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살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요.”그러나 서주혁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하여 장하리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아니야, 너 화 풀리면 일어날게.”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자포자기한 듯 장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화 풀렸으니까 일어나라고요.”그러자 서주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 장하리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다가 손은 여전히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서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순순히 대답하던 서주혁을 떠올렸다.다시 생각해보니 유치원을 다닐 때 서보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았다.서주혁은 30분 내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직도 시큰거리냐며 물었다.장하리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저 이제 쉬고 싶어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그래, 배고프면 꼭 말해.”서주혁이 말을 마치고 장하리는 다시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저녁은 서주혁과 서보겸 두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보겸은 갑자기 궁금한 듯 서주혁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왜 힘들어요?”서주혁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 지나가던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봐도 서주혁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핑크빛 기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도 미래에 아내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보겸이 넌 아직 너무 어려.”그러자 서보겸은 작은 얼굴을 홱 돌리며 반박했다.“싫어, 알기... 전 일할 거예요.”엉뚱한 아이의 대답에 서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서보겸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보겸아, 아빠가 경험자로서 알려주는데 크면 알기 싫어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너 서율 누나와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아니요, 공부가... 가장 중요해요.”큰일이다. 또 한 명의 워크홀릭이 탄생했다.서주혁은 요리사에게 장하리의 몫까지 남겨달라고 당부한 뒤, 핸드폰을
(산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소년 vs 지적이고 온화한 도시의 누나)당시연이 21살이던 해 집안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며칠 전에 시골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편지에는 황토가 묻어 있어 먼 거리를 건너 그녀 손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당시연은 시골에 친척이 없었기에 당연히 잘못 배달된 편지라고 생각했다.“엄마, 혹시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오산 마을에서 편지가 왔어.”홍영란이 주방에서 나와 손을 닦고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없어. 너희 아빠도 시골에는 친척이 없잖니. 그런데 이 오산 마을, 너 1년 전에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방문했던 곳 아니야?”1년 전 당시연이 대학 3학년일 때 동아리와 함께 오산 마을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른 중학생 한 명을 만나 돈을 조금 남기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로 반년마다 400만 원씩 송금하며 그 아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자동이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아, 기억났어. 그럼 이건 나한테 온 편지가 맞네.”홍영란은 돌아서서 다시 주방으로 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두 달 전에도 이런 편지가 왔는데, 네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렸거든. 아마 네가 지원하던 그 아이가 쓴 편지일 거야. 한 번 읽어봐.”당시연은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었다.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만났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다.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오산 마을이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1년 전에야 도로가 개통되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신발조차 없었다.편지에 적힌 몇 마디는 그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가 아이를 낳았고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연은 짧은 이 문장을 바라보며 소년의 구조 요청이 이 종이에 가득 차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소유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알겠어요. 지금 찾으러 갈게요.”소유진은 전화를 끊고 당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선배님, 성진 선배가 지금 실험실 휴게실에 있어요. 제가 자료를 가져다드릴게요. 괜히 방해했네요.”당시연은 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얕은 수작에 흥미가 없었다. 굳이 그걸 들추지도 않았다.소유진의 눈에는 살짝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도 당시연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방금 그녀가 남긴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걸까? 이미 어제 김성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까지 흘렸는데 말이다.“선배님...”당시연은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소유진의 말소리도 완전히 차단됐다.소유진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눈빛은 차가워졌다.그 사이 당시연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수업이 많지 않아 대부분 실습을 다니느라 바빴다.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어느 학교에서 실습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짐을 정리하다가 당시연은 다시 그 편지를 발견했다.