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준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강민지는 볼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곧 그녀의 앞은 다시 캄캄해졌다. 신예준이 안대를 씌운 것이었다.“예준아?”강민지는 신예준이 나가는 소리에 이어, 물을 받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뭐 먹고 있어?”“비타민.”신예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강민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신예준이 몸을 눌러올 때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쌌다.한 번의 정사가 끝난 후 강민지는 신예준의 품에 안겨 숨을 헐떡였다.신예준은 침대에 더 누워있지 않고 주방으로 가서 차가워진 음식을 다시 데웠다.강민지는 이제 정말로 배가 고팠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힘이 빠진 채로 나왔다. 식탁 앞에 가서 앉자 음식이 이미 데워져 있었다.신예준이 막 앉으려는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아마 조희서가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몰랐다.신예준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는 강민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나 좀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 너 혼자 먼저 먹어.”강민지는 지금 몸이 편치 않았다. 사람이 약해질 때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 사람이 남자 친구라면 더욱 그랬다.그러나 강민지는 이미 신예준의 일을 방해했다고 생각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신예준은 서둘러 떠났다. 그가 나가는 순간 강민지는 그가 한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가 차려준 음식을 보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자신이 너무 생각이 많았다고 여긴 강민지는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신예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강민지는 옆에 있는 휴대폰를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였다. 그가 집으로 바로 돌아간 걸까?강민지가 전화를 걸려던 찰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전화기 너머에서 신예준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민
강민지는 자신의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며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렸다.신예준은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기절시킨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강민지의 얼굴에는 아직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순간 그가 그녀에게 달려왔다.“조심해!”이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그녀를 단숨에 품에 안았다.강민지의 머리에 떨어질 뻔했던 돌이 신예준의 머리에 떨어졌다.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신예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돌을 던진 남자를 발로 차냈다.남자는 땅에 쓰러져 신음하며 신예준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신예준, 너 지금 뭐 하는지 알아? 네가 어떻게 그 여자를 보호할 수 있어. 너는...”강민지는 신예준이 다시 앞으로 나가려 하자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그만해, 예준아. 이제 그만해. 나 다치지 않았어, 정말이야. 이러다 사람 죽겠어.”강민지는 전에도 신예준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모습은 여유가 넘쳤다. 그러나 오늘 밤 그는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남자는 계속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신예준이 강민지의 손을 뿌리치고 다가오자 입을 닫았다.차가운 신발에 얼굴과 턱을 걷어차인 남자는 턱이 탈구되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신예준의 눈에는 짙은 어둠이 깃들었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강민지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다 그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다치게 된 것이다.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옆에 멍하니 서 있는 택시 기사를 바라보았다.“어서 사람을 살려요, 사람을!”택시 기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신예준을 병원으로 데려갔다.신예준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강민지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고 곧바로 강상원의 비서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리고 그녀는 강상원에게는 알리지 말고 조용히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늦은 밤에 문제를 일으켰다면 강상원이 또 뭐라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 이 일은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
강민지는 아파트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옷에 묻은 핏자국을 내려다보니 피는 거의 말랐지만 콧속에는 아직도 비릿한 피 냄새가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샤워를 한 뒤 근처 마트로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지난번에 신예준이 면을 많이 먹지 않았던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면 대신 죽을 만들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하나하나 레시피를 찾아가며 채소와 고기를 넣어 죽을 끓였다.중간에 죽이 너무 묽어져서 한 번 실패했지만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도전했고 이번에는 딱 알맞은 농도로 죽이 완성되었다.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한 입 맛보았을 때 손가락이 냄비 가장자리에 닿아 물집이 생겼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정성스럽게 죽을 담아 병원으로 돌아갔다.이리저리 시간이 지체되어 벌써 아침 6시 반이 되었다. 죽을 들고 병실로 들어가니 신예준이 보이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곧바로 병실을 나가서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신예준이 문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어디 갔다 온 거야?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움직이지 말랬잖아.”돌에 맞아 생긴 상처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녀는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졌다.