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잠깐 절망에 휩싸였다가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으로서는 임남호의 일을 빨리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반승제는 확실히 평범한 고용관계일 뿐이었다.성혜인이 임동원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부는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집으로 돌아온 하진희는 임남호가 감옥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냅다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웬일이야, 진짜! 이렇게 쓸모없는 남자랑 더 이상 같이 못 살아요. 위자료로 1억을 줘요, 저 이혼 할래요!”하진희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원래부터 임남호 부부를 무시하고 살아왔던지라 자신이 이 집안의 어른인 양 손가락질하기도 했다.“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더니, 쓸모없는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네요. 하다 하다 싸움까지 하는 사람이랑 어떻게 같이 살겠어요? 이혼하게 얼른 돈이나 줘요!”임동원과 이소애는 따로 저금한 돈이 없었다, 집안 돈은 대부분 다 하진희에게 있었으니 말이다. 임남호가 가출한 다음에는 거의 돈이 들어오는 족족 그녀에게 보내줬다.하진희는 매달 적지 않게 소비했다. 그러면서도 집안에 체면이 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이것 또한 임동원 부부의 비굴한 태도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니, 남을 탓할 건 없었다.이소애는 또 자세를 낮추며 애원하기 시작했다.“진희야, 남호도 무조건 감옥에 가야 하는 건 아니야. 우리가 배상하면 되지. 이 집을 철거하면 배상금도 금방 마련할 수 있어.”하진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어쩌면 1년 365일 배상금 걱정만 하는 거예요? 이런 집에서는 단 일초도 더 못 있겠어요.”현관에 있던 성혜인은 처음으로 하진희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2억 원의 배상금을 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사고를 쳤으니 말이다.“삼촌, 숙모.”성혜인의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부랴부랴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혜인아, 어떻게 됐어? 대표님이 도와준대?”“고소는 없는 일로 해준다고 했어요. 근데 배상은 해야 할 거예요
“저희 일단 남호 오빠를 경찰서에서 데려와요. 그리고 병원에 가서 사과부터 해요.”이소애는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 지금 바로 출발하자.”임동원과 이소애는 나갈 채비를 하면서 하진희에게 물었다.“진희야, 너도 우리랑 같이 갈 거니?”하진희는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콧방귀를 끼더니 오만한 자태로 팔짱을 꼈다.“그따위 후레자식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요.”이소애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성혜인도 화가 나기는 했지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이는 남의 집안일이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임동원과 이소애를 데리고 경찰서로 갔다. 귀를 찢는 듯한 임남호의 울음소리는 경찰서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이소애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갔다. 임남호는 경찰서로 오는 길에 결국 얻어맞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남호야, 괜찮아?”이소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임남호의 손을 잡았다. 임남호는 한심한 모양새로 눈물을 쏟아내기만 했다.“엄마, 빨리 혜인이한테 말해서 저를 풀어줘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진짜 잘못 했어요, 진짜 잘못 했다고요.”성혜인은 이소애의 뒤에서 임남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임남호는 반성하는 것이 아닌 겁먹은 것이었다. 감옥으로 가면 더 심하게 맞고 살 테니 말이다.성혜인도 함께 온 것을 발견한 임남호는 무릎 꿇을 기세로 애원하기 시작했다.“혜인아, 우리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걸 봐서라도 날 좀 도와줘. 흑흑... 나는 네 사촌 오빠잖아.”자존심도 버리고 눈물을 흘릴 줄밖에 모르는 임남호의 모습에 성혜인은 짜증 나기만 했다.“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싸움질은 왜 한 거야?”이 말을 들은 임남호는 울음마저 그치고 멈칫했다. 성혜인은 피식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말 안 할 거면 그냥 혼자 품고 감옥에나 가. 나도 신경 쓰기 귀찮으니까.”“안 돼! 잠깐만!”임남호는 무의식적으로 성혜인의 옷깃을 잡았다.
