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그녀가 괜찮을까?물론 당시연은 괜찮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홍영란의 앞으로의 삶을 지키고 싶었다.당시연이 최근 어려움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던 원진은 매일 조용히 음식을 준비해 두고 나갔다. 돌아올 때도 최대한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그러던 중 법원에서 당지석의 채무에 대해 직접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연은 더욱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며칠이 흐른 후 홍영란이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당시연은 거의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홍영란이 집을 팔았다는 것을.그들이 그 집을 샀을 때만 해도 위치가 좋아서 지금 집값이 많이 올랐다. 집을 팔고, 홍영란이 물려받은 부동산까지 정리하면 이제 10억만 남았다.하지만 이 시점에 집을 판다는 건 다시는 그 집을 되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그런 여유가 없을 테니까.당시연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홍영란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이었다. 남편과 함께 고난을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그런 여성은 흔치 않았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아내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혼을 선택할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보다 현실적이다. 반대로 여자는 언제나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한다.“시연아, 그 10억을 갚지 않으면 네 아빠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그걸 보기가 너무 힘들어.”당시연은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지금쯤 원진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홍영란은 당시연이 화가 난 걸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시연아, 미안해. 네가 이미 말한 건데도...”“엄마.”당시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엄마, 이미 부동산 다 팔아버렸잖아. 내 손에 있는 현금도 다 줬어. 이제 10억은 진짜로 구할 방법이 없어. 원진은 지금 고3이야. 이 일들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너무 싫어.”하지만 아직 10억이 남았다.
김성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원진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자신이 당시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어울린단 말인가? 원진 같은 고등학생일 리는 없었다.김성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원진의 뒷모습을 깊이 응시했다.하지만 원진은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김성진을 지나쳐 무심하게 자리를 떠났다.김성진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내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어 당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지석은 거의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었기에 김성진의 전화가 오자마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아버님, 저 김성진이에요. 오늘 시연이가 빚쟁이들에게 붙잡혔어요. 제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뻔했어요. 아버님도 딸이 다치는 걸 원치 않으시겠죠? 사실 제 요구는 간단해요. 시연이가 저와 결혼만 한다면 이 빚은 제가 다 갚아드릴게요.”당지석은 현재 수감 중이라 전화를 걸기조차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미 아내에게 들은 소식에 따르면 집을 팔았지만 여전히 10억이 부족하다고 했다.이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가 가족에게 큰 어려움을 준 것이었다. 만약 그 빚쟁이들이 당시연을 계속 노린다면 그녀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당지석은 당시연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가부장적이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고 집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만약 당시연이 그의 잘못 때문에 다친다면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당지석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김성진이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성진아, 내가 어떻게 협조하면 될까?”“아버님의 목숨을 걸고 시연이와 어머님을 설득하면 결국 승낙할 거예요.”그렇다. 목숨으로 협박한다면 아무리 당시연이 실망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실망은 실망이지만 자기 아버지가 죽는 것을 바라진 않을 테니까.잠시 침묵이 흘렀고 당지석은
원진이 돈을 챙겨 나가려는 순간 그의 허리에 총구가 겨눠졌다.“처음 와서 이렇게 큰돈을 따면 쉽게 나갈 수 없는 게 이 바닥의 룰이야, 학생.”원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 밤 그가 겪은 모든 일은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산더미처럼 쌓인 현금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총을 들이대는 남자.아마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날 여기 데려와서 도박을 하게 만든 건 당신들이고 지금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도 당신들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난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어.”남자는 원진의 담담한 반응에 놀란 듯 보였다.산골 마을에서 자란 이 소년은 비범한 침착함을 보였고 심지어 그들과 협상을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원진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여전히 그의 허리에 겨눠진 총을 무시했다.“며칠 전부터 날 따라다닌 것도 당신들이었지?”매번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미행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엔 김성진의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지만 김성진이라면 벌써 행동에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남자는 원진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찾아내려 했으나 원진은 너무도 차분했다.몇 분 후 남자는 총을 거두었다. 그의 반응에 매우 만족한 듯 보였다.만약 오늘 원진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보였다면 그는 살아서 이곳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네 아버지가 널 보고 싶어 한다.”원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의 아버지? 그 강간범?수년 전 수많은 죄를 저질러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죽지 않았다니?게다가 이제 와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니?원진의 눈가에 순식간에 혐오감이 스쳤다. 그의 인생 모든 불행은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다.“만나고 싶지 않아.”“네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넌 아버지를 만나볼 필요가 있어. 너 지금 돈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에겐 돈이 그저 가벼운 종이 쪼가리일 뿐이야.”“만나지 않을 거야.”원진은 간신히 지금의 생활을 이루어냈고
