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화가 치밀어 오른 성혜인은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따뜻한 품이 안겨 왔다.“겨우 조금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그 새로 여긴 왜 온 거야?”“승제 씨, 나 좀 도와줘요. 이 새끼 차로 치어 죽여줘요.”정말 너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이런 유치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성혜인의 가슴이 심한 기복을 이루었고 그녀는 당장이라도 신예준의 뺨을 한 대 더 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하지만 이미 배가 나온 뒤라 뺨을 때리려 괜스레 아이가 다칠까 뛸 수도 없었다.뻔뻔한 놈 같으니라고. 이 세상에 어떻게 이토록 파렴치한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화가 나 씩씩거리는 성혜인과는 반대로 신예준은 그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내가 죽어서 괴로운 사람도 결국 강민지예요. 그러니까 헛수고하지 말고 앞으로 남의 집안일에 참견하지 마시죠.”말을 마친 신예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젠장!젠장! 젠장! 젠장!성혜인은 너무 화가 나 눈앞이 흐려지고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최근 임신으로 인해 줄곧 잘 쉬지 못한 탓에 원래도 감정 기복이 불안정한 상태인데 신예준의 말까지 듣고 나니 정말 당장이라도 불에 태워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러자 반승제는 급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멀어져 가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던졌다.“화내지 마. 저 사람 일부러 우리 화나게 하려고 저렇게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혜인아, 진정하고 우리 심호흡 해보자.”“당신은 심호흡 말고는 할 말도 없는 거죠?”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반승제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양미간을 주물렀다.“아냐. 신예준은 분명 민지 씨를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민지 씨가 신예준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상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그러니 이 일은 우리가 참견해도 소용이 없어.”“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신예준이 강민지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겠는데요.”“싫으면 굳이 결혼
신예준은 그렇게 화장이 깨끗이 지워질 때까지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를 따랐다.그리고 비몽 사몽하게 잠에서 깬 강민지는 자연스럽게 전화 건너편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무력감은 또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번져나갔다.분명 더 이상 아프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듯 아파왔다.신예준 같은 남자는 1초 전까지만 해도 강민지를 지옥으로 보내놓고 1초 후에는 또 그녀를 천국으로 데려가곤 했다.강민지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강민지가 반항하지 않는 것은 신예준의 계획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 단지 정말 피곤했을 뿐이다.그리고 그 피곤함은 일종의 타협에 가까웠다.이윽고 강민지는 아주 빨리 잠이 들었다.한편, 강민지의 화장을 지워주고 뒤처리를 마친 후 샤워까지 끝낸 신예준은 묵묵히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그렇게 앞으로 3일 동안 강민지는 계속하여 멍한 상태로 돌아다녔다.결혼식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많은 사람이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휴대폰은 이미 신예준이 가져간 뒤였다.그리고 신예준이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답장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 후로는 아무도 그날의 일을 묻지 않았다.오히려 서민규가 회사에서 강등되어 지사로 보내진 것 같았다.그날부터 신예준은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물론 서민규는 잘 알고 있다. 서예나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아니었다면 신예준은 절대 이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전근 날, 바깥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민규는 캐리어를 끌어안고 계단을 내려가며 마침 많은 사람의 아첨을 받는 신예준과 마주하게 되었다.순간, 서민규는 두 손을 꾹 움켜쥐고 입술을 굳게 오므렸다.신예준은 다른 고위층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지시한 뒤 서민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서민규는 신예준이 곧바로 그를 향해 폭력을 쓰리라 예상했다. 신예준이 뼛속까지 악랄하고 음흉한 사람인 건 사실이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신예준은
짜증이 난 강민지는 쌩하고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그렇게 오후까지 자다가 의사가 찾아와 그녀에게 건강검진을 해준 뒤, 태아를 안정시키는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러자 그때, 강민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만약 제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지금 지우는 게 가장 좋죠?”강민지의 폭탄 발언에 겁에 질린 의사는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며 무의식적으로 신예준을 바라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신예준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고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민지를 쳐다보았다.“넌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면 내가 싫은 거야?”순간, 강민지는 심장이 멎는 느낌과 함께 신예준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반복해서 머릿속을 스쳤다.이런 무기력함은 너무 짜증 났지만 신예준의 함정에 타협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유리병에 갇힌 나비처럼 아무리 부딪혀도 그 장벽을 뚫을 수 없었다.의사는 감히 이 시점에서 뭐라 할 수 없어 조용히 물건을 챙겨 자리를 떴다.강민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의식적으로 배에 손을 올렸다.임신 초기였기에 배는 아직 평평한 상태였다.