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살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요.”그러나 서주혁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하여 장하리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아니야, 너 화 풀리면 일어날게.”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자포자기한 듯 장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화 풀렸으니까 일어나라고요.”그러자 서주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 장하리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다가 손은 여전히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서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순순히 대답하던 서주혁을 떠올렸다.다시 생각해보니 유치원을 다닐 때 서보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았다.서주혁은 30분 내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직도 시큰거리냐며 물었다.장하리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저 이제 쉬고 싶어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그래, 배고프면 꼭 말해.”서주혁이 말을 마치고 장하리는 다시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저녁은 서주혁과 서보겸 두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보겸은 갑자기 궁금한 듯 서주혁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왜 힘들어요?”서주혁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 지나가던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봐도 서주혁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핑크빛 기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도 미래에 아내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보겸이 넌 아직 너무 어려.”그러자 서보겸은 작은 얼굴을 홱 돌리며 반박했다.“싫어, 알기... 전 일할 거예요.”엉뚱한 아이의 대답에 서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서보겸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보겸아, 아빠가 경험자로서 알려주는데 크면 알기 싫어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너 서율 누나와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아니요, 공부가... 가장 중요해요.”큰일이다. 또 한 명의 워크홀릭이 탄생했다.서주혁은 요리사에게 장하리의 몫까지 남겨달라고 당부한 뒤, 핸드폰을
(산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소년 vs 지적이고 온화한 도시의 누나)당시연이 21살이던 해 집안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며칠 전에 시골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편지에는 황토가 묻어 있어 먼 거리를 건너 그녀 손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당시연은 시골에 친척이 없었기에 당연히 잘못 배달된 편지라고 생각했다.“엄마, 혹시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오산 마을에서 편지가 왔어.”홍영란이 주방에서 나와 손을 닦고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없어. 너희 아빠도 시골에는 친척이 없잖니. 그런데 이 오산 마을, 너 1년 전에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방문했던 곳 아니야?”1년 전 당시연이 대학 3학년일 때 동아리와 함께 오산 마을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른 중학생 한 명을 만나 돈을 조금 남기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로 반년마다 400만 원씩 송금하며 그 아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자동이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아, 기억났어. 그럼 이건 나한테 온 편지가 맞네.”홍영란은 돌아서서 다시 주방으로 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두 달 전에도 이런 편지가 왔는데, 네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렸거든. 아마 네가 지원하던 그 아이가 쓴 편지일 거야. 한 번 읽어봐.”당시연은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었다.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만났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다.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오산 마을이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1년 전에야 도로가 개통되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신발조차 없었다.편지에 적힌 몇 마디는 그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가 아이를 낳았고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연은 짧은 이 문장을 바라보며 소년의 구조 요청이 이 종이에 가득 차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소유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알겠어요. 지금 찾으러 갈게요.”소유진은 전화를 끊고 당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선배님, 성진 선배가 지금 실험실 휴게실에 있어요. 제가 자료를 가져다드릴게요. 괜히 방해했네요.”당시연은 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얕은 수작에 흥미가 없었다. 굳이 그걸 들추지도 않았다.소유진의 눈에는 살짝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도 당시연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방금 그녀가 남긴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걸까? 이미 어제 김성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까지 흘렸는데 말이다.“선배님...”당시연은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소유진의 말소리도 완전히 차단됐다.소유진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눈빛은 차가워졌다.그 사이 당시연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수업이 많지 않아 대부분 실습을 다니느라 바빴다.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어느 학교에서 실습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짐을 정리하다가 당시연은 다시 그 편지를 발견했다.