“괜찮아. 화장실에 다녀왔어.”강민지는 보온 용기를 옆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밴드가 붙어 있었다.“예준아, 와서 아침 좀 먹어.”신예준은 보온 용기 속의 죽을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아, 민지야. 그나저나 그 녀석들 때문에 너무 걱정돼.”강민지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자신의 신분을 고백할까, 고민했지만 신예준의 다음 말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래도 네가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을지 걱정했을 거야.”고백하려던 말이 그대로 목에 걸렸다.“왜? 부잣집 아가씨면 더 좋은 거 아니야?”신예준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말했다.“그럼 너랑 만날 자신이 없었겠지. 결과가 뻔한데, 괜히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신예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희서야, 더는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아.”조희서는 다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난 그저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의사 말로는 이번 수술에 전문의를 초빙해야 한다고 하던데,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맥도 필요해.”“내가 해결할게.”신예준은 다시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죽을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넌 몸만 잘 돌보면 돼.”“그럼 약속해 줘. 아무리 바빠도 자주 와서 날 봐준다고. 나 혼자 있으면 정말 너무 답답해.”“알았어.”강민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을 때 이미 몇 명의 간호사들이 타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간호사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위층 그 여자 정말 운도 좋아. 다른 남자 같았으면 분명 짐이라 생각하고 벌써 버리고 도망갔겠지.”“약혼자가 잘생기고 또 얼마나 다정한지, 아무리 피곤해도 꼭 와서 보고 간대. 이런 좋은 남자를 어디 가서 찾지?”“언제면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까? 그런 잘생긴 남자와 잠깐이라도 입맞출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그녀들은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강민지는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강상원의 전화로 가득 차 있었다.아버지는 여러 번 그녀에게 가난한 남자와 얽히지 말라고 경고했었고, 신예준 역시 부잣집 아가씨와 연애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제 이 속임수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강상원은 그녀를 아끼긴 했지만 이런 원칙적인 문제에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강민지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말했다.“회장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민지는 곧바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서재 문을 열자 강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밤중에 어떻게 그런 곳을 돌아다녀?”“아빠, 연지가 요즘 시합이 있잖아요. 나도 오토바이에 관심이 생겨서 연지한테 태워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걔가 친구의 전화를 받고 급히 가야 했거든요. 친구한테 급한 일이
강민지는 미소를 지으며 한숨에 먹고 싶은 음식 몇 가지를 말했다. 신예준의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저녁에 만들어 줄게. 이미 퇴원했어.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뛰지만 않으면 문제없대.]강민지는 이내 그를 용서했다.[좋아, 그럼 지금 당장 갈게.]강민지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 방 문을 열고 강상원에게 간단히 말한 뒤 밖으로 나섰다. 예전에도 그녀는 자주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밖에 별장이 있었고, 강상원도 구속하지 않았다.강민지는 버스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갔다. 일부러 사람을 시켜 고급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채소를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예준이 요리하는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따뜻해졌다.강민지는 주방 문 앞에 서서 신예준이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으로 칼을 잡고 다른 손으로 채소를 누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뒤에서 그를 꼭 껴안았다. “너도 다쳤잖아. 요리하지 말고 차라리 우리 그냥 배달시키자.”신예준은 허리 쪽에 감긴 그녀의 손을 보며 눈빛이 잠깐 어두워졌다.“괜찮아. 가서 앉아 있어.”강민지는 고개를 그의 등에 묻으며 말했다. “나가기 싫어.”신예준은 칼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뒤의 조리대를 받치고 강민지에게 키스했다.주방에는 세제 냄새가 났다. 신예준은 주방을 아주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다. 강민지는 그의 몸에서 나는 살냄새까지 느낄 수 있었다.신예준의 향기는 따뜻하고 깨끗한 느낌이었지만 그 깨끗함 속에는 은근히 차가운 기운이 숨어 있었다. 강민지는 그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반시간 동안이나 키스하고 나서야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거실로 걸어갔다.신예준은 다시 주방에서 바삐 돌아쳤다. 강민지는 소파에 앉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강민지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신예준의 표정은 무척 담담했다. 마치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요리가 끝나자 그는 식탁에 차려 놓았다. 강민지는 도와주려고 서둘러 나섰
