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연은 당혹스러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원진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듯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는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움직임은 한층 더 다정해졌다.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당시연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원진은 한 번도 그녀의 곁을 진정 떠난 적이 없었고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그러나 당시연은 한 번도 그를 붙잡을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반년 뒤에나 다시 만날 거라고 한 것은 그녀를 자극하고 싶어서였는데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었다.그녀를 기다리느라 긴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의 모든 마음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원진은 당시연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거의 병적으로 강렬했기에 그녀에게서 한동안 멀리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당시연은 언제나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를 산골 마을에서 데려오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김성진과 결혼하여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결국 당시연의 삶을 뒤흔든 것은 자신이었다. 원진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연은 결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당시연...”원진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당시연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술기운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원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왜 그래? 너무 심하게 했어?”당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두려울 뿐이었다.“진아, 사실 나 너 찾았었어.”정말 오랫동안.원진의 움직임이 그녀의 말에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려 했는지 당시연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당시연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 곁에 남고 싶었다.잠시 후 원진은 장난스럽게 물었다.“예전 남자 친구들이랑 비교하면 어때? 누가 더 잘해?”당시연은
당시연의 싫진 않냐는 말에 원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원진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 모두를 합쳐도 당시연 한 사람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었다. 그녀가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텅 비어버릴 듯했다.당시연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녀는 그의 삶 속에서 여러 번 그의 마음을 뒤흔든 유일한 사람이었다.“당시연...”원진은 당시연을 안으며 말했다.“난 누나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만 중요해.”당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좋아한다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결국 삼켜버렸다.원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묻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그는 그녀를 식탁으로 이끌어 음식을 집어 주었다.“우선 밥부터 먹자.”당시연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에 비해 원진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원진은 먹는 둥 마는 둥 대부분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식사를 했고 그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볼이 더 붉어졌다.식사가 끝나고 원진은 옆에서 슬며시 자신의 주민등록등본을 꺼내 들었다.“누나 건 어딨어? 지금 주민센터 일하는 시간이야. 우리 가서 혼인신고 하자.”어떤 충동에 이끌린 듯 당시연은 자신의 등본을 가져와 원진과 함께 주민센터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워서인지 마음마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혼인관계증명서를 손에 쥐었다.“원진.”“응?”당시연은 ‘이게 다야?’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머뭇거리는 모습에 원진은 그녀가 마음이 바뀐 거라고 생각했다.원진의 눈가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싫으면 지금 당장 이혼하러 가도 돼.”“그게 아니야.”당시연은 이 모든 게 너무 서두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혜인과는 이제 친구가 되었는데 그녀는 예전부터 은근히 자신과 원진을 이어주려는 기색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원진은 그런 생각을 전혀
원진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 몇 년 동안 난 계속 자기 보러 갔어. 하지만 원씨 가문 문제들이 끝나질 않아서 자꾸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어. 자기한테 위험이 갈까 봐 꾹꾹 참았지. 매일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원진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눌러 담고 고개를 들었다.“자기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 자칫 내 감정을 참지 못하고 억지로 데려오려 했다면 우리 사이가 끝나버릴까 봐... 그렇게 버티다 보니 5년이나 지나가 버렸어.”수많은 날을 그는 그 작은 희망 하나만을 붙잡고 버텼다. 당시연 주변에 다른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원진은 어김없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다행히도 당시연은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안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백화점에서의 그날 만남은 당시연에게는 첫 재회였겠지만 원진에게는 수없이 지켜보던 순간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당시연이 눈 내리는 거리에서 걷는 모습,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사소한 표정 하나하나까지 그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원진만큼 당시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병적일 정도로 소유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부 털어놓았다가는 그녀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망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저 평범하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원진이 당시연을 향한 사랑이 백 퍼센트라면 그는 그중 단 삼십 퍼센트만 표현할 뿐이었다.