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은 거의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자살이라니.하지만 나설희는 확실히 자살한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백겸도 모른다.그는 줄곧 자신의 결혼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내와 부부 관계가 화목하고 아들도 활발하게 잘 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해봐도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후 나경택과 아내는 너무 슬퍼 바로 이 구역에서 물러나며 더 이상 외부 일을 상대하지 않았다.그렇게 백겸도 그때부터 명목상의 장인어른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리고 현재 백겸은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나경택을 보고 나서야 나설희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나경택의 모습은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긴 노인처럼 심지어 걸을 때도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아마도 백겸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백겸은 순간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섰고 나경택은 곧바로 집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옆에 있는 반재인에게 알렸다.“재인아, 네가 내려가서 어르신께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전해라.”반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뛰쳐나갔다.백겸은 나경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반재인을 바라보았는데 나경택은 숨을 헐떡이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이윽고 반재인은 다시 백겸에게 뛰어왔고 조금 망설이는 듯 말을 더듬었다.“선생님, 어르신께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어르신의 부인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즉 선생님의 장모님 말씀입니다. 어르신께서 선생님께 전해주고 싶은 편지가 있으시다는데 나설희 사모님께서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직접 선생님께 주고 싶다고 합니다.”나설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 관한 수수께끼가 잔뜩 남아 있었다.처음 3년 동안 백겸은 계속하여 꿈을 꾸었다. 아주 작은 기억부
나경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백겸은 묵묵히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그와 나경택은 몇 년 동안 이렇게 한 테이블에서 식사한 적이 없었다.콜록콜록.나경택은 언제라도 기절할 것처럼 계속하여 기침해댔다.백겸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경택도 이제 정말 늙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예전에 나설희가 그에게 시집가겠다고 아우성칠 때까지만 해도 나경택은 직접 채찍을 휘두를 정도로 기력이 넘쳤다. 다만 그때 채찍을 휘두른 것은 시늉일 뿐이었고 사실 나경택은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아꼈었다.백겸이 이틀 동안 나씨 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도 나경택은 창가에서 그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나설희에게 말했다.“봐라, 저 녀석도 기껏해야 두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말 것이야. 스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절대 잊지 마. 너와 백겸은 함께 할 인연이 아니야. 백겸은 널 해칠 뿐이야.”“아버지. 제발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걸 믿으세요?”“그 스님의 점괘가 얼마나 정확한지 몰라서 그래? 그해 네 어머니가 아이를 임신하지 못했을 때도 스님은 나중에 딸을 낳을 거라고 하셨어.”나설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백겸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파 났다.그리고 나경택은 백겸이 절대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백겸의 고집은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셌고 나설희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마침내 무너지기 직전이 되자 나설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풀썩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저와 겸이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결혼 허락해주세요. 꼭 포동포동한 사내아이를 낳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때 가서 손자 얼굴을 보고 그와 놀아주며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나경택은 진심으로 나설희를 아껴주었다. 그런데 그런 딸이 덩달아 자신에게 무릎
창밖의 경보음은 계속되었고 온 하늘을 뒤흔들도록 울려 퍼지고 있었다.말을 마친 백겸은 떨리던 가슴을 멈추고 입가를 꼭 오므렸다.나경택은 몸이 너무 안 좋아 기침을 몇 번 했더니 기운을 모두 쓴 모양이다.그는 손에 든 편지를 건네주다가 부주의로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이제 멈춰라. 그리고 잘 봐. 이게 바로 네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이니.”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백겸이 그토록 오랫동안 쫓던 진실이 갑자기 나타나니 백겸은 감히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그러자 나경택은 부르르 떨면서 그의 손을 잡고 편지를 백겸에게 건네주었다.“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 주혁이와 승제 두 아이는 어릴 적부터 너도 함께 봐왔잖아. 설희가 그 두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넌 지금 뭘 하는 거냐? 주혁이를 죽이고 승제의 아내를 따라 죽게 하고 말이야. 게다가 승제의 아내는 지금 임신 상태잖아. 네가 저지른 죄는 이미 충분하다.”“그게 뭐 어때서요?”백겸의 대답은 매우 가벼웠다. 여전히 자신이 한 일에는 그 어떤 잘못도 없다는 모양이다.나경택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의 피를 손수건으로 닦았다.