“혜인아, 아무리 그래도 사촌 오빠를 때리면 어떡하니. 제발 이러지 말아줘, 숙모가 부탁할게.”이소애는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입술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임동원은 곁에서 벙어리처럼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 가장이 그렇듯 말이다.임남호는 넋이 완전히 나간 표정이었다. 그리고 피비린내고 가득한 입을 살짝 움직여 부스러진 이빨을 뱉어냈다. 성혜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며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도망을 가는 게 아닌 이혼을 해야 하는 거야. 만약 그때 회삿돈을 건드리지 않고 이혼했다면, 아빠는 오빠네 집안과 원수지지 않았을 거고, 삼촌이랑 숙모도 죄인이 되지 않았어. 오빠는 2억 남짓한 돈으로 밖에서 즐기고 있을 때, 하진희가 집에서 얼마나 행패를 부렸는지 알아? 삼촌이랑 숙모는 하진희의 도우미처럼 살았어. 그런데 지금 무슨 낯으로 아들 행세를 하는 거야? 오빠가 언제 아들 노릇을 한 적이나 있어?”임남호는 입가에 흐른 피만 닦아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찰서에도 정적이 내려앉았다. 성혜인의 뿜어낸 위협적인 아우라에 함부로 접근하거나 말을 걸려는 사람은 없었다.성혜인은 심호흡하고 이어서 말했다.“그건 그렇고 하진희가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 왜 지금까지 이혼 안 했어? 반성문은 왜 쓰고, 외상은 또 왜 했어?”임남호는 머리를 숙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빼돌린 2억 원 중에서 6000만 원만 주면 하진희가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했어. 2억 원에서 쓰다 남은 1억 원은 네가 고등학교 때 쓰던 카드에 입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몰래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 어차피 내가 빼돌린 돈은 아빠가 이미 다 갚...”짝!임남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혜인이 또다시 뺨을 때렸다. 임남호의 얼굴은 돼지처럼 부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성혜인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한심한 자식. 내 카드에 1억 원을 입금했다고?’성혜인이 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
믿을 수 없다는 임남호의 표정에 하진희는 픽 웃었다.“잊었어? 네가 돌아온 날 밤, 술에 취해서 나랑 잤잖아. 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라면 너희집에도 타격이 꽤 클 거야.”임남호도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 쭈뼛거리기 시작했다.하진희와 이혼하면 새 배우자를 찾는 것은 물론 아이를 낳는 것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누가 임남호와 아이를 낳으려 할까. 결국 대가 끊기게 되겠지.이제 하진희가 임신을 했으니 부모에게 진 빚은 갚은 셈이 되었다.‘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하진희의 말에 임씨 가족들은 모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혜인은 분노가 확 올라왔다.“외삼촌, 외숙모. 정말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이에요?”임남호에게 외도도 들킨 상황에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임남호도 자신이 그리 좋은 남자는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도 재개발에 들어가고 수중에 1억 정도 있는 지금, 앞으로 셋이 얼마나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상황에 온갖 사고를 치는 여자가 집에 남게 된다면 이 돈마저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이소애와 임동원은 성혜인의 눈을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성혜인 역시 그들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짐작됐다.이때, 하진희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성혜인에게 손가락질했다.“이 자식이 왜 갑자기 나한테 이혼하자는 건가 했더니, 네가 옆에서 종용했구나? 이 나쁜 년! 네 집 일도 똑바로 처리 못하는 게 왜 참견이야? 당장 여기서 꺼져! 우린 네가 반갑지 않으니까!”하진희는 물컵을 들어 성혜인에게 뿌렸다.성혜인은 예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비 맞은 생쥐 꼴이 될 줄 말이다.임동원과 이소애는 더더욱 면목이 없었다. 임남호도 침묵을 지켰다.성혜인은 화를 내는 대신 옆에 놓여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실례했네요.”성혜인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핀잔 한 번 주지 않고 욕받이 역할을 해왔다.이소애도 그들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걸
반승제는 무미건조하게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홀릴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방이서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얼굴까지 붉어졌다.“심 비서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그의 반응에 방이서는 금방 시무룩해지더니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죠? 밥 먹을 때 화장실 간다 해 놓고 페니 씨 만났잖아요.”반승제가 자리를 벗어날 때, 방이서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갔다가 화장실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발견했다.무언가 있는 분위기였다.게다가 반승제가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는 표정이 더 차가워 보였다. 그 뒤로 페니가 걸었던 전화도 들었다.방이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래서?”반승제는 문 안쪽에 서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낯설었다.방이서는 그의 태도에 확신이 없었다.“페니 씨는 결혼했잖아요. 근데 승제 씨를 꼬시는 것 같아요.”성혜인을 저격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누가 그렇게 예쁘래?’방이서는 성혜인이 반승제의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은 없었다.반승제의 표정에서는 어떤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에서는 냉기가 맴돌았다.“방이서, 나 결혼했어. 그러니 누가 날 꼬시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심 비서에게 연락할게.”방이서는 붉어진 눈시울로 발을 굴렀다.“그렇게 쌀쌀맞아서 누가 승제 씨를 좋아하겠어요! 흑흑...”그대로 울며 자리를 떠났다.반승제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실내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잠시 후, 심인우가 새로운 서류들을 들고 왔다.“대표님, HS그룹의 신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는데...”반승제는 볼펜을 들어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뭐라던가요?”“대표님 부인께서 문제가 좀 있으시답니다. 대표님께서 부인을 좋아하지 않고 해결해 줄 생각이 없다면 자신이 나서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쓰레기 같은 신이한, 남의 부인을 따라다니겠다고 남편에게 사전 통보를 하다니.반승제는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났다. 문득 머릿속에 가식적인
