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장하리는 여전히 옛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옛 동료들과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남기지 못했었다.한편, 서주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술 한 잔을 들고 다가오더니 장하리를 향해 턱을 까딱하며 물었다.“마중 안 가?”이제 연회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반승제도 이제 성혜인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서 대표가 가만히 있는다고? 설마 오늘 밤 장하리를 혼자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겠지.그러나 서주혁은 고개를 숙인 채 하이볼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행복해 보이는데 조금만 더 내버려 두지 뭐.”서주혁이 나타나는 순간, 장하리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행복한 미소도 곧 사라질 테니까.반승제는 원래 비굴하게 땅을 파고 들어가는 서주혁을 조롱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며 그들 중 오직 서주혁만이 줄곧 정해진 길을 따르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해 왔었다. 마치 미래의 모든 일을 진즉 준비해 놓은 것처럼 서주혁의 계획은 줄곧 철두철미했었다.과거 다들 여색에 빠져 온갖 연애에 정신이 팔렸을 때도 오직 서주혁만이 이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단지 그의 신분에 맞는 여자, 그리고 말을 잘 듣는 여자를 찾아 아내로 맞는 것. 서주혁에게 있어 남녀 사이 사랑의 감정은 줄곧 중요하지 않았다. 하여 타인이 자신의 감정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서주혁의 머릿속은 아마 연구실의 각종 데이터로 가득 찼을 것이다.그랬던 서주혁이 현재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묵묵히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하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반승제는 순간 말을 멈추고 서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곧이어 반승제는 천천히 걸어가 성혜인을 데려갔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장하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갔
“어디가 아픈데요?”“몰라.” 이마가 뜨겁지만 않았어도 장하리는 서주혁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가정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에게 빨리 오라고 당부한 뒤, 먼저 서보겸을 자신의 침실로 데려가 재워주었다.그러나 서주혁이 걱정되어서인지 서보겸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장하리는 서보겸에게 이불을 덮여주며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어 주면 돼. 곧 있으면 의사 선생님도 오실 거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보겸이는 먼저 코 자자. 아이들은 밤을 새우면 안 돼.”서보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앙증맞게 이불 속에 넣었다.장하리는 전에 서보겸을 데리고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전보다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장하리를 만난 후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이다. 지금도 비록 하는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아이가 매우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입구로 가 불을 끈 뒤,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서주혁은 혼자 소파에 기대어 누워있었고 이마는 어느덧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이윽고 장하리가 소파에 앉자 서주혁은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하고 서주혁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아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선 침대로 부축해서 쉬게 하고 수액을 맞으면서 내일 열이 내리는지 천천히 보도록 하죠.”장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와 함께 서주혁을 안방으로 부축했다.곧이어 그녀는 또 몸을 숙여 그의 양복 외투를 벗기고 또 신발을 벗겨주었다.눈치가 빠른 의사는 진즉 등을 돌렸고 장하리는 서주혁의 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그 순간, 서주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여보, 벨트는 왜 풀어?”“아프면 침대에 누워 계세요.”“그런데 나 아직 샤워 안 했어. 몸에서 술 냄새가
답답한 마음에 장하리는 알약을 손에 꼭 쥐고 으름장을 놓았다.“빨리 입 벌리고 약 먹어요.”그러나 서주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 속에서 땀방울이 방울방울 침대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서주혁 씨?”반응이 없었다.장하리도 슬슬 걱정되어 물수건으로 그의 땀을 닦아주며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어요?”그러자 서주혁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여기.”이렇게 보니 서주혁은 서보겸의 모습과 똑 닮았다.더욱 마음이 약해진 장하리는 서보겸의 목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안 먹어.”서주혁은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딘가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서주혁의 모습은 어른을 넘어서 서보겸과 너무 똑같아 보였다.하지만 약은 먹여야 하니 장하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서주혁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정신 차려요. 빨리 약 먹어야죠. 아직도 열나는데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하지만 서주혁은 여전히 입술을 짓이기며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결국, 방법이 없었던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턱을 꼬집고 약을 강제로 먹인 다음 몸을 숙여 입술로 틀어막았다.알약이 그의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흘러내리고 서주혁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하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지 서주혁의 볼은 전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 뒤, 서주혁에게 물을 먹여주기 위해 물 한 잔을 들고 오자 서주혁이 놀란 눈빛으로 장하리에게 말을 건넸다.“선생님, 왜 저한테 뽀뽀해요?”손에 들고 있던 컵이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뭐라고요?”“어떻게 학생한테 뽀뽀해요? 선생님, 이렇게 하면 불법 아닌가요?”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주혁은 정말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
