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간 반승제가 나하늘의 발목에서 반짝이는 빨간 불빛을 발견했다. 발목에 있는 그 무언가를 잡아당기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하늘, 또 도망가려고?”“어떻게 명령을 어기고 또 도망칠 생각을 해?”“다리라도 부러뜨려놔야 정신을 차리겠어?”남자의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분명 온화한 말투였으나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나하늘은 이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발목에 묶인 쇠사슬에서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목에서 그것을 뜯어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꺼져!”“꺼져버려!”그녀의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발목에 채워진 그 물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눈도 멀고 귀도 멀게 했는데, 이젠 말도 못 하게 만들어줄까?”“또 문에 가까이 가 봐. 계속 감전될 테니.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반승제는 그제야 이 지하실은 결코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외부의 모든 신호를 차단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각종 스위치도 있었다.나하늘의 위치가 문에 가까워짐을 감지하면 전류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부축하던 두 남자도 함께 이 전류에 당해버렸다. 감전이 익숙해져 버린 나하늘이 도망치려 한 적은 아마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난감한 것은 지금의 그녀에게 어떻게 이런 소식을 전할지였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끌어가려는 이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반승제는 얼굴을 구기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발목에 있는 물건을 해체할 방법은 없어?”“대표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우리도 수없이 시도해 봤지만, 재질이 워낙 단단한지라 해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 다리를 자르지 않는 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반승제가 손을 들어 자신의 미간을 문질렀다.“혹시 문 쪽에 센서가 있는지 확인해 봐. 있다면 파괴해 버려.
성혜인은 현재 상황을 알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이제 어떡하지? 엄마를 겨우 찾았는데 계속 이 어둡고 추운 지하실에 내버려둬야 하는 거야?!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도대체 누가!’입술을 감쳐문 성혜인은 눈가에 살기가 번뜩였다. 이토록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혜인아...”반승제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무력감만 느꼈다. 모든 것을 예측했지만 나하늘이 갇혀 있는 곳이 이렇게 견고할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밖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들려왔고 반승제는 성혜인을 안아 들었다. 성혜인은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미안하지만 일단 좀 자고 있어.”반승제는 손을 들고 성혜인의 목덜미를 쳤다. 성혜인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기절했다.그들 뒤에서 나하늘은 여전히 문 안에 앉아 있었다.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반승제는 다른 사람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전에 나하늘을 보살폈던 농인 데리고 와서 계속 돌봐달라고 해.”“네.”K의 부하들이 이미 들이닥쳤기 때문에 반승제는 먼저 성혜인을 데리고 떠나야 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안고 밖으로 걸어갔다.나하늘은 조용한 지하실에 앉아 있었고 옆에 있던 전류에 감전되어 기절한 두 사람은 이미 끌려 나갔다.이 공간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하늘에게 지하실은 늘 조용한 공간이었다. 마치 세상에 자신만 남은 것처럼 말이다.지하실의 견고한 벽 안에는 천 개가 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치 천여 개의 눈이 나하늘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하실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나하늘은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주려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늘 그리워 마지않던 딸이 이미 여기로 왔었던 사실도 몰랐다.반승제는 성혜인을 안고 지하실에서 나오자마자 총소리를 들었다. 반승제의 부하들도 총을 들고 반격하고 있었다.차가 있는 곳으로 가자 배현우는 이미 깨어나 눈을 뜬 채 반승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그것을 모습을 본 반승
배현우는 그것을 보고 더욱 우쭐해져서 손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단검을 천천히 밀어냈다.“만약 손을 못 대겠으면 나랑 여기 남아 있어야 할 거야. 아참, 성혜인 임신했어. 참 불쌍하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아빠가 없을 테니 말이야. 아니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지?”마지막 세글자를 말할 때 배현우의 눈빛에는 도발의 기색이 가득했다.반승제는 배현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배현우가 갑자기 왜 이렇게 광기를 부르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K와 거래했는데 K가 어떻게 그를 그냥 놓아주겠는가?게다가 K가 추적기를 사용해 위치를 알아내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으면 배현우 본인도 죽게 될 것이다.그렇게 목숨을 아끼던 사람이, 그렇게 반승우를 완전히 몰아내고 이 몸을 독점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었을까?반승제가 날린 주먹에 맞자 배현우의 광대뼈가 부어올랐다. 배현우는 아픔을 느꼈지만 그냥 혀끝으로 볼 안쪽을 핥을 뿐이었다.반승제는 배현우의 옷깃을 다시 움켜쥐고 어두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배현우, 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성혜인을 원하는 건가?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는 것인데 성혜인에 대한 배현우의 마음은 순수하게 사랑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배현우가 성혜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복잡하고 고민이 많아 보였다.배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이 내려와 눈을 약간 가려서 매우 우울해 보였다. 반승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배현우를 놓아주었다.서둘러 설기웅과 원진을 만나러 가야 했다. 이 두 세력이 지원해 주면 반승제가 구금섬를 떠난 뒤에도 무사할 것이다.하지만 배현우의 몸에 부착된 추적기가 골칫거리였다. 그 추적기 때문에 K는 언제든지 무차별적인 폭탄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차가 몇 분 동안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앞에 많은 양의 자동차가 나타났다.반승제는 성혜인을 품에 안고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배현우와
