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서 깨어난 성혜인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기억 속에서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작은 공간뿐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네이처 빌리지였다.눈앞의 천장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손을 들어 미간을 문지르는데 밖에서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서 오혜수는 결국 어떻게 된 겁니까? ”“해임되지는 않았습니다. 백겸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위에서 회의한 끝에 그녀를 스파이로 두기로 했습니다. 최근 원진 대표님과 대항하던 검은 세력이 엄청나게 날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오혜수를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만약 그녀가 큰 공을 세우면 돌아온 뒤, 다시 승진할 수 있고요. 아마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정말 당시 백겸 씨의 첫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오혜수는 아직 너무 어리다. 이번 백겸의 계획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백겸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벌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그리고 스파이가 되는 것이 바로 그녀의 벌이다.반승제는 아직 성혜인이 잠에서 깬 줄 모른 채, 창가 쪽 서재에 앉아있었다.그는 앞에 있는 문서를 몇 번 내려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반재인은 오혜수와 함께 갔나요?”“반재인은 다른 임무를 수행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어쨌든 백겸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아이이니 현재는 국경에서 다친 병사들에게 심리적 최면을 걸어주고 있습니다.”그 말에 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반재인도 원하던가요?”“달가워하진 않더군요. 머리에 총을 겨눠서야 간 겁니다. 그리고 진세운과 진백운도 있습니다. 진세운도 그날 총에 맞았지만 진백운에게 끌려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김상아는 원래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이라 다시 감옥에 갇혔고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등을 뒤로 기댔다.그도 일어난 지 이제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뿐,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사라 박사는요?”“박사님께서는 석 달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주신다고 폐관하셨습니다
저녁 무렵, 반승제는 성혜인을 데리고 쇼핑을 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한편, 성혜인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거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밖에는 설우현이 서 있었다.설우현은 커다란 박스를 손에 들고 그녀를 향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혜인아, 이건 아버지가 보내온 새해 선물.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나도 몰라. 같이 열어보자.”사실 지난번에 기자회견을 연 것도 설우현이 억지로 버티면서 진행했던 거라 당분간은 몸조리를 좀 하며 쉬어야 하지만 곧 새해라는 것을 생각하여 바로 사람을 불러 미리 준비한 선물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그러자 성혜인도 서둘러 나가지 않고 옆에 앉아 가위로 선물을 잘라서 작은 구멍을 냈다.상자는 이미 뜯겨 있었고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0.5m 높이의 작은 인형이 들어있었는데 다이아몬드 하나하나가 모두 비싼 값어치를 자랑하고 있었다.그러나 설우현은 슬쩍 한 번 보고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윽, 촌스러워. 이렇게 촌스러운 선물은 정말 본 적이 없어.”이 인형의 모습은 성혜인이 아니라 웬 새해 마스코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광택에 선물을 여는 순간 성혜인은 순간 눈이 부셨다.마스코트 인형 볼 양쪽 루비는 최근 경매에서 받은 신상품으로 주최 측에서 이 예쁜 보석이 새해 마스코트 인형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정말 화를 냈을 것이다. 성혜인은 그 작은 인형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때로는 부자들의 안목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위층에서 내려온 반승제는 그 선물을 보고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다.“설 대표, 대체 뭘 준비한 겁니까? 심 비서, 당장 저 멀리 가져다 버려요. 우리 눈을 더럽히지 말고.”그러자 설우현은 갑자기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폭발했다.“오냐, 반 대표, 당신이 감히 이 선물을 욕해? 이건 우리 아버지가 직접 디자이너에게 주문을 맡겨 준비한 선물입니다. 모든 보석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값어치가 상당한 보물이
생각해보니 성혜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여 반승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볼에 뽀뽀한 뒤, 성혜인을 꼭 껴안고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갔다.밤에 자기 직전,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창가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는 성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보일러를 켜 방 안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성혜인은 옷을 매우 얇게 입고 있었다.임신 탓인지 그녀의 몸매는 훨씬 둥글둥글해졌다.그러한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으며 반승제는 갑자기 마음이 산란해졌다.성혜인은 여전히 한서진과 최근 몇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반승제의 손길을 느끼자 곧바로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등 뒤에서 껴안은 거라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반승제는 그저 그렇게 머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성혜인이 전화를 끊고 그를 밀쳐내려는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분명 바디워시 냄새는 똑같은데 왜 너만 이렇게 향이 좋은 거지?”“그만 해요. 의사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나도 알아.”“그럼 뭘 그러게 비비적거려요. 결국, 당신만 괴로울 텐데.”