장하리는 시달리다 지친 상태였고 또 30분이 흘러서야 서주혁은 그만두었다.일어나서 정리한 후 몸 구석구석 땀을 모두 닦아준 후에야 하리는 자리에 누웠다.이번에 서주혁은 오히려 얌전해졌고 호흡이 안정되었다.장하리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대어 체온을 확인했다. 열을 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막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손을 거두려는데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여보, 미안해.”“미안…”서주혁이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장하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언제였던지 까마득했다.그동안 두 사람은 어색하게 지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면 장하리는 늘 한발 먼저 눈을 피하곤 했다.“하리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미안해...”그의 입술은 여전히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장하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적셨다.그제야 서주혁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침대에 누운 장하리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람이 울리자 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바늘을 뽑았고 또 서주혁의 이마를 닦아주었다.그의 편안히 잠을 자는 모습에 장하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장하리는 옆자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매일 일찍 일어나 옆자리를 비우던 서주혁이 오늘은 여전히 자리에 있었다.잠이 덜 깨 혼미한 상태에서 장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목젖을 더듬어 올라가 이마에 손을 댔다.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기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열이 내린 듯했다.어젯밤 종일 잠에 들지 못했기에 장하리는 열이 내렸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시름을 덜고 잠을 이어 자려 했다.그러나 이때, 그녀의 손이 무언가의 힘에 당겨졌다. 뿌리치려 애써도 덩굴처럼 점점 더 감아왔다.눈살을 찌푸린 채 장하리가 옆을 매섭게 바라보았다.옆으로 누운 서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불 속에서 장하리의 손을 꽉 잡고 깍지 낀 채 말이다.“어젯밤에 내가 기절
서주혁은 안팎으로 조금도 놓치지 않고 장하리의 몸을 훑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침대에서 몸을 뒤섞었고 서주혁이 또다시 시작하려 몸을 움직이자 장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주혁의 뺨을 내리쳤다.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장하리의 몸은 남는 구석이 없었다. 한편, 제대로 화가 치밀어오른 장하리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시간 좀 봐요. 보겸이는 그냥 놔둘 거예요?”부모가 아이도 돌보지 않고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그러나 서주혁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뒤로하고 장하리의 다리를 잡은 채, 일부러 모르쇠를 시전하며 말을 꺼냈다.“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할게, 여보. 응?”장하리는 당장이라도 서주혁을 발로 걷어차서 떨궈놓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장하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렴풋이 잠이 들고 말았다.깨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이윽고 침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서주혁과 서보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보겸은 책을 읽고 있었고 서주혁은 컴퓨터로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던 옷가지들도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방안은 다시 예전의 깨끗한 모양새를 되찾았다.물론 장하리의 몸에도 깨끗한 잠옷이 걸쳐져 있었다. 한편, 옆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바깥 하늘 아래, 크고 작은 두 얼굴이 비쳐 있으니 장하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곧이어 장하리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발견한 서주혁이 컴퓨터를 덮으며 그녀에게 물었다.“깼어? 배는 안 고파?”장하리는 확실히 배가 고팠다. 아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으로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그러자 서주혁은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다주며 말을 이었다.“좀 먹고 다시 자.”장하리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순히 숟가락을 들고 국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옆에 앉아 물끄러미 장하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주혁은 옆에 있는 휴지를 잡아 그녀의 입가를 부드
장하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살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요.”그러나 서주혁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하여 장하리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아니야, 너 화 풀리면 일어날게.”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자포자기한 듯 장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화 풀렸으니까 일어나라고요.”그러자 서주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 장하리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다가 손은 여전히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서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순순히 대답하던 서주혁을 떠올렸다.다시 생각해보니 유치원을 다닐 때 서보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았다.서주혁은 30분 내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직도 시큰거리냐며 물었다.