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혁은 눈을 들어 몇 초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좀 쉬세요. 보겸이도 이렇게 컸으니 계속 같이 있을 필요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래도 제 일인데 같이 좀 다녀올게요. 아이들은 놀이터를 좋아할 거예요.”“괜찮아요.”“그럼 보겸이 이미 다녀왔어요?”“아니요.”“그런데 왜...”“장하리 씨.”서주혁은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목소리는 더욱 쉬어 있었다.“별장에 가만히 있어요. 심심하면 보겸이와 아리 데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되고요. 별장이 너무 커서 하리 씨도 아직 다 보지 못한 풍경이 많을 거예요.”장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의 말투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을 눈치챘다. 마치 무슨 비밀을 짊어지기라도 한 듯...하지만 장하리는 쉽사리 추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 온 첫날, 비서가 전한 의사를 보아도 그들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장하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서주혁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서주혁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고 그 후 두 달 동안의 회의 역시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수정해야 할 서류도 전부 거실에 두었다.그리고 보겸이와 노는 것도 전부 서주혁의 눈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서주혁과 같은 회사 대표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서주혁은 거의 한 주일 내내 별장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일주일 후, 서주혁은 반승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나 지금 네 회사에 있는데 관리층 말을 들어보니 일주일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파?”반승제는 서주혁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손에는 두 사람의 최근 합작 프로젝트에 필요한 서류를 들고 있었다.오늘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갈 일이 생겨 서류를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게다가 서주혁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도 있고...“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 하고 있는데?”“출장 중이야.”그 말에 반
성혜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펑펑 눈물을 흘리는 반진율에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반진율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반진율의 얼굴은 정말 반승제와 똑 닮았다.“그래그래, 넌 충분히 남자다워. 그러니까 울지 마. 응?”“끅, 흑흑흑, 끅.”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반승제는 손을 내밀어 반진율의 뒤 깃을 잡고는 아이를 한 손에 들어 올렸다.“너 남자다운 사내가 이렇게 우는 거 본 적 있어?”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 반진율은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아, 이거 놔주세요. 아빠! 이거 놓으세요, 흑흑.”반승제는 아이를 대롱대롱 들고 소파 옆으로 다가와 그를 소파 위에 내동댕이쳐버렸다.그러자 반진율은 푹신한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성혜인도 아이의 곁으로 다가와 무심코 입을 열었다.“오늘 민지가 집에 온다는데 듣기로는 다온이도 데리고 온다면서?”다온이는 강민지와 신예준의 아이로서 예쁜 여자아이이다.그 말을 들은 반진율은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다급히 양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벅벅 지우기 시작했다.“저녁 먹으러 오나요?”“응, 그리고 예준 아저씨도 같이.”그러자 반진율은 기대가 가득 찬 모습으로 소파에 손가락을 대고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반진율을 속인 건 아니었다. 오늘 밤 확실히 강민지네 가족과 모이기로 약속했다.잠시 후, 일찍 도착한 신예준은 익숙하게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최근 몇 년 동안 회식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그가 요리사를 도맡았다.반진율은 귀한 양복을 벗고 고개를 숙여 채소를 고르는 신예준의 모습을 보며 존경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신예준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신예준은 피식 웃으며 반진율의 뺨을 부드럽게 꼬집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전 다온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돼요.”그러자 밖에 서 있던 설서율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부엌문을 열어버렸다.
