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수건만 걸친 상태라 안에 옷도 없었고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으로 반승제와 마주치다니 온몸이 화끈거렸다.반승제의 손에는 약이 들려져 있었고 와이셔츠만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어놓아 쇄골이 드러났다.그 아래로 붕대가 보일락 말락 했다.성혜인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마도 약을 발라달라고 온 듯했다.그들의 방도 가까웠고 저번에도 성혜인이 붕대를 감아줬었으니.게다가 심인우의 방은 어디인지 몰랐기에 반승제는 그저 가까운 성혜인을 찾아왔다.반승제가 그녀를 쓱 훑어보았다가 몸을 돌려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하지만 성혜인은 약을 바르지 않으면 그의 상처가 깊어질까 봐 약을 발라주고 싶었다.채찍질을 당한 데에는 성혜인의 이유가 적지 않으니까.“약을 발라 드릴까요? 들어오세요.”성혜인은 옆으로 비켜섰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차림을 하고 그더러 들어오라고 했다면 그는 그런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성인 남녀사이에 일어나는, 뭐 그러한 일들 말이다.하지만 상대는 성혜인이었다. 그날 그녀에게 넘어간 것도 그녀의 눈망울이 너무 순수해 보여서였다.이렇게 자기한테 들어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저 그의 상처가 걱정되어서일 것이다.반승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듯했다.“승제 씨!”방이서의 목소리를 들은 반승제는 미간을 팍 찌푸리고 바로 성혜인의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밖의 발걸음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가 그의 문밖에 우뚝 멈춰 섰다.“승제 씨, 과일 먹을래요? 우리 아빠가 직접 심은 딸기인데, 엄청 커요.”이렇게 늦은 시간에 고작 딸기 때문에 온 건 아닐 것이었다.성혜인도 알고 있었다. 반승제의 아름다운 외모와 그의 고귀한 신분 때문에 거의 모든 여자가 반승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잘 대해준다는 것을.하지만 서류상 부부인 그녀는 반승제를 피하기만 급급했고 게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의 피부가 뜨겁게 느껴졌다.반승제의 호흡마저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은 그저 열심히 약을 바르고 빠뜨린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 후 붕대를 가져와 다시 감으려고 했다.하지만 이 붕대를 감아주는 동작이, 그전에도 그랬지만, 몸을 숙여야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거리가 또 어쩔 수 없이 좁혀졌다. 숨결이 얽혀들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리고서 미간에 힘을 주었다.그가 이성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 성혜인은 빨리 붕대를 감기 위해 노력했다.마지막 바퀴를 다 감고 나서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숨이 반승제의 피부에 닿아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반 대표님, 다 되었습니다.”성혜인은 어색함에 빨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꽉 쥔 반승제의 주먹 속에 성혜인의 몸을 감고 있던 수건의 한 귀퉁이가 들어갔다. 그래서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수건이 그대로 풀려버렸다.반승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저 수건 한 장이 그의 머리를 덮은 후였다.성혜인은 놀라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일단은 수건으로 그의 시선을 가릴 생각이었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울대를 움직였다.“페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성혜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수건이 반승제의 눈을 가려서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하지만 반승제의 물음에 그녀는 몸이 확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그래서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건을 잡고 계셔서...”급한 마음에 수건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의 몸을 감쌌던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다니 무례했다.하지만 그녀의 옷은 씻기 위해 불려놨었다. 전혀 입을 옷이 없어 성혜인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머리 위의 수건을 걷어냈다.“반 대표님, 안...”성혜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가 눈을 감고 수건을 건넸다.굳어버린 성혜인의 귀에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렸다.“싫어?
