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정신만 희미했을 뿐 감각은 아주 선명했다. 그녀가 타고 있는 차는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역겨운 휘발유 냄새 때문에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귀가에서 들려왔고,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만지작대고 있었다.차는 폐공장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 이곳은 시내와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아주 으스스했다.바닥에 내팽개쳐진 성혜인은 겨우 눈을 떴다. 앞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고 끈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생김새는 참 괜찮단 말이야.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봐.”“형님 먼저 하십시오. 저는 마지막으로 맛만 보게 해주시면 됩니다.”형님이라는 남자는 술배를 흔들거리며 성혜인의 다리를 잡더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비포장도로의 흙모래 때문에 그녀의 피부는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덕분에 정신 차린 그녀는 손을 올려 남자의 뺨을 때렸다.“꺼져!”뺨을 맞은 남자는 성혜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너 죽고 싶냐?”남자는 바로 성혜인의 뺨을 때렸다. 성혜인의 입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눈에는 실핏줄이 터졌다.남자는 성혜인의 멱살을 잡더니, 그녀의 옷을 확 찢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겪는 무기력감에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성혜인이 희망의 끈을 놓아가고 있을 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성혜인은 겨우 눈을 떴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고 익숙한 향수 냄새도 났다. 주변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쨍그랑 소리와 남자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이 욕설은 금방 애원으로 변했다.성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돌 하나를 주어서 꽉 쥐었다. 날카로운 돌 모서리가 손바닥에 박히자 드디어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렇게 반승제의 얼굴을 본 그녀는 이제야 자기가 누구에게 전화했는지 알아차렸다.반승제는 성혜인을 훌쩍 안아 올려 자신의 차 안으로 왔다. 겁먹은 납치범들은 구석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힘이 풀려 휴대폰도 스르르 미끄러졌다. 인내심이 바닥 난 반승제는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지문 인식으로 잠금을 해제했다.이 휴대폰은 일 전용이었기에 연락처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물론 반승제는 그녀에게 휴대폰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 전용 휴대폰에는 당연히 ‘남편’으로 저장된 사람이 없었고, 반승제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성혜인의 연락처는 아주 깔끔했다. 고객은 한눈에 알리게 따로 표기하기도 했다. 반승제는 남편을 찾다 말고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름은 ‘반승제 대표님’, 간단하고 보기 쉬웠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던 그는 연락처를 끝까지 뒤졌다. 그리고 결혼했으면서도 불구하고 남편의 연락처가 없는 성혜인이 참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성혜인을 병원으로 데려다주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나머지는 병원에 맡길 생각이었다.성혜인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번에 일어난 일은 아직도 악몽처럼 기억에 생생했고, 그녀는 최대한 반승제와 멀리 떨어져 앉으려고 했다.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며 버티다 보니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견디기 어려웠는지라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반승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의 자태는 도무지 방금 폭력을 행사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성혜인은 창문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병원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성휘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저번에 안 좋게 헤어진 기억 때문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운이 안 좋았던 성혜인은 부쩍 병원에 자주 오는 것 같았다. 병원 대문에 거의 도착할 때, 그녀는 대문에서 부축받으며 나오는 성휘를 발견했다.성휘는 간암 말기로 이렇게 빨리 퇴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말이다. 성휘를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성혜원과 성한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모양새로 양쪽에 서 있었다.성혜인은 순
성휘가 먼저 차에 몸을 실었다. 성혜원과 성한은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뒤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창가에 앉은 성혜원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외제차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일렁였다.‘반승제의 차다!’“잠시만요, 누구 좀 만나고 올게요!”성혜원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에서 반승제를 만날 줄이야! 성휘와 성한이 반응하기도 전에 성혜원은 차 문을 열고 반승제의 차 앞으로 다가갔다.창문이 닫혀 있어 차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반승제를 몰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성혜원은 그가 타고 다니는 모든 차를 기억했다.이 차는 분명 반승제의 것이다. 그는 병원에 온 듯하다.성혜원은 급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승제 씨도 병원에 오신 거예요?”성혜원은 창문을 두드리며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창문을 두드린 그 자리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혜인이었다.성혜인은 목에 무언가 턱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혜원이 어째서 반승제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반승제와 성씨 집안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인사차 방문한 적도 없었다. 결혼을 할 때도 반승제는 모습을 감추어 성혜인 혼자 모든 절차를 처리해야 했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혜원과 엮일 일이 없었다.게다가 성혜원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는 건, 성혜원이 이 차를 알아봤다는 것이다.성혜인이 머릿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던 그때,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성혜원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더 이상 반승제에게 정체를 감출 수 없게 된다.창문이 내려가던 그 순간, 성혜인은 몸을 돌려 반승제를 껴안으며 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었다.때마침 반승제가 한 여성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 성혜원은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놀란 감정은 순식간에