사방에서 날카로운 총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며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배현우는 폭발음이 가장 강한 곳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불길이 그의 주위를 따라 퍼져나가며 그는 마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을 옆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걸어가 배현우의 어깨를 붙잡았다.“넌 죽어도 상관없지만, 반승우가 죽는 건 원치 않아!”하지만 배현우는 반승제의 손을 뿌리치고 그의 배를 걷어차려고 했다. 다행히 반승제는 매우 능숙하게 피했다. 배현우는 가슴을 심하게 떨며 손끝도 살짝 떨었다.“반승제, 내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배현우는 빨개진 눈으로 쏘아보며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반승우의 기억 말고도 반승제 네 기억도 있어! 넌 다섯 살부터 나무를 탔고 열다섯 살에 군대에 입대하여 공을 세웠지. 너랑 반승우의 다툼, 그리고 반승우가 겪은 일부 고통과 더 괴로운 기억은 이미 뇌가 알아서 차단했기 때문에 나는 이만큼밖에 볼 수 없어. 예전에 반승우가 항상 내가 연구 기지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격이라고 했을 때 난 믿지 않았었어. 난 나만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 찾았는데 참 우습지. 내가 애써 찾은 기억은 네 것이었어!”“무슨 말이야?”“아직도 모르겠어? 누군가, 네 기억의 일부를 복제해서 반승우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거야. 난 배현우도 반승우도 아니고 반승제도 아니야. 그럼 나는 누구일까?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알려줄 사람은 없는 거야?! 난 누구도 아니고 존재의 의미도 모르겠어. 반승제 네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위조품에 불과해! 심지어 위조품보다 더 못한 존재일 뿐이야. 난 너랑 성혜인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내 머릿속 반승우의 기억은 마음이 약해서 그렇게 못 하게 해. 더 우스운 건 성혜인에 대한 호감이 도대체 반승우 때문인지 아니면 너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난 아무도 아닌데 왜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견뎌야 해! 너희들이 죽었으면 좋겠어!”고함을 다 지르고 나서도 가슴이 여전히 떨렸다.
애써 찾은 진실이 너무 가슴 아파서 반승제와 성혜인을 죽이고 싶어도 주저하게 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배현우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혜인을 다시 품에 안은 반승제는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주위에서는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이는 구씨 가문과 K 세력의 짓이었다. K는 이번에 무슨 이유로 자극을 받았는지 많은 사람을 구금도에 불러들였다.반승제는 성혜인을 껴안고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뒤를 따르라고 말한 뒤, 노예찬이 알려준 비밀 통로를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공기 속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목적지에 도착한 후, 구지한이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지하도 안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폭발이 계속되었지만 더 이상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이 지하도가 구금섬의 해변까지 이어져 있으며 밖에서 설기웅과 원진이 사람들을 데리고 해변의 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노예찬이 말해줬다.오늘 밤에는 혼란스러운 싸움이 벌어질 것이지만 설기웅과 원진이 있으니 K의 세력은 제한을 받을 것이다.반승제와 사람들은 지하도 입구에서 헐떡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체력이 아무리 좋다한들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반승제는 손을 들어 성혜인의 뺨을 쓰다듬었다.“여기서 10분만 쉬어.”그러자 7, 8명은 즉시 바닥에 앉았다. 구지한도 이마에 땀을 흘리며 벽에 기대고 있었다. 깊은 지하도를 바라보면서 구지한이 불확실한 어조로 말했다.“이 통로를 지나면 바깥세상이야?”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지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들어 심장이 있는 위치를 만졌다. 그의 절박함이 최고의 보답을 해주었으니 이제 정말로 바깥세상에 나가볼 기회가 생겼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아마도 구씨 가문에서 걸려 온 전화 같았다.지금 가주 인장이 반승제에게 있으니 구씨 가문에서는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겠지. 게다가 오늘 밤 구지한을 못 찾았으니 가주 인장의 행방에 관
