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장하리는 여전히 옛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옛 동료들과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남기지 못했었다.한편, 서주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술 한 잔을 들고 다가오더니 장하리를 향해 턱을 까딱하며 물었다.“마중 안 가?”이제 연회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반승제도 이제 성혜인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서 대표가 가만히 있는다고? 설마 오늘 밤 장하리를 혼자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겠지.그러나 서주혁은 고개를 숙인 채 하이볼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행복해 보이는데 조금만 더 내버려 두지 뭐.”서주혁이 나타나는 순간, 장하리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행복한 미소도 곧 사라질 테니까.반승제는 원래 비굴하게 땅을 파고 들어가는 서주혁을 조롱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며 그들 중 오직 서주혁만이 줄곧 정해진 길을 따르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해 왔었다. 마치 미래의 모든 일을 진즉 준비해 놓은 것처럼 서주혁의 계획은 줄곧 철두철미했었다.과거 다들 여색에 빠져 온갖 연애에 정신이 팔렸을 때도 오직 서주혁만이 이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단지 그의 신분에 맞는 여자, 그리고 말을 잘 듣는 여자를 찾아 아내로 맞는 것. 서주혁에게 있어 남녀 사이 사랑의 감정은 줄곧 중요하지 않았다. 하여 타인이 자신의 감정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서주혁의 머릿속은 아마 연구실의 각종 데이터로 가득 찼을 것이다.그랬던 서주혁이 현재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묵묵히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하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반승제는 순간 말을 멈추고 서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곧이어 반승제는 천천히 걸어가 성혜인을 데려갔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장하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갔
“어디가 아픈데요?”“몰라.” 이마가 뜨겁지만 않았어도 장하리는 서주혁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가정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에게 빨리 오라고 당부한 뒤, 먼저 서보겸을 자신의 침실로 데려가 재워주었다.그러나 서주혁이 걱정되어서인지 서보겸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장하리는 서보겸에게 이불을 덮여주며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어 주면 돼. 곧 있으면 의사 선생님도 오실 거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보겸이는 먼저 코 자자. 아이들은 밤을 새우면 안 돼.”서보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앙증맞게 이불 속에 넣었다.장하리는 전에 서보겸을 데리고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전보다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장하리를 만난 후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이다. 지금도 비록 하는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아이가 매우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입구로 가 불을 끈 뒤,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서주혁은 혼자 소파에 기대어 누워있었고 이마는 어느덧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이윽고 장하리가 소파에 앉자 서주혁은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하고 서주혁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아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선 침대로 부축해서 쉬게 하고 수액을 맞으면서 내일 열이 내리는지 천천히 보도록 하죠.”장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와 함께 서주혁을 안방으로 부축했다.곧이어 그녀는 또 몸을 숙여 그의 양복 외투를 벗기고 또 신발을 벗겨주었다.눈치가 빠른 의사는 진즉 등을 돌렸고 장하리는 서주혁의 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그 순간, 서주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여보, 벨트는 왜 풀어?”“아프면 침대에 누워 계세요.”“그런데 나 아직 샤워 안 했어. 몸에서 술 냄새가
답답한 마음에 장하리는 알약을 손에 꼭 쥐고 으름장을 놓았다.“빨리 입 벌리고 약 먹어요.”그러나 서주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 속에서 땀방울이 방울방울 침대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서주혁 씨?”반응이 없었다.장하리도 슬슬 걱정되어 물수건으로 그의 땀을 닦아주며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어요?”그러자 서주혁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여기.”이렇게 보니 서주혁은 서보겸의 모습과 똑 닮았다.더욱 마음이 약해진 장하리는 서보겸의 목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안 먹어.”서주혁은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딘가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서주혁의 모습은 어른을 넘어서 서보겸과 너무 똑같아 보였다.하지만 약은 먹여야 하니 장하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서주혁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정신 차려요. 빨리 약 먹어야죠. 아직도 열나는데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하지만 서주혁은 여전히 입술을 짓이기며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결국, 방법이 없었던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턱을 꼬집고 약을 강제로 먹인 다음 몸을 숙여 입술로 틀어막았다.알약이 그의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흘러내리고 서주혁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하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지 서주혁의 볼은 전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 뒤, 서주혁에게 물을 먹여주기 위해 물 한 잔을 들고 오자 서주혁이 놀란 눈빛으로 장하리에게 말을 건넸다.“선생님, 왜 저한테 뽀뽀해요?”손에 들고 있던 컵이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뭐라고요?”“어떻게 학생한테 뽀뽀해요? 선생님, 이렇게 하면 불법 아닌가요?”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주혁은 정말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
