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회장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반승제의 눈은 멸시로 가득했다. “알겠습니다. 접대가 끝나면 가도록 하죠.”이미 SY그룹을 도와 2차 융자 위기를 넘겼고 그 여자도 계약에 사인을 했으니 성씨 가문에서는 조용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를 불러 체면을 세우려고 한다니, 성씨 가문의 콧대가 참으로 높았다. 반승제는 자기가 SY그룹과 성씨 가문에게 충분히 잘 대해 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저 제원을 떠났을 뿐, 이혼계약서을 남기고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 여자도 핍박받아 결혼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만나고 나서 그녀의 눈에 담긴 애정과 야망, 그리고 그것을 전혀 숨기지 않으려는 그녀를 보고 반감이 일었다. 그는 그때의 결혼이 그녀가 반회장을 졸라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잘 들었고 또 그녀를 아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그의 목숨도 살려준 적이 있으니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만 밝혀도 할아버지가 결혼을 추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강박적일 뿐이다. 바로 그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다니. 반승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귀국 후에도 BH그룹을 쉽게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그런 여자와 기형의 혼인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니. 성씨 가문이 반 회장을 믿고 너무 으스대고 있었다. 반 회장과 약속하고 나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맞은 쪽에 앉은 사업 파트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층 차가워진 태도를 보며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반 대표님, 제가 말한 것에 문제가 있나요?”반승제는 가볍게 웃으며 부드럽게 얘기했다. “계획안은 다 확인했습니다. 완벽하더군요.”사업 파트너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화제를 이어갔다. 다른 한편, 성혜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아빠의 몸 건강이 걱정되긴 했지만 SY그룹이 계속 반승제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에 반승제는 이미 SY그룹의 비즈니스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
성혜인은 임남호 옆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에 짙고 검은 아이라인. 진한 화장 때문에 원래의 얼굴을 보아내기 힘든 정도였다. 여자는 성혜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순간 침을 뱉었다. “임남호, 이 사람은 누구야?”“아, 여긴, 내, 내 사촌 동생이야.”“너 거짓말이었지. 제원에 친척이 없다며? 네 여자친구는 아니고?”“아니야, 절대 아니야.”임남호가 설명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이미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고 또 바닥에 침을 뱉었다.“꺼져,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임남호가 쫓아가려는데 이번에는 성혜인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임남호! 네가 유부남이라는 걸 잊지 마.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노는 건 뭐라고 안 할게. 일단 돌아가서 이혼부터 해!”여자는 멀리 가지 않아 임남호와 성혜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임남호는 자기가 2주 동안이나 공들인 여자가 떠나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그 여자는 다시 돌아오더니 성혜인을 차버렸다. “더러운 년! 내 남자를 뺏을 생각이야? 내가 누군지는 알아?”성혜인은 이 여자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녀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 오더니 성혜인을 치려고 했다. 임남호는 길옆에서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는 성혜인과 10센치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멈춰 섰다. 성혜인은 임남호가 여자를 확 밀치는 것을 보았다. “가! 꺼져! 다신 보지 말자!”“어, 그래, 임남호. 감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임남호의 얼굴이 삽시에 붉어졌다. 성혜인을 보기도 무서웠다. 성혜인은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익숙한 차 번호를 보고는 머리가 아파졌다. 차 문이 열리더니 반승제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마도 금방 접대를 마치고 온 것 같았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두 개 정도 풀어져 있었고 한 손은 차 창문에 걸친 채 그 푸른 커프스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는 성혜인을 보고 밤바람처럼 차갑게 물었다. “신 사기인가
“나 좀 내버려 둬! 그건 내 부모지 네 부모도 아니잖아. 게다가 너희 집안도 개판이잖아.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난 간다.”“그래, 가. 난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네가 가면 그 여자는 감옥에 갈 거야.”임남호는 그대로 굳어버린 채 얼굴 근육이 떨렸다. 성혜인의 태도는 강인했다. “사람을 불러서 널 돌려보낼 거야. 그리고 외삼촌과 외숙모한테도 알려서 널 데려가라고 할거고.”“너!”임남호는 또 기가 죽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난 밖에서 굶어 죽더라도 그 집에 돌아가기 싫어.”반승제의 차 창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저번에 이 남자와 싸울 때도 반승제가 현장에 있었다. 그래도 반승제는 성혜인의 집안일에 별로 큰 관심이 없었기에 제대로 듣지 않았다. 하지만 반승제는 운전기사더러 다시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운전기사도 아까의 일 때문에 놀라 혼이 나간 상태였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여전히 있는 것을 알고 그의 앞에서 더 이상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차량이 도착하고 두 경호원이 임남호를 쳐들고 그의 손발을 묶었다. 임남호는 성혜인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도망치려 했지만 두 경호원의 근육을 보고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성혜인은 이어서 전화를 또 걸었다. 이번에는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거는 전화였다. 임남호를 찾았으니 잘 데리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임동원과 이소애 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성혜인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아 이소애는 또 저번에 말한 공무원 얘기를 꺼냈다. “혜인아, 이미 물어봤는데 그 공무원 생긴 것도 꽤 잘생겼대. 바르게 사는 사람인데 한번 만나봐.”성혜인은 미간을 손으로 누르며 모르는 사이에 반승제와 눈이 마주쳤다. 반승제의 옆태는 예리하면서 부드러웠다. 차량의 빛이 그의 얼굴에 비추어져 그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귓가에는 외숙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또 생각난 것이지만