반승제의 반응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이 씨가 곧바로 성혜인에게 다가가 이야기했지만 성혜인은 고개를 내저었다.“감사하지만 견인차도 곧 오니까 잠깐 기다리면 돼요. 제 차를 따라가야죠. 오늘 차를 수리하는 대로 제원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이 씨는 추워 보이는 성혜인이 그저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였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하지만 성혜인의 말을 듣고 나서도 강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요즘은 견인차가 20분이면 오기 때문에 성혜인은 밖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고 재채기가 튀어나왔다.이 씨는 자신의 차를 뒤따라왔던 간부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반승제에게도 말이다.개의치 않는다는 듯 창문을 닫는 것이 반승제의 반응이었다.20분 후, 견인차가 도착했다.성혜인은 곧바로 견인차에 올라타 자동차 정비소로 향했다.이런 차를 타보는 건 처음이었다. 운전기사도 꽤 유쾌하고 이야기하며 아름다운 창밖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견인차 뒤로 차 몇 대가 줄지어 따라왔다. 모두가 시내로 향하는 길이었다.자동차 정비소에 도착한 뒤에도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시동을 다시 걸 수 있었다.결제를 마친 성혜인은 옆 가게에 있던 약국에 들어가 감기약을 구입했다. 감기약을 목구멍으로 넘긴 후 제원으로 돌아가려 차로 향했다.그때, 이소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성혜인은 고민도 없이 ‘거절’ 버튼을 누르고 액셀을 밟았다.그 시각, 전화를 거절 당한 이소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담배를 태우는 임동원을 바라봤다.방 안에서는 임남호가 등신이라며 나무라는 하진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임남호는 몇 번이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결국 말을 삼켰다....오후 4시. 성혜인은 제원에 도착했다.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로즈가든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임남호에 미친 그 여자와 또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포레스트로 돌아가자니 오늘 제원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반승제가 떠올랐다.결국
소윤과 허진 모두 당황한 듯 넋이 나갔다. 곧이어 허진의 눈빛에서 독기가 옅게 느껴졌다.놀란 소윤은 허둥지둥 이불로 몸을 가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여보, 어떻게... 왜 온 거예요?”성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놀란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성의 끈을 놓은 지 오래. 정상적인 사고조차 불가능했다.성휘는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더 깜빡이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쿵!성휘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소윤은 놀라 몸에 힘이 풀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허진을 가리켰다.“어떡해? 우리 사이를 알아버렸어. 깨어나면 우린 그대로 쫓겨날 거야.”허진은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 무심하게 안경을 썼다.“윤아, 이 사람 깨어나면 안 돼.”소윤은 그대로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야?”“이대로 살려둘 수 없어. 몇 년 동안의 계획이 다 수포로 될 테니까.”소윤은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았다. 성씨 집안의 것을 원하고 허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할 수 없었다.하지만 허진은 이미 성휘 앞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그는 발로 성휘를 툭툭 쳤다.성휘와 결혼하기 전, 소윤은 성휘 옆에 있는 잘생긴 비서가 마음에 들었다. 성휘보다 어리고 체력도 좋아 매번 침대에서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다.반명 재혼인 성휘의 나이는 말할 것도 없고, 회사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남자를 많이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침대에서 소윤을 만족시키지 못한 건 예전의 그 쓰레기를 제외하면 성휘 한 명뿐이었다.하지만 허진이 이 부분을 채워 줬기에 소윤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눈이 맞게 되었다.하지만 허진이 이런 식으로 입막음하려는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허진은 허리를 굽혀 성휘를 밖으로 끌고 갔다.소윤은 놀란 나머지 그를 껴안았다.“진아, 이건 살인이야. 누가 알기라도 하면 우리 다 잡혀간다고.”마흔 남짓한 허진
새벽 3시.성혜인은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성휘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현재 응급실에 있다는 것이다.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급히 외투를 껴입는 성혜인의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예전에 갔던 병원이고 주치의와 인사도 한 적이 있던 터라 주치의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홀로 복도에 앉아있는 소윤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 염려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착각일까?그때, 성혜인을 발견한 소윤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쟤가 왜 여기 있어?!’성혜인은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는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제가 서천으로 가기 전에 아빠를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간암인 거 알고 있죠? 병원에서 며칠 쉬게 하라니까 아빠가 왜 집으로 간 거예요?”소윤은 불안함에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허진의 말이 떠올라 당당하게 척추를 세웠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니? 네 아빠가 그룹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생각 안 해? 반씨 집안에서 갑자기 훼방만 놓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네가 반승제한테 잘했어야지! 회사 문제 때문에 네 아빠가 입원도 못 하고 몰래 집으로 온 거야. 마침 도우미들 모두 휴가를 보내 놓았던 터라 아무도 몰랐어. 내가 발견했을 때는 바닥이 온통 피바다였다고.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어!”소윤은 조소를 띄며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었다.“날 의심하다니, 낯짝 좋네.”성혜인은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았다.몰래 숨긴 소윤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혜인이 왜 이렇게 빨리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성휘가 깨어나면 산소 호흡기를 빼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그래야 후폭풍이 없을 것이다.‘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야지!’성혜인은 눈을 감았다. 수술실 문이 어서 열리기를 바랐다.성휘와 다툼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혜인의 친아빠이자 오랜 시간 동안 곁에 있어 준 가족이었다.엄마가 떠난 후, 성혜인은 아빠와 의지하며 살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