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리가 입술을 짓씹었다.“내가 하지 않았다고 해도 안 믿을 거잖아요.”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장하리가 어떻게 말하든 서주혁은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장하리와 노임향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있다 해도, 온시아에 대한 일은 밝혀진 바가 없으니까.온시아가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사람을 시켜 독을 먹이는 것도 그다지 똑똑한 행동은 아니었다.사실 서주혁은 이미 마음속으로 장하리가 관여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장하리가 무슨 말을 하든 의심할 것이었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어야 할 거야.”차갑게 말 한마디를 내뱉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네 어머니한테 전화해.”지금 서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노임향을 찾고 있었고, 노임향은 조만간 붙잡힐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간 동안 서수연이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것이다.서수연은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랐기에 고생 따위 모르고 컸다.장하리는 고개를 숙이고 노임향의 차단을 풀었다.막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서주혁이 곁에서 명령했다.“이쪽으로 와서 내 앞에서 전화해. 스피커 켜고.”장하리가 서주혁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서주혁에게는 일종의 아우라가 있었는데 반승제 같이 자만심 강한 귀공자와는 다른 느낌이었다.서주혁은 침착하고 차갑고 딱딱했다.그가 한 손을 무릎 위에 올리자 은빛 손목시계가 드러났다.노임향과 전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전화 건너편에서 노임향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네가 처리하라고 한 여자애 내가 데려갔으니 걱정하지 말렴. 앞으론 널 방해하지 못해.”이 말에 장하리가 흠칫 놀라며 전화를 응시했다.그녀의 어머니는 멍청하고 어리석지만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기지를 발휘하여 항상 적절하게 장하리의 일을 망쳤다.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그녀는 장하리가 전화한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이미 서씨 가문의 미움을 산 마당에 그녀와 남편도 모두 탈출했으니, 이참에 장하리를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만 있다면 일석삼조 아니겠는가?지난번 독극물 사건으로 누명을 씌우
서수연은 이렇게 거대한 절망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예전에 성혜인 때문에 놀랐을 때도 단지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절망이었다.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모두 장하리 탓이다. 장하리 때문에 이런 역겨운 사람에게 강간당한 것이다.자동차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서수연은 멍하니 차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에 올라탄 역겨운 남자의 행위는 계속되었고 서수연은 울고 싶었지만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오는 길 내내 울었더니 이제 눈물이 말라버렸다.같은 시각, 장하리는 끊긴 전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서주혁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표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화가 많이 났겠지.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자 서주혁이 대뜸 입을 열었다.“내가 가도 된다고 했나?”그는 줄곧 강압적이었으며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의 말에 장하리가 발걸음을 멈추었고, 서주혁은 라이터를 켰다.그리고 뒤이어 풍겨오는 담배 연기.“수연이 돌아오기 전까지 여기서 기다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넥타이와 정장을 챙기고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들어오도록 했다.한쪽 계단 입구로 가서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명령했다.“방 하나 치워서 들여보내. 그리고 하루 내로 수연이 찾아서 데려와.”“네. 대표님.”곧 장하리는 한 방에 끌려가 갇히게 되었다.서주혁의 방은 2층이고, 그녀가 갇히게 된 방은 1층에 있었다. 게다가 딱 봐도 가정부의 방이었다.방은 대략 50평쯤 되었고 별도로 욕실이 준비되어 있었다.그러나 이곳의 가정부 방마저 장하리가 이전에 지냈던 대부분의 방보다 훨씬 좋았다.장하리는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서수연에게 아무 일 없기를 빌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서주혁은 모든 것을 장하리의 탓으로 돌릴 것이 뻔했다.그가 노임향의 딸임을 탓할 것이고.서수연의 구조 요청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탓할 것이다.머릿속이 복잡해진 장하리는 침대에 눕지 않고 벽에 기대
서주혁이 홧김에 옆 식탁을 발로 차버렸다. 테이블 위의 모든 물건이 마구 흔들렸다.“지금 어디에 있는데?”“돌아오는 길에 이미 병원을 예약해 놓았습니다”서주혁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때 곁에 있던 하인이 다가왔다.“대표님, 하리 씨에게 아침밥 올려다 드릴까요?”서주혁이 차가운 얼굴로 하인을 응시했다. 입가에는 냉소가 지어졌다.“고추 한 접시 올려보내. 매울수록 좋아.”하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서주혁은 옆에 놓아뒀던 코트를 들고 바로 집을 나섰다.그리고 하인은 얼른 볶은 고추 한 접시를 장하리에게 가져다주었다.장하리는 밤새 잠을 못 잔 상태였으며 지금까지도 서수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문득 매운 향이 스멀스멀 나기 시작했고, 곧이어 방문이 열리더니 하인이 고추 한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하리씨, 아침 드세요.”접시에는 온통 고추뿐이었고 쌀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주혁 씨는요?”하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우선 아침 드세요. 대표님의 행방을 우리 하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말을 마친 하인은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갔다.테이블 위에는 빨간 고추만 놓여 있었는데 냄새부터가 자극적이었다.그녀는 연거푸 기침을 했다.아침밥의 상태로부터 서주혁이 많이 화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장하리는 고추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점심 12시, 서수연은 제시간에 제원에 도착하여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전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분노를 표출했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서수연은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의사가 진찰할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다.의사는 성병 예방을 위한 주사와 약을 처방 해 주었고, 성병 교육을 위한 사진을 본 수연은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서수연이 병실로