홀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강민지는 눈을 내리깐 채, 신예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곁에 앉더니 강민지의 어깨를 감싸며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었다.강민지는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지만 그에게 손이 닿자마자 되살아나는 촉촉한 느낌에 흠칫 몸을 떨었다.신예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그러자 강민지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재빨리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전에 그녀는 신예준이 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신예준은 분명 울고 있었다.하지만 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강민지도 많이 울었었다. 눈물이 마르도록 하염없이 슬픔을 토해냈었다.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이 바로 눈물이다.강민지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였다.그런데 신예준은 예상 밖으로 바로 그녀를 풀어주고는 양복 외투를 한쪽에 잡고
성혜인은 계속하여 몇 마디 쏘아붙였지만 신예준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자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그녀가 잠자코 입을 다물자 신예준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민지 좀 설득해주세요. 아이만큼은 제발 지켜달라고...”신예준의 부탁을 들은 성혜인은 너무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대체 무슨 근거로 제가 당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신 대표님, 무릎 꿇고 조금 간절하게 부탁하면 사랑꾼이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전 절대 당신 용서 못 해요. 당시 강상원 대표님께서 당신과 민지가 함께 하는 걸 동의하지 않았을 때도 민지가 무릎을 꿇었어요. 그러니 보세요. 무릎을 꿇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때로는 체면도, 존엄도 허무할 때가 있는 법이죠.”신예준은 입술을 오므린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한편, 성혜인은 신예준과 반승제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강민지가 왜 그렇게까지 신예준을 좋아했나 했더니...또다시 밀려오는 짜증에 그녀는 손을 들어 양미간을 주물렀다.“저한테 찾아와 무릎을 꿇을 시간이 있으면 민지에게 무릎을 꿇어보는 건 어때요? 제가 민지를 설득하면 민지도 제 말을 듣고 아이를 낳겠지만 아이를 낳은 후는요? 민지가 과연 그 아이를 사랑할까요? 저는 정말 모르겠네요. 민지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었어요. 그리고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누구보다 결단력 있게 그 감정을 끊어버렸죠.”“이 감정에서 가장 무고한 사람은 민지예요. 강상원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강상원을 찾아갔어야죠. 아무 죄 없는 민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을 사랑하고 결국 당신과 조희서에게 모욕을 당했잖아요. 민지가 예전에 얼마나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JM그룹을 점령한 동안, 이 바닥에서 누가 그녀를 비웃지 않았어요? 민지는 맨날 아버지 회사를 팔아버린 여자라고 손가락질당했다고요.”“어휴, 됐어요. 더 이상 다른 말은 하고 싶지 않네요. 신예준 씨가 정말 음흉하다는 건 인정할게요. 당신의
강민지가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데 도우미가 다가와 그녀에게 전했다.“대표님 식사도 좀 남겨놓을까요?”“아니요, 신예준은 바깥 공기나 실컷 먹으라고 해요.”도우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탁자를 닦고 있었다.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강민지는 침실로 돌아와 샤워했다.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 강상원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확실히 이 점은 신예준도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강상원은 확실히 그곳에 갇힌 것이 아니라 요양하러 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전문 의료진들이 그의 몸을 보살피고 있으니 강민지는 그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민지야, 뭐해?][이제 쉬려고요. 아빠, 몸은 좀 좋아지셨어요?][그럭저럭. 이번에 감옥에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강씨 집안 조상들에게 절을 해야 한다니까.]그러나 이 과정에 강민지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있다. 강상원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신예준과 그들의 원한을 더욱 확대하기 위함이었다.아니나 다를까, 강상원의 문자를 보자 강민지의 마음속 분노가 다시금 들끓어 올랐다.[아빠, 죄송해요. 이건 모두 제 잘못이에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상원은 곧바로 신예준의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그 녀석은?][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오늘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대로 미쳤나 봐요.]순간 마음이 편해진 강상원은 손을 들어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놓으며 무심코 맞은편 친구에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졌네.”그러자 상대는 욕설을 퍼부으며 손에 든 바둑알을 내려놓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여우 같으니라고. 이번 판은 내가 이길 수 있었다고.”옆에 앉아 바둑을 구경하던 다른 두 사람은 모두 참지 못하고 강상원에게 물었다.“자네 지금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야?”“민지.”“아, 그러고 보니 강상원 이 늙은 여우가 사윗감 하나는 기가 막히게 훌륭한 놈으로 찾았더라고. 너는 자식이 강민지 하나뿐인데 이 바닥에서 자네 재산을 노리고
