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찬은 손에 든 사탕을 배현우 앞에 던졌다.“바보야, 먹어.”배현우는 그가 베푸는 게 선의인지 악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는 멍청해진 게 맞았다. 그는 사탕을 집어 들고 포장을 벗겨서 입에 넣었다. 돌 위에 앉아 있던 노예찬이 물었다.“달아?”“달콤해.”“그래?”노예찬은 한 번도 이런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은 피비린내가 가장 익숙했고 단맛은 사치였다.의부가 말하길 이런 끈적끈적한 맛은 단시간 동안 신경을 마비시켜 투지를 앗아간다고 말했다.어릴 적 훈련에 지쳐 힘들어하고 있을 때 사탕의 냄새를 맡고 한 알을 훔쳐 먹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고된 훈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탕을 다 삼키기도 전에 두 번이나 채찍질을 당했다.“노예찬, 정말 실망이야. 또 그딴 걸 건드리면 손가락을 하나 잘라버리겠어.”노예찬은 그때 크게 겁을 먹었다. 이게 자신의 몇 살 때 기억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 사탕은 달콤하지 않았고 두 번의 채찍질 같은 맛이었다. 피비린내 나고, 아프고, 쓰디쓴...아무것도 모르는 배현우를 보자 그는 질투심을 느꼈다. 스물일곱이나, 여덟 살로 보이는 남자였지만 고작 사탕 한 알에 만족해서 이토록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정말 그보다 10년을 더 살았다는 게 부질없었다.노예찬은 속눈썹을 내리고 휴대폰을 꺼내 부하에게 연락했다.“그 여자를 잡아다가 고문해서 해파리 인장의 행방을 알아내. 이 연극도 이제 막을 내려야지. 그리고 K의 무리를 막아. 구금섬은 그들이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야.”“K가 장로님과 잘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합니다.”K는 이미 성혜인과 반승제가 구금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금섬의 주인에게 협조하기만 하면 두 사람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노예찬은 조직 내에서 항상 그와 대립하여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게다가 노예찬은 조직에 가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중간 섬의 밤은 불빛이 그리 밝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가던 성혜인은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은밀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어젯밤 세 사람이 도망쳤던 그 길이었다. 원래는 이 길을 따라 돌아가려고 했으나 이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이마에 총구가 닿아 발걸음을 멈췄다. 상대방의 말투는 차가웠다.“혜인 씨, 우리랑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성혜인은 이 길이 은밀한 골목이라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총을 뺏기고 두 손이 결박된 그녀는 두 눈이 검은 천으로 가려져 축축한 방으로 끌려와 두 손이 묶인 채 매달려서 심문을 받았다.“해파리 인장은 어디 있지?”K 쪽의 사람일까?아니, K는 오랫동안 그녀 주위를 맴돌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직접 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극도로 자부심이 강한 K가 고양이 쥐잡듯 자신의 목적을 대놓고 드러낼 사람도 아니었다.하지만 K가 아니면 해파리 인장과 그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바로 채찍이 날아왔다.처음 K에게 끌려갔을 때, 그녀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채찍질을 당했다. 그 후 커다란 물집이 잡혔는데 그때의 고통은 지금보다 백 배는 더 괴로웠다.이제는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으로 맞섰다.고문을 하던 남자는 채찍을 연달아 열 번을 때리며 성혜인이 견딜 수 없을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부아가 치민 그는 더욱 힘을 실어 다섯 번 연거푸 채찍질했다.“해파리 인장이 어디 있지? 말만 하면 살려주겠다.”성혜인은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과연 그럴까? 만약 말해준다면 그녀의 이용 가치도 사라지게 될 텐데...채찍으로 연속 스무 번 내려치자 그녀의 몸에 걸친 옷이 전부 찢어져 얼룩덜룩한 상처가 드러났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즉시 밖으로 나가 노예찬에게 전화를
