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마음에 장하리는 알약을 손에 꼭 쥐고 으름장을 놓았다.“빨리 입 벌리고 약 먹어요.”그러나 서주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 속에서 땀방울이 방울방울 침대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서주혁 씨?”반응이 없었다.장하리도 슬슬 걱정되어 물수건으로 그의 땀을 닦아주며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어요?”그러자 서주혁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여기.”이렇게 보니 서주혁은 서보겸의 모습과 똑 닮았다.더욱 마음이 약해진 장하리는 서보겸의 목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안 먹어.”서주혁은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딘가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서주혁의 모습은 어른을 넘어서 서보겸과 너무 똑같아 보였다.하지만 약은 먹여야 하니 장하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서주혁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정신 차려요. 빨리 약 먹어야죠. 아직도 열나는데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하지만 서주혁은 여전히 입술을 짓이기며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결국, 방법이 없었던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턱을 꼬집고 약을 강제로 먹인 다음 몸을 숙여 입술로 틀어막았다.알약이 그의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흘러내리고 서주혁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하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지 서주혁의 볼은 전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 뒤, 서주혁에게 물을 먹여주기 위해 물 한 잔을 들고 오자 서주혁이 놀란 눈빛으로 장하리에게 말을 건넸다.“선생님, 왜 저한테 뽀뽀해요?”손에 들고 있던 컵이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뭐라고요?”“어떻게 학생한테 뽀뽀해요? 선생님, 이렇게 하면 불법 아닌가요?”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주혁은 정말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
장하리는 시달리다 지친 상태였고 또 30분이 흘러서야 서주혁은 그만두었다.일어나서 정리한 후 몸 구석구석 땀을 모두 닦아준 후에야 하리는 자리에 누웠다.이번에 서주혁은 오히려 얌전해졌고 호흡이 안정되었다.장하리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대어 체온을 확인했다. 열을 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막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손을 거두려는데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여보, 미안해.”“미안…”서주혁이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장하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언제였던지 까마득했다.그동안 두 사람은 어색하게 지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면 장하리는 늘 한발 먼저 눈을 피하곤 했다.“하리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미안해...”그의 입술은 여전히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장하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적셨다.그제야 서주혁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침대에 누운 장하리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람이 울리자 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바늘을 뽑았고 또 서주혁의 이마를 닦아주었다.그의 편안히 잠을 자는 모습에 장하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장하리는 옆자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매일 일찍 일어나 옆자리를 비우던 서주혁이 오늘은 여전히 자리에 있었다.잠이 덜 깨 혼미한 상태에서 장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목젖을 더듬어 올라가 이마에 손을 댔다.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기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열이 내린 듯했다.어젯밤 종일 잠에 들지 못했기에 장하리는 열이 내렸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시름을 덜고 잠을 이어 자려 했다.그러나 이때, 그녀의 손이 무언가의 힘에 당겨졌다. 뿌리치려 애써도 덩굴처럼 점점 더 감아왔다.눈살을 찌푸린 채 장하리가 옆을 매섭게 바라보았다.옆으로 누운 서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불 속에서 장하리의 손을 꽉 잡고 깍지 낀 채 말이다.“어젯밤에 내가 기절
서주혁은 안팎으로 조금도 놓치지 않고 장하리의 몸을 훑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침대에서 몸을 뒤섞었고 서주혁이 또다시 시작하려 몸을 움직이자 장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주혁의 뺨을 내리쳤다.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장하리의 몸은 남는 구석이 없었다. 한편, 제대로 화가 치밀어오른 장하리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시간 좀 봐요. 보겸이는 그냥 놔둘 거예요?”부모가 아이도 돌보지 않고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그러나 서주혁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뒤로하고 장하리의 다리를 잡은 채, 일부러 모르쇠를 시전하며 말을 꺼냈다.“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할게, 여보. 응?”장하리는 당장이라도 서주혁을 발로 걷어차서 떨궈놓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장하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렴풋이 잠이 들고 말았다.깨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이윽고 침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서주혁과 서보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보겸은 책을 읽고 있었고 서주혁은 컴퓨터로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던 옷가지들도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방안은 다시 예전의 깨끗한 모양새를 되찾았다.물론 장하리의 몸에도 깨끗한 잠옷이 걸쳐져 있었다. 한편, 옆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바깥 하늘 아래, 크고 작은 두 얼굴이 비쳐 있으니 장하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곧이어 장하리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발견한 서주혁이 컴퓨터를 덮으며 그녀에게 물었다.“깼어? 배는 안 고파?”장하리는 확실히 배가 고팠다. 아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으로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그러자 서주혁은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다주며 말을 이었다.“좀 먹고 다시 자.”장하리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순히 숟가락을 들고 국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옆에 앉아 물끄러미 장하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주혁은 옆에 있는 휴지를 잡아 그녀의 입가를 부드