성혜인은 자신을 대하는 성혜원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둘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기에 성혜원은 성휘 앞에서 뒷담화를 하곤 했다. 종종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가 성휘가 화를 낼 정도로 말이다.그렇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매번 성혜인을 다정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정말 성혜인을 ‘언니’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소윤은 대놓고 성혜인을 미워했지만, 성혜원은 달랐다. 늘 성혜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성혜인은 순간 깨달았다. 성혜원이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반승제의 아내’라는 그 자리를 성혜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그전에 있던 일을 떠올려 보니, 이제야 뚜렷하게 이해가 됐다. 성혜원이 왜 아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이다.성혜원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성혜인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코끝에서 반승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반승제 역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면서 두 사람의 코끝이 서로 부딪쳤다.성혜인은 이마를 짚는 척하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마치 몸이 좋지 않아 그에게 기댄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눈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몸 앞이 갑자기 텅 비자 허전함이 느껴졌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성혜인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혜원이 타고 있던 차는 이미 이곳을 떠난 상태였다.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막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성휘에게 온 전화였다.성혜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순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받기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성휘의 목소리가 들렸다.“혜인아, 2차 융자 성공했다. 반씨 집안에서 투자해줬어. 퇴원 기념으로 같이 축하하고자 하는데, 승제랑 집으로 오렴. 감사 인사도 전해야 하니 이모에게 저녁 준비시킬게.”말이 좋아 ‘감사 인사’지, 사실 반씨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
이성을 다잡고 마음을 가라앉힌 반승제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병원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약 기운이 여전히 몸을 지배하고 있었고, 뺨을 맞은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따가우면서 화끈거리기까지 하니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때마침 앞을 지나가던 간호사 덕분에 부축을 받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다 정말 구토를 하고 말았다. 결국 창백한 얼굴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수액을 맞았다.하필 그때, 성휘가 또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잊지 말고 반승제를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었다.「혜인아, 승제와 결혼했으니 한 번쯤은 집에 데리고 와야지.」성혜인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외부에서 판을 치던 유언비어를 잠재우고자 반승제를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2차 융자도 유치했으니 앞으로 인맥이 넓어질 일만 남았다.하지만 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이 정략결혼을 하고 난 이후, 사람들이 성씨 집안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 반승제, 그리고 반씨 집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이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선 단체를 자처하고자 모인 것이 아니다. 체면을 살려줬다면 그만큼의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분명 성씨 집안이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니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씨 집안은 반승제가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했다.그래야만 그들의 체면을 살려줄 사람들이 계속 곁에 존재할 테니 말이다.성혜인은 홀로 병원에 앉아있으니 쓸쓸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휘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나도 너와 다투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라.」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성휘의 특기다.성혜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성휘가 그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렸을 때는 돈을
