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너무 오래 울었는지라 서보겸은 서주혁의 말을 들을 겨를도 없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한편, 서주혁은 고요히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서보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후에야 운전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어느덧 보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장하리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게다가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서보겸과 함께하며 아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서주혁이 서보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전방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발견하지 못한 채, 후방의 자동차까지 돌진해 오는 바람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서주혁은 무의식 간에 서보겸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깨진 바람막이 유리 조각이 서주혁의 팔에 꽂히고 붉은 선혈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품속에 안긴 서보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곧이어 서주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여 아들을 확인했다.“보겸아, 괜찮아?”다행히도 서보겸은 꽤 침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서주혁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많이... 아파요?”“아니야, 아빠는 괜찮아. 안 아파.”마침 그때, 서주혁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장하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그러나 서주혁은 손이 끼어있는 탓에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장하리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건 극히 드문 상황이었기에 서주혁은 더욱 초조해졌다.“보겸아, 전화 받아줘.”그의 말대로 서보겸은 몸을 숙여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휴대폰을 주워들고는 전화를 받았다.그런데 같은 시각, 또 한 대의 차가 연이어 부딪치며 엄청난 굉음이 귀를 타고 들려왔다. 연쇄 추돌 교통사고였다. 게다가 그사이에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목소리도 뒤섞여 있었다.“엄마, 사고 났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은 먹통이 되어버렸다.곧이어 구급대원이 도착하고 서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간 멈칫하고 고개를 돌리자 장하리의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팔을 움켜쥔 채, 놀라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서주혁이었다.맨발인 상태에 피까지 줄줄 흐르고 있는 장하리의 모습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어딘가 멍해 보였다.유리 조각이 팔에 찔리고 차에 끼어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던 서주혁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며 마음이 욱신거렸다.“하리야, 왜 그래? 나... 나 무서워. 무슨 일이야?”이윽고 장하리는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더니 갑자기 서주혁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움켜쥐며 캐묻기 시작했다.“보겸이는? 보겸이는 어디 있어요?”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서주혁은 다급히 장하리를 다독여주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보겸이는 멀쩡해.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팽팽하던 기운이 한순간 풀리면서 장하리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서주혁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다급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병원에 데려다줄게.”“됐어요. 보겸이는요? 보겸이 보여줘요.”그러자 서주혁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서보겸은 행인들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었다. 너무나도 예쁘게 생긴 아이가 사고에 휘말렸으니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행인들이 차를 멈춰 세우고 아이를 위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우 놀랐는지 교통사고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서보겸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곧이어 서주혁이 다급히 외쳤다.“보겸아, 이리 와서 엄마한테 얼굴 보여줘.”아직 장하리가 찾아왔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서주혁의 말 한마디에 서보겸은 곧바로 쪼르르 달려왔다.한편, 멀쩡히 뛰어다니는 서보겸의 모습을 본 순간 장하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몸을 숙여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서보겸은 장하리의 품속에서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장하리를 위로하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생각지 못했던 아이의 행동에 눈이 아려오며 펑펑 울고 싶었지만 막상 이 순간에
잠시 후, 세 사람은 나란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의사는 서주혁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그들의 얼굴이 전국 곳곳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원래도 규모가 큰 교통사고인 데다 사진 속에 서주혁의 얼굴도 담겨있으니 사고 뉴스는 진즉 온갖 실검을 뜨겁게 달구었다. 경제 뉴스를 조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주혁의 얼굴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저 사람 서산 그룹 대표 아냐? 대박, 진짜 서산 그룹 대표 맞는 것 같은데? 사진은 누가 찍은 거지? 심하게 다치신 것 같은데.”“나만 저 사람 괜찮다고 생각해? 엄청난 부자인데도 먼저 치료를 받지 않고 현장에서 중상을 입은 환자들을 먼저 보냈잖아. 적어도 직권을 남용하지는 않았다는 거지.”“다들 상처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서 대표 뺨 때린 여자가 궁금한 거야? 뺨을 맞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여자와 키스하잖아. 쯧쯧, 전에 서 대표가 쌀쌀맞다는 사람들 다 어디 갔어? 유언비어를 퍼뜨려도 정도가 있지. 어느 집 대표가 뺨을 맞고도 입술을 들이밀어? 서 대표만큼 사랑꾼인 남자도 없을 거야.”