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의 피부가 뜨겁게 느껴졌다.반승제의 호흡마저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은 그저 열심히 약을 바르고 빠뜨린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 후 붕대를 가져와 다시 감으려고 했다.하지만 이 붕대를 감아주는 동작이, 그전에도 그랬지만, 몸을 숙여야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거리가 또 어쩔 수 없이 좁혀졌다. 숨결이 얽혀들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리고서 미간에 힘을 주었다.그가 이성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 성혜인은 빨리 붕대를 감기 위해 노력했다.마지막 바퀴를 다 감고 나서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숨이 반승제의 피부에 닿아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반 대표님, 다 되었습니다.”성혜인은 어색함에 빨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꽉 쥔 반승제의 주먹 속에 성혜인의 몸을 감고 있던 수건의 한 귀퉁이가 들어갔다. 그래서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수건이 그대로 풀려버렸다.반승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저 수건 한 장이 그의 머리를 덮은 후였다.성혜인은 놀라서 어찌할지를 몰랐다. 일단은 수건으로 그의 시선을 가릴 생각이었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울대를 움직였다.“페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성혜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수건이 반승제의 눈을 가려서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하지만 반승제의 물음에 그녀는 몸이 확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그래서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건을 잡고 계셔서...”급한 마음에 수건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의 몸을 감쌌던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다니 무례했다.하지만 그녀의 옷은 씻기 위해 불려놨었다. 전혀 입을 옷이 없어 성혜인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머리 위의 수건을 걷어냈다.“반 대표님, 안...”성혜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가 눈을 감고 수건을 건넸다.굳어버린 성혜인의 귀에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렸다.“싫어?
성혜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반승제는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칫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옷을 적게 입은 데다가 마침 분위기도 좋아서 그랬던 건가?’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깃털같이 가벼운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자, 몸이 또다시 화르르 달아올랐다.이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성혜인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비척비척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목까지 새빨개진 자신이 보였다.‘나 진짜 왜 이러는 거야...’성혜인은 차가운 물을 틀어 놓고 세수를 했다.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말이다. 차가운 물이 뜨거운 얼굴에 닿자,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반승제 때문에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설마... 설마 반승제도 세속적인 욕망이 있었던 건가?’꼬리에 꼬리를 문 기억은 두 사람의 첫날밤까지 이어졌고, 성혜인은 덕분에 완전히 잠이 깨어버렸다. 막연하게 옷을 씻고, 막연하게 옷을 말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 시가 되었다.성혜인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암시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갈 데까지 가본 사이이고, 분위기 좋은 타이밍에 뽀뽀 정도 하는 것은 반승제의 입장에서 가벼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생각하며 금세 진정한 성혜인은 스르르 잠들었다. 어젯밤에 이어 오늘 밤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면 아침에 차를 타고 이동하기 힘들게 뻔했다. 다행히 성격이 무딘 편이었던 성혜인은 쉽게 잠들었다.4시간 정도 자고 7시 정각에 일어난 성혜인은 어젯밤 씻었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몇 시간 동안 머리를 비우고 나자, 어젯밤 일어났던 일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곧 이혼할 사이에 신경 쓸 건 없지.’성혜인은 문을 벌컥 열고 어제 걸어왔던 길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이미 밖에 나와 있던 반승제는 방태주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이서의 말에 현장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반승제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성혜인은 약간 당황하다가 금세 진정하고 시선을 떨군 채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비슷해요. 근데 외간 남자는 아니고 남편이 걱정되는지 전화가 와서 통화를 좀 오래 했어요.”성혜인은 방이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성혜인의 입에서 나온 남편이라는 말에 방이서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어젯밤 내내 세운 계획이 약간 우스워지기도 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마른기침을 할 때, 방태주가 입을 열었다.“이서야,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얼른 사과하지 못해? 페니 씨가 성격이 좋아서 망정이지, 너 그러다 밖에서 다른 사람한테 미움을 사면 어떡하려고 그래?”방이서는 이제야 경계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페니 씨. 벌써 결혼한 줄 몰랐어요.”성혜인이 결혼한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어젯밤 그렇게 못되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나저나 꽤 젊은 나이에 결혼했네요? 남편이 좋은 사람인가 봐요.”성혜인은 방이서의 말에 동의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다들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나이가 아직 어렸던 방이서는 대화의 기술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계속해서 캐물었다.“그렇다는 건 페니 씨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네요?”성혜인은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에 앉아 있던 반승제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관심 없는 듯한 자태로 컵을 만지작댔다.방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아~ 알겠다. 페니 씨한테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 있는 거죠? 남편이 있는 데도 계속 생각나는 첫사랑, 그런 거 맞죠?”이때 방태주가 끼어들어 말했다.“이서야, 너 그만 좀 떠들어. 애가 어쩌면 말을 가려 할 줄도 모르니? 페니 씨, 미안해. 우리 애가 철들지 못해서 이래.”성혜인은 방태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솔직한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이 말머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방이
