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백겸은 묵묵히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그와 나경택은 몇 년 동안 이렇게 한 테이블에서 식사한 적이 없었다.콜록콜록.나경택은 언제라도 기절할 것처럼 계속하여 기침해댔다.백겸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경택도 이제 정말 늙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예전에 나설희가 그에게 시집가겠다고 아우성칠 때까지만 해도 나경택은 직접 채찍을 휘두를 정도로 기력이 넘쳤다. 다만 그때 채찍을 휘두른 것은 시늉일 뿐이었고 사실 나경택은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아꼈었다.백겸이 이틀 동안 나씨 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도 나경택은 창가에서 그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나설희에게 말했다.“봐라, 저 녀석도 기껏해야 두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말 것이야. 스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절대 잊지 마. 너와 백겸은 함께 할 인연이 아니야. 백겸은 널 해칠 뿐이야.”“아버지. 제발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걸 믿으세요?”“그 스님의 점괘가 얼마나 정확한지 몰라서 그래? 그해 네 어머니가 아이를 임신하지 못했을 때도 스님은 나중에 딸을 낳을 거라고 하셨어.”나설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백겸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파 났다.그리고 나경택은 백겸이 절대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백겸의 고집은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셌고 나설희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마침내 무너지기 직전이 되자 나설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풀썩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저와 겸이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결혼 허락해주세요. 꼭 포동포동한 사내아이를 낳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때 가서 손자 얼굴을 보고 그와 놀아주며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나경택은 진심으로 나설희를 아껴주었다. 그런데 그런 딸이 덩달아 자신에게 무릎
창밖의 경보음은 계속되었고 온 하늘을 뒤흔들도록 울려 퍼지고 있었다.말을 마친 백겸은 떨리던 가슴을 멈추고 입가를 꼭 오므렸다.나경택은 몸이 너무 안 좋아 기침을 몇 번 했더니 기운을 모두 쓴 모양이다.그는 손에 든 편지를 건네주다가 부주의로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이제 멈춰라. 그리고 잘 봐. 이게 바로 네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이니.”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백겸이 그토록 오랫동안 쫓던 진실이 갑자기 나타나니 백겸은 감히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그러자 나경택은 부르르 떨면서 그의 손을 잡고 편지를 백겸에게 건네주었다.“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 주혁이와 승제 두 아이는 어릴 적부터 너도 함께 봐왔잖아. 설희가 그 두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넌 지금 뭘 하는 거냐? 주혁이를 죽이고 승제의 아내를 따라 죽게 하고 말이야. 게다가 승제의 아내는 지금 임신 상태잖아. 네가 저지른 죄는 이미 충분하다.”“그게 뭐 어때서요?”백겸의 대답은 매우 가벼웠다. 여전히 자신이 한 일에는 그 어떤 잘못도 없다는 모양이다.나경택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의 피를 손수건으로 닦았다.“보면 알 거다. 이제 난 주혁이와 혜인이를 데려갈 거다. 만약 날 막겠다면 나도 이 방에서 죽을 거다. 마침 설희와도 만날 수 있겠네.”나설희는 바로 이 작은 양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경택도 이미 완전히 지쳐버려 이제 그녀를 따라 떠나고 싶었다.백겸의 눈동자가 매섭게 움츠러들더니 그는 손에 든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편지 봉투를 열어보지 않고 천천히 서주혁이 누워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나경택을 바라보았다.옆에 있던 반재인이 다급히 그를 말리려 발걸음을 옮겼지만 백겸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당장이라도 나경택을 쏴 죽이고 싶었던 반재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러나 나경택은 겁도 없이 약물을 투여하던 사라의 손을 잡아버렸다.사라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백겸을 바라보았다.그러나 백겸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고 그조차
이것이 바로 나설희의 글씨이다. 백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글씨체... 예전에 두 사람은 몰래 편지를 주고받곤 했었다.순간적으로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지만 혹여나 종이가 흐트러질까 봐 천천히 힘을 풀었다.바깥의 경적 소리는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질 기세로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다른 사람들의 욕설도 은은히 들려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첫 글자부터 천천히 읽어보았다.[겸아, 미안해,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어떡하지? 겸이는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지금은 나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도 없네...][어머니께서 그 절이 매우 신통하다고 하셔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빌었는데 왜 나에게 아이를 주지 않는 거지...][그래서 임신한 척했어. 난 겸이를 너무 사랑하니까. 난 겸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겸이에게 빚 하나만 진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울 거야.][아이는 매우 귀엽지만 결국 나와 겸이의 아이가 아니야. 그 아이를 바라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나는 모든 사람을 속였어.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여자가 되어버렸네. 의사가 기적은 없다고 했어. 난 절대 임신할 수 없대. 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갔어. 그리고 올해는 집에 가지 않았지. 스님은 내가 완전히 영혼을 빼앗겼대. 이제 다른 사람의 아이를 봐도 모두 집에 데려가고 싶어졌어. 겸이와 닮은 아이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까.][미안해. 정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이건 다 내 잘못이야. 거짓말 한 번 하려면 수없이 많은 거짓말로 그걸 감싸야 해. 너무 고통스러워. 난 겸이를 사랑하지만 겸이를 가장 많이 속인 사람이 되어버렸어.][예전에는 나도 분명 착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런 일을 저질렀지? 이제 정말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 겸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이는 네 것이 아니야. 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이 모든 건 전부 다 가짜였어.]편지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말이었다. 결국
