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준이 집에 들어서자 강민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민지에게 인내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침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준아, 침실로 와.”신예준이 침실로 걸어가자 침대 머리맡에 섹시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강민지가 보였다. 강민지는 일어나서 한 바퀴 돌며 물었다.“어때, 예뻐?”강민지는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교제한 지도 세 달이 넘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늘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이런 옷을 입어본 그녀는 신예준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신예준은 문가에 서서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다. 방 안에서 가장 밝은 조명은 꺼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만 켜져 있어 분위기가 더욱 묘했다. 강민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아직 말 안 했잖아. 예뻐?”신예준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예뻐.”“정말?”강민지는 그의 반응이 궁금해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러나 신예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그 순간 강민지는 달콤한 감정이 밀려오며 손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었고, 그것도 밤새도록 이어졌다.하지만 신예준은 강민지와 함께할 때마다 항상 눈에 안대를 씌우거나 등을 돌리게 했다. 강민지는 자세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끔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침대 위에서 그는 감정을 깊이 숨기고 있었다.그다음 달 동안 신예준은 그녀에게 무척 잘해주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데리러 갔고, 그녀의 아파트에 있을 때면 항상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해주었다. 그들의 생활은 마치 신혼부부 같았다. 그런 시간은 반승제가 귀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강민지는 원래 성혜인을 만나려고 했지만 신예준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쉬워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 신예준이 너무 바쁘다 보니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성혜인을 다시 만난 것은 성혜인이 네이처 빌리지의 리모델링을
강민지는 일상생활에 완전히 서툰 사람이었다. 혼자서 생활하는 법을 전혀 몰랐고, 집에서는 가정부가 옆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밥을 어떻게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예준과 함께 있을 때면 그가 자연스럽게 이런 일들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하지만 신예준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강민지가 일상생활에 서툴다고 해서 그가 이런 것들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신예준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지만 강민지는 등 뒤에 있어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예준아, 너 갈비찜도 했어?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신예준은 손에 쥔 빗자루를 꽉 쥐었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지가 그의 앞에 다가와 물었다.“왜 웃어?”“네가 혼자 있을 때면 과연 밥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지금까지 강민지는 죽과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다. 죽도 겨우 한 번 해본 게 전부였다.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신예준은 거의 이틀에 한 번씩 그녀에게 밥을 해주었고, 그녀가 배달 음식을 시킬까 봐 걱정되어 다음 날 먹을 것까지 미리 준비해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자레인지 사용법도 가르쳐 주어, 그녀는 그냥 도시락을 꺼내 데우기만 하면 되었다.그래서 집에 돌아가지 않은 몇 개월 동안 강민지는 처음 아팠을 때 몇 킬로그램 빠졌던 몸무게가 다시 불어나고 오히려 1.5킬로그램이나 더 찌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신예준 덕분이었다.“못하지. 네가 있잖아?”게다가 강민지는 집이 잘 살기 때문에 굳이 직접 요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신예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을 깨끗이 닦고 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이 아파트의 화장실은 매우 좁았다. 신예준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동안 강민지와 함께한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는 강민지를 감정적으로 속인 것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철저히 돌봐주었다. ‘유능한 보모’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그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지만 어쩔
강연지는 원래 심심해서 영상 통화를 걸었고, 이제는 화면 앞에서 계속 헬멧을 닦고 있었다. 강민지는 그런 강연지가 정말 어이없었다. “강연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기나 해?”“알지, 언니 생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전화한 거야. 생일 선물은 집으로 보냈어. 축의금은 카톡으로 보냈고.”강민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나마 양심은 있네. 이제 끊는다. 나 케이크 먹으러 갈 거야.”“언니, 올해는 생일 파티 안 해? 예전엔 케이크가 열 층이나 됐는데, 한 번도 안 먹었잖아. 살찔까 봐 안 먹는다며?”“그때랑 이번엔 달라. 이번 케이크는 예준이가 직접 만들어 준 거거든. 이런 완벽한 남자가 또 있을까 싶어. 뭐든지 다 잘해. 너도 예준이가 요리할 때 모습이나 슈트 입은 모습을 봤어야 해. 내가 지난번에 2천만 원짜리 슈트를 사줬는데, 아직 꺼내지도 못했어. 조금 있다 그걸 선물하고 4만 원짜리라고 속인 다음에 침대로 유인해야지.”강연지는 더 이상 듣기 힘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사랑에 빠지면 모든 걸 거는 성격인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 많다는 것도.“끊을게. 진짜 끊는다. 난 아직 그런 얘기 들을 나이가 아니거든.”강민지는 다 자랑하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거실로 돌아갔을 때 신예준은 이미 저녁상을 차려놓았다.강민지는 그대로 의자에 앉아 젓가락도 들지 않고 턱을 괸 채 그가 주방에서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오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신예준은 식탁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4인치짜리 케이크를 꺼내어 거실의 불을 껐다.“민지야, 소원 빌어.”촛불이 켜지자 강민지는 이번에 빌 소원을 조금 고민하게 되었다. 매년 그녀의 생일이면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고, 그때마다 소원을 대충 넘겼다. 이미 그녀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신예준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직시할 용기가 없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진지했다. 촛불이
