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도 없이 반승제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이게 바로 자기가 기다려온 사람이라는 예감이 들었다.사라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럴 수도 있지.”“박사님은 저 사람을 못 믿습니까?”“나는 모든 사람을 믿었지만 그들은 매번 나에게 실망을 안겨줬어.”8호는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한 손으로 무심하게 목에 걸린 비취 구슬을 만지기 시작했다.사라는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지만 계속 실망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나갈 것이고, 너도 너의 가족을 만날 거야.”8호는 눈빛이 밝아지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좋아요. 가족을 만날래요.”그는 가족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의 기억은 혼란해졌다.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자기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었고 이 구슬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 가족을 만나려 했다.그의 기억은 이미 지워졌다. 그래서 이곳으로 어떻게 왔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기지 내부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날 뿐이다.사라는 또 손을 들어 그의 귀를 꼬집었다.“계속 여기 있으면 그들이 그 연결구를 발견할 거야.”“지금 돌아가도 그들은 알게 될 거예요. 박사님이 저를 데려다주세요.”이 강력한 무기는 사라가 만든 것이며, 모든 실험체의 몸은 수많은 실험을 거쳤다.사라는 자기가 무언가를 잊었고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어쩌면 한 사람, 그녀가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이 작은 집념 덕분에 그녀의 기억은 조금씩 이 육체의 기억을 압도했다. 그 당시 반승우도 집념으로 실험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그리고 앞에 있는 이 18세 소년도 집념 때문에 살아 있다.집념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다.센터 사람들이 8호 실험체를 찾느라 정신이 없을 때 사라가 핵심연구실에서 걸어 나왔는데, 손에 쥔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 바로 8호 실험체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즉시 실험체를 연구 상자에 가두었다.“이 실험체는 박사님의 말
진세운이 가자 여석진은 제로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연결구가 없어서 반승제는 내려갈 수 없었고, 여석진의 방에 CCTV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기에 소리도 낼 수 없었다.그는 원래 이 약병에 담긴 액체를 여석진의 몸에 부으려고 했다. 하지만 제로가 있는 것을 봤으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제로는 그가 고른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여석진은 나하늘과 관련된 사람을 대할 때 유례없이 열정을 보였다.그는 손을 쓰긴 했지만 당장 행동을 취하지는 않고, 제로의 머리채를 잡은 채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통증을 느낀 제로는 즉시 약한 체하며 눈물을 글썽였다.이를 보고 여석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는 갑자기 나하늘을 지하실에 가뒀을 때와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런 만족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눈이 괜찮네. 내가 나하늘의 눈을 멀게 해 놓고 오랫동안 아쉬워했었지. 그때는 도려내서 보관하지 못했는데, 이 눈은 가능할 것 같아. 말해봐. 이름이 뭐야?”제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여석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여자의 눈물이다. 여자는 나하늘처럼 강인해야 하고, 1년에 수백 번 도망가서 그의 변태적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앞에 있는 이 여자는 눈이 예쁘지만 성격이 너무 연약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다.찰싹! 찰싹! 제로는 뺨을 열 몇 대 얻어맞고 얼굴이 부었지만 눈은 여전히 맑았다.여석진은 일어나서 구두 신은 발로 그녀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나하늘 외의 여자에게 그는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다. 그에게 여자는 아무렇게나 굴욕을 줄 수 있는 짐승 같은 존재다.나하늘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여자는 천하고 당해도 싸다. 그때 나와 함께했다면 그 모든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잖아?’여석진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후련함을 느꼈다. 연구기지에서 누구도 함부로 때리고 욕할 수 없었던 그가 끝내 사람을 시원
반승제는 진작에 핵심 연구실로 돌아왔고, 가져갔던 약품도 다시 가져왔다.그는 제로가 거기 있는 것을 보고 여석진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아니나 다를까 다시 여석진의 소식을 접한 것이 30분 뒤였는데, 방에 불이 났고 여석진은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했다.반승제는 즉시 사라를 찾아가 이 결과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불길이 타오르기 전에 그는 이미 눈이 멀었으니 불길이 천천히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박사님, 우리 함께 탈출할 계획을 말씀해 보세요.”들어온 지 오래돼서 임신한 몸으로 밖에서 기다리는 성혜인이 무척 걱정할 것이다.그리고 연구기지를 빨리 파괴해야 H국에서 내린 지명수배도 하루빨리 해제할 수 있다.사라가 앞에 놓인 시약들을 보며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승제를 바라보았다.“방금 땅이 흔들리는 것을 못 느꼈어요?”반승제는 정말 느끼지 못했다.사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갑자기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기지가 오래전부터 존재했는데, 이전에는 지진이 일어나 이곳의 모든 것이 파괴되길 바랐어요.”