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백운은 오후 내내 바깥을 배회하다가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사람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는 이 사람이 지난번에도 자신과 부딪혔던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최근 사망한 사람들을 모두 조사한 결과, 그중 여섯 명이 아시아인이었다. 과거에는 연구 기지에서 아시아인을 거의 볼 수 없었으나 이번 달에만 여섯 명이 나타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진백운은 이 사실을 진세운에게 알려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한 번 부딪히고 난 후, 진백운은 무언가를 흡입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반승제가 사용한 약은 워낙 강력하여 며칠 동안 혼미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진백운이 실험실에서 자라며 온갖 약물에 면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진백운은 몇 초 동안 어지러움에 시달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반승제의 팔을 꽉 붙잡았다. 반승제는 그를 발로 차서 내동댕이쳐버리고,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 틈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진백운은 바닥에 쓰러져 통증이 전해지는 가슴을 문질렀다. 그는 곧 다시 일어나 눈가가 붉어진 채 진세운을 찾아갔다.“방금 어떤 남자가 나에게 약을 사용했어. 몇 초 동안 혼미했지만, 그 사람은 내가 실험실 케이지 안에서 자라 모든 약물에 면역이 되어 있다는 걸 몰랐을 거야.”진세운의 눈동자가 살짝 빛나더니,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일은 조사해 봤어?”“응, 세운아. 최근에 사망한 아시아인이 너무 많아. 연구 기지는 항상 서양인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 달에만 여섯 명의 아시아인이 사망했어. 정말 이상해.”진세운은 이내 반승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진백운은 그가 왜 웃는지 몰라 호기심에 물었다.“혹시 기쁜 일이라도 있어?”진세운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래, 조금 기쁘네. 아주 재미있는 일을 찾았거든.”그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본 진백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사라는 즉시 중앙 홀로 갔고, 그곳의 모니터에서는 다른 구역의 상황이 송출되고 있었다.다른 구역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가고 있었으며, 그 광경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홀에 있던 연구원들은 공포에 휩싸여 서로 묻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야? 저 사람 도대체 뭐 하는 거야?”“그 자식이 모든 실험체를 방출했어! 젠장, 우리는 여기서 죽게 될 거야. 너무 많은 나쁜 짓을 했어. 모두 죽을 거야.”“개조된 실험체들이 우리를 다 죽일 거야.”진세운은 턱을 괴고, 화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본래 이 감시실을 관리해야 할 배민희는 손과 발이 묶인 채 바닥에 앉아 있었고, 진백운은 그녀 앞에 서서 손에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있었다.진백운은 진세운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하려는 일이라면 무조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배민희는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진세운은 단순히 실험체를 방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실험체들이 광분하게 만드는 약물까지 미리 주입했다.이 실험체들은 가장 강력한 8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의 잔인함과 능력은 매우 공포스러웠다.이 살인 병기들의 눈에 연구원들을 적으로 보일 것이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들 것이다.진세운이 정녕 미친 것일까. 이렇게 되면 기지는 모두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이때, 바닥이 또다시 흔들렸고, 진세운도 이를 느끼며 배민희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선생님, 내가 기지를 파괴하지 않더라도 이 기지는 곧 파괴될 거예요. 느끼지 못하셨나요? 최근에 갇힌 동물들이 매우 흥분해 있었잖아요. 그들은 지진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어요.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백 년 만의 대지진일 거예요. 시점이 정말 적절하군요. 어차피 나도 그들이 살아서 나가길 원하지 않으니까요.”배민희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그녀는 입이 막혀 말할 수 없었다. 아니면 그녀는 진세운
진백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약을 쏟아부었다.배민희는 약을 빼내려 손을 입에 집어넣었지만,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 이때 진세운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선생님,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백운에게 하신 일은 정말 역겨워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을 비난할 자격이나 있을까요? 저 스스로도 역겨운 놈인데. 이 회장 자리는 진백운이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은 진백운을 진심으로 사랑했겠죠?”배민희는 흠칫하더니 진백운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장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서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들었다.그녀는 지금 이렇게 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이 진백운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추해 보였다.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자신의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며 애썼다. 그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배민희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야 진세운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세운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다.“선생님은 진심으로 진백운을 좋아하지만, 진백운은 인간의 감정 같은 건 전혀 이해 못 해요. 당신이 진백운과 잠자리를 가질 때도 진백운은 그냥 따라 했을 뿐이에요. 진백운을 계속 곁에 둘 수 있을 줄 알고, 심지어 고위층과 싸우기까지 했겠죠. 아마도 선생님은 특정 고위층 인사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회장 자리를 얻을 수 없었겠죠?”“진백운이 직접 독약을 쏟아부었으니, 많이 괴로우시죠?”단순한 괴로움이 아니었다. 진세운은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세워서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진세운은 진백운에게 독약을 먹이도록 시켰고, 진백운의 망설임 없는 행동은 배민희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배민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진백운을 보호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뛰어난 자질 때문에 끊임없이 실험에 사용
