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원래 챙겨 온 물건이 많지 않아 정리할 것도 없었다.10분쯤 지나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의 모든 가사 도우미들은 이미 주의를 받은 상태였기에 그녀를 보자 눈에 띄는 감정 없이 그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때 비서가 장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장하리 씨, 저택 주변에 다양한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요. 두 달 동안 이곳에 머무르시게 될 텐데, 외출할 계획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차량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저택에서 정문까지 가는 데만도 차로 10여 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비서의 말은 곧 이 두 달 동안 가능한 한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장하리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서보겸을 돌보기 위해 온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밖에 나가지 않을게요.”비서는 그녀의 의사를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혹시나 그녀가 외출해서 아는 사람을 만나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서주혁은 강성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많은 회의를 뒤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일찍 비서와 함께 회사로 나갔다.그가 떠나고 장하리는 서보겸과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때 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서주혁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문을 열러 나갔다.그러나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명희정이었다.명희정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장하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장하리?”장하리는 그 여자가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잠시 멈칫했다.명희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그녀의 뺨을 올려붙이며 소리쳤다.“뭐야, 너! 죽은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일부러 주혁이가 너를 못 잊게 하려고 그런 쇼를 한 거였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해서 주혁이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려 했던 거였어! 정말 교묘하게 꾸민 수작이네. 하지만 이 집에 네가 발 들일 일은 없을 거야! 절대
명희정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곧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 사이 방 안에서는 장하리가 뺨 맞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금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그 얼굴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인상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사라져 버렸다.장하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서보겸은 여전히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그녀가 틀어 놓은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서보겸은 그녀의 뺨에 남은 손자국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눈가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곧바로 분노 그리고 이내 진지함으로 바뀌었다.아이의 눈에서 이렇게나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처음 본 장하리는 마음이 뿌듯해졌다.그러나 다음 순간, 서보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누가 때렸어요?”장하리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포근해졌다. 곧바로 서보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우리 울보, 울지 마. 나도 누군지 잘 몰라. 아마 네 아빠 손님이겠지. 나중에 아빠가 오면 선생님이 잘 얘기할게. 괜히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닌지 모르겠네.”서보겸은 장하리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럴 리 없어요.”장하리는 감격에 겨워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는 비록 자폐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서주혁의 말이 옳았다. 서보겸은 확실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또한 짧은 시간 동안 서보겸의 감정이 이렇게 다양해진 것도 명희정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시큰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해졌다.“그래. 그럼 아빠가 선생님한테 뭐라 하면 보겸이가 선생님 편을 들어줘야 해.”서보겸은 눈을 내리깔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장하리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소소한 억울함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자, 이리 와. 보겸아
서주혁이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명희정이 눈에 들어왔다.명희정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장하리가 왜 네 별장에 있는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주혁의 눈가에 살벌한 기운이 스쳤다.“어머니, 장하리에게 가서 문제를 일으키셨어요?”명희정은 아들을 질책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태도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에 이런 감정이 떠오른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서주혁은 반승제, 온시환과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렸다. 그들 모두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를 겪었지만 서주혁만은 늘 규칙을 잘 따랐다. 그래서인지 명희정은 그가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니? 그 여자가 내 뺨을 때렸다고! 난 네 엄마야. 그런데 그 여자가 감히 나를 때렸어! 게다가 우리 모두 그 여자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건 분명 널 휘두르려는 수작이잖아! 주혁아, 난 그 여자가 절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주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다시는 장하리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명희정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2분 정도 지나고서야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저도 장하리가 어머니를 마주할 일이 없도록 할 거예요. 