장하리는 시달리다 지친 상태였고 또 30분이 흘러서야 서주혁은 그만두었다.일어나서 정리한 후 몸 구석구석 땀을 모두 닦아준 후에야 하리는 자리에 누웠다.이번에 서주혁은 오히려 얌전해졌고 호흡이 안정되었다.장하리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대어 체온을 확인했다. 열을 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막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손을 거두려는데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여보, 미안해.”“미안…”서주혁이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장하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언제였던지 까마득했다.그동안 두 사람은 어색하게 지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면 장하리는 늘 한발 먼저 눈을 피하곤 했다.“하리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미안해...”그의 입술은 여전히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장하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적셨다.그제야 서주혁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침대에 누운 장하리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람이 울리자 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바늘을 뽑았고 또 서주혁의 이마를 닦아주었다.그의 편안히 잠을 자는 모습에 장하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장하리는 옆자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매일 일찍 일어나 옆자리를 비우던 서주혁이 오늘은 여전히 자리에 있었다.잠이 덜 깨 혼미한 상태에서 장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목젖을 더듬어 올라가 이마에 손을 댔다.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기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열이 내린 듯했다.어젯밤 종일 잠에 들지 못했기에 장하리는 열이 내렸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시름을 덜고 잠을 이어 자려 했다.그러나 이때, 그녀의 손이 무언가의 힘에 당겨졌다. 뿌리치려 애써도 덩굴처럼 점점 더 감아왔다.눈살을 찌푸린 채 장하리가 옆을 매섭게 바라보았다.옆으로 누운 서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불 속에서 장하리의 손을 꽉 잡고 깍지 낀 채 말이다.“어젯밤에 내가 기절
서주혁은 안팎으로 조금도 놓치지 않고 장하리의 몸을 훑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침대에서 몸을 뒤섞었고 서주혁이 또다시 시작하려 몸을 움직이자 장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주혁의 뺨을 내리쳤다.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장하리의 몸은 남는 구석이 없었다. 한편, 제대로 화가 치밀어오른 장하리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시간 좀 봐요. 보겸이는 그냥 놔둘 거예요?”부모가 아이도 돌보지 않고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그러나 서주혁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뒤로하고 장하리의 다리를 잡은 채, 일부러 모르쇠를 시전하며 말을 꺼냈다.“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할게, 여보. 응?”장하리는 당장이라도 서주혁을 발로 걷어차서 떨궈놓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장하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렴풋이 잠이 들고 말았다.깨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이윽고 침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서주혁과 서보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보겸은 책을 읽고 있었고 서주혁은 컴퓨터로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던 옷가지들도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방안은 다시 예전의 깨끗한 모양새를 되찾았다.물론 장하리의 몸에도 깨끗한 잠옷이 걸쳐져 있었다. 한편, 옆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바깥 하늘 아래, 크고 작은 두 얼굴이 비쳐 있으니 장하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곧이어 장하리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발견한 서주혁이 컴퓨터를 덮으며 그녀에게 물었다.“깼어? 배는 안 고파?”장하리는 확실히 배가 고팠다. 아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으로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그러자 서주혁은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다주며 말을 이었다.“좀 먹고 다시 자.”장하리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순히 숟가락을 들고 국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옆에 앉아 물끄러미 장하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주혁은 옆에 있는 휴지를 잡아 그녀의 입가를 부드
장하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살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요.”그러나 서주혁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하여 장하리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아니야, 너 화 풀리면 일어날게.”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자포자기한 듯 장하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화 풀렸으니까 일어나라고요.”그러자 서주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 장하리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다가 손은 여전히 안마를 멈추지 않았다.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서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순순히 대답하던 서주혁을 떠올렸다.다시 생각해보니 유치원을 다닐 때 서보겸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았다.서주혁은 30분 내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아직도 시큰거리냐며 물었다.