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혁은 이미 마음속에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래서 장하리가 제원에 가는 것이 확실해지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게다가 제원에 도착하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장하리가 사고를 당했을 때 성혜인과 그 일행이 크게 소동을 부렸는데, 지금 그녀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을 알면 그들이 얼마나 놀라지 안 봐도 뻔했다.그때가 되면 과거의 일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이다.사실 서주혁은 내심 제원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원은 장하리에게 좋지 않은 기억만을 남긴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혜인, 강민지, 심지어 반승제까지 모두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결국 언젠가는 이들에게도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다음 날, 세 사람은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장하리는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특히 자신과 서주혁이 양옆에서 서보겸의 손을 잡은 모습이 영락없이 한 가족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보겸이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았기에 장하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거절했다면 아이가 또다시 마음을 닫아버릴 것 같았다.셋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정말 눈길을 끌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따라왔다. 장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서주혁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한 시간 후에 도착하니까 잠깐 눈이라도 붙여요.”장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창가 쪽에 앉은 그녀는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비현실감을 느꼈다.비행기는 제원에 도착했고 그녀와 서주혁은 VIP 통로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타고 이동하던 중 창밖의 건물들이 어쩐지 낯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에는 제원에 온 적이 없었다.차는 서주혁의 집에 도착했다. 강성에서 살던 작은 주택과는 달리 이곳은 대략 천2백 평 규모의 대저택으로 수영장과 러닝 트랙까지 갖춰져 있었다. 서주혁이 부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장하리는 원래 챙겨 온 물건이 많지 않아 정리할 것도 없었다.10분쯤 지나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의 모든 가사 도우미들은 이미 주의를 받은 상태였기에 그녀를 보자 눈에 띄는 감정 없이 그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때 비서가 장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장하리 씨, 저택 주변에 다양한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요. 두 달 동안 이곳에 머무르시게 될 텐데, 외출할 계획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차량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저택에서 정문까지 가는 데만도 차로 10여 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비서의 말은 곧 이 두 달 동안 가능한 한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장하리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서보겸을 돌보기 위해 온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밖에 나가지 않을게요.”비서는 그녀의 의사를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혹시나 그녀가 외출해서 아는 사람을 만나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서주혁은 강성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많은 회의를 뒤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일찍 비서와 함께 회사로 나갔다.그가 떠나고 장하리는 서보겸과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때 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서주혁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문을 열러 나갔다.그러나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명희정이었다.명희정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장하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장하리?”장하리는 그 여자가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잠시 멈칫했다.명희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그녀의 뺨을 올려붙이며 소리쳤다.“뭐야, 너! 죽은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일부러 주혁이가 너를 못 잊게 하려고 그런 쇼를 한 거였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해서 주혁이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려 했던 거였어! 정말 교묘하게 꾸민 수작이네. 하지만 이 집에 네가 발 들일 일은 없을 거야! 절대
명희정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곧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 사이 방 안에서는 장하리가 뺨 맞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금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그 얼굴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인상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사라져 버렸다.장하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서보겸은 여전히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그녀가 틀어 놓은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서보겸은 그녀의 뺨에 남은 손자국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눈가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곧바로 분노 그리고 이내 진지함으로 바뀌었다.아이의 눈에서 이렇게나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처음 본 장하리는 마음이 뿌듯해졌다.그러나 다음 순간, 서보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누가 때렸어요?”장하리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포근해졌다. 곧바로 서보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우리 울보, 울지 마. 나도 누군지 잘 몰라. 아마 네 아빠 손님이겠지. 나중에 아빠가 오면 선생님이 잘 얘기할게. 