장하리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셔도 상관없어요. 전 이미 4년 전에 허락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혼인 신고도 되어 있으니 본래 부부입니다.”명희정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아들이 이렇게까지 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주혁아, 넌 4년 전에 일어난 일을 의심해 보지도 않는 거니? 그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수상하지 않아? 넌 지금 완전히 그 여자의 농간에 넘어간 거야.”“어머니.”서주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제 앞에서 더는 장하리에 대해 막말하지 마세요. 전 두 번 다시 그 여자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무
장하리는 조금 의외였다. 사실 장하리는 오후 내내 두려움과 당황함에 휩싸여 있었다. 어쨌든 서주혁의 집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면 귀한 손님일 테니까.실수로 큰 인물에게 미움을 사서 서주혁도 덩달아 난처해지면 큰일이다.하물며 이 집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 그러면 서주혁이 어찌 그녀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겠는가?그런데 서주혁이 이렇게 말해주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며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났다.서주혁은 손끝으로 장하리의 볼에 남겨진 자국을 어루만져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찜질은 했어요?”“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중요한 손님일까 봐...”“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자신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그 말에 장하리의 마음은 더욱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감격에 겨워 막,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서주혁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씨 집안에서 걸려온 전화 같았다.반갑지 않은 발신자에 서주혁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장하리의 턱을 놓아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입니까?”“주혁아, 수연이가 돌아왔어. 그러니 저녁에 보겸이 데리고 와서 밥 먹어.”“됐어요. 보겸이는 가고 싶지 않대요.”“너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니? 정말 우리한테 보겸이 평생 안 보여줄 거야?”“어머니, 제가 말했잖아요. 보겸이와 그 여자와 관련된 일은 더 이상 저와 상의하지 말라고.”서주혁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눈 밑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게다가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장하리는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통화내용을 듣고서야 서주혁이 가족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말투를 들어보니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건 결국 서주혁의 사생활이라 먼저 묻기도 어려운 화제였다.저녁에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할 때, 장하리는 식탁 위에 놓인 과일주 한 병을 보며 슬며시 물었다.“이거 술이에요?”그러자 서주혁은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담담하
사내대장부가 미모라니. 이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서주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장하리의 한쪽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며 물었다.“만지고 싶어요?”그러자 장하리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주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자신에게 닥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하다.“그래도 돼요?” 입으로는 이렇게 물었지만 손은 이미 서주혁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남자는 피부도 좋았다. 게다가 골격도 그의 미모에 맞게 훌륭했다.이윽고 손가락이 미끄러져 서주혁의 목젖을 눌러버렸다.그 순간, 서주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하더니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과 서주혁의 그윽한 눈빛 속에서 그녀를 유혹하려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다른 곳도 만져볼 수 있는데.”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리는 마치 먼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찌른 것마냥 끝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그저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점점 빠져들고 점점 좋아졌다.한편, 서주혁은 장하리의 부드러운 손길에 온몸이 팽팽하게 굳어버렸다.술에 취한 사람은 이성을 잃은 상태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머릿속의 아주 작은 기억의 본능만을 따를 뿐이었다.그녀는 10분 동안 서주혁의 얼굴을 가지고 놀다가 갑자기 그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나 목말라요.”그것은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조동이기 때문에 장하리는 점점 그 건조함 속에서 목이 말라진 것이다.그 순간, 서주혁은 장하리의 뒤통수를 감싼 채 사람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이고 바로 키스를 퍼부었다.30분 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야 서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아직도 목이 말라요?”“아니요. 기분 좋아요.”서주혁의 호흡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아무리 애가 타도 정말 장하리를 건드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지난번처럼 장하리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었지만 결국 괴로운 건 서주혁 본인이었다.이윽고 서주혁은 장하리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아랫도리에 올려놓았다.하