최효원을 집안으로 들인 성혜인은 예의상 물 한 컵 따르러 갔다.성혜인의 집을 이미 한 번 구경해 본 적 있었던 최효원은 이곳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잠깐 사이 곳곳에 더해진 성혜인의 디테일한 인테리어 덕분에 집안은 훨씬 더 보기 좋아졌다.겨울이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얌전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강아지를 좋아했던 최효원은 그의 애절한 눈빛에 결국 참지 못하고 개껌 하나를 집어서 건네줬다.“페니 씨도 경헌 씨가 부자라는 걸 알고 있죠? 사람들이 다 그래요, 한낱 데스크 직원일 뿐인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차일 거라고요. 저희는 경헌 씨가 BH그룹에서 출근하고 있을 때 만났거든요.”임경헌은 강제적으로 BH그룹에서 이틀 정도 출근한 적이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도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니 성혜인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섹시한 전 여자친구와 완전히 반대되는 최효원의 청순한 모습에 그는 정해진 취향도 없이 만나고 다니나 싶었다.임경헌은 유흥업소를 밥 먹듯이 다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항상 미인이 차고 넘쳤다. 이렇게 보면 최효원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또 제가 언제 듣기로는 경헌 씨 어머니가 경헌 씨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엄청 싫어한대요. 저도 어머님을 한 번 뵌 적 있는데 진짜 무서운 분인 것 같았어요.”최효원의 육감은 아주 정확했다. 임경헌의 어머니는 확실히 무서운 사람이었고 아들에 대한 요구도 각박했다. 수많은 여자가 그녀에게 시달리다가 임경헌과 헤어졌다. 따지고 보면 좀 시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질이 떨어지기도 했다.성혜인은 남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최효원이 이미 그녀를 친구로 여긴 모양이라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었다.“사실 어머님도 그리 무섭기만 한 분은 아니에요. 사장님 여자 취향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 알기 전에 무서울 뿐이지, 효원 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분명 응원해 주실 거예요.”성혜인은 항상 임경헌을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임경헌은 자신의 집을 실내 디자이
「경헌 씨 말이 맞아요. 페니 씨는 엄청 유능한 사람인 것 같아요. 본업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잖아요!」임경헌은 최근 방탕한 마음을 다잡고 최효원에게만 잘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주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았다.사진을 본 임경헌은 눈썹을 튕기며 반승제에게도 보내줬다.「형, 이건...?」반승제는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성씨 저택 밖에 도착했다. 성씨 집안사람이 반태승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안 올래야 안 올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 오는지는 반승제에게 달렸다.성씨 일가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맴돌고 있었지만 그들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반승제와 성혜인은 오지 않았다. 더구나 성혜인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성휘는 안 그래도 화가 나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는데, 눈치 없는 소윤이 계속 곁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제가 진작에 말했죠? 혜인이는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애예요. 당신이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기승을 부리는 걸 봐요.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성휘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가 퇴원하려고 했을 때, 의사는 아직 퇴원할 상황이 아니라며 돌려 말했지만 그는 결국 듣지 않았다. 2차 융자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한창 일이 많아질 시기라서 도무지 병원에 누워 경영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성휘는 또 성혜인에게 지분을 양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딸이 고생하지 않도록 말이다.요즘은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이가 어떤지 잘 몰라서 걱정이었다. 반승제의 비서와 백연서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더욱 걱정되었다. 반승제의 권력이 필요해 추진한 정략결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휘는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성씨 일가는 저녁 6시부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의 음식이 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데워졌는데도 아무도
