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성혜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여 반승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볼에 뽀뽀한 뒤, 성혜인을 꼭 껴안고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갔다.밤에 자기 직전,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창가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는 성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보일러를 켜 방 안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성혜인은 옷을 매우 얇게 입고 있었다.임신 탓인지 그녀의 몸매는 훨씬 둥글둥글해졌다.그러한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으며 반승제는 갑자기 마음이 산란해졌다.성혜인은 여전히 한서진과 최근 몇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반승제의 손길을 느끼자 곧바로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등 뒤에서 껴안은 거라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반승제는 그저 그렇게 머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성혜인이 전화를 끊고 그를 밀쳐내려는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분명 바디워시 냄새는 똑같은데 왜 너만 이렇게 향이 좋은 거지?”“그만 해요. 의사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나도 알아.”“그럼 뭘 그러게 비비적거려요. 결국, 당신만 괴로울 텐데.”너무나도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성혜인은 반승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불을 끄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성혜인의 미간이 계속하여 풀쩍거렸다.성혜인이 그를 세게 꼬집어 아픈 와중에도 반승제는 고통을 꾹 참고 동작을 이어갔다.정말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 상황에도 계속할 수 있다니.너무나도 우스워 성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정말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녀가 승낙했다고 생각한 반승제는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지고 있다.끝날 무렵, 반승제는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직접 정성스레 성혜인의 손가락을 닦아 주었다.그리고 침대에 누웠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혜인아, 우리 아이 이름 뭐로 지을래?”임신하면 자연스레 잠이 많아지는 탓에 성혜인은 너무 졸려 생각하기 싫었다.“나중에 생각하죠.”“이 일은 일찍 생각해두는
물론 서주혁도 그 게시물을 보고 간단하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축하해.”서주혁도 댓글을 달아줄 줄 반승제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젯밤에야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벌써 SNS를 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듯했다.곧이어 많은 사람의 축하 메시지가 연이어 쏟아져 내렸다.반승제는 일일이 답장하지 않고 방금 두 장의 사진을 성혜인에게 보내주었다.“혜인아, 너도 공개해.”“됐어요. 당신이 올렸으면 됐죠.”“안돼. 우리 친구들이 다 아는 사이는 아니잖아. 게다가 전에 인테리어 측 일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고객을 만났는데 그 사람 중에 널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누가 알겠어.”반승제의 갑작스러운 투정에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정말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니까. 성혜인과 반승제의 스캔들이 실검에 몇 번이나 올랐는데 누가 감히 그녀를 건드리겠는가?하지만 반승제가 옆에서 뚫어지라 지켜보고 있는지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진 두 장을 SNS에 올렸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하고 성혜인의 뒤통수를 잡고 그녀의 입술에 한참 동안 키스를 퍼부은 뒤에야 비로소 운전대를 잡았다.성혜인의 친구 중에는 아직 S. M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너도나도 축하 메시지를 전해왔다.쏟아지는 축하 메시지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한서진에게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라고 지시를 내렸다.만약 그녀가 들어가면 모두가 불편해할 수 있기에 성혜인은 직원 단톡방에 가입하지 않았다.보너스 소식에 단톡방은 또다시 한번 들끓어 올랐다.성혜인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반승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반승제 역시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지만 그와 달리 입꼬리는 절제된 듯 아주 살짝만 구부러져 있었다.성혜인도 덩달아 감명받아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리더니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름 아닌 강민지가 보낸 것이다.강민지는 먼저 펑펑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한참 동안 메시지 폭탄을 날렸다.[감동이