글씨가 매우 예뻤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글씨였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예쁜 글씨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당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그때의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원진이를 후원하던 사람인데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장은 사투리로 대답을 했지만 당시연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진은 성적이 매우 좋았고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그 말은 결국 후원을 계속해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그 편지는 또 어떻게 된 걸까?당시연은 돈이 제대로 원진에게 전달되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다시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편지를 내
당시연이 김성진의 집을 나서자마자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시연아, 성진이가 너희 싸웠다고 하던데 네가 좀 양보해. 실험실 일도 바쁜데 무슨 말이든 앉아서 차분히 해결하면 되지, 네가 원래 남들과 싸우는 성격도 아니잖아. 어떻게 그렇게 참지 못해.”당시연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며 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아빠, 이건 우리 젊은 사람들 문제예요. 아빠는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남들과 싸우는 성격이 아니니까, 문제는 그쪽에 있다는 뜻이잖아요.”“성진이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니? 그 애는 우리랑도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거야.”당시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러니까 내가 뭘 말하지 않아도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죠?”당지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성진이 공부도 내가 봐줬잖니. 예전에 내가 과외해 줄 때도 성진이는 말 잘 듣는 아이였어. 그 애가 어떤 성격인지 내가 잘 아니까, 네가 조금만 양보해.”당시연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처음으로 부모님 전화를 먼저 끊어버린 순간이었다.자취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두통이 심해졌다.그 편지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당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편지를 찍어 김성진에게 보냈다.[우리 동아리에서 오산 마을에 실습 하러 갔을 때 만난 그 아이 기억나? 그 애가 조금 어려움을 겪고 있나 봐.]두 사람이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시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화해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성진은 소유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으니, 만약 나중에 그 선을 넘게 되면 그때 가서 헤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김성진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오산 마을에서 나왔을 때 우리 동아리 실습은 끝났잖아. 너 혼자 그 아이를 후원하고 있잖아. 시연아, 가끔 너는 너무 착한 척을 해. 네 형편도 그리 넉넉한 것도 아닌데, 6개월에 400만 원을 후원하고 솔직히 난
당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무의식적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방 안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키는 더 커졌지만 여전히 영양실조처럼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몸에 맞지 않아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원진은 시험지를 내려놓고 곧바로 아기를 보러 갔다. 그 여자는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껍질을 바닥에 뱉고 있었다.“애 보고 나면 저녁밥도 해. 우리 집에 살면서 밥 먹고 입는 게 공짜인 줄 알아? 네 부모도 없는데 우리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네가 어디서 굶어 죽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야.”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툴게 아기를 달랬다.그 여자의 말이 너무 지나쳤는지 옆에서 담당자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자 그제야 여자가 당시연을 쳐다봤다.그녀는 당시연을 알아본 듯 순간 멈칫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당시연 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당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원진이 입고 있는 옷과 바지를 보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아줌마, 제가 원진을 후원하면서 반년마다 400만 원씩 보냈어요. 그 돈으로 옷 한 벌 못 사줄 정도인가요?”여자는 뻔뻔하게도 태연하게 대꾸했다.“아유, 먹고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원진한테 물어봐요, 우리가 그 애를 굶겼나요? 학비도 다 돈이고 교재도 다 돈이죠. 설마 내가 그 돈을 가로챘다고 의심하는 건가요?”원진은 당시연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당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진아, 날 기억해? 작년에 내가 여기 왔었는데, 벌써 1년이 넘었네. 내 얼굴 아직도 기억나?”원진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금세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기억나요.”당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좋아. 아줌마, 그 돈이 원진에게 쓰였다고 하셨으니, 그럼 원진에게 들어간 비용을 상세히 적어 주세요.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가 돈을 헛되이 쓴 건 아닌지 말이에요.”이 상황에서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그 여자는 자신은 새 옷을 입고