그런데도 그 삼십 퍼센트만으로도 당시연은 이미 마음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원진, 난 그동안 네가...”그녀는 원진이 나이 많은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이 창피해서 관계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당시연은 반지를 낀 채 그의 품에 안겼다. 키 큰 원진이 그녀를 꼭 끌어안자 그녀는 그의 품 안에 푹 파묻혔다.원진은 단톡방의 대화를 힐끗 보았다. 그 안에는 친구들이 그와 당시연의 관계를 두고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는데 아직도 못 꼬
반진율과 설서율이 첫돌을 맞은 날, 설우현은 플로리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돌아왔다.원래는 설기웅과 함께 오려 했으나 설기웅이 연구 기지에서 데려온 소녀가 갑작스레 열이 나 쓰러지면서 항공편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설우현은 혼자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설기웅은 오기 전 설씨 가문의 먼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다.설의종이 병을 앓은 후부터 이들 친척은 저마다 꿍꿍이를 품고 있었고 성혜인 쪽으로 지분이 모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가문이 크게 흔들렸을 상황이었다.이제 설의종의 건강이 호전되어 지분이 다시 설기웅과 설우현에게 돌아오자 이들 친척은 다시금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모습이었다.설우현은 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몇 년 전 설준석의 딸이 실종되었고 설연주는 그가 삼촌이라 부르던 설준석네에서 불과 며칠 전에 찾은 딸이었다.설우현은 원래 설준석네와 왕래가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삼촌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직계 가족은 아니었고 단지 설씨 성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설준석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고 설경필이 살아 있을 때는 자주 설씨 가문을 찾아와 설경필을 뵙곤 했었다.그러던 어느 날 설경필에게 일이 생겼고 다행히 설연주가 한바탕 울며 소란을 피운 덕분에 사람들이 상황을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설연주는 돌연 사라져 버렸다. 설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설경필은 자신 때문에 설연주가 실종되었다는 죄책감에, 죽기 전 설의종에게 설연주가 돌아오면 감사의 표시로 가문의 1% 지분을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현재의 설씨 가문 규모로 볼 때 1%의 지분은 수천억에 달하는 금액으로,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보통 사람들은 평생 손에 쥐어보지 못할 거액이었다.하지만 그동안 설준석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여 왔고 이번에 갑자기 설연주를 찾았다는 사실이 설우현에게는 무척 의심쩍게 느껴졌다. 자꾸만 그들이 그 1%의 지분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설우현은 며칠
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한참 뒤에야 그녀는 설우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오빠, 내 생각엔 오빠는 속셈 부리는 데 서툴잖아요. 그러니 그 여자가 수상쩍다 싶으면 그냥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내가 그 여자를 무서워할 것 같아?”설우현은 다소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부터 그 여자가 내연녀 노릇을 하며 음모를 꾸미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그 여자의 속셈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다짐했다.성혜인은 설우현을 더 설득해 보려 했다. 사실 설씨 가문에서 그녀의 둘째 오빠인 설우현의 성격이 가장 단순했다.어릴 때부터 가문의 모든 상업적 일들은 설기웅이 처리했고 설우현은 그저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며 편히 지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설기웅 또한 동생을 잘 챙겨 주었고 자신의 지분 배당금을 나눠 주며 설우현을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해 주었다. 덕분에 설우현은 사람들 사이에서 손해를 본 적도, 사업에서 남들과 신경전을 벌인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설연주 같은 사람을 상대하다가는 분명 손해를 볼 터였다.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상대의 음모를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혜인의 조언 따위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리지 않기로 했다.첫돌 잔치에서 설우현은 반승제를 은근히 깎아내렸고 이에 반승제는 화가 나서 발끈했다. 서주혁에게도 몇 마디 장난스럽게 찔러 보며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고, 곧이어 온시환을 비꼬아 한마디 던지자 온시환은 결국 화가 나서 잔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설우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다.온시환은 최근 연애 문제로 몇 킬로나 빠졌고 설우현의 빈정거림에 더욱 이를 갈았다.서주혁이 옆에서 그를 위로했다. 온시환은 손바닥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설우현이 한 번쯤 연애에서 제대로 당하는 꼴을 꼭 보고 말 거야. 두고 봐, 저 자식이 한 번 추락할 날이 오면 내가 제일 먼저 비웃어 줄 테니까.”모
