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로 가까이 다가가니 맞춤 제작한 작은 책상 앞에 혼자 조용히 앉아있는 서보겸이 눈에 띄었다. 평소 서주혁이 책상 앞에서 회의할 때도 아이는 혼자 조용히 옆에 앉아있었다.서보겸은 정말 서주혁이 몇 마디 물어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 없었다.“보겸아, 배고프지 않아?”아이를 마주하자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주혁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보겸에게 다가갔다.“없어요.”“오늘 뭘 봤길래 종일 내려가지 않았던 거야?”그러나 서보겸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책에 꽂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빛을 감싸고 있는 듯 보송보송해 보였다.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서주혁도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와 함께 책을 보기 시작했다.그때 아이가 보고 있던 장면은 마침 어머니를 찾고 있는 상황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책은 서보겸이 가장 즐겨 있는 책이었다.서주혁은 그 책 안에 이런 줄거리도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때, 명희정이 했던 말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집에 여자를 들이면 정말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서보겸에게 부족했던 건 바로 모성애였다.그는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보겸아, 아빠가 엄마 찾아줄까?”그러자 고요하기만 하던 서보겸의 눈빛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서주혁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에 서주혁은 드디어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며 내심 기뻐했다. 서보겸만 필요하다면 그는 충분히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서보겸은 다시 고개를 떨구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싫어요.”단숨에 여섯 글자를 말한 것을 보면 서보겸이 집에 여자를 들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순간 마음이 아파진 서주혁이 천천히 아이를 안아 올렸다.“그래, 찾지 말자. 그럼 지금은 먼저 밥 먹으러 내려갈까? 나중에 서율 누나와 통화하게 해줄게. 응?”설서율은 반승제와
서보겸은 아리를 좋아한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아리가 곁에 있으면 엄마가 옆에 있는듯한 안전감이 느껴졌다.물론 서주혁이 옆에 있어 준다면 그 안전감은 배가 될 것이다.서보겸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리가 가장 좋았다.아리는 오후 내내 밖에서 뒹구는 바람에 꼬리에는 풀잎 몇 개가 달려있기도 했다.서주혁은 옆에서 수건을 가지고 와 아리의 발과 꼬리를 깨끗이 닦아주었고 아리도 얌전히 그의 손길을 즐겼다. 이것은 서주혁이 매일 아리에게 해주는 필수코스였다. 다 닦아주고 나면 아리는 매우 얌전히 침대에 올라가 침대 끝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곤 한다.집에는 원래 다른 강아지도 있었는데 당시 장하리에게 보상해주기 위해 사온 강아지였다. 그러나 장하리는 그의 보상을 원하지 않았고 4년 전, 온시환이 데리고 가 지금도 잘 키우고 있다.침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서주혁은 욕실에서 나올 때 아이가 조심스럽게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아리도 귀염성 있게 머리를 내어주고는 서보겸의 손길을 즐겼다.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서주혁은 잠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보겸아, 너 먼저 자. 아빠는 서재에서 업무 좀 보다가 잘게.”“네.”서주혁은 침실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불가피하게 장하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아리와 서보겸은 모두 장하리가 서주혁에게 남긴 두 가지 보물이었고 4년 동안 외로운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그러나 서주혁 또한 장하리가 죽게 된 것도 결국 그의 무정함 때문이었고 그의 잔인함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4년 동안 서주혁은 수없이 많은 밤낮을 장하리의 생각들로 지새웠고 언젠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모습마저 잊어버릴까 두려웠다.4년이라는 시간은 서주혁에게 정말 너무나도 길고 아득한 시간이었다. 어떻게 서보겸을 데리고 키웠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돌이키고 싶지 않을 만큼 길었다..하지만 앞으로 수없이 많은 4년이 서
그 말을 들은 장민철은 안색이 환해지며 뛸 듯이 기뻐했다.“그래그래, 네 엄마랑 혼수는 다 준비해뒀다. 가장 중요한 건 그 녀석이 우리 집 근처에서 사는 거다. 나중에 결혼한다고 해도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10분이면 올 수 있잖으냐. 얼마나 편해. 그리고 최대한 외지 사람은 찾지 말아. 나중에 혹여나 괴롭힘당해도 나와 네 엄마가 바로 해결해줄 수가 없잖니.”“네, 알겠어요. 저도 그 남자에게 호감 있었어요.”그날 밤, 장민철은 즉시 추미현과 상의하여 장하리에게 단독으로 집을 사주기로 했는데 좋기는 같은 동네에 장하리의 신혼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앞으로는 장하리와 그녀의 남편이 묵을 신혼집이지만 본가와도 가까워 그들 노부부도 언제든지 장하리를 보러 갈 수 있다.노부부는 곧 수중의 돈을 세기 시작했고 즉시 아파트 단지 내에 매물이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현재 마침 매물 한 채가 판매 중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내일 바로 집 상태를 보러 가겠다며 예약을 해두었다.그리고 그날 밤, 장하리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꿈속에는 웬 희미한 낯선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 정체를 확인하려 아무리 노력해봐도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희미하기만 했다.깨어났을 때 식은땀이 흐르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장하리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너무 현실적인 꿈이었다. 정말 당황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그때, 다행히 휴대폰이 울리고 확인해보니 발신자는 다름 아닌 소준호였다.그리고 소준호가 바로 현재 장하리가 호감을 가지고 만나고 있는 남자이다.두 사람은 전에 한 행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소준호는 피아노 선생님으로서 매우 온화하고 우아한 비주얼을 자랑했다.그의 전화를 받은 뒤, 장하리는 곧바로 찝찝한 느낌을 털어내고 욕실로 들어가 씻고 외출 준비를 하였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소준호의 차는 이미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다급히 조수석에 앉아 조금 빨개진 볼을 애써 감추며 설명했다.“죄송해요. 어젯밤에 악몽을 꾸는 바람에 조금 늦게 일어
