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심호흡하고 숨을 몇 번 가다듬었다.그러다가 배현우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시선이 부딪치지 않기 위해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배현우는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화장실로 들어가 손등의 핏자국을 깨끗이 씻었다.성혜인은 원래 자는 척만 하려고 했지만, 너무 졸린 나머지 진짜로 잠이 들어 버렸다.한편, 반승제는 여전히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 구지한의 우리 앞에 서 있었다.우리의 맨 앞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 노인이 바로 구 씨 집안 어르신이다.그 어르신은 검은색 평상복을 입은 채 위엄 있게 구지한을 보고 있었다.구지한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에 구지한에게 질책을 받았던 한 남자가 이때가 기회다 싶어 바로 어르신의 화를 돋우기 시작했다.“할아버지, 주인 도장을 얼른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요? 구지한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까 봐 걱정되네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어르신의 날카로운 눈빛이 구지한을 향했다.“주인 도장은 어떻게 했느냐?”구지한은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지만, 그것은 전혀 눈에 띄는 웃음기가 아니었다.“할아버지, 제가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주인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습니다.”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한 그러하다.게다가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는 단지 주인 도장을 가지고 구 씨 집안에서 도망쳤을 뿐, 구 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이는 일단 중대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그의 말에 어르신의 얼굴색은 금세 어두워졌고 옆에 서 있는 반승제를 바라보았다.반승제가 사칭한 그 인물은 속을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말수가 적기 때문에 그도 굳이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그가 성혜인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 또한, 이 검은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이틀 안에 구 씨네 가문에 물건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이 바로 그 거래를 진행하는 날이다.반승제는 그 사람에게 물건의 위치를
그가 자리를 떠나자 그곳에는 반승제와 구지한만 남았다.구 씨 어르신 구창모는 신중한 사람이라 어젯밤에 반승제가 사는 집 밖에서 부하들더러 지키게 했다.말이 지켜주는 것이지, 그건 사실 감시였다. 어쨌든 구창모가 원하는 것은 그 약이었으니 말이다.약이 없어진 것을 안 뒤로 마음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반승제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문이 닫히자 구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반승제, 언제쯤 손 쓸 예정이야?”반승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몇 시간 후면 밖에도 어두워질 것이다.그는 그를 쫓고 있는 무리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고 전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그 무리가 누구의 세력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건 바로 K이다.K의 세력이 이곳에 침투할 줄은 몰랐지만, K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폭탄 한 방으로 섬 전체를 폭파했을 텐데, 굳이 자기 사람을 애써 섬 안으로 들여보내 죽을 지경까지 다다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오늘 밤, K 쪽 사람들은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하지만 구창모 쪽에도 많은 사람이 있다. 그때 가서 양측이 싸우는 틈을 타 구지한을 데리고 성혜인을 찾으러 갈 예정이다.구지한은 본인의 물음에 반승제가 대답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때를 기다렸다.두 시간 뒤,구창모가 로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똑바로 앉은 채 자신의 유능한 조수 쪽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한번 가보거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총소리가 더욱 강렬하게 들려왔다.“어르신, 제가 지켜드릴 테니 얼른 여기를 떠나셔야 합니다.”그러자 구창모의 얼굴색이 일그러졌다.‘그놈들이 또 왔단 말인가? 젠장, 대체 누구의 세력인 거야! 감히 중섬에서 난리를 피워?’“일단 사람을 시켜 지한이를 데리고 내섬으로 돌아가. 나는 다른 가문들과 이야기 좀 나눠야겠어. 같이 뭉쳐서 이 외부세력을 물리쳐야 할 거 아니야?”