“누나, 난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성혜인은 초조한 나머지 기침을 두어 번 했지만, 가슴에는 통증만 느껴질 뿐이었다.“그 사람 건드리지 말아요. 제가 말할게요.”그녀의 말에 노예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마치 무언가가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그는 성혜인이 그렇게 빨리 입을 열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노예찬은 생각에 잠긴 듯 성혜인의 시선을 피하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한편, 노예찬을 위협하던 남성이 성혜인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조금 전에 때릴 때는 한마디도 안 하던 년이 이제야 입을 여네? 배짱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구나?”그 시각 성혜인의 머리는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피가 묻은 채 눈빛은 말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해파리 도장은 외곽 섬 제가 묵었던 방에 있어요. 제 방 침대 밑에 숨겨진 칸막이가 있는데 그 안에 있거든요.”그 당시 그녀는 해파리 도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그 물건이 크지도 않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도 않지만, 몸에 지니고 다니는 한 안전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하여 그녀는 머물 곳을 찾은 후 그것을 닥치는 대로 거기에 둔 것이다.조금 전의 그 남성은 노예찬을 놓아주며 냉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이놈을 당장 끌고 가라. 그리고 나머지 몇 명은 조금 전 말한 그곳에 가서 한번 찾아보도록 해라.”노예찬은 손을 번쩍 들어 성혜인의 옷을 잡았다.그녀의 옷은 이미 찢어질 대로 찢어졌고, 몸에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노예찬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해파리 도장이 진짜 거기 있는 거야?”그 말에 성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노예찬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전에 그가 그녀에게 해파리 도장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도, 그녀는 똑같게 그곳이라고 이야기했었다.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어떻게 그런 곳에 아무렇게나 둘 수 있단 말인가!성혜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는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다시 가서 더 고문해.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려. 나도 이젠 더는 못 참겠어.”이 게임은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었다. K 쪽 사람들이 이미 그 안에 찾아왔고, 두 사람은 이제 정면으로 마주칠 것이다.게다가 반승제, 그를 죽이는 데는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할지 아직 모른다.“10 장로님, 저 여인을 그 사람한테 보내지 않으시겠어요? 그쪽에서 연구하기 위해 저런 똑똑한 사람들이 필요하잖아요?”노예찬은 입꼬리를 올리며 손끝을 문질렀다.구금 섬은 사실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짐승처럼 팔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지위가 높은 윗사람을 제외하면 아랫사람은 우리에 갇힌 짐승과도 같다.이것이 바로 구금 섬의 잔인한 진실이다.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은 거의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구금 섬이라는 곳은 수년 전부터 이러했다.그 무리의 사람들은 좋은 싹을 고르러 여기 올 것이고, 충분히 똑똑한 사람들만이 선발될 것이다.노예찬은 처음부터 성혜인을 속이지 않았고, 실제로도 해파리 같은 문신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밑바닥의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수단일 뿐이었다.게다가 모두 그런 문신을 하고 싶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도마 위의 고기가 되어 있을 뿐이다.그런 환경에서 자란 노예찬이 어떻게 보통 사람의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장로님, 그년이 남자보다 끈기가 있으니, 아마 그쪽 사람들도 엄청나게 좋아할 것 같습니다.”그 말에 노예찬이 눈을 반짝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순간 생겨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가 승낙하려는 순간 해파리 도장을 찾으러 나갔던 사람이 돌아와 정중하게 무릎을 꿇어 보였다.“장로님, 찾았습니다.”그는 손에 해파리 도장을 들고 있었고, 그 도장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노예찬은 어리둥절했고 그 순간이 꿈만 같았다.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해파리 도장이었고, 성혜인이 잠시 머물렀
