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성혜인뿐이었다.성혜인은 임신한 몸으로 호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하지만 방의 구조로 봤을 때 이곳은 칸다의 단층집 같지 않았다.혹시 귀국한 건가?그는 억지로 몸을 버티고 일어나 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모두 국내 고유의 가구들에 국내 로고였다.확실히 귀국한 듯했다.김상아의 눈빛이 악랄하게 번뜩였고 이때 집 밖에 또 한 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반승제는 점점 이곳이 국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절 국내로 데려왔다고요?”연구기지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귀국을 시키다니 이 사람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다.마음속으로 경계하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얼굴을 유지했다.“네. 여기는 제 고향이에요. 어촌입니다.”반승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물었다.“밖은 무슨 일이에요?”“제 아빠가 지붕에서 떨어져서 돌아가셨어요.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 준비를 돕느라 그럽니다. 시끄러워요?”“아니요. 괜찮아요.”보통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울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그녀의 얼굴은 너무 냉정했다.심지어 시끄러운 것이 아니냐고 물어봤다.보통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새가 있을까?반승제는 한쪽 침대에 기대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아파졌다.“혹시 휴대전화 있어요?”그는 반드시 설기웅에게 연락해야 했다. 혹은 서주혁에라도.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낙후된 마을이라도 국내에서 휴대전화 하나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아무래도 이곳이 구금섬처럼 세상과 단절된 곳은 아니니까.사람이 생존하려면 무역 거래를 해야 한다. 무역 거래를 해야 한다면, 휴대전화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그는 억지로 지탱하여 한쪽 벽에 기대고 있었는데, 밖에 사람 소리가 들리자 나가보려 했다.“밖의 사람들은 휴대전화가 있을까요?”김상아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수많은 광경을 상상했다.그러나 반승제가 이미 문 앞에까지 걸어갔기 때문에 더 어찌하지 못했다. 그녀는 옆에 있던 몽둥이를 들고 서슴지
이미 전화를 했으니 원진의 사람들이 곧 그를 데리러 올 것이다.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값싼 니코틴 향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한 대 피우고 나면 입안이 쓰라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저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누군가 달려와 황망하게 입을 열었다.“상아야, 얼른 가봐! 이 씨 아주머니가 갑자기 쓰러졌어. 죽을 거 같아.”상아는 금방 들은 듯 능청스럽게 도끼를 얼른 내려놓았다.그는 원진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성큼성큼 이 씨 아주머니가 쓰러진 쪽으로 달려갔다.원진은 계속 자리에 서서 담배를 피웠고 다른 한 손에는 성냥을 쥐고 있었다. 이는 부뚜막에서 가져온 것이었다.그는 천천히 사고가 난 곳을 향해 걸어갔는데 방금 담배를 주던 요리사가 죽은 여인을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왜냐하면, 상아가 오면서 이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못 살려요.”짧은 시간 내에 또 한 사람을 잃었다. 그것도 수다스러운 이 씨 아주머니를.아무도 살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살인에 대한 개념도 전혀 없었고 그저 아주머니가 갑자기 돌연사했다고 생각했다.누군가 한숨을 쉬고 이 씨 아주머니를 향해 애도를 표했다.원진은 무리의 밖에 서서 죽은 여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1년 내내 농사짓는 몸이었으므로 급사할 사람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의술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저 김상아를 의심할 뿐이었다.상아는 이 씨 가족을 위로하며 건강을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원래는 상훈을 위한 장례식이었는데, 이제 이씨 가문에도 사고가 생겨버렸다.원진은 지루했다. 어차피 그의 사람들이 곧 마을에 올 것이니 늦어도 사흘이면 떠날 수 있다.돌아가면 그를 배신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조사할 것이다.이곳의 일은 그와 무관했다.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그는 동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동현은 겨우 11살이며 이런 떠들썩한 일에 끼기 좋아하는 나이였다. 그런데 이 순간에 이 자리에 없는
“저, 전 아빠 마중 가야겠어요. 배가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동현은 우물쭈물 말을 했다. 누가 봐도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했다.그러나 이 편벽한 어촌에서 무엇을 숨길 수 있겠는가.원진은 내색하지 않고 걸어갔고 그의 뒤를 따르던 동현은 정신을 팔려 넘어지기도 했다.그런데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원진이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상아 누나네 집에 가서 치료해 달라고 하자.”상아를 언급하자 동현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코를 막았다.“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런 작은 상처는 저절로 나을 수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분명 상아를 그렇게나 존경했는데 이제는 상아를 언급하는 것도 이렇게 두려워하다니, 정말 이상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동현이가 이상하다는 점은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일으켜 세운 후 천천히 동현이 집을 향해 걸었다.배가 뭍에 오를 때마다 북적거리는 마을이었지만 상아네 집과 이 씨 집 안에서 사람이 죽어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해변에 마중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원진은 동현을 따라 바닷가로 나갔고 원래는 우울했던 동현은 다가오는 어선을 보고 신이 나서 해변에서 폴짝하였다.이윽고 배가 뭍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 물고기잡이에서는 바닷바람 때문에 수확이 크지 않아 선원 6명이 고작 2통의 고개를 잡았다.원래 물고기를 잡는 것은 도박과 마찬가지였다. 수확이 좋을 때는 1년도 버틸 수 있었지만 수확이 좋지 않으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다.동현이 심각한 얼굴을 한 아버지를 보고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아빠! 아빠! 여기! 여기!”동현이 아버지의 이름은 진구였다. 그는 1년 내내 밖에서 바닷바람을 쐬었기 때문에 피부색이 검었다.물고기를 2통을 잡았으므로 한 집에는 5마리만 배급되었다. 이제 년 후에 바다로 나갈 기회가 한 번 남았다.원래는 이번의 고기잡이로 아이 학비를 좀 벌려고 했었는데.“동현아!”그가 소리를 지르며 한 손에 물고기 5마리를 들고 빠르게