가주 인장을 받은 구지한은 바로 자리를 떠났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바닥에 눕힌 뒤,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혼수상태에 빠진 성혜인은 꿈속에서조차 불안에 떠는 듯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그런 성혜인을 보며 반승제는 가슴이 아팠다.그녀의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람을 먼저 보호해야 했다.그는 성혜인의 품에 머리를 묻으며 슬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랬다.구금섬에 들어오게 된 첫날부터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배후의 장로를 알아내도록 구지한을 설득했다.그는 성혜인과 함께 이곳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배현우의 일은 그 역시 예상치 못했고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지한아, 10분만 기다릴게. 안 오면 먼저 갈 거야.”“알겠어.”구지한은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있었다. 밖은 온통 연기투성이였고 그의 뒷모습은 점차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반승제는 휴대전화로 10분 타이머를 맞추었다.구지한에게 함께 떠나겠다고 약속했으니 어겨서는 안 되었다.그는 성혜인을 꼭 안은 채 벽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어느새 7분이 흘렀다. 그러나 구지한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불안해졌다.또 2분의 시간이 흘렀지만 구지한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반승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눈도 깜짝 않고 지켜보았다.그러나 반승제가 어찌 알겠는가. 감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밖으로 나가려던 구지한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졌다는 것을.희뿌연 하늘을 힘없이 바라보는 구지한의 얼굴에 무언가 떨어졌다.아, 빗방울이구나.그는 반승제와 만나기로 했던 곳을 향해 기어가려 했다. 그러나 젖 먹던 힘까지 다해도 고작 1미터를 기어갔을 뿐이다.눈을 거의 감을 무렵,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누군가 그의 옆에 우뚝 멈춰 섰다.멈춰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마저 침침했다.이때,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걸을 수 있겠어
미스터 K가 손을 가볍게 들더니 옆 사람에게 물었다.“노예찬은?”“의부에게 불려 갔습니다. 구금섬이 혼란스러워졌으니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입니다. 그분이 십장로에 대한 벌은...”인정사정없기로 소문난 인간이니 절대 노예찬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반승제와 성혜인을 도운 것으로도 모자라 섬을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미스터 K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노예찬 상황 좀 알아봐.”“네.”반드시 노예찬을 멈추게 해야 한다. 반승제와 성혜인이 정말 도망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지금 그는 이미 두 사람에 대한 위치추적을 놓친 상태였다. 아랫사람을 시켜 배현우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했으나 배현우의 곁에 성혜인은 있지 않았다.원래의 약속대로라면 배현우가 성혜인을 데려가도록 해야 했다.그러나 노예찬이 끼어들고 다른 세력도 함께 침투하면서 통제하기 어려워졌다.그 남자가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그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를 받으니 건너편에서 남성의 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노예찬이 지하도의 위치를 반승제한테 알려줬다. 출구는 바다 수면과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사고가 나기 쉬워.”미스터 K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씩 웃었다.전화 건너편은 노예찬의 의부였다. 그가 하는 말을 보아하니 노예찬이 한 짓을 알고 있는 듯했다.목숨을 건질 지하도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 버렸으니 이제 구금섬의 비밀이 탄로 난 셈이다.“노예찬은 어떻습니까?”“벌받고 있다.”어떤 벌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50대 중반의 남성이 전화를 끊자 곁의 하인이 보고했다.“십 장로께서 기절하셨습니다. 계속할까요?”벌로 정해진 매를 모두 맞고 나면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계속해.”남성의 목소리에 온기라고는 전혀 없다. 얼굴은 냉담하기만 하다.“본인이 선택한 것이니 벌은 달게 받아야지.”하인은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성은 한편의 감시실로 들어가 구금섬 내부 곳곳
하루에 열 번 이상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남성은 마치 놀리듯이 그녀가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처음에는 열몇 번을, 그 이후에는 일곱, 여덟 번, 그 이후에는 대여섯 번, 나중에는 하루에 두 번 정도 시도했다.그리고 이제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지 1년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남성의 목적이었다.나하늘은 남성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상대하지 않았다.남성이 입을 열었다.“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그의 말에 여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한쪽에 늘어뜨린 그녀의 손이 움직이더니 시선은 어디론가 곧게 향했다.남성의 목소리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 전해지듯 뇌리에 울려 퍼졌다.“어... 어디 있는데요?”이 며칠간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반승제의 사람에게 외친 꺼지라는 한마디뿐이었다.그녀는 목이 쉰 듯 힘겹게 말했다.“널 보러 왔었고 데려가려고도 했었지. 그런데 제 몸도 보전하기 어려웠어.”나하늘이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제 딸을... 놔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하실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주변에 있던 기구들마저 모두 사라진 듯했다.스크린을 어루만지던 남성의 손이 우뚝 멈추더니 험상궂은 얼굴을 했다.“가상하네. 이 와중에도 딸 걱정.”나하늘은 아무 말 없이 등을 뒤로 기대었다.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다.놓아줄지 안 놓아줄지, 그 누가 알겠는가....반승제는 성혜인을 안고 한 시간 가까이 걸었다. 그 사이에 성혜인은 잠에서 깼다.성혜인은 깨어나자마자 기침했다.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자기 옷 끝으로 입술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힘들어?”성혜인은 말없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여 보였다.반승제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내 탓 하는 중이야?”“아니요.”“혜인아, 난 너랑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머님은 내가 나중에 꼭 구해낼게.”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그의 몸에서 피비린내와 화약 연기 냄새가 진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