거실로 돌아왔을 때 강민지는 이미 씻고 소파에 누워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신예준은 현관에 걸어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던 중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예준아, 나도 오늘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일단 먼저 씻고 와.”신예준은 반신반의하며 씻고 나왔다. 그는 소파 위에 놓인 슈트 한 벌을 보았다.신예준은 강민지 앞에서 이런 브랜드를 모르는 척했다. 그녀는 그가 정말 모르는 줄 알고 매번 수억 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녔다.이번에 준비한 옷도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패션쇼에서 선보인 신상으로 국내에는 아직 출시되지도 않았다.“이거 한 번 입어봐. 백화점 지나가다가 샀는데, 너한테 딱 어울릴 것 같았어. 너 슈트 입으면 정말 멋지잖아. 우리 이거 입고 하자.”강민지는 정말 기대에 가득 차 있었고, 자기 말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강민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솔직한 편이었다. 처음 몇 번은 조심스러운 척했지만 나중에는 직접적으로 행동하며 그를 이끌었다. 그녀는 슈트를 들고 그를 침실로 끌고 갔다.침실 안에는 그녀가 뿌린 향수의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신예준은 침대에 밀려 앉았고, 강민지는 슈트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얼른 갈아입어봐. 보고 싶어.”신예준은 이런 상황에서 말을 잘 듣는 편이었기에 바로 옷을 입었다. 그는 키가 컸고, 이 옷은 탄탄한 역삼각형 체형을 완벽하게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강민지는 속으로 환호했다. 자기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처음 그를 쫓아다니며 고생한 것도 충분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멋졌다!강민지는 손을 뻗어 넥타이를 잡고 신예준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를 맞추기 위해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한쪽 무릎을 꿇어봐.”신예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었다. 강민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을 천천히 들어 그의 가슴에 올렸다.마음속으로는 내일 이 브랜드의 모든 슈트를 신예준에게 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남자를
강민지는 신예준에게 밀려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거의 침대에 주저앉을 뻔했다.“예준아?”신예준은 어두운 얼굴로 서 있다가 곧바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강민지도 약간 화가 났다. 이 몇 달 동안 신예준은 그녀를 극진히 대해주었다. 처음 일 주일 동안은 분명히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 후로는 언제나 그녀에게 양보하며 맞춰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를 밀치고 혼자 나가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도대체 왜 이래? 선물을 주는데도 기분이 안 좋아? 오늘 내 생일이란 말이야...”강민지의 생일이면 항상 강씨네 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사치스러움은 과히 엄청났다. 지금은 그저 남자에게 슈트를 입혀보고 싶은 건데, 그는 완전히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신예준은 이미 문가에 다다랐지만 그녀가 생일을 언급하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저 몇 초간의 망설임만 있었을 뿐 그는 이내 거실로 빠르게 걸어 나가더니 그대로 집을 나갔다.강민지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고 심지어는 이별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과 냉장고에 남아 있는 반쪽짜리 케이크를 보자 조금씩 화가 누그러졌다.뭐, 아직 이별할 정도는 아니지. 신예준은 여전히 자신에게 잘해주고 있으니까.신예준은 아파트 아래로 내려가 담배를 피웠다. 그는 강민지 앞에서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녀가 담배 냄새를 참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지금 신예준은 여러 대를 연달아 피워도 속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서민규가 사는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신예준은 평소 매우 절약하며 살았고 대부분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했으며 택시를 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택시비가 비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신예준은 서민규의 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서민규는 문을 열고 그를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직접 약을 가지러 올 정도야? 대체 얼마나 자주 했길래 벌써 다 써버렸어? 참, 부럽다.”서민규의 방은 매우 작아서 두 사람이 서 있으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소파 위에는 옷들이