두 손으로 서주혁의 목을 꼭 껴안은 서보겸의 눈빛은 새까맣고 하염없이 맑았다.서주혁은 그가 배가 고픈 줄로만 알고 계속하여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관광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면서 무심코 아래층을 훑어본 그의 시선은 곧 한 여자의 뒷모습에 머무르게 되었다.지난 4년 동안, 뼛속에 새겨질 정도로 그리워하던 장하리의 얼굴, 뒷모습, 그리고 목소리까지.이렇게 먼 거리를 두고도 그는 여전히 심장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서보겸을 안고 있던 손에도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몇 초 후, 그는 엘리베이터 하강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기 시작했다.이때 버튼을 누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주혁을 안내해주던 호텔 지배인은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엘리베이터는 목표 층에 도달해야만 다시 내려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하지만 서주혁이라고 과연 이걸 모를까?단지 너무 당황하여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급한 마음에 연달아 누른 것이다.엘리베이터가 마침내 1층에 도달하고 그는 서보겸은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방금 장하리가 서 있던 곳까지 달려나갔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데 그때, 온시환의 전화가 걸려왔다.“어, 왜 그래?”“어제부터 네 어머니께서 나와 승제에게 너와 결혼할 사람을 물색해 달라고 계속 전화하셔. 너 정말 결혼할 생각이야?”지난번 서주혁의 태도가 워낙 애매해 승낙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하지만 서보겸과 이 일에 대해 말해본 결과, 그의 대답은 명확한 거절이었다.“안 할 거야. 애초에 보겸이도 새엄마를 원하지 않는다고.”말이 끝나자마자 서보겸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엄마.”이는 오랜 시간이 흘러 서보겸이 처음으로 이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이었다.그러나 서주혁의 마음은 그 단어 하나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그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온시환에게 입을 열었다.“아니야. 보겸이와 다시
피아노 가게 사장은 옆에서 필사적으로 제품을 소개했고 또 옆에 있던 소준호를 그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대표님, 저희 가게 최고의 피아노 선생님인데 피아노 음색 테스트를 맡기셔도 됩니다.”이윽고 서주혁의 시선은 자연스레 몇 초간 소준호에게 머물렀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보겸을 옆에 있는 소파에 내려놓았다.소준호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피아노 옆에 앉아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예전에 국내에서 연수를 간 적이 있었기에 연주 실력은 정말 훌륭했다.한 곡을 연주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장하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마침 서주혁은 피아노를 보고 있으니 소준호는 얼른 기회를 틈타 다른 한쪽에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응, 하리야, 무슨 일이야?”“아, 준호 씨, 죄송하지만 제 가방을 당신 차에 두고 와서 제가 당신 가게 밖으로 가서 가져올게요.”“그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가게 사장은 아직도 서주혁에게 말을 걸며 제품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그 뒤로, 서주혁은 더 이상 소준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와 달리 서보겸의 시선은 줄곧 그에게만 쏠려있었다.소준호 역시 이를 알아차리고 불편한 듯 안절부절못했다.그때, 휴대폰이 다시 울리는 것을 보니 장하리가 도착한 모양이다. 서주혁을 힐끔 바라보니 그는 이미 결제하고 있었고 이제 괜찮겠다 싶어 소준호는 옆에 있는 유리문을 열고 바깥 도로로 나갔다.장하리는 직접 택시를 타고 왔는데 차에서 내린 후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준호 씨 차는 어디 있어요? 아까는 차에서 내릴 때 저도 정신이 없었나 봐요.”소준호는 자신의 차로 달려가 장하리의 가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장하리는 가방을 받으며 자연스레 피아노 가게를 바라보았다.거대한 쇼윈도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가게 안의 서보겸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그 순간, 소파에 앉아있던 서보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그러나 장하리는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
다른 아이들은 아직 죽음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보겸은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혁은 한밤중에 술에 취해 인쇄된 장하리의 사진을 꺼내 오랫동안 침대에 앉아 묵묵히 사진을 닦은 적이 있었다.그때 잠에서 깨어난 서보겸은 동그란 눈을 뜨고 사진 속 여자를 쳐다보았다.그리고 서주혁이 서보겸에게 알려주었다.“이 사람이 바로 네 엄마야.”서주혁은 전에 휴대폰에 있는 장하리와 관련된 사진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정말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 삭제해버렸다. 하여 그 사진도 성혜인을 통해 겨우 얻은 사진이었다. 그때 성혜인에게 한참 동안 욕을 먹었던 건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그렇게 그 사진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장하리의 유일한 사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날은 서보겸이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알게 된 날이었다.과거, 서보겸은 마음속으로 엄마의 얼굴을 그리며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자신에게 물었다.엄마는 어떤 모습일까?왜 그를 보러 오지 않는 거지?자신이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해서?하지만 이 사진 속 여인은 분명 부드럽고 어여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보겸아, 아빠가 미안해. 