자동차 경적이 두 번 울리자, 심인우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뒤늦게 무언가 떠오른 듯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참, 앞으로 회장님한테는 통화를 삼가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사고가 생기면 서로 껄끄러워지지 않겠습니까.”이번 말은 단호함을 넘은 경고였다. 반씨 집안에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말이다.성휘는 순간 머리가 뻥 해지더니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성혜원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뒷좌석의 창문 앞으로 왔다.“승제 씨.”성혜원은 반승제의 차가운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매불망 창문만 바라봤다. 자신이 반승제 앞에서 얼굴을 많이 비추면 무조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화내지 마세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성혜원은 발그레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안 그래도 병약한 몸을 더 강조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느낌을 만들어 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집안사람이 맞는지 의심 갈 정도로 무식한 행동이었다.넋이 나간 채로 한쪽에 서 있던 성휘도 성혜원이 반승제에게 과하게 열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잘못된 열정 말이다. 그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하지만 열받은 나머지 말문이 막혀 버렸다.성혜원은 원래 몇 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누군가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머리를 돌렸다. 그녀를 말린 사람은 소윤이였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분위기가 더 험악해질 것 같아서 소윤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성혜원은 이제야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반승제가 있는 뒷좌석으로 향해 있었다.반승제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심인우에게 말했다.“출발하죠.”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액셀을 밟았다.차는 빠르게 멀어져갔지만, 성씨 일가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사람은 소윤이였다.“성혜인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런 취급을 당하지 않았어요. 백연서 그 여자가 했던 말 잊었어요? 반씨 집안에서 혜인이를 좋게 보는 사람은 회장님밖에 없다고요.”소윤
반승제는 말없이 휴대폰을 꺼버렸다, 마치 임경헌의 문자를 본 적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성혜인은 자신의 그림이 반승제 본인에게 전달됐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최효원이 만든 야식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겨울이도 얌전히 누워서 귀를 쫑긋거렸다. 성혜인은 최근 했던 일들을 생각하다가 금세 단잠에 빠졌다.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아침밥을 먹자마자 바로 공사 현장으로 출발했다. 신이한 덕분인지 새로 뽑은 직원은 아주 빠릿빠릿했다. 성혜인이 디자인적인 지시를 내리면 금방 알아듣고 빠르게 공사를 해나갔다.공사가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성혜인은 재료 리스트를 꺼냈다. 서천에서만 만드는 옥단 장판 빼고는 전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인맥으로 비교적 싼 값에 거래할 수 있기도 했다.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옥단 장판이었다. 이를 위해 조만간 직접 서천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성혜인은 공사 현장에서 떠나기 전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젯밤 집에 돌아가지 않았더니 수많은 전화가 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라도 자기 뜻을 밝혀야 했다. 안 그러면 집안에서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다.2차 융자가 끝난 다음에는 반승제에게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 하던 대로만 해도 회사가 잘 운영될 것이기 때문이다.성혜인은 부재중 통화를 못 본 척하고 출발하려고 했다. 이때 한지은이 갑자기 다가와서 창문에 노크했다.한지은은 저번에 조희준과 바람을 피우다가 부인한테 잡힌 적이 있었다. 그의 부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닌게, 한지은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 그녀의 평판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요즘 양한겸에게도 찝쩍대지 못하고 있었다.‘또 시비 걸러 온 건가?’성혜인은 창문을 내리더니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한지은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회의하는 날이잖아요. 근데 제 차가 고장나서... 어차피 가는 길인 것 같은데 회사까지 데려다줄 수 있죠?”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가 고장 났으면 택시를
“아주머니, 괜찮으세요?”반희월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운전석에 있던 기사는 아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상황은 성혜인 쪽보다 훨씬 심각했다.교통 정체가 시작되자 교통경찰이 금방 와서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반희월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차에서 내려왔다가 성혜인을 발견하고는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닌 걱정부터 하기 시작했다.“페니 양,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어?”성혜인은 미안한 마음에 후다닥 달려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저는 괜찮아요. 죄송해요, 아주머니. 저 일단 119부터 부를게요.”교통경찰은 차 안에 있는 기사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병원은 가야 할 것 같았다.성혜인은 사고 차량 운전자로서 당연히 경찰의 의심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 설명하려는 반희월을 막아서며 말했다.“아주머니, 구급차가 금방 도착할 테니까 먼저 병원으로 가세요. 제가 후에 직접 찾아뵙고 사과드릴게요. 이곳 일은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성혜인의 차분한 태도는 얼빠진 채로 차 안에 앉아있는 한지은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한지은은 원래 차에 기스가 남는 정도의 사고로 성혜인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복수에 자신의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핸들을 잘못 꺾어 건너편 차도로 넘어가고 말았다. 피해 차량이 비싼 외제차인 것을 발견한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차에서 내려가지도 못했다.성혜인은 경찰에게 핸들을 뺏긴 과정을 전부 설명하고 차량 블랙박스가 증거가 되어줄 것이라고 보충했다. 피해 차량이 비교적 비싼 차종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더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고 성혜인과 한지은을 전부 경찰서로 데려갔다.성혜인은 요즘 용한 무당을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찰서와 병원을 지나치게 많이 드나들었다. 안 그래도 나락을 치는 기분이 정신을 놓고 나불대는 한지은 때문에 더 나락을 치고 있었다.“그러게 운전대를 똑바로 잡고 있어야죠.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