“그래.” 진세운이 이해할 필요 없다고 말하니, 진백운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진백운의 시선은 드디어 배민희를 향했다. 배민희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진백운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작은 곤충이 있었다. 그것도 살아 있는 곤충이었다. 진백운이 전에 곤충을 잡았을 때, 진세운에게 가져갔지만 진세운은 그 곤충을 밟아 죽였다. 그 이후로 진백운은 계속 새로운 곤충을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배민희의 손에 곤충이 들어 있었다. 다만 지난번에도 곤충을 준비한 사람이 배민희였다는 사실을 진백운은 알지 못했다.피로 물든 곤충을 보고 진백운의 얼굴에 빛이 어렸다. 그는 곤충을 잡으려고 했지만 진세운이 제지했다.“건드리지 마. 더러워.” 곤충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진백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곤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응.”배민희는 한동안 손을 들고 있었지만 그가 잡으러 오지 않자 천천히 손을 풀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진백운이 있는 방향을 흘긋 보았다. 배민희의 눈에 마지막으로 남은 세상은 여전히 그 순진한 눈빛의 진백운이었다. 그렇다, 그는 항상 그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곤충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바닥에서 잠시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기어갔다. 진백운은 더 이상 배민희를 보지 않고, 대신 뒤에 있는 모니터에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학살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진세운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진세운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느끼고 조용히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3분이 지나고 나서야 진세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여자가 죽어서 슬퍼?”“누가?”진백운의 반문에 진세운은 침묵했다. 자신의 질문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진백운처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아무런 부담도 없이 다른 사람의 한마디에 필사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설기웅은 당황하여 몸이 굳어버렸다.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며 얼굴이 금세 붉어진 그는 어색하게 소녀를 밀쳐냈다.“흠흠.”설기웅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자신 앞에 여러 명이 서 있고, 사방에서 여전히 혼잡한 소음이 들려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무슨 일이 발생한 거야?”최용호는 그 소녀의 귀여운 외모와 능숙한 싸움 솜씨, 그리고 적극적인 모습에 질투가 솟구쳤다. “설기웅, 넌 운이 참 지지리도 좋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상황이 거의 끝나버렸잖아.”설기웅은 이마를 문지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소녀가 천천히 그의 등을 감싸더니 자신의 품에 가둬버렸다. 설기웅이 몸을 굳히며 한 걸음 옆으로 이동하자, 소녀도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설기웅은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소녀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승제에게 시선을 돌렸다.“이제 무엇을 해야 하죠?”반승제는 사라를 바라보았다. 사라는 설기웅을 처음 봤을 때부터 멍하니 서 있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지금의 혼란은 진세운이 일으킨 거예요. 여러분이 들어온 걸 알고 이 상황을 벌인 거죠. 이제 진세운의 배지를 얻는 건 불가능해요. 아마 지금 감시실에 숨어 있을 거예요. 그곳은 연구 기지에서 가장 견고한 장소라서, 안에서 직접 문을 열지 않는 한 외부에서는 열 수 없어요. 진세운은 거기서 실험체들이 우리를 죽이길 바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설령 실험체들이 우리를 죽이지 못하더라도, 기지 내 약물을 이용하려고 할 거예요.”반승제는 이 상황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진백운에게 들켰기 때문일 것이다. 진세운처럼 경계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가 들어왔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반승제는 진세운이 기지를 모두 파괴하려고 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닐 줄은 몰랐다. 진세운은 정말 잔인하고 미친 사람이었다.반승제는 이제 그의 배지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물어보려던 찰나, 홀 안에서 진세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다.”이