‘나는 뭐 잘못한 거 없는데?’성혜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반승제는 벌써 뒷좌석에 앉아 서류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와 다른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완벽히 어울린다는 것만큼은 언제나 똑같았다. 한 줄기의 햇살이 그의 얼굴에 비쳐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차 안에 올라탄 성혜인은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이때 방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가방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갔다.“저 등교해야 하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줘요.”반승제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머리를 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서천에 있을 거야. 서울로 가는 게 아니라.”방이서는 이미 차에 올라타서 반승제와 착 달라붙었다.“괜찮아요. 그럼 저도 서천에서 놀죠, 뭐.”보다시피 방이서의 목적은 차를 얻어타는 것이 아닌, 반승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다정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의 신분이 우스워졌던 성혜인은 말없이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반승제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승제를 방해할 용기가 없었던 방이서는 만만한 성혜인을 방해하기 시작했다.“페니 씨가 다른 남자랑 같은 차를 탄 걸 알면 남편이 질투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 올 때도 같은 차를 타고 왔잖아요.”“제 남편은 일에 간섭한 적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냥 페니 씨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에요?”이렇게 말한 방이서는 머리를 돌려 적나라한 눈빛으로 반승제를 바라봤다.“아내가 이렇게 훌륭한 남자랑 같이 있다는데 위기감이 들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어요? 얼른 전화라도 해봐요.”방이서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말했다. 성혜인이 결혼했다는 것을 안 뒤로 그녀의 적개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승제가 아무리 어째도 유부녀와 데이트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그래도 서로에게 존중과 믿음을 주는 게 건강한 혼인이 아닐까요?”이 말을 들은 반승제는 사인하던 동작을 멈췄다. 머릿속에는 서민규가 다른 여자와 공공연히 키스하
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네, 또 봐요.”성혜인은 바로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반승제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때 방이서가 그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승제 씨, 뭘 봐요?”반승제는 말없이 성큼성큼 하늘에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택시를 타고 임동원의 집 앞으로 왔다. 주변에는 이웃을 포함한 구경꾼이 잔뜩 모여서 손가락질하고 있었다.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임동원과 이소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집 밖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연장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화 건너편에서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인 듯했다.성혜인은 그중 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불끈불끈한 근육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실례합니다. 임남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성혜인을 발견한 남자는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 줄 몰랐다는 듯 흔쾌히 답했다.“높으신 분의 아들이 임남호 그 자식한테 맞아서 머리를 스무 바늘이나 꿰맸어요. 우리 서기관님께서 반드시 해결 방안을 받아오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 쫄보들이 집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거 있죠? 쫄보 뿌린데 쫄보가 난 격이죠, 하하.”성혜인은 임동원과 이소애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들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이렇게 된 것이니 말이다. 지나친 사랑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구시대 사상이 존재하는 서천에서는 아들이 한 집안의 전부였다. 아들로 태어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변함없는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서천 사람은 하나 같이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편애를 줬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요구는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딸에게는 아주 각박한 편이었다.성혜인은 차분한 자태로 남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여러분 진정하세요. 제가 한번 불러볼 테니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될까요? 서기관님도 해결 방안을 받아오라고 했지 폭력을 쓰라고는 안 했잖아요.”남자는 콧방귀를 뀌