신예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강민지는 이미 집에 없었다. 도우미가 문을 열어준 것이다.신예준은 고개를 돌려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강민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도우미에게 물었다.“강민지는요?”“아가씨는 볼일이 있어 잠깐 외출하셨습니다.”벽에 있는 알람시계를 보니 저녁 6시였다. 이 시간이라면 원래 저녁 식사 시간이고 게다가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도우미는 진흙투성이가 된 그의 바짓가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선생님,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강씨 집안의 사람들도 모두 신예준 측의 사람들로 교체되었고 이전에 강씨 집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진즉 모두 해고당했다.그렇게 강 대표의 비서만 남게 되었고 현재는 신예준의 비서로 일하고 있다.“괜찮습니다.”오늘 밤이면 설날이지만 이 집에는 설날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가족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도, 그렇다고 폭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갑기만 할 뿐이었다.위층에 가서 옷과 바지를 갈아입고 내려가자 식탁에는 어느새 푸짐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가장 가운데를 장식한 주요리는 커다란 랍스타이다. 그전에는 강민지가 워낙 좋아해 신예준이 자주 해주던 요리였다. 그러나 사이가 틀어지면서 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신예준이 다시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지만 7시가 다 되도록 강민지는 집에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도우미가 문을 열어주자 신예준의 비서가 뚜벅뚜벅 걸어왔다.비서의 몸도 흠뻑 젖어있었는데 신예준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그러나 신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전히 말없이 한쪽 의자에 앉아있었다.도우미는 진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바지를 바라보며 군더더기 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으셨나요?”그러자 윤지헌이 신예준을 대신하여 해명했다.“급하게 돌아오는 길에 차가
신예준은 조희서를 거칠게 밀어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던 조희서는 눈가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신예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저녁 8시였다. 이제 4시간만 지나면 설날이었다.“희서야, 이제 그만 돌아가.”“싫어! 오빠, 왜 강민지랑 결혼하려는 거야?! 정말 이해할 수 없어.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전에 분명히 말했잖아. 그 여자에겐 사랑이 아니라 증오밖에 없다고. 오로지 복수 때문이라고 했잖아? 이제 그 여자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잖아. 우리 그냥 강씨 집안의 회사를 손에 넣고 그 여자를 쫓아내면 끝나는 건데, 왜 결혼까지 하려는 거냐고!”조희서는 얼굴이 광기로 일그러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예준은 아무 말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담배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보자 조희서의 얼굴빛이 금세 밝아졌다. 말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오빠, 사실 오빠도 나를 잊지 못하는 거잖아. 우리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예전엔 오빠도 나한테 정말 잘해줬잖아. 지금은 그저 강민지에게 홀린 것뿐이야. 그 여자만 쫓아내면 우리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내가 아들도 낳아줄게.”그러나 신예준은 옆에 서 있던 도우미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희서 씨를 집에 데려다줘요.”“신예준!”조희서는 순간 당황했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이후 무언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서서 신예준이 손에 쥔 담배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피 맛이 퍼졌다.그 시각 강민지는 물건을 가지러 잠시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손에 선물을 들고 문을 여니, 신예준이 서 있었다. 강민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예준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선물 상자로 향했다. 상자 위에는 정성스럽게 묶인 리본이 달려 있었다. 설날
강민지는 신예준을 힘껏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안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하지만 신예준은 멈추지 않았다.몸은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데 두 사람의 영혼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강민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억지로 키스 당하며 숨이 가빠졌다. 한참 후 신예준은 턱을 놓아주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만해!”“그만하라고!”감정이 없는 상태에서의 이런 행동은 더욱 고통스럽기만 했다. 강민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신예준은 상관하지 않은 채 강민지의 허리를 움켜쥐고 마치 부서뜨리기라도 할 듯이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모든 것이 끝난 후 강민지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해졌다. 강민지는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문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옆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예준이 손을 뻗어 휴지를 집어 강민지의 땀을 닦아주었다.“꺼져.”강민지는 잠긴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지쳐서 그를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그대로 잠이 들었다.신예준은 강민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꼭 눌러준 후 창가로 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밖은 여전히 춥고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담배 한 대로는 부족해 연달아 두 대를 피우며 신예준은 조용히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12시까지 10분이 남았을 때 신예준은 몸을 돌려 강민지를 깨웠다. 세 시간 동안 시달린 탓에 강민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다시 자려고 했다.“일어나서 불꽃놀이 보자.”신예준이 흔들어 깨우자 강민지는 짜증이 밀려와 이불로 머리를 덮어버렸다. 신예준이 이불을 벗겨내자 강민지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30분간의 휴식 덕분에 약간의 기운이 돌아왔지만 힘이 미약해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했다. 얼굴이 어두워지며 신예준은 강민지를 힘껏 끌어올렸다.“안 본다고! 이거 놔!”강민지는 강제로 침대에서 끌려 나왔다. 신예준은