자신이 직접 연구해 낸 물건이기 때문에, 사라는 반승제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곧 침착하게 폭약을 꺼내서 눈앞에 있는 몇몇 사람에게 나눠주었다.“최대한 문과 가까운 모퉁이를 찾아 폭탄을 설치하세요. 다만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이 폭약의 위력은 엄청나니까요.”이것은 그녀가 3년 동안 연구해서 만든 물건으로 일반 폭약보다 몇 배 더 강력했다.이미 지면이 한 번 흔들렸기 때문에 폭약이 추가로 터진다면 곧 지진과 산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그때가 되면 연구 기지가 지상으로 튀어 오르든지, 아니면 영원히 지하에 매몰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반승제의 말처럼 여기서 기다리면 죽음뿐이었다.사람들은 곧 폭약 가방을 들고 출발했다. 그들은 일부러 방호복을 하나 더 입었다. 지금 홀 안에는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고, 진세운의 타겟이 반승제이기 때문에 큰 화면에는 반승제의 얼굴과 그의 현재 상황이 계속 비춰지고 있었다.반승제는 8번의 공격을 계속 피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었다.8번의 힘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수준이었고, 그는 반승제를 사냥감으로 여기며 언제든 덮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승제는 방금 그 주먹을 맞고,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는 다시 진세운의 목소리를 들었다.“네가 여기서 죽으면 성혜인이 정말 고통스러워하겠지? 내가 가장 아쉬운 건, 성혜인이 너와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야.”만약 성혜인도 여기 있었다면, 이 사람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반승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능숙하게 8번의 공격을 피했다.진세운은 흥미롭게 지켜보며 옆에 있는 캐비닛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옆에 시체가 눈에 거슬리지만 않았다면 그의 흥미는 더해졌을 것이다.이 감시실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는데, 이는 배민희가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그녀는 이 사실을 줄곧 진세운에게 숨기고 있었다.배민희는 진세운을 절대 믿
거대한 폭발음이 순간적으로 울려 퍼지며, 진세운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곧이어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진백운은 문가에 서 있다가 커다란 힘에 의해 튕겨 나갔고 문이 갑자기 닫혔다.기지 내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진백운은 그 힘에 의해 벽에 부딪혀서 일어날 수 없었지만, 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등 뒤에 무언가가 받쳐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뒤돌아보니 진세운이 인체 방석처럼 그를 지탱하고 있었고, 이미 피를 한 번 토한 상태였다.“세운아”진백운이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바깥의 윙윙거리는 소리보다 너무나 미미했다.“미안해, 내가 그 벌레를 잡으러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운아, 제발 일어나!”그와 동시에 기지 전체가 거대한 힘에 의해 들썩였다.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과학 기술도 무력해졌다. 8급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다고 자부하던 기지의 외벽은 산사태와 지진의 이중 공격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뚫려버렸다.온 기지가 진흙과 돌무더기의 힘에 의해 지하에서 떠오르더니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는 곧바로 휩쓸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심지어 칸다에 사는 사람들까지 귀를 찢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땅에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입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마침 성혜인이 무언가를 먹으려 할 때 테이블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방 문을 열어 복도로 나갔다.그러나 밖은 평온했고 처음의 굉음이 끝난 후에는 주민들의 기도 소리만 들려왔다.성혜인의 옆 방에 있던 여자도 그때 마침 나왔다. 몸의 상처는 거의 다 나은 것 같았지만 안색이 심각했다.“서남쪽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아요. 제가 바로 그쪽에서 왔었거든요. 그 지역은 질병이 가장 심각한 곳이에요. 거기에 지진까지 겹친다면 이 나라의 책임자는 그 지역을 완전히 포기할 가능성이 큽니다. 당분간은 구조 요원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듣고 성혜인은 불안에 휩싸였
옆방 여자는 성혜인의 생각을 눈치챈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전에 그곳에서 동생의 소식을 들었거든요. 제 동생이 아직 그곳에 있을 거예요.”하지만 이때 반승제의 사람들은 그들을 저지했다.“성혜인 씨, 대표님은 성혜인 씨가 이곳에서 안전하게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가장 중요한 긴급 보고였다.그는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하더니 즉시 플로리아 지하 격투장과 최씨 가문, 설씨 가문, 그리고 원씨 가문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다.성혜인은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즉시 그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승제 씨에 대한 소식인가요?”“네. 대표님이 계신 연구 기지가 바로 지진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대규모 인력을 보내야 합니다. 지진과 산사태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기지를 공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혜인 씨, 저는 그곳에 가서 도와야 합니다. 제발 호텔에서 안전하게 기다려 주세요.”하지만 성혜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옆방 여자에게 말했다.“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요.”옆방 여자의 시선이 성혜인의 배에 머물렀다.성혜인은 원래도 날씬한 편이었고, 임신한 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직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임산부는 일반인과는 달랐다.성혜인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며 다급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전 반드시 그쪽에 가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옆방 여자는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따라갔다.“혜인 씨가 가기로 결심했다면 제가 지켜줄게요.”그러자 성혜인은 고개를 돌려 옆방 여자를 흘끗 보고 말했다.“참, 아직 당신의 이름을 안 물어봤군요.”“전 이름이 없어요. 지하 격투장에 버려졌다가 그곳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고용되었어요. 부모님은 저를 ‘나나’라고 불렀어요.”“나나요?”“네.”“그럼 앞으로 저도 그렇게 부를게요.”이 이름은 마치 아이를 부르는 것 같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