“그럼 저 사람이 서 대표가 집안과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인 거야? 그 옆에 있는 아이는 아들인 건가? 아이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면 영상을 촬영한 사람도 아직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나 보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이도 앞으로 어딜 가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구경하려고 할 거야.”“오 마이 갓, 나 다음 생에는 저 여자로 환생할래. 뺨을 맞고도 여자를 달래주는 남편이라니... 너무 부러운걸.”“어이, 위 댓글 정신 차려. 서주혁의 개인 인터뷰만 봐도 저 사람이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 뻔히 보이는데. 그런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가 정말 일반인일 거라 생각해? 아마 저 여자도 그동안 갖은 고생을 겪었을 거야.”“맞아. 다들 정신 차려. 이런 계급의 남자도 사랑에 빠질 정도라면 저 여자도 그동안 엄청난 유명인이었을 거야. 너희들도
더 이상 설서율의 울부짖음을 참을 수 없었던 반승제는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아이를 놓아주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반승제가 아동학대를 한다며 진즉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반승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설서율은 조금이라도 늦을세라 뒤꽁무니를 빼고 말았다.두 아이가 활발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반승제는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설우현 씨는 아직도 진행 중이래?”오랜만에 가족 단톡방을 열어본 성혜인은 순간 설우현이 오랫동안 메시지를 보냈음을 깨달았다.“아마도요.”이는 확실히 조금 의외였다. 설씨 가문은 워낙 유전자가 훌륭한 데다 성혜인이든 두 오빠든 모두 1등급이라 불릴 정도로 연예인 뺨 치는 외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국내 최고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설우현을 거절하는 여자가 있다고?“그 여자분 혹시 우현 씨 신분 모르는 거 아냐?”“알아요. 하지만 확실히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분은 아닌 것 같아요.”“그러면 설우현의 능력이 마음에 안 드나 보네. 허허, 예전에는 여자들이 몰려들기만을 기다리더니 이젠 여자 한 명 손에 얻겠다고 갖은 고생을 찾아 하네. 쌤통이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혜인의 손바닥이 반승제의 뺨을 스쳤다.물론 화가 난 마음에 진심으로 때리는 것이 아닌 단지 부부 사이의 짓궂은 취미생활일 뿐이었다.반승제도 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내 말 틀렸어?”설우현은 평생 너무 순조로운 삶을 살아왔다. 위에는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형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성혜인 같은 훌륭한 여동생이 있다. 그러니 사실상 설우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어도 훌륭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아마 매일 200억씩 탕진하더라도 설씨 가문의 재산을 다 쓸 수 없을 것이다.물론 설우현에게도 많은 장점이 있다. 그는 대인관계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특히 플로리아의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대인관계가 최상위급이었다.설기웅은 능력이 출중하지만 워낙 사람들과 접촉하는 데 서툴렀고 특히 화려한
“이번에는 잊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나저나 우리 오빠한테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자신의 음침한 속셈을 들킬 수 없었기에 반승제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진율이와 서율이 보러 올 시간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진열이 우현 씨 좋아하잖아. 전에는 진율이도 우현 씨 따라 배워서 바람둥이가 될까 걱정했는데 우리 진율이 다행히도 그쪽이 아니라 울보로 자라서 참 다행이야.”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성혜인은 순간 그의 말투 속에서 약간의 우쭐함을 느낄 수 있었다.“반승제 씨, 괜한 생각하지 마요. 우리 오빠 정말 크게 상심한 것 같은데.”“알았어. 네 오빠면 내 형이기도 하지.”그렇다고?그런데 왜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지?*같은 시각, 장하리는 의사가 서주혁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게 되었다.유리 조각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가 뼈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고 서주혁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휴지를 가져다가 건네주었다.이윽고 서주혁이 고개를 들어 장하리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은 어느덧 창백하게 질려 핏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네가 닦아줘.”지금 만큼은 장하리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들어 서주혁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장하리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다 보니 서주혁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 났다. 시간이 영원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현재의 장하리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아껴주고 있다.땀을 다 닦아주니 의사의 처치도 거의 끝나 갔다.오른팔을 다쳤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는 조금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서주혁은 병원에서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특별히 의사에게 물었다.“선생님, 저 집에 돌아가서 요양해도 괜찮을까요?”“네, 하지만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꼭 주의하시고 약도 제때 갈아줘야 합니다.”고개를 끄덕이고 서주혁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장하리의 선택은 전부 아이 때문이라는 것은 서주혁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장하리가 그의 곁을 선택해준 것만으로도 서주혁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서주혁은 장하리의 마음이 여리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마침 비열하게 그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주혁은 정말 장하리를 떠나 살 수가 없다. 막상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혀왔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아이는 그가 가진 모든 카드였다. 