“상아 누나랑 이 씨 아주머니가 싸우는 걸 봤는데 무슨 일로 싸운 건지 모르겠지만, 상아 누나가 이 씨 아주머니 머리를 만지는 순간 바로 쓰러졌어요. 그런데 이 씨 아주머니가 죽었다고 하니 무서운 거예요. 누나가 제 아빠도 만졌다가 죽으면 어떡해요. ”원래부터 상아를 의심하던 원진은 동현이 말에 순간 흥미가 더 생겼다.“둘이 왜 싸웠어?”“이 씨 아주머니가 창가에서 뭔갈 봤나 봐요. 깜짝 놀란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후에 누나가 나오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씨 아주머니께서 바로 쓰러졌어요. 저는 풀숲에 숨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그냥 너무 무서웠어요. 제가 알고 있던 상아 누나가 아닌 것 같았어요.”원진은 말이 없었다. 상아네 집 안방, 거기에 보지 못할 물건이라도 있나?“전에 상아네 집에서 형을 봤다고 했지?”“아, 네. 되게 잘생긴 형이요.”원진은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상아가 이렇게 꼭꼭 감추고 쉬쉬하고 있으니 그의 신분이 분명 간단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동현이 아직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밖에서 진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아네 집에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제야 동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중 나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삼촌 상처는 괜찮아요. 약을 많이 드시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래, 상아야. 이번에 신세 졌으니 물고기 한 마리라도 들고 가렴.”“괜찮습니다.”동현이 순식간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섬뜩해지는 느낌에 다른 방으로 재빨리 숨어버렸다.진구와 상아가 들어왔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자 물었다.“동현이는요?”원진이 벤치에 앉은 채 대답했다.“피곤하다고 먼저 자러 갔습니다.”이에 진구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그 녀석이 피곤한 날도 있군요. 상아야, 그럼 이제 가거라. 마중은 안 나간다.”상아의 손에는 갖가지 약이 들려 있었다. 그의 그녀의 시선이 원진이 몸에 머물렀다.원진은 정말 기세가 남달랐다. 상아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기회를 타서 아예 없애버릴까 ?“
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났다. 원진의 사람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찾아왔다.봉현마을 사람들은 헬리콥터를 처음 봤기 때문에 무리 지어 몰려들었다.헬리콥터는 총 세 대가 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원진의 사진을 꺼내어 한 사람씩 물어보았다. 그러다 동현에게까지 다다랐다.동현의 눈이 반짝였다. “알아요, 이거 원진 형이에요. 우리 집에 있어요. 빨리 따라오세요!”그는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며 흥분한 나머지 볼이 빨개졌다.헬리콥터라니, TV에서나 보던 헬리콥터가 그것도 세 대나! 원진 형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일여덟 명이 동현을 따라 그 집에 도착하자 그들이 사는 환경을 보고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원진이 막 나오는데 몇몇 남자들이 빠르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가주님, 괜찮으십니까?”“형님, 정말 걱정했어요.”“배신자를 잡았습니다. 그 자식을 가둬뒀으니 이제 형님만 돌아오시면 됩니다.”여덟 명은 진심으로 원진을 걱정했다. 원진이 큰 문제 없다는 걸 확인한 후 함께 돌아가려고 했다.원진도 원래는 지금 출발하려 했지만 동현이 묻는 소리를 들었다. “멋진 형, 가시는 거예요?”원진은 옆에 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가장 가까운 읍내에 가서 현금을 좀 많이 찾아와.”그중 두 명이 즉시 헬리콥터를 다시 타고 떠났다.원진은 동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틀만 더 있다가 갈 거야.”동현은 실망했지만 이 멋진 형이 자기와는 다른 세계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구고 부엌으로 돌아가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원진은 자신의 사람들에게 주변에 텐트를 쳐서 머물며 먼저 식사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그들은 곧 동현의 집 마당 밖에 캠프를 차리기 시작했다.동현은 조금 미안했다. 집에 그렇게 많은 식량이 없었기 때문이다.올해 농사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가 바다에 나가서 가져온 생선도 많지 않았다. 집에 있는 쌀도 거의 다 떨어져서 오늘 밤에 아버지가 읍내에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진구가 읍내에 가서 쌀, 기름, 소금을 사러
첫 번째 문이 부서지자 단순한 장식만이 눈에 들어왔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원진은 안방 문 앞으로 가서 다시 말했다.“계속 부숴.”이 방 안에 대체 무슨 비밀이 있기에 김상아가 이렇게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걸까?원진의 부하들이 막 움직이려 할 때 밖에서 김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진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김상아가 이미 도착했고, 그의 뒤에는 열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원진은 마을에서 특별한 존재였고, 헬리콥터가 오면서 그의 소문은 더더욱 무성해졌다.그러나 어젯밤부터 누군가가 원진이 불량배 우두머리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봉현마을로 원수를 피해 숨어들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방금 이씨네 집에서 모두가 이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겁이 많은 사람들은 선동질하기 시작했다.“원진이 정말 도망 다니는 살인범이라면 우리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지금 원진의 부하들이 그를 찾으러 왔고, 헬리콥터까지 있는데 우리가 상대가 되겠어?”“나도 자꾸 원진이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어. 좋은 사람 같지 않아. 빨리 우리 마을에서 쫓아내는 게 좋겠어.”