하지만 정말 지진이 일어나면 이곳의 대부분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방금 땅이 흔들리자 그녀는 좀 불안했다. 그녀는 원래 이것에 민감했다.“박사님, 이곳에 지진이 일어날까 봐 걱정되세요?”“네, 하지만 기지는 100여 년 동안 지진이 없이 무사히 존재했어요. 반승제 씨, 밖에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했죠?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 밖에서 지원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목표가 너무 커서 산목숨으로 떠나기 힘들 거예요.”게다가 사라가 사라지면 연구기지에서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잡으려 할 것이다.사라는 오늘에야 철저히 정신을 차렸다. 이전에는 그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준비를 했을 뿐이고, 왜 떠나야 하는지 몰랐다.이제는 안다. 나가서 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어떤 신분인지 모른다. 가장 결정적인 이 정보가 줄곧 생각나지 않았다.조직
“죽여도 돼요.”“그럼 죽입시다.”그는 이 말을 할 때 오늘 날씨가 참 좋다고 말하듯 아무런 감정 기복이 없었다.사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럼 부하들에게 시작하라고 하세요.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5개 배지의 숫자와 부호를 확보했어요. 반승제 씨와 부하들은 나머지 15개만 찾으면 됩니다. 이 숫자들은 유용한 것도 있고 쓸모없는 것도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부호를 봐야 알 수 있어요. 부호와 숫자는 모두 배지의 측면에 있는데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확대경을 사용해야 해요. 회장들은 배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고, 확대경으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해요.”“19명의 배지 번호를 모두 손에 넣은 후, 마지막에 진세운을 어떻게 처리할지 같이 고민해 보죠. 그자의 배지는 먼저 놔두고 손대지 마세요. 잘못 건드리면 반승제 씨가 기지 내에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릴 거예요. 그자는 미치광이라 무슨 짓이든 하기 때문에 괜히 경솔하게 행동하면 다음 계획만 더 힘들어질 수 있어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나가서 부하들을 연락했다.그와 최용호의 대화는 여전히 위쪽 통풍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최용호는 플로리아에서 줄곧 여유로운 모습이었는데, 설기웅이 잡혀 와서 그렇게 된 것을 본 뒤로 줄곧 마음이 불편했다.“반승제 씨, 우리가 기웅이를 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반승제가 입을 삐죽거렸다.“교배에 실패하지 않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설씨 집안 아이를 남길 일은 없을 거예요.”‘X발!’최용호는 욕을 거의 하지 않는데 지금 욕이 나올 것 같다.말이 그렇지, 그 기계에 확실히 교배 실패라고 나왔지만 만에 하나 성공하면? 설기웅은 이 안에서 순결을 잃게 된다.사실 요 며칠 반승제는 통풍관을 통해 설기웅이 있는 실험실로 갔었다. 그와 같이 갇힌 여인은 그가 마음에 드는 듯 의식이 없는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먹여주는 동작이 좀 거칠긴 했지만, 줄곧 실험 상자 안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전혀
3일 만에 진세운이 가지고 있는 배지를 제외한 다른 숫자를 모두 손에 넣었다.사라는 부호에 근거해 유용한 몇 개 숫자를 골라냈고, 결국 가장 중요한 숫자는 진세운의 배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배지가 있어야 마지막 세 개 숫자를 확정할 수 있었다.세 자리 숫자는 수많은 배열 방식이 있는데, 도어락 비밀번호 오류는 한 번밖에 허용되지 않고 두 번 오류가 발생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견고한 감옥일 것이다.“박사님, 그자의 몸에 있는 것은 저에게 맡기세요.”반승제는 앞에 있는 어지러운 숫자들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제가 찾아올게요.”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가 쌓아둔 약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솔직히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숫자를 다 모을 줄은 몰랐어요. 저는 그동안 무척 노력해서 겨우 5개밖에 모으지 못했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나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8호를 데리고.”그녀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막연한 말투로 말했다.반승제가 데리고 들어온 사람들이 정말 유용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혼자서 진행한다면 몇 년을 더 고생해야 할지 모른다.두 사람이 몰랐던 사실은 진세운이 최근 센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는 것이다.특히 여석진이 사고를 당한 후 그는 마음이 은근히 불안했다.이제 그는 기지 내의 모든 약품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전에 가지 못했던 곳에도 갈 수 있었다.그는 등을 기댄 채 어두운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이때 진백운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그를 보자마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세운아, 이거 봐.”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새 잎사귀를 들고 한창 흥미진진하게 표본을 만들고 있었다.진세운은 잎사귀를 모으는 일에 관심이 없는 데다 짜증까지 나서 그의 손을 쳐 버렸다.진백운은 또 사람을 짜증 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늘어뜨렸다.그는 진세운의 가슴에 달린 배지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손으로 툭 건드렸다.진세운은 잔뜩 경계하며 즉시 그의 손을 잡았다.“뭐 하는