“보면 알 거다. 이제 난 주혁이와 혜인이를 데려갈 거다. 만약 날 막겠다면 나도 이 방에서 죽을 거다. 마침 설희와도 만날 수 있겠네.”나설희는 바로 이 작은 양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경택도 이미 완전히 지쳐버려 이제 그녀를 따라 떠나고 싶었다.백겸의 눈동자가 매섭게 움츠러들더니 그는 손에 든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편지 봉투를 열어보지 않고 천천히 서주혁이 누워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나경택을 바라보았다.옆에 있던 반재인이 다급히 그를 말리려 발걸음을 옮겼지만 백겸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당장이라도 나경택을 쏴 죽이고 싶었던 반재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러나 나경택은 겁도 없이 약물을 투여하던 사라의 손을 잡아버렸다.사라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백겸을 바라보았다.그러나 백겸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고 그조차
이것이 바로 나설희의 글씨이다. 백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글씨체... 예전에 두 사람은 몰래 편지를 주고받곤 했었다.순간적으로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지만 혹여나 종이가 흐트러질까 봐 천천히 힘을 풀었다.바깥의 경적 소리는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질 기세로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다른 사람들의 욕설도 은은히 들려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첫 글자부터 천천히 읽어보았다.[겸아, 미안해,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어떡하지? 겸이는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지금은 나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도 없네...][어머니께서 그 절이 매우 신통하다고 하셔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빌었는데 왜 나에게 아이를 주지 않는 거지...][그래서 임신한 척했어. 난 겸이를 너무 사랑하니까. 난 겸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겸이에게 빚 하나만 진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울 거야.][아이는 매우 귀엽지만 결국 나와 겸이의 아이가 아니야. 그 아이를 바라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나는 모든 사람을 속였어.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여자가 되어버렸네. 의사가 기적은 없다고 했어. 난 절대 임신할 수 없대. 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갔어. 그리고 올해는 집에 가지 않았지. 스님은 내가 완전히 영혼을 빼앗겼대. 이제 다른 사람의 아이를 봐도 모두 집에 데려가고 싶어졌어. 겸이와 닮은 아이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까.][미안해. 정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이건 다 내 잘못이야. 거짓말 한 번 하려면 수없이 많은 거짓말로 그걸 감싸야 해. 너무 고통스러워. 난 겸이를 사랑하지만 겸이를 가장 많이 속인 사람이 되어버렸어.][예전에는 나도 분명 착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런 일을 저질렀지? 이제 정말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 겸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이는 네 것이 아니야. 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이 모든 건 전부 다 가짜였어.]편지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말이었다. 결국
“선생님?”반재인은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지만 백겸은 계속하여 그 세 글자만 반복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틀렸어, 다 틀렸어. 내가 틀렸어.”“선생님, 기운 좀 내세요.”반재인은 깜짝 놀라 사라를 데려와 백겸의 상태를 보여주려 했지만 백겸은 계속하여 그를 밀어냈다. “선생님, 박사님께 진찰을 받으세요.”“재인아, 너도 이만 가. 주혁이와 혜인이를 데리고 같이 나가. 그 후에 오혜수를 찾아가면 오혜수가 널 위해 앞으로의 미래를 책임져 줄 거야.”“선생님, 이제 성공과 머지않았어요. 선생님께서 늘 이루고 싶어 하셨던 꿈이라고요.”그러나 모든 의지를 상실해버린 백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고 그의 얼굴은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다.“가. 그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 그리고 박사님 최면도 이제 풀어줘.”“선생님!”반재인은 줄곧 백겸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착한 아이 역할이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어떻게 이대로 포기한단 말인가.하지만 귀신에 씌기라도 한 듯 백겸은 굳건했다.“내 탓이야. 설희 잘못이 아니야. 다 내 잘못이었어.”그는 이미 자책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반재인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이윽고 백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다가와 반재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재인아, 네가 내 말을 듣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다.”그러자 반재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타임아웃을 외치고는 사라 더러 성혜인을 부축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그는 서주혁을 부축했다.“선생님, 확실합니까?”그러나 백겸은 마치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돌아오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반재인은 여전히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그런데 김상아는 그들과 달리 이맘때쯤 미쳐버리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들 무슨 뜻이에요? 왜 멈춰요? 전 반승제와 함께 있고 싶다고요. 전 죽더라도 그와 함께 할 거라니까요? ! 선생님, 저를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