그렇게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강민지가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는 또 다른 가방이 놓여 있었다.매번 그와의 일이 끝나고 나면 침대 옆에는 값비싼 선물이 놓여 있었다. 강민지는 오직 한 개의 가방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중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의외로 잘 팔렸다. 게다가 어떤 가방은 오히려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예전에는 가난한 청년이었던 신예준이 이제는 이렇게 손이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믿기 힘들었다.강민지는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가방을 찍어 중고 거래 단톡방에 올렸다.[8억.]거래자는 곧바로 가격을 제시했다.강민지의 통장은 이미 동결된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사용하는 것은 강연지의 카드였다.카드에는 벌써 120억이나 쌓여 있었다. 전부 신예준이 준 크고 작은 선물 덕분이었다.강민지는 그가 자신을 달래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애완동물처럼 길들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아마도 그는 마음속으로, 한때 모든 것을 가졌던 강씨 집안의 딸이 지금은 마치 매춘부처럼 그에게 복종하며 밤마다 품에 안겨 돈을 받아 가는 것을 생각하며 통쾌해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강씨 집안에 대한 복수인 것이다.강민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그녀에겐 돈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도, 또 강연지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녀는 이 유일한 사촌 동생을 도와야만 했다.강민지는 가방을 비닐봉지에 넣고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오늘은 설날 아침이었다. 신예준은 회사에 가지 않고 아래층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강민지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가정부가 입을 열었다.“아가씨, 아직 아침 식사를 안 하셨잖아요.”“먹지 않을 거예요.”강민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어젯밤 너무 심하게 시달려서 지금도 목이 쉰 상태였다.문을 열려고 할 때 신예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디 가?”최근 반달 동안 그가 그녀에게 수없이 물어봤던 말이다.강
“알았어, 언니.”강연지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묻어났다. 그 말을 들은 강민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어릴 때부터 이 사촌 동생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번 강씨 집안의 몰락에 삼촌 강상태도 큰 원인을 제공했지만 그렇다고 강연지와 완전히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강연지는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번지 점프, 레이싱, 스케이트 등 무엇이든 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롭게 여겨지는 수준이었다.“돈은 네 카드에 넣어뒀으니까, 알아서 써. 삼촌 일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신예준과 협력하다가 배신을 당해 강상태의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상태는 강연지를 자주 때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강연지가 친딸이 아니라고 의심하기까지 했다.강상원에게는 오직 강민지라는 딸 하나뿐이었다. 강연지도 집안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강상태는 외부에 사생아가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강상태는 강민지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강민지는 그가 신예준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연지야, 삼촌이 밖에 아들이 있다고 말하던데, 넌 혹시 알고 있었어?”강연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순간 강민지는 뭔가 복잡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연지야?”“언니, 이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앞으로는 우리 서로 연락 자제하자. 언니가 잘해준 거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신예준이 나한테 경고 문자를 보냈어. 언니, 이만 끊을게.”강민지는 초조했지만 이미 전화가 끊겨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강연지가 차단한 걸까?강민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연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는 것은 확신했다.한숨을 내쉬며 강민지는 이제 자신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까지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설날 아침, 강민지는 오후 4시까지 밖을 떠돌아다녔다.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민지 씨,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서민규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오늘은 설날 첫날이고 이 시간대면 다들 집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강민지는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강민지는 그를 무시하고 눈을 감으려 했지만 서민규가 차에서 내려 앞으로 다가와 우산을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눈을 다시 뜨고 평범한 외모의 그를 바라보며 문득 그가 신예준에게 준 약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신예준한테 준 약 부작용은 없나요?”