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은 매우 깨끗했다. 게다가 방 안 구석구석까지 한눈에 들어왔는데, 사람을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 침대 밑까지 확인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원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정말 빨리도 숨겼군.’밖에서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은 원진이 안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원진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상아가 당신을 구해줬잖아요.”“그래요. 당신 상처가 그렇게 심했는데, 상아의 약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네요.”사람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고함쳤고, 원진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하지만 원진의 곁에 있던 여덟 명의 남자는 모두 건장하고 강해 보였기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만약 충돌이 일어난다면 누가 손해를 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때 읍내에서 경찰이 도착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도망 중인 살인범이 있다고 신고했기 때문이다.경찰을 보자마자 몇몇 마을 주민들이 원진을 가리켰다.“저 사람이에요. 진구의 실종은 분명 저자와 관련이 있어요. 지금도 우리 마을 유일한 의사를 괴롭히고 있어요.”경찰은 원진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기품을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원진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동현이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아버지는 정말 실종되었지만 원진 형과 상관없어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동현이 말할 때 그의 눈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모두가 진구를 밤새 찾았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 진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걸로 보아 이미 불행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원진은 나무문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는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진구가 실종된 상태에서 방 안에 숨겨진 사람도 사라졌다. 만약 범인이 정말 김상아라면, 김상아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두 사람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준다면 그녀는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 해
제원에서 온 전문 수사팀은 자신들이 이런 작은 마을의 사건을 처리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보통 큰 사건만 다루는 팀이었다.이번에 파견된 사람 중 리더는 대략 스물네 살 정도로 보이는 차가운 외모의 여성이었다.수사팀은 총 다섯 명이었고 나머지 네 명의 남자들은 그녀의 지시에 잘 따랐다.원진은 사건 조사에 서툴렀기 때문에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여성이 그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도 지금은 용의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원래 자리에 머물러 주십시오. 며칠 동안은 당신들의 음식을 따로 제공할 겁니다.”원진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모든 사람이 용의자였다.이 여성의 이름은 오혜수였다.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쉽게 얻었다.수사팀은 모든 용의자를 조사한 뒤 혐의가 없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세 명의 주요 용의자에 집중했다.원진, 김상아, 그리고 진구와 함께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던 사람, 이 세 명이 주요 용의자였다. 그 중 두 사람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오혜수는 제원에 보고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이런 시골 마을에 파견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살인 사건이라 해도 내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조사할 일은 아니잖아요. 제원에도 많은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분명 또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겠죠. 높은 곳에 있는 도련님들은 자기 고급 차나 타고 놀지, 왜 이런 일에 끼어들고 난리예요!”분명 그녀는 상부의 명령을 받아 자신이 이곳에 파견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봉현리는 제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러 단계를 거쳐 신청한다고 해도 그녀를 요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금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상사가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빨리 사건이나 해결해.”오혜수는 대뜸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원진을 먼저 심문하고, 이어서 동현에게 물었다.그녀의 팀원들은 그녀의 뒤에서 기다리며 아무런 단서도 보이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었다.만
오혜수는 진구의 시체를 옮기게 했다. 동행한 법의학자가 시체 검사를 시작했다.옆에 있던 원진이 말했다. “이씨 아주머니도 검사해 보세요. 어쩌면 아주머니의 죽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오혜수는 그를 다시 한번 보더니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결과가 곧 나왔다. 두 사람의 사인은 비슷했다. 모두 뇌에 바늘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동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상아 누나예요. 상아 누나가 아주머니의 머리를 만지자마자 아주머니가 쓰러지는 걸 봤어요. 범인은 상아 누나예요.”동현은 나이가 어려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그가 지목한 사람은 김상아였으니, 마을의 유일한 의사이자 해외에서 유학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사람들은 동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어린애라 역시 철이 없네. 네 아빠의 상처도 상아가 봐준 거잖아?”“맞아. 두 사람은 원한도 없는데 왜 네 아빠를 해치겠니?”“동현이 너 정말 양심이 없구나. 상아 누나가 너한테 잘해주지 않았니?”동현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상아 누나는 분명 자신에게 잘해줬다. 하지만 이숙희 사건 이후로는 그녀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오혜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낸 뒤 시선을 사람들 사이로 돌렸다.“김상아 씨는 어디 있죠?”사람들은 그제야 김상아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방금까지 여기 있지 않았나?모두들 김상아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김상아는 이미 떠나 뒤였다.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오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용의자가 도망쳤다. 죄를 피해 숨으려는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즉시 읍내 파출소에 연락해 모두 함께 김상아를 찾기 시작했다.마을 사람들은 김상아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불안해했다. 김상아가 정말 범인일까?한편, 김상아는 이미 읍내로 향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반승제를 데리고 떠났다.반승제는 계속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몸 몇 군데에는 바늘 자국이 있었고 외부