하여 서주혁은 일부러 매일 서보겸을 데려와 장하리와 함께 지내도록 전략을 짠 것이다.그는 알고 있다. 서보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게다가 장하리는 서보겸의 친엄마이다.다른 사람들도 아이를 보면 귀엽다고 기뻐하는데 하물며 가장 가까운 혈육인 장하리가 어찌 아이를 저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지난 한 달 동안, 장하리는 정말 서주혁의 계획대로 서보겸과 점점 더 가까워졌고 게다가 오늘 발생한 교통사고가 가져다준 충격으로 장하리는 진심으로 두려웠다.자신의 섣부른 결정으로 한 가족이 산산조각이 나는 건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한편, 서주혁은 장하리를 품에 꼭 껴안은 채 마음속으로는 오늘의 교통사고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과거 신예준 그 미친놈처럼 스스로 사고를 만들어 장하리를 몰아붙일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러기에 서주혁은 너무 두려웠다. 장하리가 그의 생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까 하고 두려웠다.서주혁이 장하리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하기에 장하리가 서주혁 때문에 결정을 번복하겠는가. 오늘날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모두 서주혁이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본 것을 봐서였다.서주혁은 감히 도박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서보겸을 희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주혁은 서보겸을 사랑한다. 아이를 내세워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 건 서주혁도 원하지 않았다.이번 교통사고는 서주혁이 계획한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교통사고로 인해 모든 것이 서주혁의 계획대로, 그리고 좋은 방향으로 잘 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며 서주혁은 밤중마다 저도 모르게 상처가 생겼던 부위를 긁고 싶어 이리저리 뒤척였다.서보겸은 두 사람 사이에 누워 잠을 청했고 장하리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툭 내뱉었다.“자꾸만 움직이면 보겸이 깨어날 거예요.”서주혁은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결국 입맛을 다시며 묵묵히 응할 수 밖에 없었다.한편, 서보겸은 침대에 누운 채, 단잠에 빠져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기운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또 한 달이 지나고 장하리는 서보겸을 데리고 제원의 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이는 원래의 신분으로 복귀한 후 참여하는 첫 공식적인 파티였다.서주혁은 한 무리의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한편, 장하리는 성혜인과 강민지와 번갈아 수다를 떨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행히도 그녀는 과거와 달리 많이 밝아졌다. 비록 서주혁에게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서주혁은 장하리가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개무량했다.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마음의 고통은 결국 인과응보인 셈이다.이를 잘 알고 있기에 서주혁은 장하리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그녀를 훔쳐볼 뿐이었다.한편, 친구들과의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그들의 남자친구가 다가왔다.유해은은 백현문에게 끌려갔는데 유해은이 아무리 짜증을 내며 그를 밀어내도 백현문은 여전히 접착제마냥 그녀에게 들러붙으며 멀어지려 하지 않았다.“유해은, 이제 그만해라. 아직도 스캔들이 부족해? 오늘 밤도 난 분명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바람을 당한 기분이 들더라고.”한편, 유해은은 최근에 큰 상을 받게 되어 기분이 좋은지라 일부러 손끝으로 백현문의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안 당하면 되지.”유해은의 말에 백현문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다른 한쪽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끝이 움찔하고 움츠러들었다.“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그럼 무슨 뜻인데? 당신 말은 내가 허구한 날 남자들 꼬
같은 시각,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장하리는 여전히 옛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옛 동료들과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남기지 못했었다.한편, 서주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하리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술 한 잔을 들고 다가오더니 장하리를 향해 턱을 까딱하며 물었다.“마중 안 가?”이제 연회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반승제도 이제 성혜인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서 대표가 가만히 있는다고? 설마 오늘 밤 장하리를 혼자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겠지.그러나 서주혁은 고개를 숙인 채 하이볼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행복해 보이는데 조금만 더 내버려 두지 뭐.”서주혁이 나타나는 순간, 장하리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행복한 미소도 곧 사라질 테니까.반승제는 원래 비굴하게 땅을 파고 들어가는 서주혁을 조롱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며 그들 중 오직 서주혁만이 줄곧 정해진 길을 따르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해 왔었다. 마치 미래의 모든 일을 진즉 준비해 놓은 것처럼 서주혁의 계획은 줄곧 철두철미했었다.과거 다들 여색에 빠져 온갖 연애에 정신이 팔렸을 때도 오직 서주혁만이 이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단지 그의 신분에 맞는 여자, 그리고 말을 잘 듣는 여자를 찾아 아내로 맞는 것. 서주혁에게 있어 남녀 사이 사랑의 감정은 줄곧 중요하지 않았다. 하여 타인이 자신의 감정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서주혁의 머릿속은 아마 연구실의 각종 데이터로 가득 찼을 것이다.그랬던 서주혁이 현재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묵묵히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하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반승제는 순간 말을 멈추고 서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곧이어 반승제는 천천히 걸어가 성혜인을 데려갔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장하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갔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