장하리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저 이제 쉬고 싶어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그래, 배고프면 꼭 말해.”서주혁이 말을 마치고 장하리는 다시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저녁은 서주혁과 서보겸 두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보겸은 갑자기 궁금한 듯 서주혁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왜 힘들어요?”서주혁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 지나가던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봐도 서주혁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핑크빛 기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도 미래에 아내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보겸이 넌 아직 너무 어려.”그러자 서보겸은 작은 얼굴을 홱 돌리며 반박했다.“싫어, 알기... 전 일할 거예요.”엉뚱한 아이의 대답에 서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서보겸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보겸아, 아빠가 경험자로서 알려주는데 크면 알기 싫어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너 서율 누나와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아니요, 공부가... 가장 중요해요.”큰일이다. 또 한 명의 워크홀릭이 탄생했다.서주혁은 요리사에게 장하리의 몫까지 남겨달라고 당부한 뒤, 핸드폰을
(산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소년 vs 지적이고 온화한 도시의 누나)당시연이 21살이던 해 집안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며칠 전에 시골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편지에는 황토가 묻어 있어 먼 거리를 건너 그녀 손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당시연은 시골에 친척이 없었기에 당연히 잘못 배달된 편지라고 생각했다.“엄마, 혹시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오산 마을에서 편지가 왔어.”홍영란이 주방에서 나와 손을 닦고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없어. 너희 아빠도 시골에는 친척이 없잖니. 그런데 이 오산 마을, 너 1년 전에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방문했던 곳 아니야?”1년 전 당시연이 대학 3학년일 때 동아리와 함께 오산 마을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른 중학생 한 명을 만나 돈을 조금 남기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로 반년마다 400만 원씩 송금하며 그 아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자동이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아, 기억났어. 그럼 이건 나한테 온 편지가 맞네.”홍영란은 돌아서서 다시 주방으로 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두 달 전에도 이런 편지가 왔는데, 네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렸거든. 아마 네가 지원하던 그 아이가 쓴 편지일 거야. 한 번 읽어봐.”당시연은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었다.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만났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다.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오산 마을이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1년 전에야 도로가 개통되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신발조차 없었다.편지에 적힌 몇 마디는 그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가 아이를 낳았고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연은 짧은 이 문장을 바라보며 소년의 구조 요청이 이 종이에 가득 차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소유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알겠어요. 지금 찾으러 갈게요.”소유진은 전화를 끊고 당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선배님, 성진 선배가 지금 실험실 휴게실에 있어요. 제가 자료를 가져다드릴게요. 괜히 방해했네요.”당시연은 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얕은 수작에 흥미가 없었다. 굳이 그걸 들추지도 않았다.소유진의 눈에는 살짝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도 당시연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방금 그녀가 남긴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걸까? 이미 어제 김성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까지 흘렸는데 말이다.“선배님...”당시연은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소유진의 말소리도 완전히 차단됐다.소유진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눈빛은 차가워졌다.그 사이 당시연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수업이 많지 않아 대부분 실습을 다니느라 바빴다.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어느 학교에서 실습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짐을 정리하다가 당시연은 다시 그 편지를 발견했다.글씨가 매우 예뻤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글씨였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예쁜 글씨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당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그때의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원진이를 후원하던 사람인데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장은 사투리로 대답을 했지만 당시연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진은 성적이 매우 좋았고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그 말은 결국 후원을 계속해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그 편지는 또 어떻게 된 걸까?당시연은 돈이 제대로 원진에게 전달되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다시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편지를 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