미스터 B 역시 그의 옆 라운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레드 와인이 아닌 축하용 샴페인을 들고 있었다.“세운아, 만약 나라면 바로 전체 섬을 폭파했을 거야.”미스터 B 진백운은 자신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미스터 K 진세운의 모든 결정은 존중했다.그들은 쌍둥이 형제였고, 그는 진세운의 그림자가 되는 것에 익숙했다.진세운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천천히 한 모금 들이마셨다.“만약 그렇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예찬도 아마 안에 있을 거야. 만약 노예찬이 나 때문에 죽는다면 조직 쪽도 더욱 번거로워질 거고 말이야.”비록 세 번째 장로는 잡혔지만 큰 장로는 아직 멀쩡하다.이 두 늙은이는 같은 배에 탔고, 구금 섬에 숨어 있던 노예찬까지 합치면 K 쪽에는 7명의 장로가 있는 것이다.BK가 이렇게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 세 장로가 힘을 합쳐 그를 상대한다면, 그에게 적지 않은 문제가 초래될 것이다.따라서 노예찬을 진영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끌어들여야 한다.게다가 노예찬의 연구 기지에는 아주 중요한 파트너도 있다.진세운의 목표는 BK가 아니라 연구 기지다.노예찬이 연구 기지의 그 누군가와 사이가 좋으니, 일단은 노예찬과 잘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다만 노예찬은 강한 것에 약하니, 일단 철저하게 그를 승복시켜야 소통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오늘 무조건 그를 잡아야 한다.노예찬 뿐만 아니라 성혜인과 반승제, 그리고 오랫동안 숨어 지낸 성녀도 잡아야 한다.성녀의 존재는 언제나 K의 가슴에 박힌 가시였다.당시 그는 확실히 성녀에 의해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의 모든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계획한 것이었다.진세운은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그해 BK의 조직에서 그는 줄곧 나하늘이 자신을 매우 중시하여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진세운은 그녀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했고,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다.하지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너무
나하늘은 그를 몇 분간 빤히 쳐다보더니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너 남을 괴롭히기 위해 실력을 키우고 강해진 거야?”“저는 단지...”그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죽으면 죽었지 왜 이렇게까지 화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꿇어.”나하늘은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한마디 내뱉었다.“내가 왜 너에게 의학 가르치기를 꺼렸는지 알아? 넌 약자에 대한 동정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야. 심지어 넌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에서 흥분감을 느끼잖아! 넌 애가 천성적으로 못돼먹었어.”‘천성적으로 못돼먹었다'라는 말은 그의 가장 깊고 깊은 곳에 각인된 것만 같았다.그는 한밤중에 깨어날 때마다 나하늘의 소리가 들려왔다.‘천성적으로 못돼먹은 애, 천성적으로 못돼먹은 애’나하늘의 그 말에 진세운은 의학 공부를 하고 싶었고 심지어 아주 잘 배워보고 싶었다.그는 마음속으로 더 미친 생각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나하늘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하지만 그 뒤로 나하늘은 더욱 바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마침내 상처를 입고 돌아와 그를 데려가고 싶어 했다.“세운아, BK는 너무 음침한 곳이라 너랑 어울리지 않아. 아마 너를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인도하게 될 거야. 그러니 나랑 같이 떠나자.”그 당시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하늘의 눈빛은 아주 확고했다. 그녀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심지어 그것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그는 모든 사람이 더 강해지고 싶어 하고 비범해지기를 원하는데 왜 나하늘은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나한테 아주 귀여운 딸이 있거든? 네가 보면 분명히 좋아할 거야.”그는 자신이 BK에 몇 년을 머물렀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나하늘을 만난 횟수는 아주 적었고 매번 그녀가 만족하기만을 바라왔다. 하지만, 나하늘의 더 큰 관심사는 그가 더 강해졌는지가 아니라 그가 더 좋아졌는지 아닌지였다.게다가 그녀에게 딸도 있다니?그는 충격을 느꼈
섬에서는 여전히 전투 중이었다.한편 반승제는 구지한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구지한은 비록 다친 데는 없어도 뒤에서 너무 열심히 달린 나머지 숨을 헐떡였다.“반승제, 너 지금 그 애인 만나러 가는 거야?”“응.”반승제의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그는 밖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함께 숨겨진 길 하나를 가리켰다.“이쪽이야.”그는 며칠 동안 그 주변에 대해 파악이 완료된 상태였다.구지한은 한참을 달렸다. 그러고 보니 총소리도 점점 멀어진 듯했다.반승제는 거리에 서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반승제 씨, 저희가 10분 전에 성혜인 씨 소식에 관해 확인 완료하였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어둠 속에 숨어 있는 그 무리야말로 구 씨 집안의 주인 도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다.구지한이 반승제에게 주인 도장을 주면 반승제도 이 무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그리고 내가 찾아보라고 한 또 다른 여자는 찾아봤어요?”“그분은 지금 외섬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 번거로울 듯합니다.”“그게 뭔 뜻이죠?”“저희에게 제공해주신 사진과 저희가 찾은 그 여인은 동일 인물이 맞습니다. 하지만 눈과 귀가 먼 채 햇빛도 없는 지하실에 갇혀 있더군요.”그 말에 반승제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하늘에게 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거란 말인가!그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일단 성혜인이 있는 쪽으로 가보죠.”“네.”한 무리의 사람들은 성혜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 시간에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오늘 저녁의 중섬 움직임은 너무도 컸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도 그 움직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그녀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깨어났을 때쯤, 배현우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너무도 놀란 그녀는 이불을 움켜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배현우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되려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성혜
