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무의식적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방 안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키는 더 커졌지만 여전히 영양실조처럼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몸에 맞지 않아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원진은 시험지를 내려놓고 곧바로 아기를 보러 갔다. 그 여자는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껍질을 바닥에 뱉고 있었다.“애 보고 나면 저녁밥도 해. 우리 집에 살면서 밥 먹고 입는 게 공짜인 줄 알아? 네 부모도 없는데 우리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네가 어디서 굶어 죽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야.”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툴게 아기를 달랬다.그 여자의 말이 너무 지나쳤는지 옆에서 담당자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자 그제야 여자가 당시연을 쳐다봤다.그녀는 당시연을 알아본 듯 순간 멈칫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당시연 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당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원진이 입고 있는 옷과 바지를 보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아줌마, 제가 원진을 후원하면서 반년마다 400만 원씩 보냈어요. 그 돈으로 옷 한 벌 못 사줄 정도인가요?”여자는 뻔뻔하게도 태연하게 대꾸했다.“아유, 먹고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원진한테 물어봐요, 우리가 그 애를 굶겼나요? 학비도 다 돈이고 교재도 다 돈이죠. 설마 내가 그 돈을 가로챘다고 의심하는 건가요?”원진은 당시연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당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진아, 날 기억해? 작년에 내가 여기 왔었는데, 벌써 1년이 넘었네. 내 얼굴 아직도 기억나?”원진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금세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기억나요.”당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좋아. 아줌마, 그 돈이 원진에게 쓰였다고 하셨으니, 그럼 원진에게 들어간 비용을 상세히 적어 주세요.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가 돈을 헛되이 쓴 건 아닌지 말이에요.”이 상황에서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그 여자는 자신은 새 옷을 입고
당시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구석에 있던 소년은 마치 그녀에게서 빛이 나는 듯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 여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며불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대체 이게 무슨 천인공노할 짓이야? 내가 말해두지만 원진은 우리 애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네가 뭔데 여기까지 와서 이래라 저래라야! 너 같은 도시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을 셈이야? 게다가 얼마나 오래 신경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 애를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은 나야! 원진, 너도 생각 좀 해봐. 지금이야 이 여자가 네 편을 들어줄 수 있겠지만, 금방 갈 사람이야!”“원진을 제원으로 데리고 가서 학교에 보낼 거예요!”이 말은 충동적으로 튀어나왔고 당시연 자신도 말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안도했다. 원진을 이런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원진에게 시선을 돌리고 손을 잡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아, 나랑 같이 제원으로 갈래?”당시연은 지금 번역 일로 충분히 돈을 벌고 있었고 원진을 후원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자취방은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와 가까워 원진이 통학도 할 수 있었다.이제야 당시연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여자는 여전히 발악하고 있었다.“안 돼! 이건 납치야! 당신들 당장 신고할 거야!”“좋아요. 그럼 내 후원금 천2백만 원을 돌려주세요.”당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이 여자가 그 돈을 내놓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그 돈은 다 써버렸을지도 모른다. 원진은 이 집에서 그저 값싼 노동력이었을 뿐이었다. 여자가 값싼 노동력을 위해 천2백만만 원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당시연은 가방을 뒤져 또 4백만 원을 꺼냈다.“혹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해 준다면 이 4백만 원도 드릴게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서로 관계없이 지내요. 이장님과 여기 계신 담당자분이 증인이 되어 서류
당시연은 원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혈연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갑자기 자신의 운명을 낯선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얼마나 불안할지 충분히 이해했다.하지만 원진은 당시연의 얼굴을 몇 초 동안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고 싶어요.”당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원진의 손을 잡았다.“좋아, 그럼 우리 가서 서명하자.”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과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여자는 400만 원을 받자마자 마을 이장 집에서 바로 돈을 세기 시작했다.이장은 미안했는지 당시연에게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했지만 당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더 오래 머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진아, 앞좌석에 타.”원진은 차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자동차였다. 그는 서투르게 문을 열고 차에 탔지만 안전벨트도 어떻게 매는지 몰랐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몸을 숙여 원진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원진은 지금 너무 말랐고 보기에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 겨우 16살이니 한참 성장할 나이였기에 영양 공급은 필수였다.당시연은 안전벨트를 매고 두 손을 운전대에 올렸다.“진아, 너 몇 살이니?”“막 16살 됐어요.”“그래? 그럼 내가 너보다 6살이나 많으니까 앞으로 나를 시연 이모라고 불러. 나는 당시연이야.”“네.”당시연은 약간 피곤했다. 차를 몰고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세웠다.“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당시연은 손에 도시락을 몇 개 들고 곧 돌아왔다.“뭐 좀 먹자. 집에 도착하려면 저녁은 돼야 할 것 같아. 나도 여기서 한 시간 정도 쉬어야 해.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하면 위험하니까.”원진은 도시락을 받아 들고 당시연이 조금씩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침을 삼켰다. 그는 일회용 젓가락을 뜯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진은 워낙 식사량이