그래서 누군가는 경찰에 신고했다. 봉현마을에서 도망 중인 살인범을 발견했다고.읍내 파출소 경찰들은 즉시 출동했지만 도착하려면 아직 20분 정도는 걸릴 것이었다.바로 그때,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이씨네 집으로 달려와 말했다. “원진이 부하들을 데리고 김씨네 집으로 갔어요. 지금 문을 부수고 있어요!”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분노하며 김씨네 집으로 몰려왔다. 그곳에서 원진이 정말 문을 부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김상아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당신을 구해줬더니, 지금 제 집을 부수는 거예요?”원진은 그 자리에서 서서 김상아의 뒤에 서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전 그냥 상아 씨 방 안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게다가 당신이 돌아온 이후로 마을에서 두 번의 장례식이 열렸어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안방은 매우 깨끗했다. 게다가 방 안 구석구석까지 한눈에 들어왔는데, 사람을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 침대 밑까지 확인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원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정말 빨리도 숨겼군.’밖에서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은 원진이 안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원진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상아가 당신을 구해줬잖아요.”“그래요. 당신 상처가 그렇게 심했는데, 상아의 약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네요.”사람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고함쳤고, 원진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하지만 원진의 곁에 있던 여덟 명의 남자는 모두 건장하고 강해 보였기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만약 충돌이 일어난다면 누가 손해를 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때 읍내에서 경찰이 도착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도망 중인 살인범이 있다고 신고했기 때문이다.경찰을 보자마자 몇몇 마을 주민들이 원진을 가리켰다.“저 사람이에요. 진구의 실종은 분명 저자와 관련이 있어요. 지금도 우리 마을 유일한 의사를 괴롭히고 있어요.”경찰은 원진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기품을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원진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동현이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아버지는 정말 실종되었지만 원진 형과 상관없어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동현이 말할 때 그의 눈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모두가 진구를 밤새 찾았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 진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걸로 보아 이미 불행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원진은 나무문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는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진구가 실종된 상태에서 방 안에 숨겨진 사람도 사라졌다. 만약 범인이 정말 김상아라면, 김상아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두 사람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준다면 그녀는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 해
제원에서 온 전문 수사팀은 자신들이 이런 작은 마을의 사건을 처리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보통 큰 사건만 다루는 팀이었다.이번에 파견된 사람 중 리더는 대략 스물네 살 정도로 보이는 차가운 외모의 여성이었다.수사팀은 총 다섯 명이었고 나머지 네 명의 남자들은 그녀의 지시에 잘 따랐다.원진은 사건 조사에 서툴렀기 때문에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여성이 그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도 지금은 용의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원래 자리에 머물러 주십시오. 며칠 동안은 당신들의 음식을 따로 제공할 겁니다.”원진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모든 사람이 용의자였다.이 여성의 이름은 오혜수였다.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쉽게 얻었다.수사팀은 모든 용의자를 조사한 뒤 혐의가 없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세 명의 주요 용의자에 집중했다.원진, 김상아, 그리고 진구와 함께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던 사람, 이 세 명이 주요 용의자였다. 그 중 두 사람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오혜수는 제원에 보고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이런 시골 마을에 파견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살인 사건이라 해도 내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조사할 일은 아니잖아요. 제원에도 많은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분명 또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겠죠. 높은 곳에 있는 도련님들은 자기 고급 차나 타고 놀지, 왜 이런 일에 끼어들고 난리예요!”분명 그녀는 상부의 명령을 받아 자신이 이곳에 파견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봉현리는 제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러 단계를 거쳐 신청한다고 해도 그녀를 요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금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상사가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빨리 사건이나 해결해.”오혜수는 대뜸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원진을 먼저 심문하고, 이어서 동현에게 물었다.그녀의 팀원들은 그녀의 뒤에서 기다리며 아무런 단서도 보이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었다.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