“선생님?”반재인은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지만 백겸은 계속하여 그 세 글자만 반복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틀렸어, 다 틀렸어. 내가 틀렸어.”“선생님, 기운 좀 내세요.”반재인은 깜짝 놀라 사라를 데려와 백겸의 상태를 보여주려 했지만 백겸은 계속하여 그를 밀어냈다. “선생님, 박사님께 진찰을 받으세요.”“재인아, 너도 이만 가. 주혁이와 혜인이를 데리고 같이 나가. 그 후에 오혜수를 찾아가면 오혜수가 널 위해 앞으로의 미래를 책임져 줄 거야.”“선생님, 이제 성공과 머지않았어요. 선생님께서 늘 이루고 싶어 하셨던 꿈이라고요.”그러나 모든 의지를 상실해버린 백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고 그의 얼굴은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다.“가. 그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 그리고 박사님 최면도 이제 풀어줘.”“선생님!”반재인은 줄곧 백겸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착한 아이 역할이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어떻게 이대로 포기한단 말인가.하지만 귀신에 씌기라도 한 듯 백겸은 굳건했다.“내 탓이야. 설희 잘못이 아니야. 다 내 잘못이었어.”그는 이미 자책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반재인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이윽고 백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다가와 반재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재인아, 네가 내 말을 듣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다.”그러자 반재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타임아웃을 외치고는 사라 더러 성혜인을 부축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그는 서주혁을 부축했다.“선생님, 확실합니까?”그러나 백겸은 마치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돌아오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반재인은 여전히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그런데 김상아는 그들과 달리 이맘때쯤 미쳐버리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들 무슨 뜻이에요? 왜 멈춰요? 전 반승제와 함께 있고 싶다고요. 전 죽더라도 그와 함께 할 거라니까요? ! 선생님, 저를
깊은 잠에서 깨어난 성혜인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기억 속에서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작은 공간뿐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네이처 빌리지였다.눈앞의 천장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손을 들어 미간을 문지르는데 밖에서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서 오혜수는 결국 어떻게 된 겁니까? ”“해임되지는 않았습니다. 백겸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위에서 회의한 끝에 그녀를 스파이로 두기로 했습니다. 최근 원진 대표님과 대항하던 검은 세력이 엄청나게 날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오혜수를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만약 그녀가 큰 공을 세우면 돌아온 뒤, 다시 승진할 수 있고요. 아마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정말 당시 백겸 씨의 첫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오혜수는 아직 너무 어리다. 이번 백겸의 계획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백겸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벌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그리고 스파이가 되는 것이 바로 그녀의 벌이다.반승제는 아직 성혜인이 잠에서 깬 줄 모른 채, 창가 쪽 서재에 앉아있었다.그는 앞에 있는 문서를 몇 번 내려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반재인은 오혜수와 함께 갔나요?”“반재인은 다른 임무를 수행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어쨌든 백겸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아이이니 현재는 국경에서 다친 병사들에게 심리적 최면을 걸어주고 있습니다.”그 말에 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반재인도 원하던가요?”“달가워하진 않더군요. 머리에 총을 겨눠서야 간 겁니다. 그리고 진세운과 진백운도 있습니다. 진세운도 그날 총에 맞았지만 진백운에게 끌려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김상아는 원래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이라 다시 감옥에 갇혔고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등을 뒤로 기댔다.그도 일어난 지 이제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뿐,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사라 박사는요?”“박사님께서는 석 달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주신다고 폐관하셨습니다
저녁 무렵, 반승제는 성혜인을 데리고 쇼핑을 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한편, 성혜인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거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밖에는 설우현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커다란 박스를 손에 들고 그녀를 향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혜인아, 이건 아버지가 보내온 새해 선물.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나도 몰라. 같이 열어보자.”사실 지난번에 기자회견을 연 것도 설우현이 억지로 버티면서 진행했던 거라 당분간은 몸조리를 좀 하며 쉬어야 하지만 곧 새해라는 것을 생각하여 바로 사람을 불러 미리 준비한 선물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그러자 성혜인도 서둘러 나가지 않고 옆에 앉아 가위로 선물을 잘라서 작은 구멍을 냈다.상자는 이미 뜯겨 있었고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0.5m 높이의 작은 인형이 들어있었는데 다이아몬드 하나하나가 모두 비싼 값어치를 자랑하고 있었다.그러나 설우현은 슬쩍 한 번 보고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윽, 촌스러워. 이렇게 촌스러운 선물은 정말 본 적이 없어.”이 인형의 모습은 성혜인이 아니라 웬 새해 마스코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광택에 선물을 여는 순간 성혜인은 순간 눈이 부셨다.마스코트 인형 볼 양쪽 루비는 최근 경매에서 받은 신상품으로 주최 측에서 이 예쁜 보석이 새해 마스코트 인형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정말 화를 냈을 것이다. 성혜인은 그 작은 인형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때로는 부자들의 안목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위층에서 내려온 반승제는 그 선물을 보고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다.“설 대표, 대체 뭘 준비한 겁니까? 심 비서, 당장 저 멀리 가져다 버려요. 우리 눈을 더럽히지 말고.”그러자 설우현은 갑자기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폭발했다.“오냐, 반 대표, 당신이 감히 이 선물을 욕해? 이건 우리 아버지가 직접 디자이너에게 주문을 맡겨 준비한 선물입니다. 모든 보석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값어치가 상당한 보물이