당시연은 잠결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시연 누나.”눈을 떠보니 원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그녀는 잠시 멍하니 원진을 바라보았다.원진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한 시간이 지났어요.”당시연은 서둘러 의자를 세우고 얼굴을 살짝 두드렸다. 오랜만에 푹 잔 듯 기분이 상쾌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 시간 사십 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한 시간 지나면 깨워 달랬잖아.”원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가서 커피 좀 사 올게. 너는 뭐 마실래?”“안 마실래요.”당시연은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아까 나 뭐라고 불렀어?”원진은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누나가 젊으셔서 이모라고 부르기 싫어요.”당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누나라고 불러.”그녀는 커피 한 잔과 두유를 사 들고 돌아와서 원진에게 두유를 건넸다.“뭐라도 마셔.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으면 미리 말해. 아직 네 시간은 더 가야 하거든. 집에 도착하면 아마 저녁 7시쯤 될 거야.”“네.”당시연은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진아, 뭐든 마음에 두지 말고 이야기해. 나는 애를 키워본 적도 없고 동생도 없어. 네 생각을 어떻게 맞출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뭐든 하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해.”원진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네.”차가 두 시간쯤 달렸을 때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당시연은 받기 싫었지만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외부 스피커로 전화를 받았다.“아빠, 무슨 일이에요?”“성진이가 어젯밤에 네 자취방에 갔다가 너 못 만났다고 하더라. 너 어디 간 거야? 설마 외박했어? 시연아, 성진이랑 아직도 화해 안 했어? 성진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번엔 네가 확실히 좀 잘못한 것 같아. 그 여자애랑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챙겨준 거라잖아. 나중에 직장 생활
차 안은 너무 조용했고 두 사람 모두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듯했다.당시연이 먼저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었다.“진아, 아까 우리 아빠가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 제원에 도착하면 학교 알아봐 줄 테니까, 너는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다른 건 걱정하지 마. 내가 네게 보내는 돈은 내가 직접 번 돈이라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어.”원진은 마음이 따뜻해지며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네.”당시연은 그제야 그가 겨우 열여섯 살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도 없이 살아온 데다 속을 알 수 없는 고모 밑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걱정하지 마, 내가 너 다시 보내지 않을 거니까.”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도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원진의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은 안정된 듯했다. 그는 몰래 당시연의 옆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정말 예뻤고 성격도 온화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당시연은 또래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자신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순간 원진의 마음은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계좌번호도, 제대로 된 연락처도 없었기에 그 돈이 정말 자신에게 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고모는 그 돈 때문에 그를 마지못해 학교에 보내줬다. 그래서 공부를 못 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그때 당시연의 동아리가 도우러 왔을 때 연락처를 남겨 뒀기에 마을 이장에게서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내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편지를 부쳤지만 두 달 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원진은 그녀가 바빠서 편지를 읽지 못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주소로 이사를 가서 편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는 자신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그녀가 편지를 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짧은 편지를 보냈다. 사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차마 그런 부탁을 대놓고
