자기 모습이 얼마나 비굴한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손을 놓을 용기가 없었다.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혜인아!”임동원이 황급히 쫓아가며 말했다.“남호가 그래도 네 사촌 오빠인데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아니지.”“맞기 싫으면 제대로 설명하면 되죠. 이 사람들도 설명을 원해서 찾아온 거잖아요. 만약 경찰이 찾아온다면 집을 판다고 해도 남호 오빠를 빼내지 못할 거예요.”성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경찰들이 들어와서 임남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임동원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제자리에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아빠, 엄마, 살려줘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혜인아, 나 좀 도와줘. 너는 내 사촌 동생이잖아.”성혜인도 잔뜩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도 경찰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이소애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성혜인의 팔을 잡더니 애원하기 시작했다.“혜인아, 내가 이렇게 빌게. 너 반 대표님이랑도
방이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는 보지 못했다, 그저 휴대폰 화면에 짧은 영어가 뜬 것만 희미하게 보았다.“승제 씨, 전화 안 받아요?”반승제는 임원이 건네는 술을 받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보이스피싱이야.”“아...”방이서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휴대폰에 이름이 뜨는 걸 봐서는 분명히 저장된 번호였다.이때 한 임원이 말했다.“대표님, 이것 좀 마셔보세요. 셰프가 서천 특산품인 매실로 직접 담근 매실주예요.”반승제는 감사 인사와 함께 매실주를 한 모금 마셔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모두 이번 프로젝트에 진심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이서는 반승제의 표정이 약간 달라진 것을 느꼈다.인사치레로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었다. 반승제는 셔츠 단추 두 개를 풀며 프로젝트에 새로 더해진 조항을 간단히 설명했다. 군청 임원들은 흔쾌히 동의했고 다른 복지 시설도 세울 생각이라고 말했다.잠시 후 반승제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레스토랑과 화장실은 전부 별장의 1층에 있었다. 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성혜인은 일부러 화장실 앞에서 반승제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별장 앞에서 잠깐 기다려 볼 생각이었는데 도우미들이 화분을 옮기는 것을 보고 손을 보태다가 어쩌다 보니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흙이 잔뜩 묻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온 것이다. 남녀공용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성혜인은 그렇게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앞길을 막게 되었다.“대표님?”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고는 수도를 틀어 느긋하게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약간 위로 말아 올린 소매 아래로 자극적이게 튀어나온 힘줄이 은은하게 보였다.성혜인은 화장실 문 앞에 멈춰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승제의 차가운 모습에 말을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손을 씻고 난 반승제가 물기를 닦아내며 먼저 물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