소년은 이미 키가 185cm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에게 기대는 모습은 마치 위로를 구하는 어린아이 같았다.당시연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아직 저녁 안 먹었지? 음식 데워났으니까 가서 좀 먹어.”원진은 결국 4억 원을 손에 넣었지만 현금 대신 수표를 받았다. 현금을 들고 다니면 눈에 띌 수 있었기에 때문이다.그러나 그 수표를 당시연에게 바로 줄 수는 없었다. 만약 당시연이 그 수표의 출처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원진의 안전을 계속 염려하게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그 수표를 홍영란에게 보냈다. 아마도 지금쯤 그녀는 그 수표를 받았을 것이다.홍영란은 정말 수표를 받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지만 편지에는 자신이 예전에 가르쳤던 한 제자라고 적혀 있었다. 홍영란과 당지석은 모두 교사였기 때문에 가르친 학생이 너무 많아 정확히 어느 학생인지 떠올리지 못했다.그녀는 반신반의하며 은행에 가서 수표를 환전해 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4억 원이 있었다.이제 6억 원만 남았다.홍영란은 무척 흥분했지만 이 소식을 당시연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편지에 분명히 당시연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당시연은 요즘 평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집이 팔린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아무런 저축도 없기에 빠르게 돈을 벌지 않으면 자신과 원진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당지석의 빚은 아직 10억 원이 남았다. 설령 그가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법원에서 형을 감경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그 후 일주일이 지나면서 원진이 집에 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연은 당지석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깜짝 놀란 당시연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정말인가요?”“지금 병원에 이송된 상태입니다. 아직 위기를 넘기지 못했지만 어머님이 이미 병원에 와 계십니다.”당시연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홍영란을 보았다.2주 만에 보는 홍영란의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당시연은 그 자리에
당시연은 김성진의 품에 안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멀리 서 있는 원진을 보자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원진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아마도 방금 막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당시연은 밤새 병원에 있었고 그 시각 원진은 당연히 집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지만 새벽 4시에 두 사람은 아파트 아래에서 마주쳤다.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김성진을 밀어내고 원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그의 입가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팔에도 여러 곳에 상처가 보였다.“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원진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김성진에게 향했다.두 사람이 조금 전까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시연 누나가 김성진을 다시 만나려는 걸까?’원진은 갑자기 강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까까지는 아프지 않았던 몸이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심지어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당시연은 걱정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원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때 김성진이 말을 꺼냈다.“시연아, 잘 생각해 봐.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 다 네가 필요해.”당시연은 발걸음을 주춤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원진이 다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었다.집에 돌아가는 동안 원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당시연이 집 안의 불을 켜자 밝은 빛 아래서 원진의 상처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옷 벗어봐.”방금 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 원진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못 들은 척했다.그러자 당시연은 다가와 그의 옷을 들추어 올렸고 그의 몸에 퍼진 멍 자국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이 상처들은 오늘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생긴 상처들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너무 바빠서 원진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이유를 묻지 않았다.“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너를 때린 거야? 왜 이렇게 심