장하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살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요.”그러나 서주혁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하여 장하리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아니야, 너 화 풀리면 일어날게.”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자포자기한 듯 장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화 풀렸으니까 일어나라고요.”그러자 서주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 장하리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다가 손은 여전히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서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순순히 대답하던 서주혁을 떠올렸다.다시 생각해보니 유치원을 다닐 때 서보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았다.서주혁은 30분 내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직도 시큰거리냐며 물었다.장하리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저 이제 쉬고 싶어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그래, 배고프면 꼭 말해.”서주혁이 말을 마치고 장하리는 다시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저녁은 서주혁과 서보겸 두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보겸은 갑자기 궁금한 듯 서주혁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왜 힘들어요?”서주혁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 지나가던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봐도 서주혁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핑크빛 기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도 미래에 아내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보겸이 넌 아직 너무 어려.”그러자 서보겸은 작은 얼굴을 홱 돌리며 반박했다.“싫어, 알기... 전 일할 거예요.”엉뚱한 아이의 대답에 서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서보겸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보겸아, 아빠가 경험자로서 알려주는데 크면 알기 싫어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너 서율 누나와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아니요, 공부가... 가장 중요해요.”큰일이다. 또 한 명의 워크홀릭이 탄생했다.서주혁은 요리사에게 장하리의 몫까지 남겨달라고 당부한 뒤, 핸드폰을
(산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소년 vs 지적이고 온화한 도시의 누나)당시연이 21살이던 해 집안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며칠 전에 시골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편지에는 황토가 묻어 있어 먼 거리를 건너 그녀 손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당시연은 시골에 친척이 없었기에 당연히 잘못 배달된 편지라고 생각했다.“엄마, 혹시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오산 마을에서 편지가 왔어.”홍영란이 주방에서 나와 손을 닦고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없어. 너희 아빠도 시골에는 친척이 없잖니. 그런데 이 오산 마을, 너 1년 전에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방문했던 곳 아니야?”1년 전 당시연이 대학 3학년일 때 동아리와 함께 오산 마을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른 중학생 한 명을 만나 돈을 조금 남기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로 반년마다 400만 원씩 송금하며 그 아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자동이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아, 기억났어. 그럼 이건 나한테 온 편지가 맞네.”홍영란은 돌아서서 다시 주방으로 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두 달 전에도 이런 편지가 왔는데, 네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렸거든. 아마 네가 지원하던 그 아이가 쓴 편지일 거야. 한 번 읽어봐.”당시연은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었다.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만났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다.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오산 마을이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1년 전에야 도로가 개통되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신발조차 없었다.편지에 적힌 몇 마디는 그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가 아이를 낳았고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연은 짧은 이 문장을 바라보며 소년의 구조 요청이 이 종이에 가득 차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소유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알겠어요. 지금 찾으러 갈게요.”소유진은 전화를 끊고 당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선배님, 성진 선배가 지금 실험실 휴게실에 있어요. 제가 자료를 가져다드릴게요. 괜히 방해했네요.”당시연은 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얕은 수작에 흥미가 없었다. 굳이 그걸 들추지도 않았다.소유진의 눈에는 살짝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도 당시연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방금 그녀가 남긴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걸까? 이미 어제 김성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까지 흘렸는데 말이다.“선배님...”