서민규는 지금 제이엔 쥬얼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론 신예준이 그를 데려간 덕분이었다. 그는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그를 미워하는 상사 때문에 승진이 어려웠다. 지금은 신예준 덕에 제이엔 쥬얼리에 들어가서 바로 팀장 자리를 맡았고 제법 잘 해내고 있었다.“있죠. 하지만 예준이는 아마 내가 말하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약에 대해서는 민지 씨가 더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예준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죠? 그런데 예준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조희서예요. 처음에 강민지 씨에게 다가간 것도 조희서 씨의 수술 때문이었다고요.”서민규는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강민지가 여전히 신예준에게 미련을 두는 것이 싫었다. 이제 강민지네 회사를 손에 넣었으니 당연히 조희서와 결혼할 줄 알았는데, 신예준이 결혼 상대로 선택한 사람은 강민지였다.서민규는 속이 조금 불편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늘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이제는 팀장이 되었지만 신예준은 이미 대표 자리에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신예준은 외모까지 잘생겼으니... 이제 결혼하는 상대도 진짜 재벌가의 딸이었다. 당시에 강민지가 얼마나 신예준을 좋아했는지 다들 알았다. 어째서 모든 좋은 일은 신예준이 다 차지하는 것일까?친구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 안쓰럽지만 막상 그 친구가 나보다 더 잘 나가거나 좋은 차를 타면 은근히 배 아픈 법이다. 지금 신예준은 이미 돈과 권력을 다 가졌는데 여자 문
공지민은 온시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민을 따라가며 외쳤다.“지민아, 정말 의논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니? 우리 다 같은 가족인데,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잖아.”연승혁이 안정숙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맞아요, 누나. 그냥 남아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께서 누나 일로 오랫동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연씨 가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잖아요.”공지민의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챘다.그의 힘은 너무 강해서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온시환은 위험했다.안정숙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민아, 우리가 잘못했어. 네 정체만 밝히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네가 겪은 일이 많아서 이미 마음이 많이 변했을 거란 걸 잊었어. 하지만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앞으로는 승혁이가 널 잘 보호하게 할게. 너희 남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좀 해봐.”공지민은 돌아서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조금 쉬고 싶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래, 그래. 아직 상처도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온시환은 그녀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온시환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공지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온시환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공지민은 알고 있었다. 온시환은 이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연승혁에게 접근하여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공지민! 너 정말 미쳤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 이렇게
온시환은 연씨 가문으로 가는 길 내내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안정숙의 공지민에 대한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하지만 연씨 가문 내부의 사정을 뚜렷이 알 방법이 없었고 오늘 밤 직접 들어봐야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안정숙이 이유를 밝힐 것이다.차가 연씨 가문 저택 앞에 멈췄다. 한때 치열했던 상속권 싸움의 흔적이 떠올랐다. 연씨 가문의 다툼은 유독 잔혹했고 연승혁의 사촌 형제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몇 년 전 연씨 가문의 사건은 거의 ‘피바다’로 묘사될 정도였다.그 이야기를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온시환은 연승혁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잔혹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승혁이 현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 위를 딛고 올라섰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공지민을 부축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연씨 가문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가장 가까운 혈족은 이미 연승혁에 의해 정리된 상태였다.안정숙은 주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몇몇 남은 연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긴 테이블 양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승혁은 안정숙 옆에 앉아 있었는데, 공지민이 들어서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안정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지민아, 온시환, 둘 다 왔구나. 어서 앉아. 오늘은 그냥 가족끼리의 식사 자리야.”‘가족끼리의 식사?’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참고 있었다.그 대신 공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전부터 궁금했어요.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안정숙은 잠시 연승혁을 쳐다보고 나서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20여 년 전, 연씨 가문에서 아이 하나를 잃어버렸어. 그 아이는 내 손녀이자, 승혁이의 친누나였단다. 그 사건 이후 승혁이의 어머니는 깊은 상심에 빠져 세상을 떠났어. 내 남은 평생의 소원은 그 아이를 다시 찾는 것이었단다.”그 말이 떨어지자 온시환은
