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며 서주혁은 밤중마다 저도 모르게 상처가 생겼던 부위를 긁고 싶어 이리저리 뒤척였다.서보겸은 두 사람 사이에 누워 잠을 청했고 장하리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툭 내뱉었다.“자꾸만 움직이면 보겸이 깨어날 거예요.”서주혁은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결국 입맛을 다시며 묵묵히 응할 수 밖에 없었다.한편, 서보겸은 침대에 누운 채, 단잠에 빠져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기운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또 한 달이 지나고 장하리는 서보겸을 데리고 제원의 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이는 원래의 신분으로 복귀한 후 참여하는 첫 공식적인 파티였다.서주혁은 한 무리의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한편, 장하리는 성혜인과 강민지와 번갈아 수다를 떨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행히도 그녀는 과거와 달리 많이 밝아졌다. 비록 서주혁에게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서주혁은 장하리가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개무량했다.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마음의 고통은 결국 인과응보인 셈이다.이를 잘 알고 있기에 서주혁은 장하리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그녀를 훔쳐볼 뿐이었다.한편, 친구들과의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그들의 남자친구가 다가왔다.유해은은 백현문에게 끌려갔는데 유해은이 아무리 짜증을 내며 그를 밀어내도 백현문은 여전히 접착제마냥 그녀에게 들러붙으며 멀어지려 하지 않았다.“유해은, 이제 그만해라. 아직도 스캔들이 부족해? 오늘 밤도 난 분명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바람을 당한 기분이 들더라고.”한편, 유해은은 최근에 큰 상을 받게 되어 기분이 좋은지라 일부러 손끝으로 백현문의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안 당하면 되지.”유해은의 말에 백현문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다른 한쪽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끝이 움찔하고 움츠러들었다.“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그럼 무슨 뜻인데? 당신 말은 내가 허구한 날 남자들 꼬
같은 시각,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장하리는 여전히 옛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옛 동료들과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남기지 못했었다.한편, 서주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술 한 잔을 들고 다가오더니 장하리를 향해 턱을 까딱하며 물었다.“마중 안 가?”이제 연회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반승제도 이제 성혜인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서 대표가 가만히 있는다고? 설마 오늘 밤 장하리를 혼자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겠지.그러나 서주혁은 고개를 숙인 채 하이볼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행복해 보이는데 조금만 더 내버려 두지 뭐.”서주혁이 나타나는 순간, 장하리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행복한 미소도 곧 사라질 테니까.반승제는 원래 비굴하게 땅을 파고 들어가는 서주혁을 조롱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며 그들 중 오직 서주혁만이 줄곧 정해진 길을 따르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해 왔었다. 마치 미래의 모든 일을 진즉 준비해 놓은 것처럼 서주혁의 계획은 줄곧 철두철미했었다.과거 다들 여색에 빠져 온갖 연애에 정신이 팔렸을 때도 오직 서주혁만이 이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단지 그의 신분에 맞는 여자, 그리고 말을 잘 듣는 여자를 찾아 아내로 맞는 것. 서주혁에게 있어 남녀 사이 사랑의 감정은 줄곧 중요하지 않았다. 하여 타인이 자신의 감정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서주혁의 머릿속은 아마 연구실의 각종 데이터로 가득 찼을 것이다.그랬던 서주혁이 현재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묵묵히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하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반승제는 순간 말을 멈추고 서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곧이어 반승제는 천천히 걸어가 성혜인을 데려갔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장하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갔
“어디가 아픈데요?”“몰라.” 이마가 뜨겁지만 않았어도 장하리는 서주혁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가정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에게 빨리 오라고 당부한 뒤, 먼저 서보겸을 자신의 침실로 데려가 재워주었다.그러나 서주혁이 걱정되어서인지 서보겸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장하리는 서보겸에게 이불을 덮여주며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어 주면 돼. 곧 있으면 의사 선생님도 오실 거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보겸이는 먼저 코 자자. 아이들은 밤을 새우면 안 돼.”서보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앙증맞게 이불 속에 넣었다.장하리는 전에 서보겸을 데리고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전보다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장하리를 만난 후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이다. 지금도 비록 하는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아이가 매우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입구로 가 불을 끈 뒤,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서주혁은 혼자 소파에 기대어 누워있었고 이마는 어느덧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이윽고 장하리가 소파에 앉자 서주혁은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하고 서주혁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아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선 침대로 부축해서 쉬게 하고 수액을 맞으면서 내일 열이 내리는지 천천히 보도록 하죠.”장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와 함께 서주혁을 안방으로 부축했다.곧이어 그녀는 또 몸을 숙여 그의 양복 외투를 벗기고 또 신발을 벗겨주었다.눈치가 빠른 의사는 진즉 등을 돌렸고 장하리는 서주혁의 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그 순간, 서주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여보, 벨트는 왜 풀어?”“아프면 침대에 누워 계세요.”“그런데 나 아직 샤워 안 했어. 몸에서 술 냄새가