진백운은 오후 내내 바깥을 배회하다가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사람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는 이 사람이 지난번에도 자신과 부딪혔던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최근 사망한 사람들을 모두 조사한 결과, 그중 여섯 명이 아시아인이었다. 과거에는 연구 기지에서 아시아인을 거의 볼 수 없었으나 이번 달에만 여섯 명이 나타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진백운은 이 사실을 진세운에게 알려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한 번 부딪히고 난 후, 진백운은 무언가를 흡입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반승제가 사용한 약은 워낙 강력하여 며칠 동안 혼미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진백운이 실험실에서 자라며 온갖 약물에 면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진백운은 몇 초 동안 어지러움에 시달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반승제의 팔을 꽉 붙잡았다. 반승제는 그를 발로 차서 내동댕이쳐버리고,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 틈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진백운은 바닥에 쓰러져 통증이 전해지는 가슴을 문질렀다. 그는 곧 다시 일어나 눈가가 붉어진 채 진세운을 찾아갔다.“방금 어떤 남자가 나에게 약을 사용했어. 몇 초 동안 혼미했지만, 그 사람은 내가 실험실 케이지 안에서 자라 모든 약물에 면역이 되어 있다는 걸 몰랐을 거야.”진세운의 눈동자가 살짝 빛나더니,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일은 조사해 봤어?”“응, 세운아. 최근에 사망한 아시아인이 너무 많아. 연구 기지는 항상 서양인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 달에만 여섯 명의 아시아인이 사망했어. 정말 이상해.”진세운은 이내 반승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진백운은 그가 왜 웃는지 몰라 호기심에 물었다.“혹시 기쁜 일이라도 있어?”진세운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래, 조금 기쁘네. 아주 재미있는 일을 찾았거든.”그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본 진백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사라는 즉시 중앙 홀로 갔고, 그곳의 모니터에서는 다른 구역의 상황이 송출되고 있었다.다른 구역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가고 있었으며, 그 광경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홀에 있던 연구원들은 공포에 휩싸여 서로 묻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야? 저 사람 도대체 뭐 하는 거야?”“그 자식이 모든 실험체를 방출했어! 젠장, 우리는 여기서 죽게 될 거야. 너무 많은 나쁜 짓을 했어. 모두 죽을 거야.”“개조된 실험체들이 우리를 다 죽일 거야.”진세운은 턱을 괴고, 화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본래 이 감시실을 관리해야 할 배민희는 손과 발이 묶인 채 바닥에 앉아 있었고, 진백운은 그녀 앞에 서서 손에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있었다.진백운은 진세운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하려는 일이라면 무조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배민희는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진세운은 단순히 실험체를 방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실험체들이 광분하게 만드는 약물까지 미리 주입했다.이 실험체들은 가장 강력한 8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의 잔인함과 능력은 매우 공포스러웠다.이 살인 병기들의 눈에 연구원들을 적으로 보일 것이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들 것이다.진세운이 정녕 미친 것일까. 이렇게 되면 기지는 모두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이때, 바닥이 또다시 흔들렸고, 진세운도 이를 느끼며 배민희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내가 기지를 파괴하지 않더라도 이 기지는 곧 파괴될 거예요. 느끼지 못하셨나요? 최근에 갇힌 동물들이 매우 흥분해 있었잖아요. 그들은 지진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어요.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백 년 만의 대지진일 거예요. 시점이 정말 적절하군요. 어차피 나도 그들이 살아서 나가길 원하지 않으니까요.”배민희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그녀는 입이 막혀 말할 수 없었다. 아니면 그녀는 진세운
진백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약을 쏟아부었다.배민희는 약을 빼내려 손을 입에 집어넣었지만,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 이때 진세운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선생님,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백운에게 하신 일은 정말 역겨워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을 비난할 자격이나 있을까요? 저 스스로도 역겨운 놈인데. 이 회장 자리는 진백운이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은 진백운을 진심으로 사랑했겠죠?”배민희는 흠칫하더니 진백운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장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서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들었다.그녀는 지금 이렇게 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이 진백운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추해 보였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자신의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며 애썼다. 그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배민희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야 진세운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세운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다.