괜히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닌지 모르겠네.”서보겸은 장하리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럴 리 없어요.”장하리는 감격에 겨워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는 비록 자폐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서주혁의 말이 옳았다. 서보겸은 확실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또한 짧은 시간 동안 서보겸의 감정이 이렇게 다양해진 것도 명희정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시큰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해졌다.“그래. 그럼 아빠가 선생님한테 뭐라 하면 보겸이가 선생님 편을 들어줘야 해.”서보겸은 눈을 내리깔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장하리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소소한 억울함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자, 이리 와. 보겸아
서주혁이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명희정이 눈에 들어왔다.명희정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장하리가 왜 네 별장에 있는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주혁의 눈가에 살벌한 기운이 스쳤다.“어머니, 장하리에게 가서 문제를 일으키셨어요?”명희정은 아들을 질책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태도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에 이런 감정이 떠오른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서주혁은 반승제, 온시환과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렸다. 그들 모두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를 겪었지만 서주혁만은 늘 규칙을 잘 따랐다. 그래서인지 명희정은 그가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니? 그 여자가 내 뺨을 때렸다고! 난 네 엄마야. 그런데 그 여자가 감히 나를 때렸어! 게다가 우리 모두 그 여자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건 분명 널 휘두르려는 수작이잖아! 주혁아, 난 그 여자가 절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주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다시는 장하리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명희정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2분 정도 지나고서야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저도 장하리가 어머니를 마주할 일이 없도록 할 거예요. 장하리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셔도 상관없어요. 전 이미 4년 전에 허락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혼인 신고도 되어 있으니 본래 부부입니다.”명희정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아들이 이렇게까지 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주혁아, 넌 4년 전에 일어난 일을 의심해 보지도 않는 거니? 그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수상하지 않아? 넌 지금 완전히 그 여자의 농간에 넘어간 거야.”“어머니.”서주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제 앞에서 더는 장하리에 대해 막말하지 마세요. 전 두 번 다시 그 여자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무
장하리는 조금 의외였다. 사실 장하리는 오후 내내 두려움과 당황함에 휩싸여 있었다. 어쨌든 서주혁의 집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면 귀한 손님일 테니까.실수로 큰 인물에게 미움을 사서 서주혁도 덩달아 난처해지면 큰일이다.하물며 이 집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 그러면 서주혁이 어찌 그녀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겠는가?그런데 서주혁이 이렇게 말해주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며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났다.서주혁은 손끝으로 장하리의 볼에 남겨진 자국을 어루만져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찜질은 했어요?”“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중요한 손님일까 봐...”“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자신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그 말에 장하리의 마음은 더욱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감격에 겨워 막,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서주혁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씨 집안에서 걸려온 전화 같았다.반갑지 않은 발신자에 서주혁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장하리의 턱을 놓아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입니까?”“주혁아, 수연이가 돌아왔어. 그러니 저녁에 보겸이 데리고 와서 밥 먹어.”“됐어요. 보겸이는 가고 싶지 않대요.”“너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니? 정말 우리한테 보겸이 평생 안 보여줄 거야?”“어머니, 제가 말했잖아요. 보겸이와 그 여자와 관련된 일은 더 이상 저와 상의하지 말라고.”서주혁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눈 밑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게다가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장하리는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통화내용을 듣고서야 서주혁이 가족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말투를 들어보니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건 결국 서주혁의 사생활이라 먼저 묻기도 어려운 화제였다.저녁에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할 때, 장하리는 식탁 위에 놓인 과일주 한 병을 보며 슬며시 물었다.“이거 술이에요?”그러자 서주혁은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담담하
