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미가 사람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기에 성혜인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윤선미의 옆을 지나쳤다. 윤선미는 충분히 대놓고 그녀에게 망신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당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헤픈 여자 같으니라고! '윤선미가 성혜인을 따라가서 잡으려고 했지만 성혜인은 이미 반승제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성혜인은 걸어 들어갔고 분에 차 있는 윤선미만 사무실 밖에 남았다. 윤선미는 성혜인을 막으려고 달려들다가 하마터면 문에 코를 찧을 뻔했다. 놀란 그녀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후에 겨우 중심을 잡았다. 이를 뿌득뿌득 갈며 윤선미가 닫힌 사무실의 문을 노려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또 사촌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야 할 참이었다. 그녀는 구석에서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빨리 전화를 받아 든 윤단미의 목소리는 꽤 친절했다. “선미야, 왜? 승제가 또 너한테 못되게 굴었니?”“언니, 내가 저번에 말했던 그 디자이너 있잖아. 또 형부를 찾아 BH그룹에 왔어. 저번에 깜빡하고 말 못 한게 있는데 저 디자이너가 형부를 따라 호텔까지 갔더라? 게다가 형부한테 4천만짜리 커프스를 선물했어. 언니, 언니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저 디자이너가 언니 자리를 뺏을지도 몰라!”예쁘게 휘어졌던 윤단미의 눈이 순식간에 독기를 품었다. 그리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 지며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데?”“딱 봐도 꽃뱀처럼 생겼어.”윤단미는 살짝 불안했다. 그녀와 반승제가 오랫동안 냉전하고 있었으니 이젠 화해할 때도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쁜 여자가 반승제의 곁에 나타나서 마침 반승제가 거기에 넘어갔다면?하지만 반승제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기에 윤단미는 다시금 안심되었다. 여태까지 어떠한 스캔들도 없었고 결혼했다고 해도 그저 허울뿐인 결혼이었다. 반승제는 지금까지 그 아내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꽃뱀따위에 쉽게 넘어갈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윤단미는 윤선미가
반승제는 시선을 내려 성혜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시야 밖에서는 그녀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윤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 대표님.”“들어와.”그는 시선을 돌려 또 컴퓨터에 집중했다. 윤선미는 성혜인을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아까 사촌 언니가 연락이 왔는데, 대표님께 선물을 준비했대요. 배달원이 급하게 가져왔어요. 반 대표님, 받으세요.”윤선미는 일부러 성혜인이 보게끔 커프스를 열어 보였다. “사촌 언니가 말하기를 맘에 들지 않으면 바꿔도 된다고 했어요. 아직 배달원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성혜인은 그 커프스가 자기가 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발견했다. 그때 커프스를 고를 때 죄책감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 골랐기에 아직도 인상이 깊었다. 윤선미가 무슨 생각으로 보낸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살짝 과한 반응이었다. 반승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반승제는 이미 성혜인이 그에게 준 커프스가 어떻게 생겼던지도 까먹었기에 그대로 건네받았다. “단미가 왜 갑자기 선물을?”윤선미는 잘난 척 성혜인을 쳐다보았다. 이게 바로 윤단미다. 반승제는 윤단미와 관련된 일이라면 바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윤선미는 성혜인이 주눅 들 줄 알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침착했다. 마치 이 일이 그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 무슨 일이지? 연기하는 건가? 그녀가 뭐라고 하려던 찰나, 반승제의 핸드폰이 울렸다. 윤단미가 걸어온 것이었다. 반승제가 수신 버튼을 누르자 그쪽에서 윤단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제야, 선물 받았어?”“응.”“마음에 들어? 꽤 오래 고른 건데,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괜찮네.”반승제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전속 코디네이터도 있었기에 전혀 이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윤단미는 웃음을 지었다. 사무실 안에 성혜인도 있을 것을 생각하며 일부러 애교 섞인 말투를 썼다. “네 마음에 들면 됐어. 앞으로
전에 그녀를 위해 손바닥이 뚫렸고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 후에는 또 납치범한테서 그녀를 구해냈고. 반승제에게 있어서 그녀와 함께 있기만 하면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니 국을 갖다주는 것쯤은 당연한 것 아닌가?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태연하다는, 오히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반승제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성혜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서류를 챙기고 나가버렸다. 윤선미는 성혜인을 괴롭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 나갔다. 사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이제 마음 접어요. 사촌 언니랑 형부는 사이가 엄청 좋거든요. 누구도 못 끼어들 만큼.”성혜인은 그저 이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윤선미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윤선미는 그런 변함없는 성혜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남자를 꼬시려고 왔으면서 도도한 척은. '“아, 그러고 보니 신이한씨랑 가깝게 지낸다더니. 진짜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잡네요. 어쩐지 형부가 싫어하더라니.”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성혜인은 계속 윤선미를 무시한 채 걸어 들어갔다. 윤선미는 화가 치밀어 목까지 빨개졌다. 마치 허공에 주먹질한 것 같았다. 아프지는 않지만 창피한. “이 더러운 년이!”결국 참지 못하고 따라 들어가 손을 올린 윤선미가 바로 성혜인의 뺨을 내리치려고 했다. 성혜인은 윤선미의 손목을 딱 잡고 윤선미를 벽으로 밀고 차갑게 말했다. “윤선미 씨, 제가 같은 수에 연속 당할 줄 알아요? 계속 사촌 언니를 들먹이는데, 당신 사촌 언니는 윤선미 씨가 반 대표님을 좋아한다는 건 알아요?”윤선미의 낯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이 일은 사촌 언니가 알아서는 절대 안 되었다. “놔!”성혜인은 CCTV를 확인했다. 여기는 BH그룹이니 여기서 윤선미와 싸웠다가는 윤선미와 같은 편인 윤단미를 위해 반승제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윤선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아까 누구도 엘리베이터 층수를 누르지 않았기에 엘리베