“선생님은 진심으로 진백운을 좋아하지만, 진백운은 인간의 감정 같은 건 전혀 이해 못 해요. 당신이 진백운과 잠자리를 가질 때도 진백운은 그냥 따라 했을 뿐이에요. 진백운을 계속 곁에 둘 수 있을 줄 알고, 심지어 고위층과 싸우기까지 했겠죠. 아마도 선생님은 특정 고위층 인사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회장 자리를 얻을 수 없었겠죠?”“진백운이 직접 독약을 쏟아부었으니, 많이 괴로우시죠?”단순한 괴로움이 아니었다. 진세운은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세워서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진세운은 진백운에게 독약을 먹이도록 시켰고, 진백운의 망설임 없는 행동은 배민희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배민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진백운을 보호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뛰어난 자질 때문에 끊임없이 실험에 사용
좋은 사람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설우현은 그대로 거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느샌가 설연주의 장난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하지만 더 이상 설연주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셨다.그렇게 설우현이 별장을 떠난 후에야 설연주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뜨고 눈앞에 드리워진 꽃밭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유리 꽃밭은 온통 잘 핀 꽃들로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다는데 바람둥이라서 그런지 설우현은 이러한 낭만적인 놀이를 잘하는 편이었다.이윽고 설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살펴보았다.핸드폰 화면에는 온통 그녀를 저주하는 김현서의 욕지거리와 그녀가 보낸 잠자리 사진이었다.대학교 시절 설강민과 사귀게 되면서부터 김현서는 설강민과의 잠자리 사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물론 잠자리 장면이 전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자고 있거나 두 사람의 팔이 드러난 사진 등 관계 후에 찍은 사진임이 명확했다.처음엔 차단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단을 하면 꼭 김현서에 의해 잡혀버렸다.설연주에게 김현서는 악랄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친구들 옆에서 김현서는 대범하고 밝은 여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사람이라면 반에서 절대 잘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설연주는 늘 김현서의 가장 큰 적이었다.사진만 슬쩍 확인한 설연주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옆에 환히 핀 꽃 한 다발을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꽃냄새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김현서를 연상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을 살짝 꺾으면 연약한 꽃은 힘없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부러지고 약간의 즙만 손바닥에 남을 뿐이었다.묵묵히 손가락을 바라보던 설연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가 정승후한테 연락했어요?”“네, 연락했습니다.”“그럼 다음에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날 때, 두 사람의 영상을 설강민에게 보내줘요. 물론 학교 카페에도 보내세요.”“
컴퓨터에 머물러 있던 설우현의 손길이 멈칫했다.‘이 세상에 아직도 커피를 마셔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하지만 설연주는 워낙 뻔뻔하고 속임수에 능하니 설우현은 그녀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겼다.한편, 설연주는 배가 고팠는지 손에 든 과일을 다 먹고 손가락까지 깨끗하게 빨았다.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는 설연주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 한 장을 뽑아 설연주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설씨 가문이 너 굶겼어? 왜 그렇게 먹어?”설우현의 질책에 설연주는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잠자코 휴지를 주워들어 손가락 사이에 묻은 과즙을 닦아냈다.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설연주에 설우현은 또다시 혹여나 말이 심하진 않았는지 반성하기 시작했다.비록 지금은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부족한 것 없겠지만 과거에는 틀림없이 배를 굶주리며 나날을 보내왔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식권을 모아두었으니 그 이후로는 틀림없이 잘 먹고 잘살았을 테지.그리고 김현서와 설강민의 그 같잖은 괴롭힘 수단이라면 정말 볼품없었다.설우현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높은 세력을 누비며 살아왔는지라 일반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하여 그에게는 볼품없는 괴롭힘 수단이었지만 김현서와 설강민의 괴롭힘은 일반인 한 명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설연주가 계속하여 침묵을 지켰다.마침내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인지 설우현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과일 접시를 그녀에게 넘겨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먹어. 누가 먹지 말래?”그러자 설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설우현의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과일을 하나 더 집어 들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는 늘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면 혼자 반성하더라고요. 도덕 기준이 상당히 높나 봐요.”어색하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곧이어 설우현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일부러 그랬어?”그러자 설연주는 혼자 추측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이른 아침부터 또다시 화가