생각해보니 성혜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여 반승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볼에 뽀뽀한 뒤, 성혜인을 꼭 껴안고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갔다.밤에 자기 직전,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창가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는 성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보일러를 켜 방 안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성혜인은 옷을 매우 얇게 입고 있었다.임신 탓인지 그녀의 몸매는 훨씬 둥글둥글해졌다.그러한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으며 반승제는 갑자기 마음이 산란해졌다.성혜인은 여전히 한서진과 최근 몇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반승제의 손길을 느끼자 곧바로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등 뒤에서 껴안은 거라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반승제는 그저 그렇게 머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성혜인이 전화를 끊고 그를 밀쳐내려는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분명 바디워시 냄새는 똑같은데 왜 너만 이렇게 향이 좋은 거지?”“그만 해요. 의사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나도 알아.”“그럼 뭘 그러게 비비적거려요. 결국, 당신만 괴로울 텐데.”너무나도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성혜인은 반승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불을 끄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성혜인의 미간이 계속하여 풀쩍거렸다.성혜인이 그를 세게 꼬집어 아픈 와중에도 반승제는 고통을 꾹 참고 동작을 이어갔다.정말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 상황에도 계속할 수 있다니.너무나도 우스워 성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정말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녀가 승낙했다고 생각한 반승제는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지고 있다.끝날 무렵, 반승제는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직접 정성스레 성혜인의 손가락을 닦아 주었다.그리고 침대에 누웠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혜인아, 우리 아이 이름 뭐로 지을래?”임신하면 자연스레 잠이 많아지는 탓에 성혜인은 너무 졸려 생각하기 싫었다.“나중에 생각하죠.”“이 일은 일찍 생각해두는
물론 서주혁도 그 게시물을 보고 간단하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축하해.”서주혁도 댓글을 달아줄 줄 반승제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젯밤에야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벌써 SNS를 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듯했다.곧이어 많은 사람의 축하 메시지가 연이어 쏟아져 내렸다.반승제는 일일이 답장하지 않고 방금 두 장의 사진을 성혜인에게 보내주었다.“혜인아, 너도 공개해.”“됐어요. 당신이 올렸으면 됐죠.”“안돼. 우리 친구들이 다 아는 사이는 아니잖아. 게다가 전에 인테리어 측 일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고객을 만났는데 그 사람 중에 널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누가 알겠어.”반승제의 갑작스러운 투정에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정말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니까. 성혜인과 반승제의 스캔들이 실검에 몇 번이나 올랐는데 누가 감히 그녀를 건드리겠는가?하지만 반승제가 옆에서 뚫어지라 지켜보고 있는지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진 두 장을 SNS에 올렸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하고 성혜인의 뒤통수를 잡고 그녀의 입술에 한참 동안 키스를 퍼부은 뒤에야 비로소 운전대를 잡았다.성혜인의 친구 중에는 아직 S. M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너도나도 축하 메시지를 전해왔다.쏟아지는 축하 메시지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한서진에게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라고 지시를 내렸다.만약 그녀가 들어가면 모두가 불편해할 수 있기에 성혜인은 직원 단톡방에 가입하지 않았다.보너스 소식에 단톡방은 또다시 한번 들끓어 올랐다.성혜인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반승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반승제 역시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지만 그와 달리 입꼬리는 절제된 듯 아주 살짝만 구부러져 있었다.성혜인도 덩달아 감명받아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리더니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름 아닌 강민지가 보낸 것이다.강민지는 먼저 펑펑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한참 동안 메시지 폭탄을 날렸다.[감동이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
공지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무슨 일이시죠? 시환 씨를 찾으러 오셨다면 오늘 집에 없어요.”아침 일찍부터 온시환은 외출한 상태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난 누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누나, 정말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할머니가 오늘 아침 너무 상심하셔서 거의 쓰러질 뻔하셨어요.”연승혁은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입에 붙은 듯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부르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반면 공지민은 그 호칭이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그 호칭 좀 하지 마요.”연승혁은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아 정원에 활짝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지민과 그 꽃들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문득 과거에 자신이 창피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럼 뭐라고 부르죠?”연승혁은 깔끔한 외모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가의 십자 흉터는 그의 인상에 강인하고 냉혹한 분위기를 더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를 이국적인 매력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 돼요.”“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시던데.”그의 시선은 계속 공지민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누나, 원아정 때문이에요? 그래서 연씨 가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앞으로 원아정과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을 거라고.”공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게 이유 중 하나긴 해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다른 이유라니? 설마 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누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는 내가 다 처리할게요.”공지민은 앞에 핀 꽃 한 송이를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승혁 씨, 당신은 나를 연씨 가문에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를 시험하거나, 관찰