성혜인은 반승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전화했어요? 뭐라 하던가요?”“아무 말도 안 했어.”그러자 성혜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장하리가 떠난 지도 어언 4년이 넘었다. 물론 서주혁이 새로운 여자를 찾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이 편치 않을 뿐...서보겸은 장하리가 목숨을 다 바쳐 낳은 아이인데 다른 여자가 과연 장하리처럼 아이를 예뻐해 줄 수 있을까?게다가 서보겸은 자폐증을 앓고 있어 회식할 때에도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의 애정도 전부 서보겸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주혁 측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서주혁 씨, 오늘 저녁 네이처 빌리지에 식사하러 오시겠어요? 신예준 씨도 불렀는데.”“안 갑니다.”“승제 씨가 말하기로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다면서요. 뭐가 그렇게 바빠요?”“보겸이에게 책 읽어주느라요.”그 말에 성혜인이 실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마침 저도 보겸이 보고 싶은데 저녁에 서율이 데리고 보겸이 보러 갈게요.”“안 그래도 됩니다.”서보겸은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지만 반대로 설서율은 시끄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아이였다. 하여 그녀가 서보겸을 에워싸고 계속하여 말을 걸다 보면 서보겸도 몇 마디 답해주곤 한다.예전 같으면 서주혁은 설서율이 그의 집에 가는 것을 매우 환영했을 텐데 지금은 단칼에 거절했다고?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성혜인이 전화를 끊자 마침 강민지가 다온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이윽고 다온이가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아저씨, 안녕하세요.”다온이의 목소리는 마음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아이는 설서율과 반진율에게도 고개를 끄덕인 뒤, 신예준을 찾으러 부엌으로 달려갔다.“아빠.”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신예준은 곧바로 장갑을 벗고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물건은 다 샀어? 엄마는? 오늘 기분 좋으셔?”“좋아요. 오늘은 아빠 칭찬도 했어요.”그 말에
순간 환청이라도 들은 것 마냥 성혜인과 강민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그러자 서수연은 피식 냉소를 터뜨리다가 무언가 알아차린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우리 오빠가 꽤 열심히 숨겼나 봐. 너희들도 모르고 있을 줄 몰랐는데... 아무튼 장하리는 별장에 숨겨져 있어.”성혜인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이윽고 서주혁이 일주일 동안 별장에 있었던 것을 연상하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직접 차를 몰고 서주혁의 별장으로 달려갔다. 직접 보지 않고는 정말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물론 성혜인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장하리의 친구였으니까.그러나 막상 별장 밖에 도착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이윽고 초인종을 눌렀지만 한참을 울려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또다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도 서주혁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그는 여전히 평소와 똑같은 냉랭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방금 당신 여동생을 만났는데 장하리 살아있다면서요. 심지어 당신 별장에 숨겨져 있다는데 서주혁 씨, 전 오늘 이 말이 사실인지 알아야겠어요.”그 순간, 서주혁의 눈빛에 악랄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원래는 서수연을 한 달 동안 제원에서 머무르게 할 계획이었지만 이제 보니 기껏해야 일주일 안에는 다시 보내버려야 할 것 같았다.한편, 서주혁이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 서수연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서주혁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가 친구라면 그의 거짓말은 더욱 어색해지곤 한다.결국, 성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하리 한 번만 만나게 해줘요.”“아직은 안 됩니다.”“왜요?”“하리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요.”성혜인은 똑똑한 여자이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서주혁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장하리가 기억을 잃어 사람을 별장에 가둬놓았다고? 결국, 장하리를 강
방금 혼인신고서를 손에 넣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서보겸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선생님.”서보겸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혼인신고서에 꽂혀있었다.장하리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하게 혼인신고서를 원위치에 가져다 놓고 어색하게 서보겸을 바라보았다.“응, 왜 그래?”“그거... 보고 싶어요?”당사자의 아이 앞에서 장하리는 당연히 인정할 수 없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런 거 아니야. 그냥 실수로 손에 닿아서 그랬어.”고용인에게서 들은 바로는 서보겸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보겸아, 책 다 읽었어? 선생님이 다른 책 가져다줄까?”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보겸은 말없이 그녀에게 걸어오더니 작은 의자 하나를 옮겨왔다. 아직 키가 작아 캐비닛 안의 혼인신고서를 꺼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이윽고 혼인신고서를 꺼낸 서보겸이 장하리에게 보여주었다.“보세요. 상관없어요.”아이의 시선이 너무나도 진지했던 탓인지 장하리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너무 비열하게 느껴졌다.“아니야, 괜찮아.”그녀는 혼인신고서를 건네받고 다시 원위치에 가져다 놓으며 캐비닛을 꼭 닫아놓았다.이곳은 서주혁의 방이다. 그러니 외부인인 장하리가 제멋대로 캐비닛을 여는 것은 이미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아니면 오늘은 콜라보레이션 게임으로 바꿀까?”그러나 서보겸은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장하리도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혼인신고서 때문인 것 같았다. 혼인신고서에서는 엄마의 사진이 있을 테니까.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하리는 더욱 미안해졌다. 애초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보겸아, 우리 생존 합작 게임을 해보자. 게임에서는 사냥과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확보해야 해. 안 그러면 굶어 죽을 수도 있거든. 선생님이 가르쳐 줄까?”그러자 서보겸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거실에 앉아