방에 돌아와 막 잠이 든 설연주는 곧바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버렸다.먼저 김현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설강민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그러나 몸을 한 번 뒤척일 뿐 설연주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자 김현서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더욱 언성을 높여 신음소리를 흘려보냈다.관계가 끝나고 김현서는 일부러 설연주의 방을 찾아갔지만 방문은 꽁꽁 잠겨있어 문고리를 비틀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화가 난 김현서는 이내 언성을 높이고 쾅쾅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설연주, 당장 나와!”하지만 진즉 시끄러운 방 안에서 잠에 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김현서가 바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설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설씨 저택에 입주한 이 한 달은 설연주가 살면서 가장 편안하게 잠을 잔 시간이다. 적어도 옆집 이웃이 한밤중에 그녀의 집에 쳐들어올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고, 좁은 화장실에 숨어서 경찰에 신고할 필요도 없고, 입을 가리고 몰래 눈물을 훔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편에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분명 설연주가 먼저 꼬셨으니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며 그녀를 나무랐다.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 적어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문을 두드리고 발로 걷어차도 꼭 잠긴 방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화가 난 김현서는 씩씩거리며 옷을 여미고 설강민을 바라보았다.“천박한 년 주제에 다 컸네? 이제 우리 말도 무시해?”과거의 진연주는 개 짖는 흉내를 내라고 시키면 말없이 따르곤 했었다.그런데 지금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아?하지만 씩씩거리고 있는 김현서와 달리 설강민은 오히려 하품하며 김현서를 꼭 끌어안았다.“현서야, 오늘은 너무 늦었다. 일단 자자.”“그래, 오늘은 먼저 자고 내일 아침 다시 혼내 주지.”다음 날 아침 6시, 설우현이 계단을 내려오는데 도우미가 그에게 다가와 누군가 대문 앞에 앉아있다고 말해주었
설연주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피곤한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차 안은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고 설우현은 또다시 음악을 틀었다.이윽고 그들이 탄 자동차는 설준석이 사는 별장에 멈춰 섰고 설우현은 고개를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짙은 화장 아래, 짙은 피곤함이 몰려왔다.원래라면 큰소리를 내어 설연주를 깨었을 테지만 무슨 일인지 설우현은 손을 뻗다가도 다시 움츠러들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나서야 설연주는 잠에서 깨어났다.시간을 확인한 설연주는 이내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이내 설연주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설우현도 더 이상 이곳에 더 머물지 않고 바로 차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같은 시각, 김현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핸들을 꼭 잡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오랫동안 설우현의 뒤를 밟으며 언젠가는 손을 쓸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지만 설우현이 갑자기 카지노에 찾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김현서는 회원권이 없기에 카지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설우현이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지만 이번에는 설연주 그 천박한 년이 설우현의 뒤를 따라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파도처럼 몰려오는 질투심에 삼켜진 김현서는 당장이라도 핸들을 부러뜨리고 싶을 지경이었다.한편, 왜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냐며 그녀를 재촉하는 설강민의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지만 현재 김현서의 머릿속은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다.게다가 방금 그들이 탄 자동차는 별장에 도착하고도 30분 동안 바깥에 멈추어 서 있었다. ‘두 사람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사람 친척 아니었나?’김현서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남자를 꼬셨으니 설연주라면 분명 이런 짓도 할 수 있다.김현서는 여전히 설우현과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어려운데 진연주는 이미 설우현의 조수석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정말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