윤선미는 지기 싫었다. 그녀는 사촌 언니와 사이가 좋아서 덕분에 BH그룹에 입사한 후 사촌 언니와 반승제의 관계 덕분에 BH그룹 안에서도 꽤 잘나갔다. 하지만 성혜인이 나타나면서부터 반승제에게 혼나고 형부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고 또 혼났다. 반승제가 윤선미에게 이렇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윤선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어차피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아도 다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성혜인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윤선미가 성혜인의 말을 무시하자 분위기는 오묘해졌다. 다들 성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고, 실내 디자이너로 살짝 이름이 있다고 해도 고위층들과는 큰 관계가 없었기에 다들 성혜인이 낯설었다. 하지만 윤선미는 윤단미의 사촌 동생이고, 윤단미는 BH그룹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다. 이때 나서서 윤선미의 편을 들어준다면 반 대표와의 사이도 가까워질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사람이 바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디의 직원인가? 방금 문이 열릴 때 우리가 윤선미 씨가 자네 앞에 꿇어있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봤어. 그런데도 부축도 해주지 않았지. 게다가 이곳에 올라오는 건 예약해야 하는 건데 혹시 데스크 직원들을 속이고 몰래 올라와 대표님을 보려고 한 건 아닌가?”확실히 예전에 어떤 여자가 몰래 직원을 따라서 꼭대기 층에 올라왔다가 경찰에 잡혀간 적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반승제는 이런 추행을 싫어했다. 윤선미는 고위층의 말에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억울하다는 듯, 눈가는 여전히 붉었다. 원래도 예쁜 윤선미가 눈물을 흘리니 안아서 달래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하지만 윤선미와 윤단미의 신분을 아니 남자 직원들도 쉽사리 고백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고위층들 앞에서 여린 여자를 보호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연약한 윤선미보다 강인해 보이는 성혜인을 좋아하는 남자는 적었다. 대부분 남자는 영웅주의가 있어서 이런 여자를 보호해 주려고 한다. 성혜인은 반승제를 쳐
성혜인은 시선을 거두었다. 마음은 평소와도 같이 고요했다. 그저 제원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 커플의 인연을 축복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반승제의 눈이 낮다고 생각했다. 윤단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윤단미의 행동은 약간의 여우짓이 첨가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를 좋아하는 여자를 곁에 두다니. 첫사랑을 위해서 많은 것을 참고 있었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1층에 도착했다. 성혜인은 매너 있게 기다리다가 그들보다 한발 늦게 내렸다. 반승제의 뒤로 고위층들이 같이 걸어 나갔다. 성혜인은 원래 회사로 가려고 했지만 또 아버지가 얘기한 임무를 떠올리니 오늘 밤 무조건 반승제를 성씨 저택에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솔직히 반승제는 아내를 증오해서 아내가 갑자기 죽었다고 해도 장례식에 참가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반 회장이 시키지 않는다면 성씨 저택에 발조차 들여놓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와 숨바꼭질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계약했으니 계속 연기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가장 중요한 시공 시간도 확정되었으니 재료시장에 오다가다보면 바빠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포레스트에 돌아와서 또 전전긍긍하며 반승제를 피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더욱 피곤해졌다. 성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행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그녀가 집을 판 돈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요즘 계속 운이 좋지 않았는데 드디어 기쁜 일이 생겼다.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중개인에게 연락할게요.”반승제의 16억을 갚지 않아도 되어서 확실히 쉬워졌다. 그의 온정을 빚지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내라는 신분으로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 그와 첫사랑의 다시 만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성혜인은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반승제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기가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중개인에게 가서 남은 돈을 건네고 그 집에