네 엄마는 먼 곳으로 떠나 버렸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TV를 봤는데 보통 어른들이 아이에게 이 말을 할 때 사진 속의 사람은 죽었다는 뜻이다.흙 밑에 묻혀 어른들은 이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확실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 이후로 서보겸은 단 한 번도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만났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사진과 똑같은 모습으로.그리고 서주혁은 서보겸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곧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미 술에 취했을 때 아이에게 장하리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서보겸은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한눈에 기억했다.그러니 서주혁의 기억 속, 서보겸은 단 한 번도 장하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하여 지금도 엄마가 보
한참 뒤 3분 정도 지나서야 서주혁은 앞 좌석에 있던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CCTV를 확인해보세요.”“예, 대표님.”장하리는 아직 자신이 찍힌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온 후 여유롭게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그런데 그때, 유치원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최근에 강성 투자자의 아들이 유치원에 오기로 했는데 기회를 얻고 싶은 선생님은 신청서 한 장을 작성해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3대 이내의 가정 상황까지 명확하게 작성해야 하는 걸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장하리 선생님, 이건 절대 위조하면 안 돼요. 교육청에서 다 검사해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다들 여기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번 기회가 정말 좋은 기회라는 건 저희도 알아요. 그래서 이 말은 모든 선생님에게 말씀드렸어요. 다들 공정하게 경쟁하라고.”“양식은 각 선생님 메일로 전부 발송했으니 오늘 밤 9시까지 작성해서 제출하세요.”장하리는 원래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으니 재빨리 답장을 보내주었다.“죄송하지만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전 반응이 남들보다 반 박자 느려 신청하지 않겠습니다.”“확실해요? 만약 투자자 마음에 들면 당신에게 직접 별장 한 채를 선물할지도 모른다고요.”“확실해요. 신청하지 않겠습니다.”“그래요, 장하리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이 이 자리 하나 때문에 얼마나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지 모르죠?”그러나 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마디 얼버무리더니 단호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저녁 무렵, 그는 소준호와 함께 외식하기로 약속했기에 팩하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가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웬 고급 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보기만 해도 값어치가 꽤 될 것 같은 고급 차다.‘비록 이 동네가 강성시내의 부자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걸핏하면 몇십억짜리의 차를 몰만 한 사람은 없을 텐데...’그러자 곧바로 의심을 저 멀리 털어내고 장하리는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며 소준호를 기다렸다.같은 시각,
그 순간, 줄곧 미소를 짓고 있던 장하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이 사람 뭐지? 예의상 한 말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소준호도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더듬었다.“하지만 오늘은 좀...”이는 너무나도 명백한 거절이었고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의 말에 따라 순순히 넘어가 줄 것이다.그러나 서주혁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밥 먹으러 가실 거면 저도 끼워주시죠.”그 말에 소준호는 금방 알아차렸다. 아, 일부러 찾아온 거구나.그런데 왜? 어제 사간 피아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장하리는 소준호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바로 앞으로 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합니다. 저희도 두 사람만의 데이트라 외부인을 데려갈 수는 없어요. 정말 가이드가 필요하신 거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고 다른 날도 괜찮습니다.”여기까지 말했으면 눈치를 채고 물러가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서주혁은 오히려 복잡한 시선으로 장하리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볼 뿐이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남자는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당신들... 어떤 사이입니까?”목소리는 말라붙은 땅처럼 갈라져 있었고 눈 밑에 서린 감정은 조금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조금 이상해 보이는 서주혁의 모습에 장하리가 눈살을 찌푸리자 소준호가 다급히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세워주며 답했다.“대표님, 하리는 제 여자친구입니다. 혹시 피아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면 저희 가게에서 환불, 혹은 다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소준호는 장하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손을 잡는 것이었다.워낙 얼굴이 얇은 장하리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소준호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고 고개를 돌려 몰래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먼저 차에 타.”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타려고 돌아섰을 때, 서주혁의 언성이 높아지고 으름장을 놓는 듯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하리!”그 세 글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