서주혁의 별장.장하리는 좁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다. 도망치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높이였다.하지만 장하리는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바깥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지만 서주혁이 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장하리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다.서주혁이 휴대전화를 가져갔기 때문에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는 상태였다.장하리는 턱을 팔에 기댄 채 창가에 앉아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이때쯤 배에서 자꾸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별장에 들어온 날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위병이 계속 도졌다.게다가 이틀 동안 빈속이었으니 오죽할까. 세 번이나 구역질을 했지만, 토해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인이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인은 매일 장하리에게 물을 가져다주었고 장하리는 물 두 주전자로 이틀을 버텼다.배고픔으로 인하여 어지러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위병이 터져서 위가 따끔거렸다.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장하리는 침대 앞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억울한 일들을 겪었다. 하여 더는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일들을 겪어 왔음에도 외로움과 서러움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결국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다.밖에서 자동차 타이어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더니, 곧이어 서주혁이 별장으로 들어왔다.장하리는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침대 곁에 기대어 앉았다.별장에 들어선 서주혁이 옷을 하인에게 건네자 하인이 물었다.“대표님, 하리 씨에겐 언제 음식을 가져다줄까요?”서주혁이 며칠 동안 줄곧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들도 감히 마음대로 음식을 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코트를 건네던 그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제야 서주혁은 장하리가 아직 별장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그는 현재 장하리의 일가족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생각만 해도 저도 모르게 혐오감이 조성되었다.하인이 그를 방 입구까지 안내했다.문을 여니 침대에 기대어
의사가 급히 와서 위를 세척하고 약을 처방했다. 수액을 투여한 후 따뜻한 죽 한 그릇을 준비하라고 일렀다.“서 대표님, 환자분의 위병이 꽤 심각합니다. 앞으로 몇 달간은 매운 음식은 피하시고 한 달 동안은 죽만 드셔야 합니다. 육류와 자극적인 음식은 꼭 삼가셔야 해요.”서주혁은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장하리의 가냘픈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목이 언제 이렇게 가늘어졌는지 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알겠습니다.”서주혁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사가 떠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 명희정의 전화였다.“그 가족 어디 있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놈들을 모두 감방에 처넣어버릴 거야!”평소 딸 서수연을 애지중지하던 명희정은 서수연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장하리의 가족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다. 명희정은 하루 동안 서수연을 돌보았다. 서수연이 시끄럽게 굴진 않았지만,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자신이 망가졌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명희정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주혁아, 그 두 사람 지금 어디 있어? 경찰서에 넘기지 마. 내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생지옥을 경험시켜 줄 거야.”“제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요.”명희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장하리는? 수연이가 그 여자가 시킨 거라고 말했어.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어?”지난번 온씨 집안 사건에도 장하리가 연루되었는데, 이번에도 또 나타나다니. 명희정은 절대로 이 여자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서주혁의 시선은 옆으로 향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장하리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였다. 서수연이 당한 일을 떠올리며 그는 장하리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어머니, 이 일은 제가 잘 조사해 볼게요.”“조사할 필요가 뭐가 있어? 수연이가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었다잖아! 장하리를 나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수연이에게 넘겨.”서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희정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서수연은 여전히 욕설을 퍼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장하리는 서주혁에게 끌려가며 팔이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것도 버거워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하지만 서주혁은 그녀를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복도 끝에 있는 침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장하리를 침대 위로 던졌다.