방금 도착했다는 설우현의 말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설연주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제 가시는 건가요? 저 오빠 차 타고 가도 돼요?”설우현은 묵묵히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옆 휴지통에 버릴 뿐 설연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러자 설연주는 넉살 좋게 따라오며 설우현의 뒤에 서서 고개를 내밀었다.“오빠, 설마 나더러 택시를 타고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죠? 카지노 여기 택시 잡기 어려워요.”설우현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과거는 의심일 뿐이었다면 현재 설연주에 대한 설우현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번져갔다.설연주는 단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신분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뿐이고 설씨 가문은 아주 좋은 이용수단이었을 뿐이다.왜 두 번의 친자확인에서 모두 통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보아하니 진연주는 진짜 설연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자신의 자동차 옆으로 다가간 설우현은 가엾게 밖에 서 있는 설연주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화가 나 버럭 언성을 높였다.“제니?”순간 움찔한 설연주는 이내 머쓱한 듯 코끝을 긁적였다.“그건 그냥 아르바이트하기 위한 가명일 뿐이에요. 게다가 오빠도 밖에서는 날 여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잖아요. 모르는 척하는 게 오빠한테도 좋을 거예요.”그 말에 설우현은 피식 냉소를 터뜨리며 말없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설연주도 얼른 뻔뻔하게 설우현을 따라 조수석에 앉았다.“뒷좌석으로 꺼져. 조수석은 내 여자친구 자리야.”그러나 설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맸다.“오빠는 여자친구도 많잖아요. 그럼 이 자리에 앉아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뭐하러 굳이 그런 걸 신경 써요. 그래도 불편하다면 그냥 저를 여자친구라고 생각하세요.”그 순간, 핸들을 잡은 설우현의 손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어떻게 이토록 뻔뻔한 여자가 존재할 수가 있는 거지?더 이상 말을 하기도 귀찮았던 설우현은 바로 액셀을 밟고 출발했다.잠시 후, 차 안의 고요함이 불편해진 설우현이 음악을 틀었다.뜻밖에도 설연주는
그러나 설우현은 더 이상 설연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장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다면...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괴물이 되는 걸 자처하겠어요? 오랫동안 지하 카지노를 운영하면서 제가 만나본 사람은 도련님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순간 설우현은 말문을 잃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훤칠한 손가락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칩을 쥐고 있었다.같은 시각, 설연주는 남자에게 안겨 그들이 앉아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그녀 역시 맞은편에 앉아있는 설우현을 발견했지만 모르는 사람인 것마냥 오직 재벌 2세 남자 옆에만 얌전하게 서 있었다.마스코트도 아니고...기분이 나빠진 설우현이 입술을 짓이겼다. 도중 설우현은 이미 적지 않은 판에서 승리를 따냈고 정신 차려 보니 남자의 손은 이미 설연주의 옷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하여 남자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묵묵히 지켜보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판돈을 바꿨다.이번 판엔 남자가 이기게 되었고 남자는 뛸 듯이 기뻐하며 설연주의 얼굴에 뽀뽀하고는 그녀에게 칩 세 개를 쥐여주었다.이윽고 설연주가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주위로부터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볼륨감이 넘치는 몸매와 청순한 외모, 그리고 화끈한 옷차림까지 더해져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보고만 있어도 절로 긴장될 지경이다.하지만 설우현은 보아냈다. 설연주의 기술은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그 남자가 이긴 몇 판도 모두 설연주의 안내에 따라 이긴 것이다.몇 번 반복되고 설우현도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더 이긴 후, 설우현과 설연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게다가 설연주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도 설우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우리 제니, 설 도련님 알아?”그러나 설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보였다.“아니요.”제니?설우현이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대체 가명이 몇 개
전화를 끊고 김현서는 즉시 정성껏 치장하기 시작했다.김현서의 목표는 계속하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설강민은 지금까지 그녀가 만났던 남자 중 가장 훌륭한 조건을 가진 남자이니 김현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강민을 꽉 붙잡아두어야 했다.다행히 설강민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유독 그녀의 말을 잘 듣는 편이고 대학교 시절, 캠핑하러 다녀오며 김현서가 의외로 설강민의 생명의 은인이 된 덕분에 설강민은 더더욱 그녀에게 단념하게 되었다.물론 목표를 바꿔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설강민과 만나고 기회를 틈타 설기웅과 만나며 그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그러나 설강민이 먼저 여러 번 약속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설기웅은 결국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그렇게 김현서는 시선을 설우현에게 돌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뜻밖에도 설우현은 상당히 눈이 높고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날 밤 가까스로 상대방이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낸 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다가 한껏 멋을 부리고 달려갔지만 돌아온 건 많은 사람 앞에서의 설우현의 질타와 욕지거리였다.절세의 미인은 아니지만 김현서 역시 꽤 예쁜 편이었다. 하여 김현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 욕을 먹고도 설우현이 진심으로 그녀를 밀어낸 것이 아니리라 믿었다. 