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는 자신의 옷자락을 꼭 그러쥐었다. 서주혁을 보는 순간 죽다가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제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귓가에는 전필준과 전아영의 비명 섞인 애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하리의 옷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헝클어져 있었다.서주혁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장하리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장하리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그러다 서주혁이 그녀를 안아 올리고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방금 전필준이 자신을 깔아뭉개고 덮치려 했을 때 장하리는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었다.동료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었고 그저 자주 가는 카페라서 전아영이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장하리는 머리를 서주혁의 가슴에 기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서주혁은 그녀를 안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뒤에서는 전필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차에 태워졌을 때도 장하리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잠시 후 서보겸이 차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서보겸은 여전히 얌전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장하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자리에서 전아영과 전필준을 다시 찾아가 수십 대씩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손을 대다니.차 밖에는 강성의 여러 관계자들이 서 있었고 원장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원장의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곳에 있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대투자자의 아들이 유치원 선생님에게 맞았고 투자자가 아끼는 여자가 지역 관료에게 강간당할 뻔했다. 이런 일을 겪고도 강성이 무사할 수 있을까?원장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이들도 침묵하고 있었다.서주혁은 그들에게 한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고 비서에게 차를 몰라고 지시했다.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장하리는 여전
그는 몸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4년 동안 여자를 가까이한 적이 없었고 자신을 수도승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하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다른 여자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와 접촉을 시도한다면 그 사람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장하리는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온 첫 번째 여자였다.서주혁은 차가운 물로 샤워했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그제야 고통스러울 만큼 단단하게 굳어버린 아랫도리를 느낄 수 있었다.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은 서주혁은 차라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몇 바퀴를 뛰는 동안 아리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꼬리를 흔들었다.서주혁은 운동을 마치고 다시 한번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후 물을 한 잔 마시려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때 장하리가 얇은 잠옷 차림으로 물을 따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거실 등은 꺼져 있었고 주방 등만 켜져 있었다. 얇은 잠옷 너머로 그녀의 몸매가 어렴풋이 보였다. 겨우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요동쳤다. 서주혁의 몸은 순식간에 반응했다.하지만 장하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천천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은 새벽 1시였다. 장하리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러 나온 것이었다.며칠 동안 전필준에 관한 악몽에 시달렸다가 오늘 밤에야 겨우 숙면을 할 수 있었다.그녀는 컵을 들고 천천히 뒤돌았다가 가까이에 서 있는 서주혁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 대표님, 물 마시러 오셨어요?”서주혁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장하리의 쇄골에 머물렀다. 그녀의 피부는 하얬고 방금 일어나서인지 흐트러진 잠옷이 흘러내려 목덜미가 다 드러나 있었다.서주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잠옷을 정리해 주었다.장하리는 그가 잠옷의 깃을 바로잡아 줄 때까지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그녀보다 키가 큰 서주혁은 고개를 숙이
그녀의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소파에 눕혀지기까지 잠시 시간이 흐르고서야 장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던 서주혁은 그녀의 눈동자가 맑아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내민 손부터 천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이런 일에 있어 남자는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 여자를 만족시키고자 하면 저절로 방법을 터득하기 마련이니까.장하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그 미세한 이성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그녀의 눈동자는 점차 흐릿해졌다.그녀의 기억 속에는 남자와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마음이 더욱 쉽게 흔들렸다.“그만...”간신히 입을 뗀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말은 그만하라고 했지만 그녀의 손에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온몸이 거센 파도에 떠밀려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사방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몸이 이리저리 떠밀리는 이 감각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서주혁은 일부러 그녀가 이성을 잃도록, 정신을 놓아버리도록 부드러운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부드러웠고 입을 맞추는 곳마다 옅은 흔적만 남았다.장하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발끝이 저절로 오그라들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서주혁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만졌다. 그녀가 이미 혼란에 빠졌음을 깨달은 그는 이제 마지막 단계로 넘어갈 때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순간, 집 안에 불이 환하게 켜졌고 서보겸이 눈을 비비며 계단 아래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날카로운 불빛과 아이의 목소리에 장하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서주혁은 옆에 있는 옷을 집어 얼른 그녀의 몸을 덮어준 후 멀뚱히 서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서보겸은 두리번거리며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는 상의를 벗은 채 하의만 입고 있었는데 허리와 복근은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로 드러나 있었다.서주혁은 이마를 짚었다