성혜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반승제는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칫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옷을 적게 입은 데다가 마침 분위기도 좋아서 그랬던 건가?’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깃털같이 가벼운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자, 몸이 또다시 화르르 달아올랐다.이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성혜인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비척비척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목까지 새빨개진 자신이 보였다.‘나 진짜 왜 이러는 거야...’성혜인은 차가운 물을 틀어 놓고 세수를 했다.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말이다. 차가운 물이 뜨거운 얼굴에 닿자,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반승제 때문에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설마... 설마 반승제도 세속적인 욕망이 있었던 건가?’꼬리에 꼬리를 문 기억은 두 사람의 첫날밤까지 이어졌고, 성혜인은 덕분에 완전히 잠이 깨어버렸다. 막연하게 옷을 씻고, 막연하게 옷을 말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 시가 되었다.성혜인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암시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갈 데까지 가본 사이이고, 분위기 좋은 타이밍에 뽀뽀 정도 하는 것은 반승제의 입장에서 가벼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생각하며 금세 진정한 성혜인은 스르르 잠들었다. 어젯밤에 이어 오늘 밤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면 아침에 차를 타고 이동하기 힘들게 뻔했다. 다행히 성격이 무딘 편이었던 성혜인은 쉽게 잠들었다.4시간 정도 자고 7시 정각에 일어난 성혜인은 어젯밤 씻었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몇 시간 동안 머리를 비우고 나자, 어젯밤 일어났던 일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곧 이혼할 사이에 신경 쓸 건 없지.’성혜인은 문을 벌컥 열고 어제 걸어왔던 길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이미 밖에 나와 있던 반승제는 방태주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이서의 말에 현장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반승제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성혜인은 약간 당황하다가 금세 진정하고 시선을 떨군 채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비슷해요. 근데 외간 남자는 아니고 남편이 걱정되는지 전화가 와서 통화를 좀 오래 했어요.”성혜인은 방이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남편이라는 말에 방이서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어젯밤 내내 세운 계획이 약간 우스워지기도 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마른기침을 할 때, 방태주가 입을 열었다.“이서야,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얼른 사과하지 못해? 페니 씨가 성격이 좋아서 망정이지, 너 그러다 밖에서 다른 사람한테 미움을 사면 어떡하려고 그래?”방이서는 이제야 경계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페니 씨. 벌써 결혼한 줄 몰랐어요.”성혜인이 결혼한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어젯밤 그렇게 못되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나저나 꽤 젊은 나이에 결혼했네요? 남편이 좋은 사람인가 봐요.”성혜인은 방이서의 말에 동의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다들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나이가 아직 어렸던 방이서는 대화의 기술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계속해서 캐물었다.“그렇다는 건 페니 씨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네요?”성혜인은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에 앉아 있던 반승제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관심 없는 듯한 자태로 컵을 만지작댔다.방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아~ 알겠다. 페니 씨한테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 있는 거죠? 남편이 있는 데도 계속 생각나는 첫사랑, 그런 거 맞죠?”이때 방태주가 끼어들어 말했다.“이서야, 너 그만 좀 떠들어. 애가 어쩌면 말을 가려 할 줄도 모르니? 페니 씨, 미안해. 우리 애가 철들지 못해서 이래.”성혜인은 방태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솔직한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이 말머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방이
‘나는 뭐 잘못한 거 없는데?’성혜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반승제는 벌써 뒷좌석에 앉아 서류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와 다른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완벽히 어울린다는 것만큼은 언제나 똑같았다. 한 줄기의 햇살이 그의 얼굴에 비쳐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차 안에 올라탄 성혜인은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이때 방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가방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갔다.“저 등교해야 하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줘요.”반승제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머리를 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서천에 있을 거야. 서울로 가는 게 아니라.”방이서는 이미 차에 올라타서 반승제와 착 달라붙었다.“괜찮아요. 그럼 저도 서천에서 놀죠, 뭐.”보다시피 방이서의 목적은 차를 얻어타는 것이 아닌, 반승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다정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의 신분이 우스워졌던 성혜인은 말없이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반승제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승제를 방해할 용기가 없었던 방이서는 만만한 성혜인을 방해하기 시작했다.“페니 씨가 다른 남자랑 같은 차를 탄 걸 알면 남편이 질투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 올 때도 같은 차를 타고 왔잖아요.”“제 남편은 일에 간섭한 적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냥 페니 씨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에요?”이렇게 말한 방이서는 머리를 돌려 적나라한 눈빛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아내가 이렇게 훌륭한 남자랑 같이 있다는데 위기감이 들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어요? 얼른 전화라도 해봐요.”방이서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말했다. 성혜인이 결혼했다는 것을 안 뒤로 그녀의 적개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승제가 아무리 어째도 유부녀와 데이트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그래도 서로에게 존중과 믿음을 주는 게 건강한 혼인이 아닐까요?”이 말을 들은 반승제는 사인하던 동작을 멈췄다. 머릿속에는 서민규가 다른 여자와 공공연히 키스하