마치 자기기만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이미 온시환에게 약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그 감정이 더욱 커졌다.사실 온시환의 말은 맞았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앉아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속이려는 의도만 가득했다.온시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두 사람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를 바라보더니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공지민이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대체품으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는 걸까?온시환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녀를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그 뒤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잠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풀리면서 묵었던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지민아,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어?”“연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당장 들뜬 표정으로 연씨 가문에 들어갈 순 없어요. 그 사람들과 조금 더 연극을 해야 해요.”처음으로 공지민은 온시환 앞에서 자신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봤고 그의 눈에는 단지 부드러운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너 처음 연예계에 들어간 것도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였어?”공지민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분하게 보냈다.반면 연승혁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연기한 것이었다.“맞아요. 그렇다고 봐도 돼요. 언젠가 연기가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공지민이 수년간 연기를 했음에도 여전히 조연 배우에 머무른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 한마디의 여파는 매우 컸다. 온시환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공지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구은우를 위한 복수라는 목적뿐이었다. 그녀는 그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목숨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럼 온시환은 대체 뭘까?그가 한 모든 일은 결국 그녀의 눈에 광대짓에 불과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지민 역시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시환은 마침내 자신이 최근 느꼈던 불안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언젠가 그녀가 폭발할 것임을 예감했었다. 단지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을 뿐이다.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이제 공지민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속임수가 들통난다면 연승혁과 안정숙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임을 알아챌 것이고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공지민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두 사람을 무사히 속여 넘기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핸들을 꽉 쥐고 있던 온시환은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이번에는 공지민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질문이 들려왔다.“구은우를 위해 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 연승혁을 죽일 거야?”공지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죽이는 게 제일 좋겠지.”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네가 연승혁의 명목상 누나가 됐다고 해서, 연승혁이 너를 경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공지민, 넌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공지민은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적어도 지금은 기회가 있어.”온시환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내일이면 더는 그녀를 안을 수 없을 것처럼.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더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그런
공지민은 온시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민을 따라가며 외쳤다.“지민아, 정말 의논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니? 우리 다 같은 가족인데,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잖아.”연승혁이 안정숙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맞아요, 누나. 그냥 남아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께서 누나 일로 오랫동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연씨 가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잖아요.”공지민의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챘다.그의 힘은 너무 강해서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온시환은 위험했다.안정숙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민아, 우리가 잘못했어. 네 정체만 밝히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네가 겪은 일이 많아서 이미 마음이 많이 변했을 거란 걸 잊었어. 하지만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앞으로는 승혁이가 널 잘 보호하게 할게. 너희 남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좀 해봐.”공지민은 돌아서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조금 쉬고 싶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래, 그래. 아직 상처도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온시환은 그녀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온시환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공지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온시환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공지민은 알고 있었다. 온시환은 이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연승혁에게 접근하여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공지민! 너 정말 미쳤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