원진은 소파에 기대어 당시연의 억눌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당시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자꾸만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당시연.”당시연이 눈물을 닦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원진의 눈은 반짝였고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순간 당시연은 그가 왜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의아해했다. 시연 누나라고 부르던 아이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다니.“왜 그래?”“누나가 울면 내가 더 힘들어져요.”그 말이 나오자 집안은 더욱 고요해졌다.당시연은 김성진 외에는 다른 남자와 교제한 적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서툴렀다. 그래서 눈앞의 소년이 아무런 가림 없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진아, 아프지 않아?”원진의 몸 곳곳에 남은 심한 상처 자국들을 보며 누군가가 그를 얼마나 잔인하게 때렸는지를 생각하니 당시연은 마음이 아팠다.“정말 안 아파요.”원진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당시연의 얼굴은 눈물로 축축했다.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무력해 보였다.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불안감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원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였다.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정말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원진은 그저 당시연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당시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코를 훌쩍였다.“그러니까 누구한테 맞았는지 말해줄래?”“그냥 우연히 시비가 붙은 불량배들일 뿐이에요. 오늘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래
쿠당탕.원진은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옆에서 그를 훈련시키던 이들은 냉혹한 표정으로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이 정도로는 어림없어. 네가 상대할 적은 훨씬 더 강할 테니까.”원진은 피를 내뱉으며 천천히 일어섰다.온몸이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는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원진은 보통 사람들보다 고통을 참아내는 능력이 뛰어났다.그의 팔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이를 통해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했는지 알 수 있었다.“쿨럭쿨럭.”그러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음에도 얼굴만은 멀쩡했다. 이는 원진이 그들에게 내건 조건 덕분이었다. 얼굴에 상처가 나면 당시연이 알아챌까 봐 그들에게 얼굴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공격해.”원진이 휘두른 주먹은 상대의 방어에 막혔고 상대방의 눈빛에는 희미한 만족감이 스쳤다.처음 원진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원진이 별 볼 일 없는 아이일 거라 생각했다. 산골에서 자란 아이가 얼마나 대단하겠냐는 생각이었다. 아마 돈 몇 푼만 봐도 바로 욕심을 드러내며 비굴하게 굴 거라 믿었다.만약 그랬다면 그저 총 한 방이면 해결될 일이었다.하지만 원진은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잘 성장하고 있었고 모든 면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을 흥분시킬 정도로 말이다.이대로 잘 키우면 원진은 어르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그것이 그들이 원진을 찾아낸 목적이었고 2년 뒤 결정될 상속자 자리에 그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원진의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라졌고 이들은 원진이 상속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키워내야만 했다.하지만 상속을 둘러싼 싸움은 말 그대로 피를 보는 전쟁이었다. 산골에서 자란 아이가 하루아침에 그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원진을 비밀리에 훈련시키고 있었다.다행히도 원진은 그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강한 반응 속도와 타고난 능력으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쿵.원진은 또다시 바닥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약점이 있어야 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원진이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그를 다루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남자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원진의 두 손을 떼어냈다.“그 기세 좋아. 계속 그렇게 해. 네가 가문으로 돌아오는 걸 기대하고 있겠다.”원진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이제 겨우 열여덟도 되지 않은 그가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한다니.그는 뒤로 물러서서 1억 수표와 가방을 들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그때 한 남자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다가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저 자식은 자기 아버지보다 더 독하군.”어린 나이임에도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나 혹독할 수 있는 사람은 남에게는 얼마나 더 독하게 굴 수 있을지 모른다.다행히 지금은 원진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가 더 이상 소중히 여길 사람이 없어진다면 그는 통제 불가능한 야수가 될 것이다.다른 한 남자는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하지만 원진의 약점이 너무 명확합니다. 어르신께서는 후계자가 약점을 가지는 걸 용납하지 않으시겠죠. 원진이 지금부터 미래를 한 여자에게 묶어두는 건 큰 감점 요인이 될 겁니다. 제 생각엔 차라리 당시연을 잡아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원진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 그때 당시연을 없애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면 원진은 감정 없는 기계가 될 거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겁니다.”원진을 상대했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자신의 손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원진이 잠시 보여줬던 강한 보호 본능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절대 당시연을 죽이면 안 돼. 오히려 잘 살게 해둬야 해. 그 여자는 원진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야. 너무 똑똑한 척 앞서가면 일을 그르칠 거다. 저 아이가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성장한 걸 보면 앞으로가 기대돼. 만약 저 아이에게 아무 일이 없다면 다음 후계자는 분명 저 아이가 될 거야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