장하리는 문득 서주혁은 대체 어떻게 그녀에게 호감이 생긴 것인지 궁금해졌다.알고 지낸 시간도 짧은데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매달리는 거지?제원에는 예쁜 여자도 얼마나 많은데... 장하리는 결코 자신이 최고의 미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두 사람은 그렇게 묘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때, 서주혁이 먼저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무슨 일입니까”그 순간, 장하리는 왠지 모르게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마냥 심장이 아팠다.“저, 그게 보겸이와 게임을 하다 보면 아이가 말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하루에 한 시간씩은 게임을 같이 하고 싶어서요.”장하리도 불편한 마음에 차마 서주혁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서주혁이 시선을 돌려 다시 장하리를 바라보자 장하리는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심장도 두근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했다.서주혁은 결국 또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고 같은 시각, 서보겸도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는 다급히 손을 뻗어 장하리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옆에 있는 벽으로 끌어당겼다.당황한 장하리가 그의 목적을 묻자 서주혁은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서주혁 씨!”장하리는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을 쳤지만 서주혁은 장하리의 민감한 부분을 잘 알고 있는지라 손길 몇 번만으로 장하리는 온몸이 나른해지며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장하리가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그녀의 몸이 이렇게도 방탕했단 말인가?서주혁의 몸을 두드리던 손에도 힘이 점점 풀렸다.그러자 서주혁은 다른 한 손으로 장하리의 몸을 부축해주었고 두 사람이 현재 서 있는 곳은 비교적 은밀한 구석이었기에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의 콧속은 꽃향기로 가득 채워졌고 조금만 숨을 들이마셔도 숨결이 흐트러지는 기분이었다.서주혁은 그 상태로 잠시 입을 맞추더니 갑자기 이마를 짚고 무언가를 참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이에 장하리의 모습은 더욱 낭패해졌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여자의 말소리에 소준호는 순간 두피가 저린 기분이 들었다. 장하리가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는 몸을 흠칫 떨고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미안해, 나 다른 여자와 잤어.”술에 취해 저지른 짓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부정할 수 없다.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한편, 장하리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목에 거대한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을 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줄곧 소준호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소준호만큼은 절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좋아요.”장하리는 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그럼 준호 씨도 행복하세요. 앞으로 결혼식은 강성에서 할 건가요?”장하리의 말에 순간 당황한 소준호는 덩달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소준호도 일이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응. 하리야, 정말 미안해.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푹 쉬세요.”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서주혁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심지어 기분은 상당히 괜찮아 보였고 긴 손가락은 손안의 라이터를 이리저리 돌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하리는 서주혁을 무시하고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 발걸음을 옮겼지만 곧바로 그에게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누구한테서 온 전화예요?”애매한 말투와 조금 전보다 더 친밀한 스킨쉽까지.큰 키에 장하리를 끌어안고 있으니 장하리는 당장이라도 서주혁의 품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순간, 장하리는 어마어마한 무력감을 느끼며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요.”“안 놔. 그러니까 말해봐요. 누구 전화인데요?”그의 말투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주혁의 얼굴은 장하리가 소준호와 헤어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소준호요.”“뭐라고 했는데요?”왠지 모르겠지만 장하리는 소준호와 헤어진 사실을 이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
장하리가 막 그의 손을 밀어내려는데 이번에는 서주혁이 먼저 손을 빼어냈다. 마치 그녀의 생각 정도는 전부 간파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그러나 같은 시각, 장하리는 그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소준호의 일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감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한편, 장하리의 옆에 서 있으니 서주혁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이윽고 서주혁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반응이 없자 서주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뭐 먹고 싶어요?”“마음대로 하세요.”장하리는 별로 흥미가 돋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대충 답하고는 다시 서보겸에게 걸어갔다.물론 서주혁도 딱히 서두르지는 않았다. 때로는 몰아붙일수록 원하던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다.위층 서재에 올라가 자리에 앉는 순간, 서주혁의 휴대폰이 다시금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성사되었다는 전화였다.서주혁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손끝으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가 한 글자를 뱉어냈다.“응.”전화를 끊고 서주혁의 시선은 다시금 비즈니스 정보가 빼곡히 들어찬 컴퓨터를 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만약 과거였다면... 누군가 그에게 미래의 서주혁이 한 여자에게 푹 빠질 거라고 말해준다면 서주혁은 무조건 웃기지도 않은 유머로 여기며 대충 웃어넘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장하리가 아래층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방금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던 손끝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바들바들 떨려 났다. 그는 애써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려 미간을 힘껏 주물럭거렸다.남자라면 알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고 들뜬 성욕을 억제할수록 편해지는 것이 아닌 오히려 통증이 거세질 뿐이라는 것을.서주혁은 단단해진 아랫도리를 애써 무시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마른 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단단해진 아랫도리는 쉽사리 기가 죽지 않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