공지민은 온시환의 변화를 눈치챘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온시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는 억울한 듯 내가 너한테 빚진 거라도 있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 오늘 하루는 놀랍도록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러니 공지민도 일부러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예상외로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이틀 뒤, 공지민은 퇴원했고 다친 다리는 이제 집에서 요양하면 되는 상태였다. 온시환은 완전히 그녀의 전담 간호사가 되어 온종일 그녀를 보살폈다.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다른 사람 손 하나 빌리지 않았다.심지어 공지민이 목욕할 때조차 온시환이 직접 그녀를 안아 욕조에 옮겼다.처음에는 이런 극진한 보살핌이 익숙지 않아 공지민도 어색해했지만 온시환이 마치 그 일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다만 온시환이 그녀를 씻기다 말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며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다쳤거든요.”온시환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다친 네 근육을 풀어주려고 마사지해 주는 거잖아.”“근데 시환 씨 손이 지금 내 가슴 위에 있잖아요.”“가슴도 마사지해야지.”온시환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전혀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결국 공지민은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지쳐,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결국 온시환은 자신의 바람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일을 끝냈다. 공지민이 다쳤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히지도 않았다.온시환은 살며시 키스를 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우리 아이 하나 낳을까?”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욕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온시환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본능적으로 알았다. 두 사람은 곧 또다시 다툴 것이다.그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지난번에 너한테 사준 선물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연승혁 앞에서 자신의 연기가 통했을지 고민했다. 그녀가 그 당시 연예계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앞으로 연기를 해야 할 상황이 많을 테니까.적어도 자신이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그 후로 온시환은 공지민을 정성껏 돌봐주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씨 가문의 안정숙 어르신이 병문안을 왔다.온시환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안정숙이 병상 옆에 앉아 공지민의 안부를 묻고 다정한 말투로 챙기는 모습을 보자 온시환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은 어색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할머니,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요?”그녀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안정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냥 너와 특별히 인연이 깊은 것 같아서 그래. 지민아, 네가 몸이 좀 회복되면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오면 좋겠어.”온시환의 눈매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의 마음속에 위기감이 엄습했다.“어르신, 설마 승혁이가 지금 여자가 없다고 제 아내를 노리려는 건 아니죠? 참고로 저랑 지민이는 이미 혼인신고까지 한 사이랍니다. 승혁이가 저한테 전화했을 때부터 좀 이상하더라니까요. 언제부터 제 아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거죠?”안정숙은 살짝 입꼬리를 떨며 공지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연승혁과 약속한 대로 아직 진실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연승혁은 이번 주 동안 좀 더 조사하겠다고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이었다.“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내가 그런 사람이겠어? 난 그저 지민이가 순수한 아이 같아서 자네가 더 잘 대해줬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죠. 제 아내는 제가 알아서 잘 챙깁니다.”그는 공지민 옆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자, 여보. 물 좀 마셔.”온시환이 처음으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는 얼굴이 잔뜩 붉어졌지만, 안정숙이 진짜 공지민과 연승혁을 이어주려는 건 아닌
