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원래 챙겨 온 물건이 많지 않아 정리할 것도 없었다.10분쯤 지나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의 모든 가사 도우미들은 이미 주의를 받은 상태였기에 그녀를 보자 눈에 띄는 감정 없이 그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때 비서가 장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장하리 씨, 저택 주변에 다양한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요. 두 달 동안 이곳에 머무르시게 될 텐데, 외출할 계획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차량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저택에서 정문까지 가는 데만도 차로 10여 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비서의 말은 곧 이 두 달 동안 가능한 한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장하리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서보겸을 돌보기 위해 온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밖에 나가지 않을게요.”비서는 그녀의 의사를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혹시나 그녀가 외출해서 아는 사람을 만나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서주혁은 강성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많은 회의를 뒤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일찍 비서와 함께 회사로 나갔다.그가 떠나고 장하리는 서보겸과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때 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서주혁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문을 열러 나갔다.그러나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명희정이었다.명희정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장하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장하리?”장하리는 그 여자가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잠시 멈칫했다.명희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그녀의 뺨을 올려붙이며 소리쳤다.“뭐야, 너! 죽은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일부러 주혁이가 너를 못 잊게 하려고 그런 쇼를 한 거였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해서 주혁이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려 했던 거였어! 정말 교묘하게 꾸민 수작이네. 하지만 이 집에 네가 발 들일 일은 없을 거야! 절대
명희정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곧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 사이 방 안에서는 장하리가 뺨 맞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금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그 얼굴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인상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사라져 버렸다.장하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서보겸은 여전히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그녀가 틀어 놓은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서보겸은 그녀의 뺨에 남은 손자국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눈가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곧바로 분노 그리고 이내 진지함으로 바뀌었다.아이의 눈에서 이렇게나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처음 본 장하리는 마음이 뿌듯해졌다.그러나 다음 순간, 서보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누가 때렸어요?”장하리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포근해졌다. 곧바로 서보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우리 울보, 울지 마. 나도 누군지 잘 몰라. 아마 네 아빠 손님이겠지. 나중에 아빠가 오면 선생님이 잘 얘기할게. 괜히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닌지 모르겠네.”서보겸은 장하리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럴 리 없어요.”장하리는 감격에 겨워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는 비록 자폐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서주혁의 말이 옳았다. 서보겸은 확실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또한 짧은 시간 동안 서보겸의 감정이 이렇게 다양해진 것도 명희정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시큰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해졌다.“그래. 그럼 아빠가 선생님한테 뭐라 하면 보겸이가 선생님 편을 들어줘야 해.”서보겸은 눈을 내리깔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장하리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소소한 억울함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자, 이리 와. 보겸아
서주혁이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명희정이 눈에 들어왔다.명희정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장하리가 왜 네 별장에 있는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주혁의 눈가에 살벌한 기운이 스쳤다.“어머니, 장하리에게 가서 문제를 일으키셨어요?”명희정은 아들을 질책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태도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에 이런 감정이 떠오른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서주혁은 반승제, 온시환과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렸다. 그들 모두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를 겪었지만 서주혁만은 늘 규칙을 잘 따랐다. 그래서인지 명희정은 그가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니? 그 여자가 내 뺨을 때렸다고! 난 네 엄마야. 그런데 그 여자가 감히 나를 때렸어! 게다가 우리 모두 그 여자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건 분명 널 휘두르려는 수작이잖아! 주혁아, 난 그 여자가 절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주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다시는 장하리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명희정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2분 정도 지나고서야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저도 장하리가 어머니를 마주할 일이 없도록 할 거예요. 