강민지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성은 자신이 조금 과장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잠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때 맞장구를 쳤다.“사실 맞아요. 민지 씨 남자 친구 정말 잘생겼어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봤던 잘생긴 남학생과는 비교도 안 돼요. 민지 씨,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멋진 남자를 만난 거예요?”남자 친구가 칭찬받자 강민지는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그녀가 첫눈에 반한 남자다웠다. 막 대답하려던 찰나 사람들의 화제가 바뀌었다.“잘생기긴 했는데, 듣자 하니 정식 직업은 없고 계속 아르바이트만 한다면서요? 그것도 여러 개를 한다던데, 완전 가난한 거 아니에요?”“안타깝네. 집안 형편만 좋았어도 그 남자를 선택할 사람은 많았을 텐데.”“이 정도로 잘생겼으면 돈 많은 여자들이 많이 접근했겠죠? 그래도 민지 씨한테는 꽤 충실한 것 같던데요.”“요즘 세월에 충실함이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2억이 더 낫지.”강민지는 이 무리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원래 신예준 때문에 여기에 일하러 온 것이었고, 평소에는 사람들과 잘 지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지금 모두가 각자 한마디씩 하는데 겉으로는 잡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를 비꼬아 평생 가난하게 살 운명이라는 듯, 가슴을 찌르는 말들이었다.강민지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곧 한 직원의 남자 친구가 여러 개의 우산을 가지고 왔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우산을 받았지만 강민지만 받지 못했다.그 남자는 처음에 강민지에게도 우산을 주려 했지만 여자 친구에게 눈치를 받자 머쓱해하며 다시 가져갔다.결국 여기에는 강민지 혼자만 남았다. 그녀는 점점 더 화가 나고, 점점 더 서러워졌다.강민지는 휴대폰을 꺼내 망설임 없이 신예준의 대화창을 열어 세 글자를 보냈다.[헤어져!!!]막 메시지를 보낸 순간 그녀는 멀리서 누군가가 우산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바로 신예준이었다.아마도 메시지 알림 소리 때문에 그는 휴대폰을 꺼내 누가 보낸 메시지인지 확인하려는
집에 도착하자 강민지는 차에서 내렸다. 신예준은 우산 절반을 강민지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끼고 꼭 붙어서 작은 아파트로 들어갔다.목욕을 마친 후 강민지가 물었다. “오늘 출근했어?”“응.”“네가 입은 슈트 멋지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아니, 다들 바빴어.”강민지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정말 눈썰미가 없는 사람들이야.’신예준은 오늘 밤 서민규에게서 받은 약을 강민지 모르게 몇 알 삼켰다. 그러나 약병 뚜껑을 막 닫으려는 순간 강민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거 매번 먹는 거 뭐야? 비타민이야?”병에 비타민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강민지는 신예준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 쑥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다.“비타민이야. 그냥 재미로 먹는 거지.”신예준은 병을 치우고 강민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강민지는 신예준의 얼굴을 보며 그의 다크서클이 예전보다 더 짙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최근에 잠을 잘못 잔 거야?”“아니. 근데 지금 그런 거 물어볼 때야?”강민지는 미소를 지으며 신예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그래. 이제 안 물어볼게.”둘은 곧 침대에서 뒤섞였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기꺼이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했다.땀방울이 신예준의 코끝을 타고 흘러내려 강민지의 가슴에 떨어졌다.강민지의 눈동자가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듯 번뜩이더니 곧이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신예준은 그녀를 끌어올려 품에 안았다. 강민지는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에 그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예준아, 너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 일이 너무 고된 거 아니야? 평소에는 또 날 돌보느라 쉬지도 못하고. 아니면 내가 요리라도 배워볼까?”신예준은 바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시계는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예준은 옆에 놓인 옷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창문을 열고 팔꿈치를 창틀에 얹은 그는 깊은 눈빛으로
신예준은 10여 분이 지나서야 병실로 돌아갔다.희서는 안색이 좋지 못했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전엔 병문안 올 때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으면서. 오빠 저 여자 좋아해?”“아니야.”그는 옆 의자에 앉아 능숙하게 희서를 위해 사과를 깎아주었다.희서는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예쁘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오빠랑 동료란 말이야?”“전엔 부잣집 아가씨였는데, 지금은 파산했어.”그제야 조희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있는 집안 사람 같더라니.“그래도 좀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전에 부잣집 사람들은 노는 것도 방탕하다고 들었어. 혹시 저 사람이 오빠를 마음에 두었을까 봐 겁나. 오빤 저런 사람들 상대가 아닌걸.”신예준은 조용히 사과를 깎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조희서는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 신예준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있었다.신예준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그에게 꼭 희서를 잘 보살피고 꼭 희서와 결혼해야 한다고 당부했었다.신예준의 아버지는 희서네 운전기사였다.희서의 부모님은 모두 신예준의 아버지가 운전기사였을 당시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신예준의 아버지 역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후에 신예준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아들이 보는 앞에서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불과 한 달 만에 희서는 부잣집 자제로부터 부모님을 잃은 고아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회사는 제이엔 쥬얼리에 인수되었고 이는 희서의 한평생 아픔이었다.부모가 없었기에 회사는 빠르게 인수되었고 그녀와 신예준은 서로 의지하기 시작했다.신예준의 어머니는 모든 게 남편의 잘못이라 생각했고 투신하기 전 신예준에게 당부했다.“희서를 잘 돌봐줘. 우리 가족이 조씨 집안에 빚졌어. 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희서가 고아가 될 일도 없었어. 엄마가 부탁할게. 너 혼자 두고 가는 거, 내가 이기적이란 걸 알아. 하지만 정말 이제 더 견디지 못하겠다.”어머니의 당부 때문에 이 몇 년간 신예준은 그녀에게 한 치의 실수도 범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그러나 희서가 몸을 내주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