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금 전 온시아가 떠날 때 한 말을 떠올렸다.“장하리 씨 어머니 예전에 무슨 짓을 했던 것 같아요. 의붓아버지도 감방에서 나오자마자 밖에서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운다던데, 우리가 장하리 씨 도와야 하는 건 아닐까요?”장하리를 도우려는 척 보이지만 실은 집안일에 대해 폭로한 것이었다.기댈 곳도 내어주지 않던 엄마, 그리고 술에 찌든 의붓아버지를 둔 장하리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온시아가 말하고 싶은 건, 장하리와 의붓아버지의 사이가 결백하다는 것인가?온시아는 서주혁의 앞에서 너무 속마음을 드러내면 역효과가 날까 봐 조금 돌려 말했다.“아마 지금 시환 오빠 찾아온 것도 오빠가 뭔가 해결해 줬으면 해서겠죠?”그 말뜻인즉슨 장하리가 온시환을 꼬시고 있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말을 마치며 온시아는 슬쩍 서주혁의 눈치를 보았다.다행히도 서주혁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장하가 그에게는 낯선 사람인 듯 말이다.온시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득의양양했다. 과연 장하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그녀는 만족해하며 차를 운전해 떠났다.서주혁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여러 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 된 듯하다.그가 곁눈질로 장하리가 차에 오르고 시동을 걸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서주혁을 보지 못한 것처럼.마지막 담배까지 피우고는 차에 올라탔다.그 역시 자신이 왜 여태 남아있었는지 알지 못했다.자동차에 낯익은 별장에 멈추고 그는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뒤에야 자신이 온 곳이 어디인지 눈치챘다.장하리와 함께 지내던 곳이다. 그녀와 약속을 잡을 때마다 호텔 아니면 이곳에 오곤 했다.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하리는 일은 야무지고 빠르게 처리했지만 서주혁의 앞에서는 마치 성깔 없는 사람처럼 고분고분했다.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반박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아무리 심하게 대해도 그저 조용히 견뎌낼 뿐이었다.그녀의 이러한 반응이 서주혁의
한편, 장하리는 차에 올랐을 때부터 서주혁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곧 시동을 걸고 떠났다.두 차가 스치듯 지나감에도 장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앞만 쳐다보았다.그리고 차가 대략 500미터 정도 달린 후에야 장하리는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눈치챘다.집으로 향했어야 했는데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장하리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침착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었다.모두가 어울리지 않는대도 뻔뻔하다고 해도 장하리는 포기할 수 없었다.장하리는 이런 사람이었다. 전에 어머니가 아무리 괴롭혀도 그녀는 마치 스펀지처럼 어머니께서 가끔 주는 가식적인 사랑만이라도 필사적으로 받으며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했다.방우찬과의 7년간의 관계도 그러했다. 아무리 그가 자신에게 몇억의 빚을 지게 하고 사장의 딸과 바람을 피우더라도 장하리는 그가 어느 순간에는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있었다.어떠한 감정이든 그녀는 항상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고 끝없이 자신을 낮추곤 했다.다만 어머니, 방우찬에 대한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더 실망할 감정도 없을 때야 그녀는 조용히 떠났다.그런데 아직 서주혁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니 실망이 덜한가 보다.장하리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막 집 문을 열자 회색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다.장하리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은 뒤 강아지를 안고 높이 들었다.“아리! 미안해. 요 며칠 계속 야근하느라 못 왔어.”아리는 작은 토종 개로 전에 서주혁과 별장에서 지낼 때 함께 입양한 강아지이다. 서주혁은 기억하지 못하는.장하리는 밥그릇의 사료를 갈고, 물을 부어준 다음 배변 패드를 처리했다.체력이 좋은 아리는 계속 장하리의 뒤를 졸졸 쫓으며 꼬리를 흔들었다.장하리는 강아지의 애교에 마음이 녹아 품에 다시 안았다.아리는 그녀가 봐온 강아지 중 가장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장하리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회사에서 야근할 때마다 참지 못하고 아리를 보곤 했다.지금은 아직