글씨가 매우 예뻤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글씨였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예쁜 글씨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당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그때의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원진이를 후원하던 사람인데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장은 사투리로 대답을 했지만 당시연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진은 성적이 매우 좋았고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그 말은 결국 후원을 계속해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그 편지는 또 어떻게 된 걸까?당시연은 돈이 제대로 원진에게 전달되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다시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편지를 내
당시연이 김성진의 집을 나서자마자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시연아, 성진이가 너희 싸웠다고 하던데 네가 좀 양보해. 실험실 일도 바쁜데 무슨 말이든 앉아서 차분히 해결하면 되지, 네가 원래 남들과 싸우는 성격도 아니잖아. 어떻게 그렇게 참지 못해.”당시연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며 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아빠, 이건 우리 젊은 사람들 문제예요. 아빠는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남들과 싸우는 성격이 아니니까, 문제는 그쪽에 있다는 뜻이잖아요.”“성진이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니? 그 애는 우리랑도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거야.”당시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러니까 내가 뭘 말하지 않아도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죠?”당지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성진이 공부도 내가 봐줬잖니. 예전에 내가 과외해 줄 때도 성진이는 말 잘 듣는 아이였어. 그 애가 어떤 성격인지 내가 잘 아니까, 네가 조금만 양보해.”당시연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처음으로 부모님 전화를 먼저 끊어버린 순간이었다.자취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두통이 심해졌다.그 편지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당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편지를 찍어 김성진에게 보냈다.[우리 동아리에서 오산 마을에 실습 하러 갔을 때 만난 그 아이 기억나? 그 애가 조금 어려움을 겪고 있나 봐.]두 사람이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시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화해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성진은 소유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으니, 만약 나중에 그 선을 넘게 되면 그때 가서 헤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김성진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오산 마을에서 나왔을 때 우리 동아리 실습은 끝났잖아. 너 혼자 그 아이를 후원하고 있잖아. 시연아, 가끔 너는 너무 착한 척을 해. 네 형편도 그리 넉넉한 것도 아닌데, 6개월에 400만 원을 후원하고 솔직히 난
당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무의식적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방 안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키는 더 커졌지만 여전히 영양실조처럼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몸에 맞지 않아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원진은 시험지를 내려놓고 곧바로 아기를 보러 갔다. 그 여자는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껍질을 바닥에 뱉고 있었다.“애 보고 나면 저녁밥도 해. 우리 집에 살면서 밥 먹고 입는 게 공짜인 줄 알아? 네 부모도 없는데 우리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네가 어디서 굶어 죽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야.”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툴게 아기를 달랬다.그 여자의 말이 너무 지나쳤는지 옆에서 담당자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자 그제야 여자가 당시연을 쳐다봤다.그녀는 당시연을 알아본 듯 순간 멈칫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당시연 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당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원진이 입고 있는 옷과 바지를 보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아줌마, 제가 원진을 후원하면서 반년마다 400만 원씩 보냈어요. 그 돈으로 옷 한 벌 못 사줄 정도인가요?”여자는 뻔뻔하게도 태연하게 대꾸했다.“아유, 먹고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원진한테 물어봐요, 우리가 그 애를 굶겼나요? 학비도 다 돈이고 교재도 다 돈이죠. 설마 내가 그 돈을 가로챘다고 의심하는 건가요?”원진은 당시연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당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진아, 날 기억해? 작년에 내가 여기 왔었는데, 벌써 1년이 넘었네. 내 얼굴 아직도 기억나?”원진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금세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기억나요.”당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좋아. 아줌마, 그 돈이 원진에게 쓰였다고 하셨으니, 그럼 원진에게 들어간 비용을 상세히 적어 주세요.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가 돈을 헛되이 쓴 건 아닌지 말이에요.”이 상황에서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그 여자는 자신은 새 옷을 입고