사내대장부가 미모라니. 이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서주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장하리의 한쪽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며 물었다.“만지고 싶어요?”그러자 장하리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주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자신에게 닥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하다.“그래도 돼요?” 입으로는 이렇게 물었지만 손은 이미 서주혁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남자는 피부도 좋았다. 게다가 골격도 그의 미모에 맞게 훌륭했다.이윽고 손가락이 미끄러져 서주혁의 목젖을 눌러버렸다.그 순간, 서주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하더니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과 서주혁의 그윽한 눈빛 속에서 그녀를 유혹하려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다른 곳도 만져볼 수 있는데.”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리는 마치 먼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찌른 것마냥 끝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그저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점점 빠져들고 점점 좋아졌다.한편, 서주혁은 장하리의 부드러운 손길에 온몸이 팽팽하게 굳어버렸다.술에 취한 사람은 이성을 잃은 상태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머릿속의 아주 작은 기억의 본능만을 따를 뿐이었다.그녀는 10분 동안 서주혁의 얼굴을 가지고 놀다가 갑자기 그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나 목말라요.”그것은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조동이기 때문에 장하리는 점점 그 건조함 속에서 목이 말라진 것이다.그 순간, 서주혁은 장하리의 뒤통수를 감싼 채 사람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이고 바로 키스를 퍼부었다.30분 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야 서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아직도 목이 말라요?”“아니요. 기분 좋아요.”서주혁의 호흡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아무리 애가 타도 정말 장하리를 건드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지난번처럼 장하리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었지만 결국 괴로운 건 서주혁 본인이었다.이윽고 서주혁은 장하리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아랫도리에 올려놓았다.하
서주혁은 눈을 들어 몇 초 동안 그녀를 쳐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좀 쉬세요. 보겸이도 이렇게 컸으니 계속 같이 있을 필요 없어요.”“그럴 리가요, 그래도 제 일인데 같이 좀 다녀올게요. 아이들은 놀이터를 좋아할 거예요.”“괜찮아요.”“그럼 보겸이 이미 다녀왔어요?”“아니요.”“그런데 왜...”“장하리 씨.”서주혁은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목소리는 더욱 쉬어 있었다.“별장에 가만히 있어요. 심심하면 보겸이와 아리 데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되고요. 별장이 너무 커서 하리 씨도 아직 다 보지 못한 풍경이 많을 거예요.”장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의 말투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을 눈치챘다. 마치 무슨 비밀을 짊어지기라도 한 듯...하지만 장하리는 쉽사리 추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 온 첫날, 비서가 전한 의사를 보아도 그들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장하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서주혁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서주혁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고 그 후 두 달 동안의 회의 역시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수정해야 할 서류도 전부 거실에 두었다.그리고 보겸이와 노는 것도 전부 서주혁의 눈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서주혁과 같은 회사 대표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서주혁은 거의 한 주일 내내 별장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일주일 후, 서주혁은 반승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나 지금 네 회사에 있는데 관리층 말을 들어보니 일주일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파?”반승제는 서주혁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손에는 두 사람의 최근 합작 프로젝트에 필요한 서류를 들고 있었다.오늘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갈 일이 생겨 서류를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게다가 서주혁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도 있고...“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 하고 있는데?”“출장 중이야.”그 말에 반
성혜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펑펑 눈물을 흘리는 반진율에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반진율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반진율의 얼굴은 정말 반승제와 똑 닮았다.“그래그래, 넌 충분히 남자다워. 그러니까 울지 마. 응?”“끅, 흑흑흑, 끅.”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반승제는 손을 내밀어 반진율의 뒤 깃을 잡고는 아이를 한 손에 들어 올렸다.“너 남자다운 사내가 이렇게 우는 거 본 적 있어?”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온 반진율은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아, 이거 놔주세요. 아빠! 이거 놓으세요, 흑흑.”반승제는 아이를 대롱대롱 들고 소파 옆으로 다가와 그를 소파 위에 내동댕이쳐버렸다.그러자 반진율은 푹신한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성혜인도 아이의 곁으로 다가와 무심코 입을 열었다.“오늘 민지가 집에 온다는데 듣기로는 다온이도 데리고 온다면서?”다온이는 강민지와 신예준의 아이로서 예쁜 여자아이이다.그 말을 들은 반진율은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다급히 양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벅벅 지우기 시작했다.“저녁 먹으러 오나요?”“응, 그리고 예준 아저씨도 같이.”그러자 반진율은 기대가 가득 찬 모습으로 소파에 손가락을 대고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반진율을 속인 건 아니었다. 오늘 밤 확실히 강민지네 가족과 모이기로 약속했다.잠시 후, 일찍 도착한 신예준은 익숙하게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최근 몇 년 동안 회식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그가 요리사를 도맡았다.반진율은 귀한 양복을 벗고 고개를 숙여 채소를 고르는 신예준의 모습을 보며 존경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신예준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신예준은 피식 웃으며 반진율의 뺨을 부드럽게 꼬집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전 다온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돼요.”그러자 밖에 서 있던 설서율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부엌문을 열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