당시연은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소유진의 말소리도 완전히 차단됐다.소유진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눈빛은 차가워졌다.그 사이 당시연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수업이 많지 않아 대부분 실습을 다니느라 바빴다.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어느 학교에서 실습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짐을 정리하다가 당시연은 다시 그 편지를 발견했다.글씨가 매우 예뻤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글씨였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예쁜 글씨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당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그때의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원진이를 후원하던 사람인데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장은 사투리로 대답을 했지만 당시연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진은 성적이 매우 좋았고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그 말은 결국 후원을 계속해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그 편지는 또 어떻게 된 걸까?당시연은 돈이 제대로 원진에게 전달되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다시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편지를 내
당시연이 김성진의 집을 나서자마자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시연아, 성진이가 너희 싸웠다고 하던데 네가 좀 양보해. 실험실 일도 바쁜데 무슨 말이든 앉아서 차분히 해결하면 되지, 네가 원래 남들과 싸우는 성격도 아니잖아. 어떻게 그렇게 참지 못해.”당시연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며 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아빠, 이건 우리 젊은 사람들 문제예요. 아빠는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남들과 싸우는 성격이 아니니까, 문제는 그쪽에 있다는 뜻이잖아요.”“성진이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니? 그 애는 우리랑도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거야.”당시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러니까 내가 뭘 말하지 않아도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죠?”당지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성진이 공부도 내가 봐줬잖니. 예전에 내가 과외해 줄 때도 성진이는 말 잘 듣는 아이였어. 그 애가 어떤 성격인지 내가 잘 아니까, 네가 조금만 양보해.”당시연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처음으로 부모님 전화를 먼저 끊어버린 순간이었다.자취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두통이 심해졌다.그 편지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당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편지를 찍어 김성진에게 보냈다.[우리 동아리에서 오산 마을에 실습 하러 갔을 때 만난 그 아이 기억나? 그 애가 조금 어려움을 겪고 있나 봐.]두 사람이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시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화해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성진은 소유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으니, 만약 나중에 그 선을 넘게 되면 그때 가서 헤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김성진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오산 마을에서 나왔을 때 우리 동아리 실습은 끝났잖아. 너 혼자 그 아이를 후원하고 있잖아. 시연아, 가끔 너는 너무 착한 척을 해. 네 형편도 그리 넉넉한 것도 아닌데, 6개월에 400만 원을 후원하고 솔직히 난
당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무의식적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방 안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키는 더 커졌지만 여전히 영양실조처럼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몸에 맞지 않아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원진은 시험지를 내려놓고 곧바로 아기를 보러 갔다. 그 여자는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껍질을 바닥에 뱉고 있었다.“애 보고 나면 저녁밥도 해. 우리 집에 살면서 밥 먹고 입는 게 공짜인 줄 알아? 네 부모도 없는데 우리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네가 어디서 굶어 죽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야.”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툴게 아기를 달랬다.그 여자의 말이 너무 지나쳤는지 옆에서 담당자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자 그제야 여자가 당시연을 쳐다봤다.그녀는 당시연을 알아본 듯 순간 멈칫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당시연 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당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원진이 입고 있는 옷과 바지를 보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아줌마, 제가 원진을 후원하면서 반년마다 400만 원씩 보냈어요. 그 돈으로 옷 한 벌 못 사줄 정도인가요?”여자는 뻔뻔하게도 태연하게 대꾸했다.“아유, 먹고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원진한테 물어봐요, 우리가 그 애를 굶겼나요? 학비도 다 돈이고 교재도 다 돈이죠. 설마 내가 그 돈을 가로챘다고 의심하는 건가요?”원진은 당시연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당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진아, 날 기억해? 작년에 내가 여기 왔었는데, 벌써 1년이 넘었네. 내 얼굴 아직도 기억나?”원진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금세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기억나요.”당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좋아. 아줌마, 그 돈이 원진에게 쓰였다고 하셨으니, 그럼 원진에게 들어간 비용을 상세히 적어 주세요.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가 돈을 헛되이 쓴 건 아닌지 말이에요.”이 상황에서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그 여자는 자신은 새 옷을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