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네, 또 봐요.”성혜인은 바로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반승제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때 방이서가 그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승제 씨, 뭘 봐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큼성큼 하늘에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택시를 타고 임동원의 집 앞으로 왔다. 주변에는 이웃을 포함한 구경꾼이 잔뜩 모여서 손가락질하고 있었다.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임동원과 이소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집 밖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연장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화 건너편에서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인 듯했다.성혜인은 그중 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불끈불끈한 근육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실례합니다. 임남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성혜인을 발견한 남자는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 줄 몰랐다는 듯 흔쾌히 답했다.“높으신 분의 아들이 임남호 그 자식한테 맞아서 머리를 스무 바늘이나 꿰맸어요. 우리 서기관님께서 반드시 해결 방안을 받아오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 쫄보들이 집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거 있죠? 쫄보 뿌린데 쫄보가 난 격이죠, 하하.”성혜인은 임동원과 이소애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들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이렇게 된 것이니 말이다. 지나친 사랑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구시대 사상이 존재하는 서천에서는 아들이 한 집안의 전부였다. 아들로 태어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변함없는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서천 사람은 하나 같이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편애를 줬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요구는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딸에게는 아주 각박한 편이었다.성혜인은 차분한 자태로 남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여러분 진정하세요. 제가 한번 불러볼 테니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될까요? 서기관님도 해결 방안을 받아오라고 했지 폭력을 쓰라고는 안 했잖아요.”남자는 콧방귀를 뀌
임동원과 이소애는 성혜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해결 방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임남호가 성혜인의 뒤에 숨어 있는 꼴은 아주 우스웠다. 구경꾼들이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고 임동원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지난번 집을 사들인 일로 인해 이미 관계가 끝장났던지라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이 동네가 아무리 곧 철거한다고 해도 서천군청에서 아직 말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과 얼굴을 붉혀서 좋을 게 없었다.남자들은 임남호의 비굴한 모습에 소리 내어 비웃기 시작했다.“꼴에 사람 팰 용기는 있었나 봐?”임남호는 잔뜩 경직된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때 성혜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난 그냥 돌아갈래. 어차피 이 사람들은 오빠를 찾으러 온 거고, 나는 삼촌이랑 숙모가 무사한 것만으로 충분해. 이참에 한 번 맞고 정신 좀 차려.”임남호는 성혜인의 팔을 꼭 잡았다. 자기 모습이 얼마나 비굴한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손을 놓을 용기가 없었다.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혜인아!”임동원이 황급히 쫓아가며 말했다.“남호가 그래도 네 사촌 오빠인데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아니지.”“맞기 싫으면 제대로 설명하면 되죠. 이 사람들도 설명을 원해서 찾아온 거잖아요. 만약 경찰이 찾아온다면 집을 판다고 해도 남호 오빠를 빼내지 못할 거예요.”성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경찰들이 들어와서 임남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임동원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제자리에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아빠, 엄마, 살려줘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혜인아, 나 좀 도와줘. 너는 내 사촌 동생이잖아.”성혜인도 잔뜩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도 경찰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이소애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성혜인의 팔을 잡더니 애원하기 시작했다.“혜인아, 내가 이렇게 빌게. 너 반 대표님이랑도
방이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는 보지 못했다, 그저 휴대폰 화면에 짧은 영어가 뜬 것만 희미하게 보았다.“승제 씨, 전화 안 받아요?”반승제는 임원이 건네는 술을 받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보이스피싱이야.”“아...”방이서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휴대폰에 이름이 뜨는 걸 봐서는 분명히 저장된 번호였다.이때 한 임원이 말했다.“대표님, 이것 좀 마셔보세요. 셰프가 서천 특산품인 매실로 직접 담근 매실주예요.”반승제는 감사 인사와 함께 매실주를 한 모금 마셔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모두 이번 프로젝트에 진심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이서는 반승제의 표정이 약간 달라진 것을 느꼈다.인사치레로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었다. 반승제는 셔츠 단추 두 개를 풀며 프로젝트에 새로 더해진 조항을 간단히 설명했다. 군청 임원들은 흔쾌히 동의했고 다른 복지 시설도 세울 생각이라고 말했다.잠시 후 반승제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레스토랑과 화장실은 전부 별장의 1층에 있었다. 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성혜인은 일부러 화장실 앞에서 반승제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별장 앞에서 잠깐 기다려 볼 생각이었는데 도우미들이 화분을 옮기는 것을 보고 손을 보태다가 어쩌다 보니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흙이 잔뜩 묻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온 것이다. 남녀공용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성혜인은 그렇게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앞길을 막게 되었다.“대표님?”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고는 수도를 틀어 느긋하게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약간 위로 말아 올린 소매 아래로 자극적이게 튀어나온 힘줄이 은은하게 보였다.성혜인은 화장실 문 앞에 멈춰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승제의 차가운 모습에 말을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손을 씻고 난 반승제가 물기를 닦아내며 먼저 물었다.“무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