잠시 후, 온시환이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집에서 시아랑 네 혼사에 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는데, 너 정말 결혼할 거야?][잘 생각해 봐. 온씨 가문과 혼인한다는 것이 결정되면 이제 말 못 바꿔. 승제랑 혜인 씨도 관계가 좋아졌는데도 아직 결혼 못 하고 있잖아.]휴대전화 알림음이 계속 울리는 바람에 서주혁은 어쩔 수 없이 화면을 보게 되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보게 되었을 때 참지 못하고 답장했다.[그러니까 맞는 사람들끼리 결혼해야 하는 거지. 승제가 같은 업계 사람을 찾았다면 결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거야.]전송 버튼을 누른 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두 사람이 다시 열애하는 사실은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반승제가 성혜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았다면 지금쯤 자녀도 낳고 해외를 떠돌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들 울타리 안에서는 맞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게다가 오늘 장하리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 비열한 여자에게서 나온 딸이 어떻게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서씨 가문은 절대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서주혁 뿐만이 아니라 서수연 역시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자신의 단톡에서 오늘 밤 장하리 어머니를 만났던 일에 대해 미친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입에 걸레를 문 건지 욕설이 끝도 없이 나오더라고. 없는 집 출신 아니랄까 봐. 계속 무슨 창녀라느니, 남자한테 다리를 벌린다느니 듣기 거북한 욕설들을 하는데. 우리 오빠가 얼굴이 다 창백해졌더라니까. 그렇게 막말하는 사람은 아마 처음 봤겠지.][진짜 너희가 직접 봤어야 해. 그 여자는 우리 집 도우미도 할 자격이 없어.]이 두 메시지를 보낸 후 서수연은 얼굴에 팩을 붙였다.이윽고 단톡방의 사람들이 활기를 띠며 너도나도 메시지를 보냈다.[그러니까 네 오빠가 장하리를 싫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걔 엄마는 학교는 다녀봤대?][그럴 리가. 내가 이미 조사해 봤는데 겨우 초졸이더라니까. 웃겨 죽겠다. 요즘 시대에 초졸인 사람도 있어?][웃기
다음날 장하리는 오후까지 회사에 머물렀다. 오늘 연예인의 이직과 관련된 문제로 다른 엔터테인먼트 회사 매니저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그쪽의 유명 연예인인 유현이 S.M으로 이직하기를 원했다.유현은 10년 전부터 많은 드라마에 출연했으므로 유명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다수의 선협 드라마에 출연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되었으며 네티즌들은 모두 그의 계약 만료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하지만 유현이 이미 S.M에 연락을 걸어왔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장하리 역시 높은 가격으로 계약을 맺기로 약속했다.하지만 장하리가 직접 만나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약속 시간이 되자 그녀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부매니저는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유현은 옆방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하리 씨, 제가 현이 형한테 배달을 시켜줬는데 문 두드려서 깨워주세요. 하리 씨가 올 거라고 이미 말했고 지금쯤이면 아마 깨어있을 거예요.”전에 장하리는 이미 유현의 회사와 상의를 했었다. S.M에서 주는 계약금이 많고 게다가 상대편 회사에 대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회사에서는 유현을 놓아주고 싶어 했다. 게다가 유현이 성실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데뷔 20년이 다 되어감에도 인스타 팔로워가 무려 8천만 명이므로 명실상부한 롱런 스타임이 분명했다.하기에 이번에도 디스패치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호텔에서 만난 것이었다.이 호텔은 보안이 좋기로 유명했으며 종래로 디스패치의 방해를 받은 적이 없었다.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문으로 다가가 노크했다.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유현은 매니저인 줄 알고 가운차림으로 문을 열었으나, 장하리를 보고 어리둥절해 있었다.장하리 역시 당황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가, 한참 후에야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깼으면 나와요. 매니저분이랑 계약서 한번 훑어봐야 해요.”유현은 머리를 긁적이곤 이내 안정을 찾았다.“알겠습니다.”그제야 장하리는 옆방으로 돌아왔다.이번에 계약하는 속도가 매우 빠