남자는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수치심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공지민이 냉큼 2층 난간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뭐 하는 거야?!”공지민은 난간에서 몸을 날리며 도발하듯 한마디를 던졌다.“오빠 바지 내가 벗겨버렸네. 근데 정말 별로다.”남자는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공지민은 1층으로 떨어지며 다리에 피가 맺힐 정도로 다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부리나케 폐공장을 빠져나갔다. 근처에 도로가 보이자 지나가던 차를 세워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폐공장 2층. 연승혁은 머리에 쓰고 있던 가발을 벗어 던졌다. 천천히 얼굴에 바른 까무잡잡한 분장을 휴지로 닦아내고 붙였던 눈썹과 수염도 떼어냈다. 그러고 나서 벗겨진 바지를 내려다보았다.‘좋아, 공지민. 제대로 기억해 두겠어.’연승혁은 바지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경호원은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서늘해졌다.방금 그의 바지가 벗겨지는 것을 봤을 때 경호원은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그 여자가 정말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연승혁이 멍해진 틈을 타 2층에서 뛰어내렸다.경호원은 이 여자가 대담한 건지,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형님...”연승혁은 가발을 휙 던지며 말했다.“돌아가자.”그는 공지민의 허벅지에 있는 꽃 모양 반점을 자세히 확인했다. 문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의 말이 맞을 터였다. 그녀는 연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딸, 그의 친누나일 가능성이 높았다.연승혁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공지민의 피부에서 느껴졌던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운전 중인 남자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형님,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누님이 맞을까요?”연승혁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내려놓았다.“그럴 가능성이 높지.”그런데 그녀의 성격이 꽤 거칠다고 생각했다.그는 공지민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연예계에 들어온 후로는 아주 조용히 지내며
공지민은 아침에 잠깐의 휴식을 마친 후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 한참을 돌아다녔다.연승혁이 언제 움직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녀를 압박하며 위협할 게 분명했다.그녀는 차를 골목 한쪽에 세운 뒤 물건을 사러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다가오는 덩치 큰 남자 몇 명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공지민은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눈을 떴을 때 눈 위에는 두꺼운 검은 천이 씌워져 있었고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당신들 누구야? 왜 날 납치한 거야?”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은 갔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마도 연승혁이 보낸 사람들이겠지.’그때 누군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생각보다 꽤 예쁘게 생겼네. 듣자 하니 연예인이라며? 아직 연예인이랑은 한 번도 안 해봤거든.”공지민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리며 몸을 뒤로 뺏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고 이내 그녀는 다시 그들에게 끌려갔다.“뭐야? 들리는 말로는 너 남자도 꽤 많이 만났다며? 설마 우리 같은 놈들은 마음에 안 드는 거냐?”공지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제 그녀는 이들이 정말 연승혁의 사람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만약 연승혁의 사람이었다면 연씨 가문이나 그녀의 태어날 때부터 있는 특징에 대해 추궁했을 텐데 이들은 단순히 그녀를 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곧바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혹시 원아정이 보낸 사람이 아닐까?원아정은 최근 큰 망신을 당했으니 분명 복수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손목에 묶인 밧줄은 이미 그녀의 피부를 파고들어 빨갛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남자가 말했다.“오, 아가씨 허벅지에 있는 그 모반 참 독특한데?”공지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그녀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모반을 언급했다는 건 이들이 연승혁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연승혁은 그녀를 진짜 해치지는 않을
“할머니, 이 일은 서두르지 마세요. 제가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하지만 안정숙이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그 애는 고등학교 때 부모님과 남동생까지 모두 잃었고, 혼자서 오랜 기간 괴롭힘을 당했어. 이미 사람을 시켜 당시 일을 조사했는데 부모님의 일은 확실히 사고였고 원아정이 그 애에게 한 짓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어. 이건 더 조사할 필요도 없어. 다만 골치 아픈 건 그 애가 이미 결혼했다는 거야. 게다가 결혼 상대가 온시환 그 방탕아라니, 내가 어찌 그놈이 갑자기 변했을 거라고 믿겠니.”연승혁은 안정숙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할머니, 저에게 일주일만 주세요. 이 일을 속속들이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공지민이 정말 제 누나라면 절대로 고생시키지 않겠습니다.”안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버지도 조사했는데 결론은 같아. 사흘 밖에 휴가를 안내서 지금 다시 일터로 돌아갔으니, 이 일은 너에게 맡길게.”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씨 가문 저택을 떠났다.그는 곧바로 사람들을 동원해 조사에 나섰다. 공지민의 고등학교 동창들에게까지 연락해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있다는 점 같은 태어날 때부터의 특징이 언제 생긴 것인지 알아보려 했다. 