강민지는 더 이상 묻지도, 신예준의 친구들을 소개받겠다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그가 반대로 그녀의 친구들에 대해 물어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신예준은 곧바로 조희서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조희서는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예준아, 나 사과 먹고 싶어.”신예준은 예전처럼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여전히 능숙했다. 조희서의 눈빛이 순간 밝아졌다. “한 마리 더 깎아줘.”신예준은 과일칼을 사용해 또 하나의 사과 토끼를 깎아냈다. 그 모양은 정말 정교하고 생동감 있었다.하지만 강민지에게 준 사과는 그냥 대충 깍둑썰기한 것에 불과했다. 그에게 있어 강민지를 달래려고 일부러 토끼 모양을 깎아줄 이유는 없었다.강민지는 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이 신예준과 진지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성혜인이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그녀와 연락했을 때 강민지는 이미 신예준과 사귄 지 3개월이 지나 있었다.강민지는 성혜인과 마주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은 너희들에게 소개해 줄 수 없어. 너는 신예준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도 모를 거야.”성혜인은 연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강민지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올 때도 항상 컴퓨터를 들고나와 디자인 수정을 하고 있었다.강민지는 성혜인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들이밀며 그녀의 입에 치즈 한 조각을 넣어주었다.“혜인아, 내가 듣기로 반승제가 해외에서 돌아온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드디어 명의상 남편을 만나게 되는 건가? 그런데 그 자식이 자기 첫사랑을 데리고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네.”성혜인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아주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응, 맞아. 반승제 할아버지가 돌아오라고 했대. 첫사랑을 데리고 올지는 나도 정말 모르겠어.”강민지는 과일을 먹으면서 한숨을 내쉬고 성혜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너는 슬프지도 않아? 그래도 그 사람은 명의상 네 남편이잖아.”성혜인은 키보드를 치는 손
신예준이 집에 들어서자 강민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민지에게 인내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침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준아, 침실로 와.”신예준이 침실로 걸어가자 침대 머리맡에 섹시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강민지가 보였다. 강민지는 일어나서 한 바퀴 돌며 물었다.“어때, 예뻐?”강민지는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교제한 지도 세 달이 넘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늘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이런 옷을 입어본 그녀는 신예준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신예준은 문가에 서서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다. 방 안에서 가장 밝은 조명은 꺼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만 켜져 있어 분위기가 더욱 묘했다. 강민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아직 말 안 했잖아. 예뻐?”신예준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예뻐.”“정말?”강민지는 그의 반응이 궁금해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러나 신예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그 순간 강민지는 달콤한 감정이 밀려오며 손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었고, 그것도 밤새도록 이어졌다.하지만 신예준은 강민지와 함께할 때마다 항상 눈에 안대를 씌우거나 등을 돌리게 했다. 강민지는 자세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끔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침대 위에서 그는 감정을 깊이 숨기고 있었다.그다음 달 동안 신예준은 그녀에게 무척 잘해주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데리러 갔고, 그녀의 아파트에 있을 때면 항상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해주었다. 그들의 생활은 마치 신혼부부 같았다. 그런 시간은 반승제가 귀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강민지는 원래 성혜인을 만나려고 했지만 신예준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쉬워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 신예준이 너무 바쁘다 보니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성혜인을 다시 만난 것은 성혜인이 네이처 빌리지의 리모델링을
강민지는 일상생활에 완전히 서툰 사람이었다. 혼자서 생활하는 법을 전혀 몰랐고, 집에서는 가정부가 옆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밥을 어떻게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예준과 함께 있을 때면 그가 자연스럽게 이런 일들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하지만 신예준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강민지가 일상생활에 서툴다고 해서 그가 이런 것들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신예준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지만 강민지는 등 뒤에 있어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예준아, 너 갈비찜도 했어?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신예준은 손에 쥔 빗자루를 꽉 쥐었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민지가 그의 앞에 다가와 물었다.“왜 웃어?”“네가 혼자 있을 때면 과연 밥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지금까지 강민지는 죽과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다. 죽도 겨우 한 번 해본 게 전부였다.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신예준은 거의 이틀에 한 번씩 그녀에게 밥을 해주었고, 그녀가 배달 음식을 시킬까 봐 걱정되어 다음 날 먹을 것까지 미리 준비해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자레인지 사용법도 가르쳐 주어, 그녀는 그냥 도시락을 꺼내 데우기만 하면 되었다.그래서 집에 돌아가지 않은 몇 개월 동안 강민지는 처음 아팠을 때 몇 킬로그램 빠졌던 몸무게가 다시 불어나고 오히려 1.5킬로그램이나 더 찌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신예준 덕분이었다.“못하지. 네가 있잖아?”게다가 강민지는 집이 잘 살기 때문에 굳이 직접 요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신예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을 깨끗이 닦고 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이 아파트의 화장실은 매우 좁았다. 신예준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동안 강민지와 함께한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는 강민지를 감정적으로 속인 것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철저히 돌봐주었다. ‘유능한 보모’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그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지만 어쩔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