답답한 마음에 장하리는 알약을 손에 꼭 쥐고 으름장을 놓았다.“빨리 입 벌리고 약 먹어요.”그러나 서주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 속에서 땀방울이 방울방울 침대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서주혁 씨?”반응이 없었다.장하리도 슬슬 걱정되어 물수건으로 그의 땀을 닦아주며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어요?”그러자 서주혁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여기.”이렇게 보니 서주혁은 서보겸의 모습과 똑 닮았다.더욱 마음이 약해진 장하리는 서보겸의 목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안 먹어.”서주혁은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딘가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서주혁의 모습은 어른을 넘어서 서보겸과 너무 똑같아 보였다.하지만 약은 먹여야 하니 장하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서주혁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정신 차려요. 빨리 약 먹어야죠. 아직도 열나는데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하지만 서주혁은 여전히 입술을 짓이기며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결국, 방법이 없었던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턱을 꼬집고 약을 강제로 먹인 다음 몸을 숙여 입술로 틀어막았다.알약이 그의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흘러내리고 서주혁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하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지 서주혁의 볼은 전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 뒤, 서주혁에게 물을 먹여주기 위해 물 한 잔을 들고 오자 서주혁이 놀란 눈빛으로 장하리에게 말을 건넸다.“선생님, 왜 저한테 뽀뽀해요?”손에 들고 있던 컵이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뭐라고요?”“어떻게 학생한테 뽀뽀해요? 선생님, 이렇게 하면 불법 아닌가요?”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주혁은 정말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
장하리는 시달리다 지친 상태였고 또 30분이 흘러서야 서주혁은 그만두었다.일어나서 정리한 후 몸 구석구석 땀을 모두 닦아준 후에야 하리는 자리에 누웠다.이번에 서주혁은 오히려 얌전해졌고 호흡이 안정되었다.장하리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대어 체온을 확인했다. 열을 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막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손을 거두려는데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여보, 미안해.”“미안…”서주혁이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장하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언제였던지 까마득했다.그동안 두 사람은 어색하게 지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면 장하리는 늘 한발 먼저 눈을 피하곤 했다.“하리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미안해...”그의 입술은 여전히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장하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적셨다.그제야 서주혁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침대에 누운 장하리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람이 울리자 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바늘을 뽑았고 또 서주혁의 이마를 닦아주었다.그의 편안히 잠을 자는 모습에 장하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장하리는 옆자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매일 일찍 일어나 옆자리를 비우던 서주혁이 오늘은 여전히 자리에 있었다.잠이 덜 깨 혼미한 상태에서 장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목젖을 더듬어 올라가 이마에 손을 댔다.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기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열이 내린 듯했다.어젯밤 종일 잠에 들지 못했기에 장하리는 열이 내렸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시름을 덜고 잠을 이어 자려 했다.그러나 이때, 그녀의 손이 무언가의 힘에 당겨졌다. 뿌리치려 애써도 덩굴처럼 점점 더 감아왔다.눈살을 찌푸린 채 장하리가 옆을 매섭게 바라보았다.옆으로 누운 서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불 속에서 장하리의 손을 꽉 잡고 깍지 낀 채 말이다.“어젯밤에 내가 기절
서주혁은 안팎으로 조금도 놓치지 않고 장하리의 몸을 훑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침대에서 몸을 뒤섞었고 서주혁이 또다시 시작하려 몸을 움직이자 장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주혁의 뺨을 내리쳤다.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장하리의 몸은 남는 구석이 없었다. 한편, 제대로 화가 치밀어오른 장하리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시간 좀 봐요. 보겸이는 그냥 놔둘 거예요?”부모가 아이도 돌보지 않고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그러나 서주혁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뒤로하고 장하리의 다리를 잡은 채, 일부러 모르쇠를 시전하며 말을 꺼냈다.“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할게, 여보. 응?”장하리는 당장이라도 서주혁을 발로 걷어차서 떨궈놓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장하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렴풋이 잠이 들고 말았다.