장하리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저 이제 쉬고 싶어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그래, 배고프면 꼭 말해.”서주혁이 말을 마치고 장하리는 다시금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저녁은 서주혁과 서보겸 두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보겸은 갑자기 궁금한 듯 서주혁에게 물었다.“아빠, 엄마 왜 힘들어요?”서주혁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 지나가던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봐도 서주혁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핑크빛 기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도 미래에 아내가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보겸이 넌 아직 너무 어려.”그러자 서보겸은 작은 얼굴을 홱 돌리며 반박했다.“싫어, 알기... 전 일할 거예요.”엉뚱한 아이의 대답에 서주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서보겸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보겸아, 아빠가 경험자로서 알려주는데 크면 알기 싫어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너 서율 누나와 사귀고 싶다지 않았어?”“아니요, 공부가... 가장 중요해요.”큰일이다. 또 한 명의 워크홀릭이 탄생했다.서주혁은 요리사에게 장하리의 몫까지 남겨달라고 당부한 뒤, 핸드폰을
(산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소년 vs 지적이고 온화한 도시의 누나)당시연이 21살이던 해 집안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며칠 전에 시골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편지에는 황토가 묻어 있어 먼 거리를 건너 그녀 손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당시연은 시골에 친척이 없었기에 당연히 잘못 배달된 편지라고 생각했다.“엄마, 혹시 시골에 아는 사람이 있어? 오산 마을에서 편지가 왔어.”홍영란이 주방에서 나와 손을 닦고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없어. 너희 아빠도 시골에는 친척이 없잖니. 그런데 이 오산 마을, 너 1년 전에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방문했던 곳 아니야?”1년 전 당시연이 대학 3학년일 때 동아리와 함께 오산 마을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른 중학생 한 명을 만나 돈을 조금 남기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로 반년마다 400만 원씩 송금하며 그 아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자동이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언급해 주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아, 기억났어. 그럼 이건 나한테 온 편지가 맞네.”홍영란은 돌아서서 다시 주방으로 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두 달 전에도 이런 편지가 왔는데, 네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렸거든. 아마 네가 지원하던 그 아이가 쓴 편지일 거야. 한 번 읽어봐.”당시연은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었다.편지에 적힌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만났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다.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오산 마을이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1년 전에야 도로가 개통되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신발조차 없었다.편지에 적힌 몇 마디는 그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가 아이를 낳았고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연은 짧은 이 문장을 바라보며 소년의 구조 요청이 이 종이에 가득 차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소유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알겠어요. 지금 찾으러 갈게요.”소유진은 전화를 끊고 당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선배님, 성진 선배가 지금 실험실 휴게실에 있어요. 제가 자료를 가져다드릴게요. 괜히 방해했네요.”당시연은 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얕은 수작에 흥미가 없었다. 굳이 그걸 들추지도 않았다.소유진의 눈에는 살짝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도 당시연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방금 그녀가 남긴 말의 숨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걸까? 이미 어제 김성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까지 흘렸는데 말이다.“선배님...”당시연은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소유진의 말소리도 완전히 차단됐다.소유진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눈빛은 차가워졌다.그 사이 당시연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수업이 많지 않아 대부분 실습을 다니느라 바빴다.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어느 학교에서 실습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짐을 정리하다가 당시연은 다시 그 편지를 발견했다.글씨가 매우 예뻤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글씨였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예쁜 글씨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당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그때의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원진이를 후원하던 사람인데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장은 사투리로 대답을 했지만 당시연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진은 성적이 매우 좋았고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그 말은 결국 후원을 계속해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그 편지는 또 어떻게 된 걸까?당시연은 돈이 제대로 원진에게 전달되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다시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편지를 내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