술주정이겠지, 맨정신이 아닐 거라고 여기며 계속하여 들이댔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김현서를 밀어내며 계속하여 욕지거리를 내뱉었다.몇 번이고 남자를 꼬시는 데 실패하고 김현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설강민도 잡지 못할까 봐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그러나 사실 김현서의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설우현을 원하고 있었다.바람둥이로 유명한 설우현은 워낙 여자에게 대범하여 인기가 많았다. 입이 조금 독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거의 단점을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설씨 가문의 큰 지분을 손에 쥐고 있으니 차갑고 지루한 설기웅보다는 설우현이 훨씬 나았다.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김현서는 계속하여 진연주를 찾아가 괴롭혔다.하지만 진연주는 아무리 심하게 괴롭힘을 당해도 다음날 아랑곳하지 않고 등교하곤 했다.남학생들이 전부 그녀를 멀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어떻게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무렵, 김현서는 곧바로 진연주가 웬 남자 선생님과 무척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선생님은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얼굴도 꽤 잘생긴 편이었다.두 사람이 학교 밖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을 발견한 김현서는 당장이라도 화가 치밀어 올라 쓰러질 지경이었고 즉시 학교에 선생님을 신고했다.곧이어 남자 선생님은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떠나기 직전 진연주에게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하여 더 이상 그녀에게 질척이는 남학생이 없어도 다행히 굶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김현서는 여전히 진연주가 달갑지 않았다. 몸 파는 주제에 왜 진연주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그 후 김현서의 괴롭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졌다.대학에 가서 김현서는 진연주와 또 같은 전공을 공부하게 되었고 당시 그곳에서 현재의 남자친구 설강민을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진연주에 대한 험담은 조금도 빠지지 않았다.설강민은 김현서를 사랑하는 데다 그녀의 말을 잘 들어 그에게 있어 진연주는 이미 사형수와도 같은 존재였다.심지어 김현서를 도와 함께 진연주를 괴롭힐 때도 수없이 많았다.그렇게 김현서는 진연주가 평생 자신의 발밑에서 벌레와도 같은 인생을 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진연주의 작품이 표절 신고를 받고 쥬얼리 업계에서는 모두 진연주를 블랙리스트에 넣어버렸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김현서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이쯤 했으니 진연주 그 독한 년도 절대 일어나지 못하겠지.’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진연주는 개명하여 설연주가 되어버렸고 설강민의 여동생이 되어버렸다.그러나 도무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사과해.”화가 난 설준석이 책상을 쾅쾅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이는 정말 진지하게 화가 났다는 뜻이다.그러나 설우현 역시 설준석 못지않게 화가 난 상태이다. 하여 그는 일부러 그들의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으며 대꾸했다.“전 절대 사과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사당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하세요.”“좋다. 그럼 가서 3시간 동안 무릎 꿇고 있어.”기껏해야 한 시간이리라 예상했지만 갑작스럽게 떨어진 불호령에 설우현은 고개를 돌려 설연주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설연주는 설우현의 눈을 마주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하는 것인지 홀로 중얼거릴 뿐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굴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설우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당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당 앞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여자에게 사과할 일은 없을 것이다.점점 멀어져가는 설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설준석도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주물럭거렸다.“연주야, 넌 남아서 점심 먹고 가거라.”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설연주는 바로 눈물을 감추고 얌전하게 답했다.“네.”한 시간이 흐르고 설우현은 여전히 사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보니 설연주가 손에 사과 하나를 쥐고 들어와 설우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그의 곁에는 또 다른 부들 뭉치가 있었는데 설연주는 다리를 꼬고 털썩 주저앉더니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싸늘한 어투로 설연주를 경고했다. “여기는 사당이야. 먹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먹어.”이윽고 설우현은 다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상대하기도 귀찮았다.그러나 눈치도 없는 것인지 귓가를 자극하는 사과 베어먹는 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진 설우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설연주!”한편, 설연주는 이미 사과 하나를 다 먹고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한 시간 오십 분 남았네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제가 사과 하나라도 가져다드릴까요?”“저리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