서주혁은 혼자 소파에 앉아 그곳을 잡았다. 아까 장하리의 모습을 떠올리자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었다. 깨끗이 정리한 후 그는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서보겸은 아직 자지 않고 동그란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작은 손으로 옆에 있는 아리를 쓰다듬고 있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아빠, 안 괴롭혔어요?”괴롭히지 않았다면 아까 엄마 목소리가 왜 울 것처럼 들렸지?“만약 이게 괴롭히는 거라면 너도 나중에 네 아내를 그렇게 괴롭히게 될 거란다.”“아내, 안 찾아요.”서주혁은 웃음이 났다. 자기와 꼭 닮은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이 부드러워졌다.“보겸아, 굳이 찾을 필요 없어. 나중에 네가 가만히 있어도 많은 여자애들이 찾아올 테니까. 아니면 넌 오직 서율이 누나만 원하는 건가?”서보겸은 순간 부끄러워 얼굴을 감쌌다.“아니에요.”서주혁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서보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짧은 시간 동안 장하리와 지내면서 아이는 이미 여러 가지 감정 변화를 보였다.서주혁의 마음은 설렘으로 부풀어 오랐고 약간 들뜬 상태였다.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한편, 장하리는 집에 돌아온 후 방 안을 가득 채운 자신의 숨소리만 들렸다.침대에 누웠지만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다.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몸 전체가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밝은 욕실 불빛 아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몸에 남은 흔적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옅은 붉은빛이 감도는 자국들은 서주혁이 지나치게 힘을 쓰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서주혁을 때렸던 건 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장하리는 얼른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하지만 찬가운 물이 달아오른 얼굴에 닿자마자 금세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십여 분 동안 물로 씻어내
서주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지시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보겸이 물었다.“엄마는요?”“이미 식사했다니까 우리끼리 먹자.”“엄마 화났어요. 아빠, 안 좋아요.”서주혁은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젯밤에 서보겸이 나타나 일을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내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손을 뻗어 서보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화난 게 아니야. 어젯밤에 오해가 좀 있었을 뿐이야. 보겸아, 아빠랑 약속해. 다음에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네 방에만 있어야 해, 알겠지?”“왜... 요?”“그때 네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엄마가 더 빨리 우리랑 함께 살게 될 거야.”서보겸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서주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전필준 사건 이후로 서보겸을 더는 그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장하리도 이미 유치원을 그만두어 현재는 무직 상태였다.한편, 장하리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서둘러 내려가 문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서주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서주혁이 재빠르게 한 손을 뻗어 문틀을 잡았다.“하리 씨, 할 얘기가 있어요. 잠깐만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장하리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결국 그를 집에 들여보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애써 시선을 피했다.“무슨 이야기인데요?”서주혁은 손에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서보겸을 위해 직접 만든 간식이었는데 특별히 두 개를 준비했다. 하나는 서보겸에게 그리고 또 하나는 장하리에게 주기 위해서였다.“내가 만든 거예요. 드셔 보실래요?”장하리는 더욱 불편해졌다. 서주혁이 너무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그의 뺨에는 아직도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둘 다 책임이 있었다. 그가 억지로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 자신도 순간
서주혁은 이미 마음속에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래서 장하리가 제원에 가는 것이 확실해지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게다가 제원에 도착하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장하리가 사고를 당했을 때 성혜인과 그 일행이 크게 소동을 부렸는데, 지금 그녀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을 알면 그들이 얼마나 놀라지 안 봐도 뻔했다.그때가 되면 과거의 일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이다.사실 서주혁은 내심 제원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원은 장하리에게 좋지 않은 기억만을 남긴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혜인, 강민지, 심지어 반승제까지 모두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결국 언젠가는 이들에게도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다음 날, 세 사람은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장하리는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특히 자신과 서주혁이 양옆에서 서보겸의 손을 잡은 모습이 영락없이 한 가족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보겸이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았기에 장하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거절했다면 아이가 또다시 마음을 닫아버릴 것 같았다.