서주혁은 눈을 들어 몇 초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좀 쉬세요. 보겸이도 이렇게 컸으니 계속 같이 있을 필요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래도 제 일인데 같이 좀 다녀올게요. 아이들은 놀이터를 좋아할 거예요.”“괜찮아요.”“그럼 보겸이 이미 다녀왔어요?”“아니요.”“그런데 왜...”“장하리 씨.”서주혁은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목소리는 더욱 쉬어 있었다.“별장에 가만히 있어요. 심심하면 보겸이와 아리 데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되고요. 별장이 너무 커서 하리 씨도 아직 다 보지 못한 풍경이 많을 거예요.”장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의 말투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을 눈치챘다. 마치 무슨 비밀을 짊어지기라도 한 듯...하지만 장하리는 쉽사리 추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 온 첫날, 비서가 전한 의사를 보아도 그들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장하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서주혁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서주혁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고 그 후 두 달 동안의 회의 역시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수정해야 할 서류도 전부 거실에 두었다.그리고 보겸이와 노는 것도 전부 서주혁의 눈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서주혁과 같은 회사 대표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서주혁은 거의 한 주일 내내 별장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일주일 후, 서주혁은 반승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나 지금 네 회사에 있는데 관리층 말을 들어보니 일주일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파?”반승제는 서주혁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손에는 두 사람의 최근 합작 프로젝트에 필요한 서류를 들고 있었다.오늘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갈 일이 생겨 서류를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게다가 서주혁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도 있고...“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 하고 있는데?”“출장 중이야.”그 말에 반
성혜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펑펑 눈물을 흘리는 반진율에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반진율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반진율의 얼굴은 정말 반승제와 똑 닮았다.“그래그래, 넌 충분히 남자다워. 그러니까 울지 마. 응?”“끅, 흑흑흑, 끅.”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반승제는 손을 내밀어 반진율의 뒤 깃을 잡고는 아이를 한 손에 들어 올렸다.“너 남자다운 사내가 이렇게 우는 거 본 적 있어?”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 반진율은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아, 이거 놔주세요. 아빠! 이거 놓으세요, 흑흑.”반승제는 아이를 대롱대롱 들고 소파 옆으로 다가와 그를 소파 위에 내동댕이쳐버렸다.그러자 반진율은 푹신한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성혜인도 아이의 곁으로 다가와 무심코 입을 열었다.“오늘 민지가 집에 온다는데 듣기로는 다온이도 데리고 온다면서?”다온이는 강민지와 신예준의 아이로서 예쁜 여자아이이다.그 말을 들은 반진율은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다급히 양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벅벅 지우기 시작했다.“저녁 먹으러 오나요?”“응, 그리고 예준 아저씨도 같이.”그러자 반진율은 기대가 가득 찬 모습으로 소파에 손가락을 대고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반진율을 속인 건 아니었다. 오늘 밤 확실히 강민지네 가족과 모이기로 약속했다.잠시 후, 일찍 도착한 신예준은 익숙하게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최근 몇 년 동안 회식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그가 요리사를 도맡았다.반진율은 귀한 양복을 벗고 고개를 숙여 채소를 고르는 신예준의 모습을 보며 존경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신예준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신예준은 피식 웃으며 반진율의 뺨을 부드럽게 꼬집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전 다온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돼요.”그러자 밖에 서 있던 설서율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부엌문을 열어버렸다.
성혜인은 반승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전화했어요? 뭐라 하던가요?”“아무 말도 안 했어.”그러자 성혜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장하리가 떠난 지도 어언 4년이 넘었다. 물론 서주혁이 새로운 여자를 찾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이 편치 않을 뿐...서보겸은 장하리가 목숨을 다 바쳐 낳은 아이인데 다른 여자가 과연 장하리처럼 아이를 예뻐해 줄 수 있을까?게다가 서보겸은 자폐증을 앓고 있어 회식할 때에도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의 애정도 전부 서보겸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주혁 측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서주혁 씨, 오늘 저녁 네이처 빌리지에 식사하러 오시겠어요? 신예준 씨도 불렀는데.”“안 갑니다.”“승제 씨가 말하기로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다면서요. 뭐가 그렇게 바빠요?”“보겸이에게 책 읽어주느라요.”그 말에 성혜인이 실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마침 저도 보겸이 보고 싶은데 저녁에 서율이 데리고 보겸이 보러 갈게요.”“안 그래도 됩니다.”서보겸은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지만 반대로 설서율은 시끄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아이였다. 하여 그녀가 서보겸을 에워싸고 계속하여 말을 걸다 보면 서보겸도 몇 마디 답해주곤 한다.예전 같으면 서주혁은 설서율이 그의 집에 가는 것을 매우 환영했을 텐데 지금은 단칼에 거절했다고?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성혜인이 전화를 끊자 마침 강민지가 다온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이윽고 다온이가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아저씨, 안녕하세요.”다온이의 목소리는 마음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아이는 설서율과 반진율에게도 고개를 끄덕인 뒤, 신예준을 찾으러 부엌으로 달려갔다.“아빠.”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신예준은 곧바로 장갑을 벗고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물건은 다 샀어? 엄마는? 오늘 기분 좋으셔?”“좋아요. 오늘은 아빠 칭찬도 했어요.”그 말에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