사라가 빠르게 도착해 반승제의 혈액을 검사한 후 미간을 찌푸렸다. 설우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사님, 반승제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사라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분에게 주사를 놓은 사람이 누구죠?”설우현은 즉시 김상아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반승제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김상아를 무리하게 다룰 수 없어 감금만 해두었다. 그러나 오혜수가 소속된 경찰서에서는 살인자를 함부로 데려갈 수 없다며 계속해서 사람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설우현은 그 여형사를 무시하고 김상아를 병원으로 데려왔다. 사라는 김상아를 보자마자 눈매가 가늘어졌다.“박사님, 이 여자의 정체를 아시나요?”“연구 기지 출신입니다. 재능이 아주 뛰어나죠. 기지에서도 그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설우현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럼 반승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김상아는 누군가에게 끌려 나오면서 웃음을 터뜨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자부심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사라 박사님, 아직 살아계셨군요. 게다가 나 같은 말단 연구원도 기억하다니 놀랍네요.”사라는 반승제의 몸을 계속 검사하며 말했다. “이분은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 여자가 준 약물이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문제는 이 여자만 알 겁니다.”연구 기지에는 천재들이 많아서 어떤 약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라도 그곳에 오래 있었지만 기지에서 연구되는 모든 약의 종류를 알 수는 없었다. 연구 구역마다 다루는 분야가 달랐기 때문이다.“구체적인 반응은 깨어나야 알 수 있습니다.”반승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설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라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뇌 조직이 인위적으로 손상되었습니다. 깨어나더라도 지능이 어린아이 수준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증상은 깨어난 뒤에야 알 수 있을 겁니다.”설우현은 뒷골이 뻐근한 느낌을 받았다. 이 사실은 당분간 성혜인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김상아는 또다
반승제는 그날 저녁에 깨어났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천천히 일어나려 할 때 옆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기분이 어때요?”설우현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반승제가 어린아이처럼 지능이 저하될 줄 알았던 설우현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승제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괜찮아요. 혜인이는 어디 있어요?”아직도 성혜인을 기억하고 정상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니, 설우현은 놀라면서도 안도했다.“지금 제원에 있어요. 혜인은 네이처 빌리지에서 태교 중이에요. 모두가 칸다에서 당신을 찾느라 애를 쓰고 있었어요.”반승제는 병실을 둘러보았으나 성혜인은 보이지 않았다.“혜인이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성혜인이 가장 걱정되었다.“태교 중이에요. 지금 이 상태로 만나는 건 위험해요. 혜인이의 기분을 자극할 수 없어요. 혹시나 헛된 기쁨이 될까 봐 아직 당신이 발견되었다고 전하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당신 몸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네.”반승제는 대답하자마자 목구멍이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이 가려움은 단순히 긁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구멍에서 시작해 몸 깊은 곳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반승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손등을 긁었지만 이건 그저 바깥의 가려움만을 달래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손을 멈추고 설우현을 바라보았다.“나한테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반승제는 매우 예민해졌다. 방금 그 순간, 피부를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심한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설우현이 김상아의 상황을 설명하자 반승제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벌레라도 삼킨 듯한 표정이었다.“그 여자의 피를 마시지 않을 테니, 감옥에 처넣어서 나오지 못하게 해 주세요.”“하지만...”이 중독은 일반 마약보다 천 배는 강해 그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반승제는 천천히 침대로 돌아갔다. “견딜 수 있어요. 진세운과 진백운은 찾았나요? 배현우는요?”“진백운의 행적은 확인되었어요. 그를 찾으면
“하나병원으로 가주세요.”하나병원은 반승제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다. 이 남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으니, 아마 여전히 혼수상태일 것이다.김상아는 구실을 찾아 병원에 들어가서 반승제가 영원히 자신을 떠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성혜인은 하나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병원 정문에 도착해서 차를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자 김상아는 이미 차에서 내려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그러나 몇 걸음 걷던 김상아는 다시 돌아와서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휴대폰과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갑자기 스프레이가 뿌려지자 성혜인은 눈앞이 아찔하고 혼미해졌다. 본능적으로 대답하려 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김상아의 손을 꽉 잡았다.김상아는 조금 놀랐다. 