당시연은 잠옷을 입은 채 원진의 방에 들어가 침대를 정리해 주고 1층 마트에 내려가 그를 위한 세면도구를 사 왔다.“부족한 건 내일 가서 더 사자. 이제 곧 배달 음식이 올 거니까 먼저 저녁부터 먹어.”당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원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많이 먹어. 먹는 거로 절대 아끼지 마. 배불리 먹지 않으면 다 남겨서 낭비하는 거야.”원진은 고모 집에 있을 때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다. 고기라도 먹으려고 하면 항상 빈정거림과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런 생활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이렇게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방에서 지내는 건 꿈만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이 달콤한 꿈에서 깰까 봐 걱정되었다.당시연은 원진이 얌전히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이 떡갈비 좀 더 먹어. 내가 현장에서 먹어봤는데,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거라 깨끗하고 좋아. 너는 지금 단백질을 더 보충해야 해.”원진은 고개를 들어 당시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시연 누나, 고마워요.”당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차를 몰고 오는 내내 그녀는 자신이 너무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건 아닌지,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아직 자신도 학생인데 이런 큰 책임을 짊어지는 게 맞는지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원진을 마주한 이 순간 그녀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고 느꼈다.“고맙긴. 내가 너를 데리고 나온 이상, 네 모든 걸 책임질 거야.”원진이 저녁을 다 먹자 당시연이 일어나서 치우려 했지만 원진이 먼저 일어섰다.“제가 치울게요. 저도 요리할 수 있어요. 다만 집에서 하던 것들이라 단순한 가정식인데, 누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너는 요리할 필요 없어. 월요일에 학교 가면 공부량이 많아질 거야. 네가 마을에서는 우수한 학생일지 몰라도, 여기서는 그만큼 치열할 거야. 각오하고 있어야 해. 원진, 네가 이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
당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집안이 조용해진 후에야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그녀는 김성진을 정말 좋아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와 사귀지 않았을 것이다.잠시 울고 난 뒤 당시연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카드를 주워 현관에 있는 열쇠 상자에 넣었다.손님방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었고 그 문이 다시 조용히 닫혔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원진은 문에 기대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래는 나가서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불편함이 자신 때문에 생긴 것 같아 차마 나가지 못했다. 혹시 그녀가 마음을 바꿔 자신을 다시 돌려보낼까 봐 두려웠다.그는 몹시 불안했다.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당시연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울음소리는 매우 억눌려 있고 작았지만 마치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울음소리는 멈췄고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꽃잎들을 정리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원진은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여전히 그 습하고 어두운 방에 있는 건 아닌지, 여전히 작은 고깃덩어리 하나를 집어 먹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행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여기 있는 이불은 매우 따뜻했다. 반면 그가 평소에 덮던 이불은 얇은 한 겹뿐이었고 머리까지 덮으면 발이 드러났다. 겨울에도 그 얇은 이불로 버텼기 때문에 그는 늘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야 했다.결국 원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뭔가 아침을 차리려고 했으나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었다.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숙제 책을 꺼내 들고 조용히 거실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당시연은 아침 9시에 일어났고 배달 음식을 시켰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한 뒤 당시연은 원진을 데리고 쇼핑몰로 향했다.하지만 원진은 옷의 가격표를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반팔 셔츠
두 사람은 오전 내내 밖에서 쇼핑을 했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당시연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원진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당시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방 한쪽에 있는 0.6평 정도 되는 빈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에 책상을 하나 놓아줄까? 아니면 네 방에 놓을까? 숙제할 때 편하겠지.”“방에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누나를 방해할까 봐 걱정돼요.”“그래, 그럼 방에 놓자. 그렇게 하면 너도 네 공간이 생길 테니까.”원진의 방은 6평 정도로 꽤 넓어서 책상을 놓기에는 충분했다.당시연은 그가 입을 새로 산 옷들을 옷장에 정리하고 새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두었다.“진아, 너 예전에 입던 안 맞는 옷들이랑 신발들은 버려도 되지? 이제 새 옷 입자.”원진은 급히 일어서며 말했다.“제가 버릴게요.”“괜찮아. 네가 쓰레기통이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1층까지 내려가야 하거든.”당시연의 다정한 말투에 원진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하기가 어려웠다.그러나 저녁이 되자 당시연의 아버지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더 엄격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김성진이 또 무언가 불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당시연은 그 순간 더 피로감을 느끼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시연아, 성진이가 그러던데 네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너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얼마나 돈이 드는지 알아? 그 아이가 이제 고등학생이라면 반쯤은 남자나 다름없잖아. 너 그 아이와 함께 지낸다고?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너 점점 말을 안 듣는구나!”당시연은 원래도 피곤했고 김성진과의 이별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그래서 한층 더 답답해졌다.“아빠, 성진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요.”“네가 잘못한 거니까 사과하고 선물이라도 사가서 화해해. 결혼 얘기까지 나왔던 사이인데, 어떻게 외부 사람 하나 때문에 헤어질 수가 있냐. 그리고 그 집에 데려온 그 아이,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빨리 돌려보내. 너는 언제나 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