너무나도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성혜인은 반승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때, 반승제는 불을 끄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성혜인의 미간이 계속하여 풀쩍거렸다.성혜인이 그를 세게 꼬집어 아픈 와중에도 반승제는 고통을 꾹 참고 동작을 이어갔다.정말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 상황에도 계속할 수 있다니.너무나도 우스워 성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정말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녀가 승낙했다고 생각한 반승제는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지고 있다.끝날 무렵, 반승제는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직접 정성스레 성혜인의 손가락을 닦아 주었다.그리고 침대에 누웠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혜인아, 우리 아이 이름 뭐로 지을래?”임신하면 자연스레 잠이 많아지는 탓에 성혜인은 너무 졸려 생각하기 싫었다.“나중에 생각하죠.”“이 일은 일찍 생각해두는
물론 서주혁도 그 게시물을 보고 간단하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축하해.”서주혁도 댓글을 달아줄 줄 반승제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젯밤에야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벌써 SNS를 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듯했다.곧이어 많은 사람의 축하 메시지가 연이어 쏟아져 내렸다.반승제는 일일이 답장하지 않고 방금 두 장의 사진을 성혜인에게 보내주었다.“혜인아, 너도 공개해.”“됐어요. 당신이 올렸으면 됐죠.”“안돼. 우리 친구들이 다 아는 사이는 아니잖아. 게다가 전에 인테리어 측 일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고객을 만났는데 그 사람 중에 널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누가 알겠어.”반승제의 갑작스러운 투정에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정말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니까. 성혜인과 반승제의 스캔들이 실검에 몇 번이나 올랐는데 누가 감히 그녀를 건드리겠는가?하지만 반승제가 옆에서 뚫어지라 지켜보고 있는지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진 두 장을 SNS에 올렸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하고 성혜인의 뒤통수를 잡고 그녀의 입술에 한참 동안 키스를 퍼부은 뒤에야 비로소 운전대를 잡았다.성혜인의 친구 중에는 아직 S. M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너도나도 축하 메시지를 전해왔다.쏟아지는 축하 메시지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한서진에게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라고 지시를 내렸다.만약 그녀가 들어가면 모두가 불편해할 수 있기에 성혜인은 직원 단톡방에 가입하지 않았다.보너스 소식에 단톡방은 또다시 한번 들끓어 올랐다.성혜인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반승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반승제 역시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지만 그와 달리 입꼬리는 절제된 듯 아주 살짝만 구부러져 있었다.성혜인도 덩달아 감명받아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리더니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름 아닌 강민지가 보낸 것이다.강민지는 먼저 펑펑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한참 동안 메시지 폭탄을 날렸다.[감동이
신예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강민지는 이미 집에 없었다. 도우미가 문을 열어준 것이다.신예준은 고개를 돌려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강민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도우미에게 물었다.“강민지는요?”“아가씨는 볼일이 있어 잠깐 외출하셨습니다.”벽에 있는 알람시계를 보니 저녁 6시였다. 이 시간이라면 원래 저녁 식사 시간이고 게다가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도우미는 진흙투성이가 된 그의 바짓가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선생님,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강씨 집안의 사람들도 모두 신예준 측의 사람들로 교체되었고 이전에 강씨 집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진즉 모두 해고당했다.그렇게 강 대표의 비서만 남게 되었고 현재는 신예준의 비서로 일하고 있다.“괜찮습니다.”오늘 밤이면 설날이지만 이 집에는 설날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가족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도, 그렇다고 폭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갑기만 할 뿐이었다.위층에 가서 옷과 바지를 갈아입고 내려가자 식탁에는 어느새 푸짐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가장 가운데를 장식한 주요리는 커다란 랍스타이다. 그전에는 강민지가 워낙 좋아해 신예준이 자주 해주던 요리였다. 그러나 사이가 틀어지면서 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신예준이 다시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지만 7시가 다 되도록 강민지는 집에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도우미가 문을 열어주자 신예준의 비서가 뚜벅뚜벅 걸어왔다.비서의 몸도 흠뻑 젖어있었는데 신예준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그러나 신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전히 말없이 한쪽 의자에 앉아있었다.도우미는 진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바지를 바라보며 군더더기 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으셨나요?”그러자 윤지헌이 신예준을 대신하여 해명했다.“급하게 돌아오는 길에 차가