당시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구석에 있던 소년은 마치 그녀에게서 빛이 나는 듯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 여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며불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대체 이게 무슨 천인공노할 짓이야? 내가 말해두지만 원진은 우리 애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네가 뭔데 여기까지 와서 이래라 저래라야! 너 같은 도시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을 셈이야? 게다가 얼마나 오래 신경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 애를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은 나야! 원진, 너도 생각 좀 해봐. 지금이야 이 여자가 네 편을 들어줄 수 있겠지만, 금방 갈 사람이야!”“원진을 제원으로 데리고 가서 학교에 보낼 거예요!”이 말은 충동적으로 튀어나왔고 당시연 자신도 말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안도했다. 원진을 이런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원진에게 시선을 돌리고 손을 잡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아, 나랑 같이 제원으로 갈래?”당시연은 지금 번역 일로 충분히 돈을 벌고 있었고 원진을 후원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자취방은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와 가까워 원진이 통학도 할 수 있었다.이제야 당시연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여자는 여전히 발악하고 있었다.“안 돼! 이건 납치야! 당신들 당장 신고할 거야!”“좋아요. 그럼 내 후원금 천2백만 원을 돌려주세요.”당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이 여자가 그 돈을 내놓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그 돈은 다 써버렸을지도 모른다. 원진은 이 집에서 그저 값싼 노동력이었을 뿐이었다. 여자가 값싼 노동력을 위해 천2백만만 원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당시연은 가방을 뒤져 또 4백만 원을 꺼냈다.“혹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해 준다면 이 4백만 원도 드릴게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서로 관계없이 지내요. 이장님과 여기 계신 담당자분이 증인이 되어 서류
당시연은 원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혈연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갑자기 자신의 운명을 낯선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얼마나 불안할지 충분히 이해했다.하지만 원진은 당시연의 얼굴을 몇 초 동안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고 싶어요.”당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원진의 손을 잡았다.“좋아, 그럼 우리 가서 서명하자.”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과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여자는 400만 원을 받자마자 마을 이장 집에서 바로 돈을 세기 시작했다.이장은 미안했는지 당시연에게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했지만 당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더 오래 머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진아, 앞좌석에 타.”원진은 차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자동차였다. 그는 서투르게 문을 열고 차에 탔지만 안전벨트도 어떻게 매는지 몰랐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몸을 숙여 원진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원진은 지금 너무 말랐고 보기에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 겨우 16살이니 한참 성장할 나이였기에 영양 공급은 필수였다.당시연은 안전벨트를 매고 두 손을 운전대에 올렸다.“진아, 너 몇 살이니?”“막 16살 됐어요.”“그래? 그럼 내가 너보다 6살이나 많으니까 앞으로 나를 시연 이모라고 불러. 나는 당시연이야.”“네.”당시연은 약간 피곤했다. 차를 몰고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세웠다.“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당시연은 손에 도시락을 몇 개 들고 곧 돌아왔다.“뭐 좀 먹자. 집에 도착하려면 저녁은 돼야 할 것 같아. 나도 여기서 한 시간 정도 쉬어야 해.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하면 위험하니까.”원진은 도시락을 받아 들고 당시연이 조금씩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침을 삼켰다. 그는 일회용 젓가락을 뜯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진은 워낙 식사량이
당시연은 잠결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시연 누나.”눈을 떠보니 원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그녀는 잠시 멍하니 원진을 바라보았다.원진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한 시간이 지났어요.”당시연은 서둘러 의자를 세우고 얼굴을 살짝 두드렸다. 오랜만에 푹 잔 듯 기분이 상쾌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 시간 사십 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한 시간 지나면 깨워 달랬잖아.”원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가서 커피 좀 사 올게. 너는 뭐 마실래?”“안 마실래요.”당시연은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아까 나 뭐라고 불렀어?”원진은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누나가 젊으셔서 이모라고 부르기 싫어요.”당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누나라고 불러.”그녀는 커피 한 잔과 두유를 사 들고 돌아와서 원진에게 두유를 건넸다.“뭐라도 마셔.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으면 미리 말해. 아직 네 시간은 더 가야 하거든. 집에 도착하면 아마 저녁 7시쯤 될 거야.”“네.”당시연은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진아, 뭐든 마음에 두지 말고 이야기해. 나는 애를 키워본 적도 없고 동생도 없어. 네 생각을 어떻게 맞출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뭐든 하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해.”원진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네.”차가 두 시간쯤 달렸을 때 당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당시연은 받기 싫었지만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외부 스피커로 전화를 받았다.“아빠, 무슨 일이에요?”“성진이가 어젯밤에 네 자취방에 갔다가 너 못 만났다고 하더라. 너 어디 간 거야? 설마 외박했어? 시연아, 성진이랑 아직도 화해 안 했어? 성진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번엔 네가 확실히 좀 잘못한 것 같아. 그 여자애랑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챙겨준 거라잖아. 나중에 직장 생활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