설우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우현이 왜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지 설연주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진즉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설씨 가문의 1% 지분도 호시탐탐 노리지 않았을 테지.그러자 설연주는 한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다시금 설우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오빠, 제가 술 따라드릴게요.”얼굴에 철판을 깐 것인지 계속하여 다가오는 설연주에 설우현은 입꼬리를 달싹이더니 방금 딴 술 다섯 병과 홀딱 넘어가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얼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난 네가 따라주는 술을 마실 자격이 없어서 이만.”이윽고 설우현은 바텐더를 불러 가장 비싼 술을 따라 달라며 당부했다.“오빠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죠. 다른 남자라면 돈을 받았겠지만 오빠는 내가 특별히 사줄게요.”뜻밖의 말에 설우현이 눈썹을 치켜들었다.돈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구두쇠가 웬일이지?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저 화장실 좀.”하지만 설우현이 그녀에게 답을 해줄 리는 없었다.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았던 설우현은 휴대폰을 꺼내 단톡방의 메시지에 답장하기 시작했다.그런데 10분 후, 네다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설우현의 주위에 몰려들더니 모두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이다. 여자친구를 술집 아가씨로 이용한 놈이다.”“평범하게 생겨서 연주를 이따위로 이용하다니. 그런데 연주는 왜 하필이면 이런 놈한테 사랑에 빠져서...”“연주가 이딴 놈을 좋아한다고? 당장 돈 내놔!”“당장 돈 갚으라고! 수천만 술값 내놔!”“미친, 나도 수천만 원을 꼬라박았는데 설연주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내 돈으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을 먹여 살려?”소란스러운 분위기에 고개를 든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남자들을 바라보았다.“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립니까?”“그렇지 않으면? 경고해두는데 지금 당장 돈을 갚지 않으면 오늘 살아서 못 갈 줄 알아. 남자가 돼서
“화장실에 빠진 건 아니고 그냥 속이 좀 불편해서 먼저 집에 왔어요.”‘뻔뻔하기 그지없는 사기꾼 같으니라고. 정말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뱉어내네.’“설연주, 넌 내가 바보 같아 보여?”“오빠, 어떻게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순간 목이 막히고 숨이 막혀왔다.여태껏 약을 올리는 건 줄곧 그의 몫이었는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설우현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내가 어디 사는지 알지? 택시 타고 와.”그 말에 설연주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실눈을 뜨더니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해주었다.“하지만 지금은 밤 10시인걸요? 조금 불편할 것 같은데.”“불편한 거 맞아?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는 건가?”그러자 설연주는 타협이라도 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요. 그럼 제가 갈게요.”막상 설연주가 단숨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설우현이 잠깐 뜸을 들였다.‘혹시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하지만 설우현은 설연주가 두렵지 않았다.어차피 설씨 집안의 그 1% 지분을 노리고 하는 짓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빨리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합리한 선택이다.별장으로 돌아온 설우현은 멍이 든 입가를 주무르며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정말 생각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러나 자정까지 꼬박 두 시간이 지나도록 설연주는 오지 않았다.새벽 1시, 설우현의 안색은 바깥 하늘에 깔린 어둠처럼 점점 더 어두워졌다.또다시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오히려 방금 잠에서 깬듯한 눈치였다.“무슨 일이에요, 오빠?”태연한 그녀의 목소리에 설우현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서야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트랙터를 타고 와도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거다.”그러나 설우현의 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설연주는 오히려 하품하며 졸린 눈을 비비적거렸다.“오빠, 제가 가겠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언제 간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내일 아침에 가서 아침 식사도
“오빠, 설씨 가문 1%의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수천억이에요.”그 말은 즉 60억 따위로 그녀를 가문에서 쫓아내는 건 어림도 없다는 소리다.설우현이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드디어 본심을 드러냈군. 결국, 설씨 가문의 돈을 노리는 것이었네.’“친자확인 그거 안 해도 돼. 그러니까 60억 가지고 당장 나가. 하지만 네가 고집을 부리며 나가지 않는다면 난 친자확인을 시킬 수밖에 없어. 너도 알겠지만 내가 손을 쓰는 한 네가 아무리 수단을 써도 언젠가는 들통나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그때는 돈 한 푼도 받지 못할 거다.”그러나 설연주는 설우현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요리사가 내오는 음식에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오빠, 우리 일단 먹으면서 얘기해요.”설연주는 정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된 것마냥 행동했다.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을 오므렸지만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아왔던 탓에 설우현은 더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결국, 그는 설연주가 자리를 찾아 식탁 앞에 앉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여긴 우리 집이야!”설우현이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그리고 네 손에 쥐어져 있는 컵, 마실 물까지 모두 우리 집 거라고.”폭발해버린 설우현의 모습에 설연주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좁지만 길게 뻗은 두 눈으로 분노에 삼켜진 그를 바라보았다.그렇게 3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뭘 봐?”“오빠가 좋아서요.”순식간에 목구멍이 막히고 가슴 가득 꽉꽉 채워진 험한 말들은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설우현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를 짜내었다.“어쩐지 남자들이 너한테 끔뻑 죽더라니... 너 그런 방법으로 남자들을 홀리고 다녔구나?”어찌 보면 모욕적인 말에도 설연주는 묵묵히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마시기 시작하더니 이내 두 가지 규칙을 정리해주었다.“전 약속도 거절도 한 적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제 친구고요.”“친구라... 친구가 아니라 인간 현금인출기를 키우고 있는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