신예준은 조희서를 거칠게 밀어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던 조희서는 눈가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신예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저녁 8시였다. 이제 4시간만 지나면 설날이었다.“희서야, 이제 그만 돌아가.”“싫어! 오빠, 왜 강민지랑 결혼하려는 거야?! 정말 이해할 수 없어.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전에 분명히 말했잖아. 그 여자에겐 사랑이 아니라 증오밖에 없다고. 오로지 복수 때문이라고 했잖아? 이제 그 여자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잖아. 우리 그냥 강씨 집안의 회사를 손에 넣고 그 여자를 쫓아내면 끝나는 건데, 왜 결혼까지 하려는 거냐고!”조희서는 얼굴이 광기로 일그러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예준은 아무 말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담배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보자 조희서의 얼굴빛이 금세 밝아졌다. 말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오빠, 사실 오빠도 나를 잊지 못하는 거잖아. 우리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예전엔 오빠도 나한테 정말 잘해줬잖아. 지금은 그저 강민지에게 홀린 것뿐이야. 그 여자만 쫓아내면 우리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내가 아들도 낳아줄게.”그러나 신예준은 옆에 서 있던 도우미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희서 씨를 집에 데려다줘요.”“신예준!”조희서는 순간 당황했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이후 무언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서서 신예준이 손에 쥔 담배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피 맛이 퍼졌다.그 시각 강민지는 물건을 가지러 잠시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손에 선물을 들고 문을 여니, 신예준이 서 있었다. 강민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예준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선물 상자로 향했다. 상자 위에는 정성스럽게 묶인 리본이 달려 있었다. 설날
강민지는 신예준을 힘껏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안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하지만 신예준은 멈추지 않았다.몸은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데 두 사람의 영혼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강민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억지로 키스 당하며 숨이 가빠졌다. 한참 후 신예준은 턱을 놓아주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만해!”“그만하라고!”감정이 없는 상태에서의 이런 행동은 더욱 고통스럽기만 했다. 강민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신예준은 상관하지 않은 채 강민지의 허리를 움켜쥐고 마치 부서뜨리기라도 할 듯이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모든 것이 끝난 후 강민지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해졌다. 강민지는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문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옆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예준이 손을 뻗어 휴지를 집어 강민지의 땀을 닦아주었다.“꺼져.”강민지는 잠긴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지쳐서 그를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그대로 잠이 들었다.신예준은 강민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꼭 눌러준 후 창가로 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밖은 여전히 춥고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담배 한 대로는 부족해 연달아 두 대를 피우며 신예준은 조용히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12시까지 10분이 남았을 때 신예준은 몸을 돌려 강민지를 깨웠다. 세 시간 동안 시달린 탓에 강민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다시 자려고 했다.“일어나서 불꽃놀이 보자.”신예준이 흔들어 깨우자 강민지는 짜증이 밀려와 이불로 머리를 덮어버렸다. 신예준이 이불을 벗겨내자 강민지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30분간의 휴식 덕분에 약간의 기운이 돌아왔지만 힘이 미약해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했다. 얼굴이 어두워지며 신예준은 강민지를 힘껏 끌어올렸다.“안 본다고! 이거 놔!”강민지는 강제로 침대에서 끌려 나왔다. 신예준은
그렇게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강민지가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는 또 다른 가방이 놓여 있었다.매번 그와의 일이 끝나고 나면 침대 옆에는 값비싼 선물이 놓여 있었다. 강민지는 오직 한 개의 가방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중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의외로 잘 팔렸다. 게다가 어떤 가방은 오히려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예전에는 가난한 청년이었던 신예준이 이제는 이렇게 손이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믿기 힘들었다.강민지는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가방을 찍어 중고 거래 단톡방에 올렸다.[8억.]거래자는 곧바로 가격을 제시했다.강민지의 통장은 이미 동결된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사용하는 것은 강연지의 카드였다.카드에는 벌써 120억이나 쌓여 있었다. 전부 신예준이 준 크고 작은 선물 덕분이었다.강민지는 그가 자신을 달래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애완동물처럼 길들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아마도 그는 마음속으로, 한때 모든 것을 가졌던 강씨 집안의 딸이 지금은 마치 매춘부처럼 그에게 복종하며 밤마다 품에 안겨 돈을 받아 가는 것을 생각하며 통쾌해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강씨 집안에 대한 복수인 것이다.강민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그녀에겐 돈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도, 또 강연지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녀는 이 유일한 사촌 동생을 도와야만 했다.강민지는 가방을 비닐봉지에 넣고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오늘은 설날 아침이었다. 신예준은 회사에 가지 않고 아래층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강민지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가정부가 입을 열었다.“아가씨, 아직 아침 식사를 안 하셨잖아요.”“먹지 않을 거예요.”강민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어젯밤 너무 심하게 시달려서 지금도 목이 쉰 상태였다.문을 열려고 할 때 신예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디 가?”최근 반달 동안 그가 그녀에게 수없이 물어봤던 말이다.강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