임동원과 이소애는 성혜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해결 방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임남호가 성혜인의 뒤에 숨어 있는 꼴은 아주 우스웠다. 구경꾼들이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고 임동원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지난번 집을 사들인 일로 인해 이미 관계가 끝장났던지라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이 동네가 아무리 곧 철거한다고 해도 서천군청에서 아직 말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과 얼굴을 붉혀서 좋을 게 없었다.남자들은 임남호의 비굴한 모습에 소리 내어 비웃기 시작했다.“꼴에 사람 팰 용기는 있었나 봐?”임남호는 잔뜩 경직된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때 성혜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난 그냥 돌아갈래. 어차피 이 사람들은 오빠를 찾으러 온 거고, 나는 삼촌이랑 숙모가 무사한 것만으로 충분해. 이참에 한 번 맞고 정신 좀 차려.”임남호는 성혜인의 팔을 꼭 잡았다. 자기 모습이 얼마나 비굴한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손을 놓을 용기가 없었다.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혜인아!”임동원이 황급히 쫓아가며 말했다.“남호가 그래도 네 사촌 오빠인데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아니지.”“맞기 싫으면 제대로 설명하면 되죠. 이 사람들도 설명을 원해서 찾아온 거잖아요. 만약 경찰이 찾아온다면 집을 판다고 해도 남호 오빠를 빼내지 못할 거예요.”성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경찰들이 들어와서 임남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임동원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제자리에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아빠, 엄마, 살려줘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혜인아, 나 좀 도와줘. 너는 내 사촌 동생이잖아.”성혜인도 잔뜩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도 경찰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이소애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성혜인의 팔을 잡더니 애원하기 시작했다.“혜인아, 내가 이렇게 빌게. 너 반 대표님이랑도
방이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는 보지 못했다, 그저 휴대폰 화면에 짧은 영어가 뜬 것만 희미하게 보았다.“승제 씨, 전화 안 받아요?”반승제는 임원이 건네는 술을 받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보이스피싱이야.”“아...”방이서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휴대폰에 이름이 뜨는 걸 봐서는 분명히 저장된 번호였다.이때 한 임원이 말했다.“대표님, 이것 좀 마셔보세요. 셰프가 서천 특산품인 매실로 직접 담근 매실주예요.”반승제는 감사 인사와 함께 매실주를 한 모금 마셔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모두 이번 프로젝트에 진심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이서는 반승제의 표정이 약간 달라진 것을 느꼈다.인사치레로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었다. 반승제는 셔츠 단추 두 개를 풀며 프로젝트에 새로 더해진 조항을 간단히 설명했다. 군청 임원들은 흔쾌히 동의했고 다른 복지 시설도 세울 생각이라고 말했다.잠시 후 반승제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레스토랑과 화장실은 전부 별장의 1층에 있었다. 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성혜인은 일부러 화장실 앞에서 반승제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별장 앞에서 잠깐 기다려 볼 생각이었는데 도우미들이 화분을 옮기는 것을 보고 손을 보태다가 어쩌다 보니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흙이 잔뜩 묻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온 것이다. 남녀공용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성혜인은 그렇게 의도치 않게 반승제의 앞길을 막게 되었다.“대표님?”반승제는 말없이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고는 수도를 틀어 느긋하게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약간 위로 말아 올린 소매 아래로 자극적이게 튀어나온 힘줄이 은은하게 보였다.성혜인은 화장실 문 앞에 멈춰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승제의 차가운 모습에 말을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손을 씻고 난 반승제가 물기를 닦아내며 먼저 물었다.“무
별장에서 나온 성혜인은 부끄러움에 몸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반복해서 심호흡하며 애써 진정했다. 지금으로서는 임남호의 일을 빨리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녀도 후련하게 서울로 돌아갈 수 있었다.성혜인은 이미 서기관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봤다. 그의 이름은 연흥민으로 꽤 훌륭한 업적을 쌓은 공무원이었다. 책 잡을 게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단점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 청부업자를 고용한 것은 임남호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양이다. 자식이 머리에 스무 바늘이나 꿰맸는데 화나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성혜인은 공개 웹사이트를 뒤지고 있다가 연흥민과 신이한이 개업식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녀는 기사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신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금방 신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랜만이에요, 페니 씨. 혹시 저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성혜인은 신이한의 능글맞은 말은 못 들은 척 본론을 꺼냈다.“이한 씨, 지난해 서천에 왔을 때 연흥민 서기관님과 만난 적 있죠?”신이한은 회사를 물려받은 후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그래서 지난해에 만난 작은 도시의 서기관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신이한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개업식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줬다.“이 사람이에요. 혹시 기억나요?”신이한은 드디어 기억난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그건 왜 물어요? 혹시 무슨 일 있어요?”성혜인은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이한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BH그룹이 요즘 서천군에서 사업하고 있다지 않았어요? 엄청난 사업이라고 하던데 서천의 서기관이라면 저보다 반 대표님이 더 잘 알지 않을까요?”성혜인은 신이한이 자신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말을 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탁하는 처지였기에 어쩔 수 없이 숙이고 들어갔다.“대표님은 바쁘셔서 제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어요. 게다가 저희는 그저 평범한 고용관계일 뿐인걸요.”신이한은 미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