“살아서 돌아올게.”반승제는 그 말만 남긴 채 나머지 사람들더러 안전하고 외진 위치 좀 찾아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몇 명 더러 그곳에 남아 구지한을 지키라고 명령했다.구지한은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내섬 연 씨 가문에 연하준이라고 있거든. 나 그놈이랑 친해. 그러니 만약 해결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연하준한테 말해. 하지만 이거는 미리 말할게. 너도 혼자 내섬에 가봤고, 그 가문에 거의 이기적인 놈들만 있다는 거 너도 잘 알 거야. 그러니 너랑 네 연인한테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닥칠 수 있을 거란 말이지. 만약 얼굴이 평범할 정도로 생겼으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쁘게 생기면 그 사람들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야.”그 말에 반승제의 눈빛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그 모습에 너무 놀란 구지한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나 노려봐도 소용없어. 그 안의 규칙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계급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그 누구도 대가문의 사람들을 관여하지 않아. 그들이 바로 왕법이거든. 약간의 평범한 자색을 갖춘 여인들은 앞으로의 예비 후궁인 거지.”비록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사실이었다.구금 섬에서 지난 백 년 동안 돈이 많은 사람은 항상 그런 사람들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계급을 바꿀 기회조차 없었다.게다가 윗선에서도 그들의 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무리에 의지해서 필사적으로 구금 섬을 운영 유지해야 했으니 말이다.반승제는 손에 총을 든 채 여러 발의 총알을 연이어 장전했다.이윽고 구지한이 설명을 이어나갔다.“네가 예전에 내섬에 나타났을 때, 그 무리의 사람들이 얼마나 공포에 질렸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그 사람들은 네가 모두의 자원을 나눠 가질까 봐 두려웠거든. 백 년 동안 아무도 그들을 이렇게 공포에 떨게 한 적이 없었어. 네가 쥐고 있는 재력, 능력, 혹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섬에서 너를 따르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이 있을 거야.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면, 네 쪽에 새로운 가족
성혜인은 죽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자 가정부는 눈을 흘기며 그릇을 치웠다.“얌전히 침대에 누워있어요. 여기에는 당신을 모실 사람 따윈 없으니까.”방문이 닫히자 성혜인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행히 약 같은 건 주사하지 않아 움직일 힘이 있었다.창밖을 내다본 그녀는 이곳이 바위가 쌓여 산을 이루고 그 위로 물이 흐르는 호화로운 정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성혜인은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열리지 않자 문가로 가서 문을 밀어보았다. 밖에서 잠가 놓았는지 문 역시 열리지 않았다.누군가에게 갇힌 걸까?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있는 이 방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도 갖추어져 있었다.성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현재 상황을 모르는 성혜인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한편 연씨 가문의 응접실에는 배현우가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연씨 가문의 가주는 이제 40대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전임 가주를 이어 지금의 연태광이 되었다. 연태광은 배현우의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그러니까 배현우 씨는 우리와 다른 사업을 하고 싶다 이 말씀인가요?”배현우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면 담담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업인지는 연 가주님께서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두발짐승 거래는 당신들의 주 사업이 아니던가요?”두발짐승, 다름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구금섬에서 이 가문들이 뒤로는 어떤 사업을 하는지 누가 모를까. 더럽고 추악하지만 끈질기게 지속되어 온 사업이었다. 게다가 이 가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섬 전체의 일반인들은 전부 그들의 상품이나 다름없었다.그래서 이곳 여자들의 지위는 극히 낮았다. 아이를 낳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을 때마다 적지 않은 보상을 받으니 섬 전체에 외동은 거의 없었다.섬 안의 모든 학교는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기 위해 세워졌고 혹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으면 그들의 눈에 들었다.노예찬이 전에 성혜인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과장 되지는 않았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조차도 이 방을 나가고 싶을 때 문 앞에 있는 경비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성혜인은 벽을 부수는 소리를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의 한쪽 벽은 문만큼 크게 뚫려져 있었고 곧 누군가가 정말로 그 자리에 문을 설치했다.그녀는 이 문을 통해 옆방을 바라보았다. 옆방에는 여러 종류의 유리 시험관이 가득 있었는데 아마도 실험실인 것 같았다. 그 안에는 흰 가운을 입고 눈에는 고글을 낀 배현우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점잖은 불량배 같아 보였다.공사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성혜인은 다가가서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당신 반승우야, 아니면 배현우야?”반승우는 약물 연구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고 10대 시절부터 연구소의 수석연구원들을 따라다니며 실험을 함께했다. 하지만 배현우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실험을 통해 탄생한 인격이니 제약에 관한 지식을 알 리가 없었다.혹시... 그가 반승우에 관한 기억을 전부 기억해 낸 거라면?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배현우는 그저 실험으로 탄생한 두 번째 인격이지만 반승우야말로 그 몸의 주요 인격인데, 배현우가 반승우를 밀어내고 혼자서 이 몸을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배현우는 손에 든 시험관을 응시할 뿐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가 여러 약품을 계량하고 혼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확신했다. 배현우가 정말 반승우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반승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는 거야? 아니면 일부만 기억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현우는 손에 든 시험관을 부숴버렸다.“약을 먹여야만 조용히 할래?”성혜인은 경계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순간 배현우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치켜들었다.“성혜인, 여기서 너는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 해. 내가 하라고 하는 건 무엇이든 해야 하고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일이 생긴다면 나 또한...”이 말을 마치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나 또한 널 화나게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