이 시간에 라이브를 켰다는 건 분명 실검을 노린 것이다.장하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바로 이 어린 스타의 라이브를 켰다.민아는 유현의 전 드라마 여자 조연으로 인지도가 높지 않으며 유현의 전 회사에서 최근 영업하려는 신인이었다.전 회사는 두 사람을 연인으로 엮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지금 민아는 울고 있었고 팬들이 초조하게 댓글로 묻고 있었다.“유현이랑 무슨 문제 생겼어?”“유현 그 쓰레기가 S.M 직원이랑 바람 난 것 같음. 사진 속에 여자 내가 아는데 장하리임.”“역겹다. 둘 다 지옥에나 가라.”“장하리 맞네. 전에 다른 여자 연예인 사진에서 봤음. 지금 S.M 큰일들은 다 쟤가 맡아서 한다며?”민아는 여전히 카메라를 보며 설명도 없이 울기만 했다. 그녀의 행동에 팬들은 더 마음 아파했다.빠르게, 안쓰러운 민아에 대한 검색어가 실검 2위에 올랐다.1위는 장하리와 유현에 관한 검색어였다.라이브를 확인하는 장하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제야 부매니저가 왜 그녀더러 문을 두드리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호텔은 보안이 좋기에 이런 몰카는 찍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분명 부매니저가 사람을 보내 몰래 찍어 올린 것이니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한서진은 회사 홍보팀에게 인터넷 소식을 잘 지켜보라고 명령한 뒤 장하리에게 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장하리가 이제 해명한다고 해도 그녀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진은 진짜였으니까.유현을 깨우러 갔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팬들은 둘 사이 관계가 이상하다고 더더욱 의심할 것이다.유현은 이미 이직하였고 예정대로라면 S.M에서 SNS에 이 소식을 발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먼저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이 함께 비난당할 것이었다.해명할 수도, 유현이 이직했다고 선언할 수도 없었다.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회사와 회사가 협력하는데 뒤에서 이렇게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정말이지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였다.장하리는 양미간을
일은 점점 커지더니 장하리에 관한 실검이 여러 개나 생겼다.온시아는 장하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댓글들을 보며 기뻐했다.온시아는 또 사람을 시켜 전에 장하리의 어머니에게서 욕설을 들은 여자인 게 연락하여 수억 원을 쥐여주며 그날 당한 일을 인터넷에 올리도록 했다.원래부터 장하리가 마녀사냥의 대상이었으므로 누군가 폭로하기만 하면 네티즌들은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다가와 물어뜯었다.여인은 당연히 바로 승낙했고 노임향이 술집에서 욕설을 퍼붓는 영상을 올려버렸다.영상은 온시아가 직접 술집에서 받아온 영상이었다. 일반 신분이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노임향이 얼마나 듣기 거북한 욕설을 심하게 퍼부은 건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게다가 영상 속 노임향의 얼굴은 왜곡되어 무식한 건달처럼 보였다.옆에서 그녀에게 욕을 먹은 소녀는 계속 울고 있었다.여자아이 본인이 직접 폭로했고, 곧이어는 장하리의 의붓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워 감옥살이한 사실이 폭로되었다.장하리의 집안일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누리꾼들은 장하리를 향해 거침없는 욕설을 해댔으며 오히려 유현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유현 뿐만 아니라 이참에 인기를 누려보려던 민아도 장하리에 의해 가려졌다. 이처럼 큰 스캔들 앞에서 아무도 민아의 라이브를 보려 하지 않았다.라이브 시청자가 100만 명 이상 줄어들자 민아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그녀는 자신에게 연락하는 회사 고위층 직원들의 메시지를 보며 바로 고개를 숙여 검색어를 살폈다. 민아는 눈을 한 바퀴 굴리고는 라이브에 남은 자신의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저 사실 장하리 그분 알고 있어요. 연예계에서 소문이 엄청 안 좋거든요. 여기서만 말할 테니 소문 퍼뜨리면 안 돼요! 그분 전에 유명한 사람한테 꼬리 쳤다가 실패했거든요. 몇 번이나 모욕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귀찮게 하는 바람에 남성분이 아예 연락처를 차단했다 하더라고요. 파티에서 마주칠 때마다 남성분이 얼마나 정색하던지.”“그래서 결국 두 사