깨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이윽고 침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서주혁과 서보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보겸은 책을 읽고 있었고 서주혁은 컴퓨터로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던 옷가지들도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방안은 다시 예전의 깨끗한 모양새를 되찾았다.물론 장하리의 몸에도 깨끗한 잠옷이 걸쳐져 있었다. 한편, 옆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바깥 하늘 아래, 크고 작은 두 얼굴이 비쳐 있으니 장하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곧이어 장하리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발견한 서주혁이 컴퓨터를 덮으며 그녀에게 물었다.“깼어? 배는 안 고파?”장하리는 확실히 배가 고팠다. 아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으로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그러자 서주혁은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다주며 말을 이었다.“좀 먹고 다시 자.”장하리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순히 숟가락을 들고 국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옆에 앉아 물끄러미 장하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주혁은 옆에 있는 휴지를 잡아 그녀의 입가를 부드
장하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살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요.”그러나 서주혁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하여 장하리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아니야, 너 화 풀리면 일어날게.”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자포자기한 듯 장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화 풀렸으니까 일어나라고요.”그러자 서주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 장하리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다가 손은 여전히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서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순순히 대답하던 서주혁을 떠올렸다.다시 생각해보니 유치원을 다닐 때 서보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았다.서주혁은 30분 내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직도 시큰거리냐며 물었다.장하리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저 이제 쉬고 싶어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그래, 배고프면 꼭 말해.”서주혁이 말을 마치고 장하리는 다시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저녁은 서주혁과 서보겸 두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보겸은 갑자기 궁금한 듯 서주혁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왜 힘들어요?”서주혁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 지나가던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봐도 서주혁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핑크빛 기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도 미래에 아내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보겸이 넌 아직 너무 어려.”그러자 서보겸은 작은 얼굴을 홱 돌리며 반박했다.“싫어, 알기... 전 일할 거예요.”엉뚱한 아이의 대답에 서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서보겸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보겸아, 아빠가 경험자로서 알려주는데 크면 알기 싫어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너 서율 누나와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아니요, 공부가... 가장 중요해요.”큰일이다. 또 한 명의 워크홀릭이 탄생했다.서주혁은 요리사에게 장하리의 몫까지 남겨달라고 당부한 뒤, 핸드폰을
(산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소년 vs 지적이고 온화한 도시의 누나)당시연이 21살이던 해 집안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며칠 전에 시골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편지에는 황토가 묻어 있어 먼 거리를 건너 그녀 손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당시연은 시골에 친척이 없었기에 당연히 잘못 배달된 편지라고 생각했다.“엄마, 혹시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오산 마을에서 편지가 왔어.”홍영란이 주방에서 나와 손을 닦고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없어. 너희 아빠도 시골에는 친척이 없잖니. 그런데 이 오산 마을, 너 1년 전에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방문했던 곳 아니야?”1년 전 당시연이 대학 3학년일 때 동아리와 함께 오산 마을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른 중학생 한 명을 만나 돈을 조금 남기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로 반년마다 400만 원씩 송금하며 그 아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자동이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아, 기억났어. 그럼 이건 나한테 온 편지가 맞네.”홍영란은 돌아서서 다시 주방으로 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두 달 전에도 이런 편지가 왔는데, 네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렸거든. 아마 네가 지원하던 그 아이가 쓴 편지일 거야. 한 번 읽어봐.”당시연은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었다.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만났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다.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오산 마을이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1년 전에야 도로가 개통되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신발조차 없었다.편지에 적힌 몇 마디는 그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가 아이를 낳았고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연은 짧은 이 문장을 바라보며 소년의 구조 요청이 이 종이에 가득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