장하리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셔도 상관없어요. 전 이미 4년 전에 허락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혼인 신고도 되어 있으니 본래 부부입니다.”명희정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아들이 이렇게까지 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주혁아, 넌 4년 전에 일어난 일을 의심해 보지도 않는 거니? 그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수상하지 않아? 넌 지금 완전히 그 여자의 농간에 넘어간 거야.”“어머니.”서주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제 앞에서 더는 장하리에 대해 막말하지 마세요. 전 두 번 다시 그 여자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무
장하리는 조금 의외였다. 사실 장하리는 오후 내내 두려움과 당황함에 휩싸여 있었다. 어쨌든 서주혁의 집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면 귀한 손님일 테니까.실수로 큰 인물에게 미움을 사서 서주혁도 덩달아 난처해지면 큰일이다.하물며 이 집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 그러면 서주혁이 어찌 그녀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겠는가?그런데 서주혁이 이렇게 말해주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며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났다.서주혁은 손끝으로 장하리의 볼에 남겨진 자국을 어루만져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찜질은 했어요?”“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중요한 손님일까 봐...”“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자신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그 말에 장하리의 마음은 더욱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감격에 겨워 막,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서주혁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씨 집안에서 걸려온 전화 같았다.반갑지 않은 발신자에 서주혁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장하리의 턱을 놓아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입니까?”“주혁아, 수연이가 돌아왔어. 그러니 저녁에 보겸이 데리고 와서 밥 먹어.”“됐어요. 보겸이는 가고 싶지 않대요.”“너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니? 정말 우리한테 보겸이 평생 안 보여줄 거야?”“어머니, 제가 말했잖아요. 보겸이와 그 여자와 관련된 일은 더 이상 저와 상의하지 말라고.”서주혁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눈 밑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게다가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장하리는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통화내용을 듣고서야 서주혁이 가족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말투를 들어보니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건 결국 서주혁의 사생활이라 먼저 묻기도 어려운 화제였다.저녁에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할 때, 장하리는 식탁 위에 놓인 과일주 한 병을 보며 슬며시 물었다.“이거 술이에요?”그러자 서주혁은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담담하
사내대장부가 미모라니. 이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서주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장하리의 한쪽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며 물었다.“만지고 싶어요?”그러자 장하리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주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자신에게 닥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하다.“그래도 돼요?” 입으로는 이렇게 물었지만 손은 이미 서주혁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남자는 피부도 좋았다. 게다가 골격도 그의 미모에 맞게 훌륭했다.이윽고 손가락이 미끄러져 서주혁의 목젖을 눌러버렸다.그 순간, 서주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하더니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과 서주혁의 그윽한 눈빛 속에서 그녀를 유혹하려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다른 곳도 만져볼 수 있는데.”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리는 마치 먼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찌른 것마냥 끝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그저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점점 빠져들고 점점 좋아졌다.한편, 서주혁은 장하리의 부드러운 손길에 온몸이 팽팽하게 굳어버렸다.술에 취한 사람은 이성을 잃은 상태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머릿속의 아주 작은 기억의 본능만을 따를 뿐이었다.그녀는 10분 동안 서주혁의 얼굴을 가지고 놀다가 갑자기 그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나 목말라요.”그것은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조동이기 때문에 장하리는 점점 그 건조함 속에서 목이 말라진 것이다.그 순간, 서주혁은 장하리의 뒤통수를 감싼 채 사람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이고 바로 키스를 퍼부었다.30분 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야 서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아직도 목이 말라요?”“아니요. 기분 좋아요.”서주혁의 호흡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아무리 애가 타도 정말 장하리를 건드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지난번처럼 장하리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었지만 결국 괴로운 건 서주혁 본인이었다.이윽고 서주혁은 장하리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아랫도리에 올려놓았다.하