장하리는 충격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기침을 토해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련한 모습을 더했다.서주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방금 수연이가 당해도 싸다고 했어?”장하리는 머리가 멍해졌다. 고통이 온몸에 퍼지며 억울함이 그녀를 잠식하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더 이상 이 남매를 참을 수 없었다.“그래요. 그럴만하니까요.”서주혁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장하리, 내가 널 너무 얕봤나 보네. 그러니까 이번 사건에 네가 정말 연루된 거야?”뭐라고 대답하든 그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나? 어차피 그녀를 의심할 테니까.장하리가 침묵하자 서주혁은 이를 인정한 것으로 여겼다.“그래. 장하리,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여자가 낳은 자식이 좋은 사람일 리가 없지. 네가 수연이가 당해도 싸다고 했으니, 너도 그 맛을 봐야 하지 않겠어?”장하리는 침대 위에서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자꾸만 흘러내렸다.서주혁은 반쯤 타버린 담배를 손에 들고 문밖을 향해 말했다. “다 들어와.”문밖에 있던 두 명의 경호원이 곧장 방으로 들어왔다.“대표님.”서주혁은 침대 위의 장하리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소 말랐지만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워 보였다.“맘껏 즐겨.”장하리는 환청이라도 들은 듯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은 그녀는 서주혁이 이어서 하는 말을 들었다.“제대로 만족시켜 줘.”“주혁 씨!”그의 이름을 부를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장하리는 입술을 떨며
경호원들은 바지를 벗고 장하리의 발목을 잡아챘다.서주혁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통증이었다.내뱉은 담배 연기가 서주혁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나가.”두 명의 경호원은 마치 사면을 받은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정말로 침대 위의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그들은 급히 바지를 올리고 서주혁에게 허리를 숙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마치 뒤에서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빠르게 걸어갔다.서주혁은 담배를 버리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장하리의 발목에는 경호원이 남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제압할 때 힘을 조절하지 않고 세게 잡았다. 그 결과 그녀의 발목에 다섯 개의 붉은 자국이 남았다.장하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마치 모든 감각이 무뎌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혀 끌어올려지면서 그녀는 앉은 자세가 되었다.입가의 피가 번지면서 장하리의 입술 주변을 물들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서주혁을 바라보았다.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제 팔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서주혁은 옆에 있는 휴지를 꺼내 장하리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한 번 닦을 때마다 장하리의 입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왔다. 서주혁은 그녀의 턱을 잡고 손가락을 그녀의 입안에 넣었다.장하리는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의 손가락이 혀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점점 더 흐르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서주혁은 상처를 대충 살펴보았다. 혀가 끊어질 정도로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그가 손가락을 빼려는 순간 장하리가 입을 다물고 그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 하지만 힘이 바닥나서 고양이가 살짝 깨무는 것 같았다.“놔.”서주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장하리는
다음 순간 장하리가 기침을 하더니 그의 셔츠에 피를 토했다. 서주혁의 얼굴은 즉시 어두워졌고, 장하리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장하리는 옆으로 쓰러지더니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의 극심한 통증에 침대 시트를 꽉 움켜잡았다. 마치 곧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서주혁은 자기 셔츠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봤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수연 아가씨가 계속 울고 있습니다.”그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셔츠를 벗고 옷장 쪽으로 가서 깨끗한 옷을 고르려던 찰나, 장하리가 말했다.“차라리 날 죽여줘요.”그녀에게 계속 붉은 고추를 먹여 위암에 걸리게 할 작정인가? 진정 죽이려 한다면 차라리 독약을 먹이면 그만이지 않은가?“죽고 싶어?”서주혁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손목의 차가운 시계를 정리했다.지금은 밤 9시였다.“밖에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 수연이 화가 풀리면 돌아가게 해줄게.”여전히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쥐고 있던 장하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손에 힘이 풀렸다.장하리를 등지고 서 있던 서주혁이 문가로 걸어가 문을 열려고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혁 씨.”잠시 발걸음을 멈춘 서주혁은 미간을 구겼다. 마음속에서 짜증이 솟구쳤다.서주혁은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가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장하리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눈을 내리깔며 계속 침대에 웅크리고 있었다.어디가 아픈지 말할 수 없을 만큼 견딜 수 없는 고통만 느껴졌다.서주혁이 계단을 내려가 보니, 서수연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울며불며 난리 치지는 않았지만 옆에 있는 단도를 집어 들어 자기 목을 그을 기세였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서수연은 몇 번이나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건드리지 마!”서주혁은 계단 입구에 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서수연은 온몸이 굳은 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오빠, 저 여자 좋아해요? 저 여자를 우리 집에 데려와 새언니로 만들려는 거예요? 저 여자가 가당키나 해요?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