혹시 연씨 가문의 딸인 척하려고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허벅지 안쪽 같은 곳은 너무나 은밀한 위치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그때 연승혁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공지민과 결혼했고 이미 부부 관계를 가진 사이였다. 그는 그 특징을 봤을 가능성이 있었다.그런데 온시환은 사실 그 점을 전혀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공지민과의 달콤한 시간을 보낸 뒤 우연히 그 특징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이거 언제 문신했어? 그런데 문신 같지도 않은데.”공지민은 다리를 약간 뻗으며 대답했다.“원래부터 있었던 거예요.”“그래? 난 전에 본 적 없는 것 같은데.”“그건 시환 씨가 나한테 관심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공지민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 순간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며 손을 뻗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를 힘껏 밀쳤다.“꺼져. 당장 차에서 내려.”여자는 순간 당황했다. 예쁜 여자라면 누구든 좋아하고 게다가 절대 여자를 거부하지 않는 온시환이 갑자기 왜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여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리 보이는 공지민을 발견했다. 공지민 역시 온시환의 차를 알아보고는, 잠시 그의 쪽을 바라보더니 곧장 술집으로 들어가려 했다.온시환은 순간 다급해져 서둘러 차에서 내려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오해하지 마! 나랑 저 여자 아무 사이도 아니야!”공지민은 차갑게 대꾸했다.“오해? 시환 씨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요. 하루에도 몇 명씩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심지어 내 앞에서까지도요.”온시환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에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시선이 방금 전까지 차에 타고 있던 여자에게로 향했다.“여기 와서 네가 직접 설명해.”여자는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물러서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알던 온시환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난 갈게요.”그녀는 빠르게 근처 택시를 잡아 타고는 사라져버렸다.온시환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자의 이런 행동은 마치 현장에서 딱 걸린 사람이 급히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오히려 그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지민아, 난 정말...”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공지민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공지민!”온시환은 죄를 지은 강아지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지민을 쫓아갔다.하지만 공지민은 그가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녀는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고 온시환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한참을 걷고 난 뒤 그녀는 그가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대체 뭘 하려는 거죠? 왜 자꾸 따라와요?”“이 늦은
전화를 받은 공지민이 쇼핑몰에 있다는 말에 온시환은 곧장 그녀를 찾아갔다. 그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명품 브랜드의 물건들을 사주었지만 공지민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온시환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공지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자신이 우스웠다.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과거에 겪은 괴롭힘과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왜 지민이를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니, 왜 예전에 지민이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을까?’온시환은 자신을 자책했다.“이게 다 마음에 안 들면 해외 패션쇼에서 이번 시즌 신상을 직접 공수해 오라고 할게. 지민아, 너 이제 내 아내야. 그 정도는 좀 인식하고 살아줬으면 좋겠어.”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차에 올라타 있었고 뒷좌석에 쌓인 값비싼 선물들을 힐끗 본 뒤 마지못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난 사과를 좋아하는데 억지로 배를 쥐여주고 기뻐하라니, 그게 말이 돼요?”순간 자동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온시환은 핸들을 꽉 쥐며 낮게 말했다.“내가 너한테 빚졌어?”공지민을 기쁘게 해주려 할수록 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조금의 부드러운 말조차 하지 않았다.“내려.”공지민은 그 말에 굴하지 않고 문을 열어 대뜸 차에서 내렸다.온시환은 핸들을 세게 내려치며 잠시 고민했다. 그제야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그녀를 찾겠다고 나왔으면서 정작 그녀를 내쫓아버렸으니.그는 바로 차를 몰고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갔다. 공지민은 여전히 길가에 서 있었다.차창을 열며 그는 말했다.“타. 방금 한 말은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하지만 공지민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다른 골목으로 걸어갔다.“공지민!”온시환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차에서 내려 그녀를 뒤쫓았다. 하지만 그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공지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초조해진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