당시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구석에 있던 소년은 마치 그녀에게서 빛이 나는 듯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 여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며불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대체 이게 무슨 천인공노할 짓이야? 내가 말해두지만 원진은 우리 애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네가 뭔데 여기까지 와서 이래라 저래라야! 너 같은 도시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을 셈이야? 게다가 얼마나 오래 신경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 애를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은 나야! 원진, 너도 생각 좀 해봐. 지금이야 이 여자가 네 편을 들어줄 수 있겠지만, 금방 갈 사람이야!”“원진을 제원으로 데리고 가서 학교에 보낼 거예요!”이 말은 충동적으로 튀어나왔고 당시연 자신도 말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안도했다. 원진을 이런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원진에게 시선을 돌리고 손을 잡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아, 나랑 같이 제원으로 갈래?”당시연은 지금 번역 일로 충분히 돈을 벌고 있었고 원진을 후원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자취방은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와 가까워 원진이 통학도 할 수 있었다.이제야 당시연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여자는 여전히 발악하고 있었다.“안 돼! 이건 납치야! 당신들 당장 신고할 거야!”“좋아요. 그럼 내 후원금 천2백만 원을 돌려주세요.”당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이 여자가 그 돈을 내놓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그 돈은 다 써버렸을지도 모른다. 원진은 이 집에서 그저 값싼 노동력이었을 뿐이었다. 여자가 값싼 노동력을 위해 천2백만만 원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당시연은 가방을 뒤져 또 4백만 원을 꺼냈다.“혹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해 준다면 이 4백만 원도 드릴게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서로 관계없이 지내요. 이장님과 여기 계신 담당자분이 증인이 되어 서류
당시연은 원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혈연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갑자기 자신의 운명을 낯선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얼마나 불안할지 충분히 이해했다.하지만 원진은 당시연의 얼굴을 몇 초 동안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고 싶어요.”당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원진의 손을 잡았다.“좋아, 그럼 우리 가서 서명하자.”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과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여자는 400만 원을 받자마자 마을 이장 집에서 바로 돈을 세기 시작했다.이장은 미안했는지 당시연에게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했지만 당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더 오래 머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진아, 앞좌석에 타.”원진은 차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자동차였다. 그는 서투르게 문을 열고 차에 탔지만 안전벨트도 어떻게 매는지 몰랐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몸을 숙여 원진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원진은 지금 너무 말랐고 보기에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 겨우 16살이니 한참 성장할 나이였기에 영양 공급은 필수였다.당시연은 안전벨트를 매고 두 손을 운전대에 올렸다.“진아, 너 몇 살이니?”“막 16살 됐어요.”“그래? 그럼 내가 너보다 6살이나 많으니까 앞으로 나를 시연 이모라고 불러. 나는 당시연이야.”“네.”당시연은 약간 피곤했다. 차를 몰고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세웠다.“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당시연은 손에 도시락을 몇 개 들고 곧 돌아왔다.“뭐 좀 먹자. 집에 도착하려면 저녁은 돼야 할 것 같아. 나도 여기서 한 시간 정도 쉬어야 해.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하면 위험하니까.”원진은 도시락을 받아 들고 당시연이 조금씩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침을 삼켰다. 그는 일회용 젓가락을 뜯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진은 워낙 식사량이
당시연은 잠결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시연 누나.”눈을 떠보니 원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그녀는 잠시 멍하니 원진을 바라보았다.원진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한 시간이 지났어요.”당시연은 서둘러 의자를 세우고 얼굴을 살짝 두드렸다. 오랜만에 푹 잔 듯 기분이 상쾌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 시간 사십 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한 시간 지나면 깨워 달랬잖아.”원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가서 커피 좀 사 올게. 너는 뭐 마실래?”“안 마실래요.”당시연은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아까 나 뭐라고 불렀어?”원진은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누나가 젊으셔서 이모라고 부르기 싫어요.”당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누나라고 불러.”그녀는 커피 한 잔과 두유를 사 들고 돌아와서 원진에게 두유를 건넸다.“뭐라도 마셔.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으면 미리 말해. 아직 네 시간은 더 가야 하거든. 집에 도착하면 아마 저녁 7시쯤 될 거야.”“네.”당시연은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진아, 뭐든 마음에 두지 말고 이야기해. 나는 애를 키워본 적도 없고 동생도 없어. 네 생각을 어떻게 맞출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뭐든 하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해.”원진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네.”차가 두 시간쯤 달렸을 때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당시연은 받기 싫었지만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외부 스피커로 전화를 받았다.“아빠, 무슨 일이에요?”“성진이가 어젯밤에 네 자취방에 갔다가 너 못 만났다고 하더라. 너 어디 간 거야? 설마 외박했어? 시연아, 성진이랑 아직도 화해 안 했어? 성진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번엔 네가 확실히 좀 잘못한 것 같아. 그 여자애랑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챙겨준 거라잖아. 나중에 직장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