장하리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온시환조차도 민아의 뒷담화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했다.그는 즉시 라이브 주소를 서주혁에게 보내주었다.사무실에 있던 서주혁은 양미간을 찌푸리고 라이브로 들어갔다.문득 걱정된 온시환이 서주혁에게 어떻게 할지 물어보려던 때, 라이브가 내려졌음을 발견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이브 방송에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플랫폼 측에 경고하지 않는 한, 돈에 환장한 플랫폼에서 라이브를 내렸을 리가 없었다.[네가 했어? 그런데도 장하리 씨한테 마음이 없다고?]서주혁은 그저 겸사겸사 사람을 시켜 라이브를 내리라고 시켰을 뿐이다. 미친 여자가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까.잠잔 게 헛수고기는, 12억이나 줬구먼.원래 기분 나쁘던 참에 온시환의 시답잖은 질문까지, 민아가 마침 잘 걸린 셈이다.연락을 받은 부매니저는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러나 대체 누가 이런 명령을 내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윗사람은 그에게 라이브를 바로 중단하라 했을 뿐이다. 상류층의 사람이 불만스러워한다고 말이다.그는 온시아에게 다시 묻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바로 이때, 그는 장하리가 올린 인스타 게시물을 보았다.장하리 역시 인스타 계정이 있었다. 장하리는 호텔에서 자신이 유현과 만났던 순간의 영상을 입수하고 아예 인스타 계정에서 부매니저를 멘션 했다.[조금 전 유현의 전 회사와 계약을 마쳤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은 당시 부매니저가 배달을 시키고 유현을 깨워달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뒤로 30초 이상 머물지 않았고 호텔에서의 전후 원본영상을 올립니다.]영상에서 장하리가 나타난 뒤, 유현이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은 몇 마디 후 바로 갈라졌다.스폰도, 일촉즉발의 상황도, 유현이 화를 내며 거절하는 장면도 없었다.장하리가 부매니저를 멘션 한 건 이 일에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부매니저는 막 회사에서 고위층으로 임명받은 뒤였으므로 감히 장하리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현이 형과 우리 회사는
인터넷 여론이 바뀐 것을 본 온시아는 화가 난 채 바로 부매니저에게 연락했다.이때 부매니저 역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온시아의 명령 때문에 장하리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상류층에게 밉보이게 됐으니 불안했다.“이제 이 일에서 발 빼겠습니다. 윗선에서 경고를 받아서요.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자 온시아는 기가 막혔다. 감히 매니저 따위가 전화를 끊다니.전에 존댓말 써가며 부탁한 건 모두 제 교양이 좋아서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 매니저 따위가 뭐라고 감히.그녀는 즉시 회사의 고위층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장하리의 일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완곡하게 거절했다.연거푸 두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한 온시아는 기분이 나빠졌다.인터넷에서도 사람들이 점차 민아를 나무라고 장하리에 대한 욕설을 멈추자 온시아는 더더욱 불쾌해졌다.바로 이때, 온씨 가문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오늘 밤 파티에서 서주혁과 만나는 것이 어떻겠냐 물었다.“오늘 밤 파티에서 시아 씨와 서주혁 씨 두 사람의 관계를 은연중에 털어놓읍시다. 시아 씨는 방금 귀국해서 업계에 얼굴을 잘 비추지 못했으니 앞으로 이런 행사에는 더 많이 참석해야 해요.”온시아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승낙한 뒤 서둘러 드레스를 입어보기 시작했다.그러나 인터넷 뉴스를 생각하니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아 바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걸었다.전화를 끊은 후에 온시아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장하리가 오늘 밤 감히 파티에 등장한다면 크게 망신을 줄 것이다.한편 장하리는 여전히 누가 자신을 도운 건지 생각하고 있었다.장하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눈동자는 구르고 구르다 결국 서주혁의 이름 위에서 멈췄다.하지만 서주혁은 그녀를 차단한 상태였다.매번 이런 작은 희망이 있을 때마다 장하리는 서주혁을 생각하곤 했다.마치 영원히 아픔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마치 집에서 쫓겨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