부럽기는 개뿔.“우리 집 사정은 감옥에 가는 것보다 더 힘들어. 와이프가 아들을 낳았는데 재산을 좀 더 받기 위해 보름 전에 내 차에 약을 탔다니까. 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집사가 일찍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은 내 유골과 바둑을 둘 뻔했을 거야.”“누군 아니야? 내 막내딸은 최근에 남자 모델이 마음에 든다고 그 사람한테 600억을 꽂았다니까. 지금은 나한테 그 남자 모델한테 회사를 차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어. 잘 생기기라도 했으면 말을 안 해. 어휴, 말을 말자. 신씨 그 꼬락서니는 적어도 잘 생겼잖아.”“넌 가치관이 왜 그래? 멀쩡하게 생기면 다야? 멀쩡하게 생기면 장인어른을 감옥에 보내도 돼? 미리 말해두는데. 난 그 자식이 강씨네 별장에서 여기까지 무릎을 꿇고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모두가 화가 풀린 후에야 이 일을 끝낼 거야.”“걔가 왜 무릎을 꿇어? 신예준도 사고로 부모를 잃은 불쌍한 아이잖아.”말이 끝나자마자 강상원은 계좌번호를 부르며 성을 냈다.“1인당 2천만 원이니 그만들 하고 돈이나 보내.”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보냈다.그리고 여전히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었다.“강상원, 너 정말 신예준 그 자식의 속내를 몰랐어? 너 사람 보는 눈은 항상 정확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널 늙은 여우라고 말하겠어?”강상원은 돈을 받고 또 새로운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모두가 궁금해할 때,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신예준은 민지에게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그 녀석은 침착한 구석이 있어. 기층에서 그토록 모욕당해도 계속 버텨냈는데 난 한눈에 그가 큰일을 해낼 인물이라는 걸 보아냈지.”“그래서?”모두의 시선이 강상원에게로 향했다.“배경을 조사해보니 그 당시 일과 관련이 있었고 내 비서가 그에게 몇 통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을 발견했지. 그리고 신씨 그 녀석이 손을 썼어.”“비서? 너희 집 비서 윤지헌 아냐?”“그 사람 맞아. 나에게 오랫동안
강상원의 일기예보는 매우 정확했다. 그날 밤부터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강민지는 천둥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내려치며 탁탁 소리를 냈다.이윽고 아래층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신예준은 여전히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도우미는 그가 걱정되는 것인지 1층의 불을 켜두었다.곧이어 강민지는 매서운 눈빛으로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꽃다발을 발견했는데 빗물을 가득 머금은 꽃잎은 온 바닥에 흩뿌려졌다.커튼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강민지는 갑자기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기왕이면 하늘이 천둥을 몇 개 더 쳐서 신예준을 죽여버렸으면 좋겠다고.그런데 막상 천둥이 치기 시작하니 강민지는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만약에 진짜 죽으면 어떡하지?그녀는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흐리멍덩하게 잠이 들었다.깨어난 시간은 다음날 오전 10시였다.강민지는 곧 창가로 다가갔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신예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도우미가 옆에서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강민지는 일부러 못 본 척하며 식사를 이어갔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강민지는 놀러 가기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어떤 사람과도 만날 수 없었다. 어쨌든 반승제는 지금 성혜인을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어 성혜인이 몇 걸음만 걸어도 아이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시키곤 했다.하여 강민지는 결국 강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한참을 울려도 강연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상한 마음에 강민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강연지와 연락을 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갔다.그녀는 또 자신의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삼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직접 찾아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던 찰나, 강연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언니.”“연지야, 요즘 뭐해?”“학교에서 수업 보지.”강연지같이 소탈하고 자유로운 아이
유해은과 한서진이 모두 떠난 후, 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말해봐, 무슨 일이야?”그러나 강민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탁자 위의 과일을 바라보았다.“너 보러 왔지.”“네가 직접 운전했다고?”“응.”신예준의 일 때문에 찾아왔지만 막상 성혜인을 마주하니 신예준의 이름을 꺼내기가 어려웠다.전에 성혜인이 반승제와 싸울 때, 그녀는 항상 신예준은 얼마나 좋은지 자랑을 늘어놓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를 맞을 줄은 전혀 상상치 못했다.하여 강민지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신예준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되었다.이 바닥 안의 모든 사람은 강민지의 놀림거리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니, 심지어 그들은 이미 강민지의 놀림거리를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신예준 설마 아직도 집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아니지?”“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어제 신예준이 갑자기 네이처 빌리지에 찾아와서 털썩 무릎 꿇고 엉엉 울었다니까. 하도 울어서 난 또 연극 하는 줄 알았지.”마음속에 숨겨두고 있어 답답했었는데 성혜인이 농담 섞인 어투로 이렇게 말해주니 강민지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한껏 웃고 나니 스트레스도 많이 줄어든 기분이다.성혜인도 옆에 있던 도우미를 불러 과일을 깎아 오라고 당부했다.그때, 마침 반승제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말로는 짧은 회의가 있어 나가봐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벽에 있는 알람시계를 보고 몇 번씩이나 성혜인에게 맹세했다.“저녁 6시에 반드시 집에 도착할게.”말을 이어가며 반승제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이따 약은 잊지 말고 꼭 먹어. 그리고 의사 선생님과 내일 검진 예약을 잡았으니 12시에 한번 다녀오자. 아, 지난번에 네가 갖고 싶다던 유모차는 오후에 공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한 꽃은 3일이 지나면 바로 시들어 버린대. 그래서 배송으로 가져오면 신선하지 않아서 R국 쪽에 있는지 확인해 볼게.”신발을 갈아신고 문을 열며 반승제는 또다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