반승제는 어둠이 깔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할 일 다 끝났어?”3년 전. 백연서는 반승제와 윤단미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았다. 반승제가 성혜인과 결혼하자 윤단미는 해외로 떠나버렸다.사실 윤단미에게 ‘할 일’ 같은 건 없었다. 백연서가 둘을 떼어놓으니 속으로 참고 삭이는 일 말고는 더 있겠는가.반승제가 직접 그녀를 찾으러 가거나 수도 없이 전화를 해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동안 반승제는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그렇다 보니 윤단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제 발로 돌아온다면 백연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반승제와 완전히 끝이었다.사실 그 당시 반승제는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그런 설득은 아니었다. 반승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 백연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과 함께 도망가길 바랐던 것이다.윤씨 집안은 적은 재산 정도 가지고 있는 가문일 뿐, 재벌에 속하지는 않았다.윤단미는 제원에서 권력 집단에 속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부유한 편에 속했다.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반승제와 사귄 이후로는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윤단미가 반승제에게 시집 가 그림 같은 한 쌍이 되리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모두가 그렇다 보니 윤단미 역시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반승제가 자신과 화해하고자 고개를 숙이며 들어올 줄 안 것이다.반승제가 붙잡을 때, 윤단미는 거절했다. 그녀가 원하던 건 반승제가 평생 윤단미 없이 살 수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반승제의 행동은 윤단미의 기대에 못 미쳤다. 그렇게 윤단미는 반승제가 결혼할 때까지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해외에서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늘 반승제가 달래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그 이후로 3년 동안 반승제는 아주 드물게 연락을 하며 회사 업무에 치여 살았고, 그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다.심지어 귀국한 이후, 반승제가 직접 자신의 아내와 상의해 윤단미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라고 할 것이라는 상상까지 했다.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알고 있으니까.윤단미가 냉전을 끝내기만 하면, 그 자리는 바로 그녀의 것이다.윤단미는 입꼬리를 올리며 휴대폰을 뒤져보다가 반승제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사진 속의 반승제는 풋풋했다. 오랫동안의 애정이 갑자기 솟아난 돌부리에 부서질 리가 없기에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휴대폰을 막 내려놓자, 벨소리가 울렸다. 윤선미에게 걸려온 전화였다.며칠에 한 번씩 윤선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반승제의 최근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예전에 이미 이 디자이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윤단미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동안 반승제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캔들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디자이너에 대해서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언니, 그래도 빨리 오는 게 좋겠어. 그 여자, 아무래도 형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내가 지켜보고 있을게.”“선미야. 그렇게까지 의심 안 해도 돼. 승제 마음속에는 나뿐이니까.”윤선미의 머릿속에 성혜인이 떠올랐다.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정말 예뻤으니까.이렇게까지 안심하는 그녀에게 윤선미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성혜인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얼굴이 거슬렸다....성혜인은 홀로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뺨에 남은 손자국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어젯밤 그 남자들이 무자비하게 힘을 휘둘렀던 걸 다시 떠올리니 조금 무서워졌다.그녀는 신고할 생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경찰에서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순간 흠칫했지만, 반승제가 그들을 신고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납치 수법이 허술해서 경찰이 조사하면 금방 잡힐 것이다.“성혜인 씨, 맞으시죠? 어제 그 사람들 잡았는데 청부업자들이더군요.”“절 해치려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조희준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이 년이 감히...!’망할.성혜인을 잘 구슬릴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터지는 순간, 경찰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성혜인이 합의를 해주지 않아 경찰로 사건이 넘어간다면 분명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고, 회사는 그대로 나락의 길을 걷고 말 것이다.조희준은 속이 뒤틀렸다. 여자 혼자서 두 납치범을 경찰서에 보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그는 지금까지도 누군가 성혜인을 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성혜인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이렇게 당한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나쁜 년!”그는 욕을 뱉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성혜인을 직접 찾아가 합의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다.조희준은 성혜인에게 가고자 급히 문밖을 나섰다.하지만 더 이상 이 일에 얽매여 있을 생각이 없던 성혜인은 경찰에게 모든 걸 맡겼다. 어차피 합의도 없으니까.그녀는 퇴원하는 길에 우연히 반희월과 마주쳤다.지난번 병원에서 반희월과 마주쳤을 때도 뺨에 손바닥 자국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성혜인은 최대한 몸을 돌리며 반희월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희월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페니 양?”지난번과 똑같았다.이름까지 불렀는데 숨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성혜인은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인사했다.반희월의 시선이 성혜인의 얼굴로 향했다.손바닥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무시하기도 애매했다.교양을 갖춘 반희월은 상대방의 상처를 대놓고 들춰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여자친구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성혜인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잘 청하지 않는 독립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경헌이 얘도 참... 여자친구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데도 가만히 있다니.’“안녕하세요.”성혜인은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자 반희월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왜 또 이렇게 된 거니? 아파?”갑작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