우연이었다. 너무나도 기막힌 우연이었다. 성혜인의 심장이 멎을 정도로. 앞으로 임경헌과 만나야 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게다가 임경헌은 반승제의 사촌 동생이니. 임경헌은 살짝 놀라더니 걸어들어왔다. “페니 씨, 여기 살아요?”성혜인은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 사장님과... 여자친구분?”임경헌은 바로 여자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그녀의 볼에 뽀뽀했다. “네. 두 분이 이웃이 되겠네요.”성혜인은 청소하며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성혜인은 임경헌의 여자친구와 이웃이 되기 싫었다. 게다가 임경헌의 어머니는 성혜인이 여자친구인 줄 알고 계시니. 지금 그의 여자친구 앞에서 성혜인은 어느 날 반희월을 마주칠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반희월이 여기 올 리는 없었다. 임경헌이 여자에게 돈을 물 쓰듯 쓰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반희월이 잡으려고 해도 힘들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혜인은 안심이 되었다. 임경헌은 성혜인이 홀로 청소하는 모습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편은요? 제가 맞은 쪽에 살 때는 이 집이 안 팔렸었는데. 최근에 산 거죠? 남편이랑 이사하려고요?”성혜인은 골치가 아파 그대로 굳어버렸다.확실히, 오늘 성혜인은 이사해 왔고 임경헌은 진작에 맞은편의 집을 사들였었다. 원래 한참 전에 샀다고 거짓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남편의 일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임경헌 옆의 여자는 임경헌을 안고 성혜인을 향해 날을 세웠다. 원래는 임경헌과 친한 여자인 줄 알고 그런 것이었다. 임경헌과 친한 여자는 대부분 그의 전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경계하다가 임경헌의 말을 듣고 다시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그냥 친구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효원이라고 해요. 효원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사실 성혜인도 그 얼굴을 봤을 때 어딘가 익숙했다. 그러다가 최효원의 눈이 빛났다
반 회장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반승제의 눈은 멸시로 가득했다. “알겠습니다. 접대가 끝나면 가도록 하죠.”이미 SY그룹을 도와 2차 융자 위기를 넘겼고 그 여자도 계약에 사인을 했으니 성씨 가문에서는 조용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를 불러 체면을 세우려고 한다니, 성씨 가문의 콧대가 참으로 높았다. 반승제는 자기가 SY그룹과 성씨 가문에게 충분히 잘 대해 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저 제원을 떠났을 뿐, 이혼계약서을 남기고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 여자도 핍박받아 결혼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만나고 나서 그녀의 눈에 담긴 애정과 야망, 그리고 그것을 전혀 숨기지 않으려는 그녀를 보고 반감이 일었다. 그는 그때의 결혼이 그녀가 반회장을 졸라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잘 들었고 또 그녀를 아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그의 목숨도 살려준 적이 있으니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만 밝혀도 할아버지가 결혼을 추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강박적일 뿐이다. 바로 그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다니. 반승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귀국 후에도 BH그룹을 쉽게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그런 여자와 기형의 혼인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니. 성씨 가문이 반 회장을 믿고 너무 으스대고 있었다. 반 회장과 약속하고 나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맞은 쪽에 앉은 사업 파트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층 차가워진 태도를 보며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반 대표님, 제가 말한 것에 문제가 있나요?”반승제는 가볍게 웃으며 부드럽게 얘기했다. “계획안은 다 확인했습니다. 완벽하더군요.”사업 파트너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화제를 이어갔다. 다른 한편, 성혜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아빠의 몸 건강이 걱정되긴 했지만 SY그룹이 계속 반승제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에 반승제는 이미 SY그룹의 비즈니스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
성혜인은 임남호 옆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에 짙고 검은 아이라인. 진한 화장 때문에 원래의 얼굴을 보아내기 힘든 정도였다. 여자는 성혜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순간 침을 뱉었다. “임남호, 이 사람은 누구야?”“아, 여긴, 내, 내 사촌 동생이야.”“너 거짓말이었지. 제원에 친척이 없다며? 네 여자친구는 아니고?”“아니야, 절대 아니야.”임남호가 설명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이미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고 또 바닥에 침을 뱉었다.“꺼져,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임남호가 쫓아가려는데 이번에는 성혜인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임남호! 네가 유부남이라는 걸 잊지 마.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노는 건 뭐라고 안 할게. 일단 돌아가서 이혼부터 해!”여자는 멀리 가지 않아 임남호와 성혜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임남호는 자기가 2주 동안이나 공들인 여자가 떠나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그 여자는 다시 돌아오더니 성혜인을 차버렸다. “더러운 년! 내 남자를 뺏을 생각이야? 내가 누군지는 알아?”성혜인은 이 여자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녀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 오더니 성혜인을 치려고 했다. 임남호는 길옆에서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는 성혜인과 10센치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멈춰 섰다. 성혜인은 임남호가 여자를 확 밀치는 것을 보았다. “가! 꺼져! 다신 보지 말자!”“어, 그래, 임남호. 감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임남호의 얼굴이 삽시에 붉어졌다. 성혜인을 보기도 무서웠다. 성혜인은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익숙한 차 번호를 보고는 머리가 아파졌다. 차 문이 열리더니 반승제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마도 금방 접대를 마치고 온 것 같았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두 개 정도 풀어져 있었고 한 손은 차 창문에 걸친 채 그 푸른 커프스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는 성혜인을 보고 밤바람처럼 차갑게 물었다. “신 사기인가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