서주혁은 눈을 들어 몇 초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좀 쉬세요. 보겸이도 이렇게 컸으니 계속 같이 있을 필요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래도 제 일인데 같이 좀 다녀올게요. 아이들은 놀이터를 좋아할 거예요.”“괜찮아요.”“그럼 보겸이 이미 다녀왔어요?”“아니요.”“그런데 왜...”“장하리 씨.”서주혁은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목소리는 더욱 쉬어 있었다.“별장에 가만히 있어요. 심심하면 보겸이와 아리 데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되고요. 별장이 너무 커서 하리 씨도 아직 다 보지 못한 풍경이 많을 거예요.”장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의 말투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을 눈치챘다. 마치 무슨 비밀을 짊어지기라도 한 듯...하지만 장하리는 쉽사리 추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 온 첫날, 비서가 전한 의사를 보아도 그들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장하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서주혁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서주혁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고 그 후 두 달 동안의 회의 역시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수정해야 할 서류도 전부 거실에 두었다.그리고 보겸이와 노는 것도 전부 서주혁의 눈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서주혁과 같은 회사 대표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서주혁은 거의 한 주일 내내 별장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일주일 후, 서주혁은 반승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나 지금 네 회사에 있는데 관리층 말을 들어보니 일주일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파?”반승제는 서주혁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손에는 두 사람의 최근 합작 프로젝트에 필요한 서류를 들고 있었다.오늘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갈 일이 생겨 서류를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게다가 서주혁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도 있고...“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 하고 있는데?”“출장 중이야.”그 말에 반
성혜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펑펑 눈물을 흘리는 반진율에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반진율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반진율의 얼굴은 정말 반승제와 똑 닮았다.“그래그래, 넌 충분히 남자다워. 그러니까 울지 마. 응?”“끅, 흑흑흑, 끅.”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반승제는 손을 내밀어 반진율의 뒤 깃을 잡고는 아이를 한 손에 들어 올렸다.“너 남자다운 사내가 이렇게 우는 거 본 적 있어?”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 반진율은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아, 이거 놔주세요. 아빠! 이거 놓으세요, 흑흑.”반승제는 아이를 대롱대롱 들고 소파 옆으로 다가와 그를 소파 위에 내동댕이쳐버렸다.그러자 반진율은 푹신한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성혜인도 아이의 곁으로 다가와 무심코 입을 열었다.“오늘 민지가 집에 온다는데 듣기로는 다온이도 데리고 온다면서?”다온이는 강민지와 신예준의 아이로서 예쁜 여자아이이다.그 말을 들은 반진율은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다급히 양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벅벅 지우기 시작했다.“저녁 먹으러 오나요?”“응, 그리고 예준 아저씨도 같이.”그러자 반진율은 기대가 가득 찬 모습으로 소파에 손가락을 대고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반진율을 속인 건 아니었다. 오늘 밤 확실히 강민지네 가족과 모이기로 약속했다.잠시 후, 일찍 도착한 신예준은 익숙하게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최근 몇 년 동안 회식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그가 요리사를 도맡았다.반진율은 귀한 양복을 벗고 고개를 숙여 채소를 고르는 신예준의 모습을 보며 존경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신예준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신예준은 피식 웃으며 반진율의 뺨을 부드럽게 꼬집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전 다온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돼요.”그러자 밖에 서 있던 설서율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부엌문을 열어버렸다.
성혜인은 반승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전화했어요? 뭐라 하던가요?”“아무 말도 안 했어.”그러자 성혜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장하리가 떠난 지도 어언 4년이 넘었다. 물론 서주혁이 새로운 여자를 찾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이 편치 않을 뿐...서보겸은 장하리가 목숨을 다 바쳐 낳은 아이인데 다른 여자가 과연 장하리처럼 아이를 예뻐해 줄 수 있을까?게다가 서보겸은 자폐증을 앓고 있어 회식할 때에도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의 애정도 전부 서보겸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주혁 측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서주혁 씨, 오늘 저녁 네이처 빌리지에 식사하러 오시겠어요? 신예준 씨도 불렀는데.”“안 갑니다.”“승제 씨가 말하기로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다면서요. 뭐가 그렇게 바빠요?”“보겸이에게 책 읽어주느라요.”그 말에 성혜인이 실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마침 저도 보겸이 보고 싶은데 저녁에 서율이 데리고 보겸이 보러 갈게요.”“안 그래도 됩니다.”서보겸은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지만 반대로 설서율은 시끄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아이였다. 하여 그녀가 서보겸을 에워싸고 계속하여 말을 걸다 보면 서보겸도 몇 마디 답해주곤 한다.예전 같으면 서주혁은 설서율이 그의 집에 가는 것을 매우 환영했을 텐데 지금은 단칼에 거절했다고?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성혜인이 전화를 끊자 마침 강민지가 다온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이윽고 다온이가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아저씨, 안녕하세요.”다온이의 목소리는 마음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아이는 설서율과 반진율에게도 고개를 끄덕인 뒤, 신예준을 찾으러 부엌으로 달려갔다.“아빠.”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신예준은 곧바로 장갑을 벗고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물건은 다 샀어? 엄마는? 오늘 기분 좋으셔?”“좋아요. 오늘은 아빠 칭찬도 했어요.”그 말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