셋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정말 눈길을 끌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따라왔다. 장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서주혁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한 시간 후에 도착하니까 잠깐 눈이라도 붙여요.”장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창가 쪽에 앉은 그녀는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비현실감을 느꼈다.비행기는 제원에 도착했고 그녀와 서주혁은 VIP 통로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타고 이동하던 중 창밖의 건물들이 어쩐지 낯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에는 제원에 온 적이 없었다.차는 서주혁의 집에 도착했다. 강성에서 살던 작은 주택과는 달리 이곳은 대략 천2백 평 규모의 대저택으로 수영장과 러닝 트랙까지 갖춰져 있었다. 서주혁이 부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장하리는 원래 챙겨 온 물건이 많지 않아 정리할 것도 없었다.10분쯤 지나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의 모든 가사 도우미들은 이미 주의를 받은 상태였기에 그녀를 보자 눈에 띄는 감정 없이 그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때 비서가 장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장하리 씨, 저택 주변에 다양한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요. 두 달 동안 이곳에 머무르시게 될 텐데, 외출할 계획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차량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저택에서 정문까지 가는 데만도 차로 10여 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비서의 말은 곧 이 두 달 동안 가능한 한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장하리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서보겸을 돌보기 위해 온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밖에 나가지 않을게요.”비서는 그녀의 의사를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혹시나 그녀가 외출해서 아는 사람을 만나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서주혁은 강성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많은 회의를 뒤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일찍 비서와 함께 회사로 나갔다.그가 떠나고 장하리는 서보겸과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때 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서주혁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문을 열러 나갔다.그러나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명희정이었다.명희정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장하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장하리?”장하리는 그 여자가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잠시 멈칫했다.명희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그녀의 뺨을 올려붙이며 소리쳤다.“뭐야, 너! 죽은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일부러 주혁이가 너를 못 잊게 하려고 그런 쇼를 한 거였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해서 주혁이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려 했던 거였어! 정말 교묘하게 꾸민 수작이네. 하지만 이 집에 네가 발 들일 일은 없을 거야! 절대
명희정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곧바로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그 사이 방 안에서는 장하리가 뺨 맞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금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그 얼굴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인상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사라져 버렸다.장하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서보겸은 여전히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그녀가 틀어 놓은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서보겸은 그녀의 뺨에 남은 손자국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눈가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곧바로 분노 그리고 이내 진지함으로 바뀌었다.아이의 눈에서 이렇게나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처음 본 장하리는 마음이 뿌듯해졌다.그러나 다음 순간, 서보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누가 때렸어요?”장하리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포근해졌다. 곧바로 서보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우리 울보, 울지 마. 나도 누군지 잘 몰라. 아마 네 아빠 손님이겠지. 나중에 아빠가 오면 선생님이 잘 얘기할게. 괜히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닌지 모르겠네.”서보겸은 장하리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럴 리 없어요.”장하리는 감격에 겨워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는 비록 자폐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서주혁의 말이 옳았다. 서보겸은 확실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또한 짧은 시간 동안 서보겸의 감정이 이렇게 다양해진 것도 명희정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시큰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해졌다.“그래. 그럼 아빠가 선생님한테 뭐라 하면 보겸이가 선생님 편을 들어줘야 해.”서보겸은 눈을 내리깔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장하리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소소한 억울함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자, 이리 와. 보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