이 여자가 스프레이에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성혜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당신 뭐 하는 거야?”김상아는 손을 들어 반격하려 했지만 성혜인이 재빨리 피했다.성혜인은 김상아를 걷어차서 차에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김상아는 원래 그녀에게서 돈을 얻으려 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 여자가 임산부라서 쉽게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실패했다.김상아는 밖에서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성혜인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성혜인은 차 안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떠나지 않고 김상아의 뒷모습을 주시했다.김상아는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잔디밭으로 가서 배관을 타고 올라갔다.반승제의 병실 앞에는 경비가 지키고 있어 쉽게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배관을 통해 들어가려 했다.그녀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금세 반승제의 창문 옆에 도착했다.창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병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그녀는 곧바로 내려가서 간호사에게 물어보고서야 반승제가 이미 퇴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김상아의 얼굴은 즉시 어두워졌다. 제원에 대해 잘
성혜인은 임신 중이라 집에서 반승제의 소식을 물어보는 것도 두려웠다. 그런데 그는 밖에서 여자와 포옹하고 심지어 네이처 빌리지에도 돌아오지 않았다.성혜인은 발끝에서부터 불같은 화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반승제가 김상아를 밀어내는 순간, 그의 뺨을 힘껏 때렸다.짝!반승제의 눈앞에 서 있는 성혜인은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이때 김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 씨, 우리 함께 가요. 네?”반승제는 아직 회복 중인 상태에서 뺨을 맞고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성혜인을 보고 몹시 당황했다.“혜인아?”성혜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현재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실종된 줄 알았던 사람이 그녀 몰래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니, 성혜인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반승제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다.성혜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반승제는 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혜인아!”“혜인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이때 김상아가 그의 팔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승제 씨, 나랑 가요. 내가 당신을 치료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내가 치료할 수 있다고요.”김상아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오로지 반승제를 손에 넣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만 남아 있었다.반승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손을 들어 김상아를 기절시켰다.그는 손에 든 스무 개가 넘는 쇼핑백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히 성혜인을 쫓아가며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어 김상아를 데려가라고 말했다.“여자 하나도 제대로 감시 못하다니. 설우현, 당신 왜 이렇게 무능해요?”설우현은 이 말을 듣고 성혜인이 몰래 칸다로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반승제는 이런 식으로 그를 욕했었다.반승제는 전화를 끊고 나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특히 김상아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나니 가려움이 심해져서 미칠 지경이
성혜인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더욱 마음에 찔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럼 내가 잘 보관해 줄게. 김상아 일은 신경 쓰지 마. 반승제가 버틸 수만 있으면 되잖아, 맞지?”말할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하나는 반승제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김상아를 놓친 사실 때문이었다.반승제는 이번에도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혜인이 그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깊이 잠든 성혜인은 한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여기는 네이처 빌리지의 안방이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가슴이 순간 부드러워지며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손을 빼내려 했지만 성혜인이 너무 단단히 잡고 있었다. 눈가는 여전히 붉어 있었고, 분명 울었던 것 같았다.심장이 시큼하고 아팠다. 반승제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성혜인은 깨어나자마자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정말 괜찮아.”반승제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눕혀져 검사를 받았다. 외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독에 당한 문제는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었다.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그녀와 정상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입안의 살점을 너무 씹은 나머지 전부 짓물렀다.뼛속까지 새겨진 가려움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이내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는 일어나서 성혜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안심시킨 후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몸 구석구석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고통이 들끓고 있었다.설우현이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누군가가 자신의 혈액으로 약을 제조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샤워를 마친 후 그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두드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시 평온한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그날 저녁, 반승제의 몇몇 친구들이 네이처 빌리지에 찾아왔다. 네이처 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