성혜인은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그 자리에 걸려있었다.그 시간 동안 아무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고, 그 앞에 누워 있는 시체를 제외하고는 그 방에 성혜인 혼자뿐이었다.햇빛이 쏟아졌을 때, 마침내 문이 열렸다.한 남성이 방에 들어왔고 그는 그녀를 묶고 있던 밧줄을 단검으로 잘라냈다. 그러더니 차가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이건 그놈이 남긴 쪽지야. 흐흐, 이미 우리가 불에 태워 죽여버렸거든.”말을 마친 뒤 그 남성은 바로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몇 초가 지나서야 그녀는 그 남자를 따라잡으려고 쫓아 나갔다.“이미 도장 찾은 거 아니에요?”“탓할 거면 말 많은 그 자식을 탓해.”그 남성은 말을 마친 뒤 한쪽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멀지 않은 곳에는 한 무더기의 재가 있었고, 거기에는 아직 온도가 남아 있는 채로 한 무더기의 시체 뼈가 있었다.그전까지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성혜인은 그 장면에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사람들이 그녀를 놓아줬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여기를 떠나야 했다.그녀는 발로 불에 타고 있는 재를 걷어찬 뒤 안에 있는 인골 몇 조각을 주웠다.성혜인은 지금 남아 있는 게 진짜로 인골인지 뭔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게다가 손은 인골을 줍는 바람에 새까맣게 그을렸다.그 잿더미의 온도는 매우 높았고 아직 불이 타고 있는 부분도 많았다.성혜인은 십여 분 동안 휘적이다 결국은 노예찬의 뼈라고 확신한 걸 주운 후에야 옷감을 찢고 그것을 그 안에 감쌌다.사실 그녀는 노예찬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단지 그녀가 구금 섬에서 눈을 뜰 때마다 노예찬이 보였을 뿐이었다. 비록 그의 행동이 괴상할 때도 많았지만, 성혜인은 줄곧 그를 위한 이유를 찾았다.예를 들면, 이런 곳에서 생활하니 좀 이상한 것도 당연한 거라고 말이다.아마 성혜인이 지금 임
노예찬은 떠나기 직전 다시 한번 잿더미를 살폈다. 그의 마음은 무언가에 긁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게다가 현재의 그 짜증스러움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주에 걸린 것 같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이런 감정을 거의 느낀 적이 없다.잠깐동안 탐구를 하기 싫어서, 성혜인의 목숨을 살려준 건 그에게 있어 큰 자비를 베푼 거나 다름없다.*성혜인은 인골을 넣은 천 조각을 들고 1킬로미터도 못 가서 기절했다.그녀는 온몸이 아파 났고 심지어 몸에 열도 있음을 느꼈다.그 순간 그녀의 몸은 마치 불덩이처럼 타오를 것만 같았다.이때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살짝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눈을 뜨고 볼 힘조차도 없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작은 침대 위에 있었을 때였다.창밖에는 이미 해가 지며 어여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그녀는 손등에 바늘이 꽂힌 채 링거를 맞고 있었다.성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바늘을 뽑으려는 찰나, 누군가에 의해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사람은 바로 배현우였다.성혜인은 온몸이 굳어진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이제 회복이 된 건가.’배현우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침대 옆의 걸상에 앉았다.“좀 괜찮아졌어?”“이젠 다 회복된 거야?”배현우의 이마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상처가 있었다. 아마 어젯밤 일일 것이다.어젯밤 그녀와 노예찬이 없는 걸 보고 배현우가 그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실수로 머리를 부딪힌 거로 보인다.그는 손을 들어 상처가 있는 곳을 더듬는 동시에 매우 공격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성혜인은 그 상황이 아주 불편했다.“회복되었다고 봐야지.”그녀는 단번에 그가 배현우, 아니 반승우라는것을 알았다.반승우는 보통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응시한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음침한 시선으로 사람을 응시하지는 않는다.하지만 현재 이 남성의 시선은 너무도 공격적이다.성혜인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고 그와 어떤 교류도 하고 싶지 않았다.배현우
그녀는 심호흡하고 숨을 몇 번 가다듬었다.그러다가 배현우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시선이 부딪치지 않기 위해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배현우는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화장실로 들어가 손등의 핏자국을 깨끗이 씻었다.성혜인은 원래 자는 척만 하려고 했지만, 너무 졸린 나머지 진짜로 잠이 들어 버렸다.한편, 반승제는 여전히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 구지한의 우리 앞에 서 있었다.우리의 맨 앞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 노인이 바로 구 씨 집안 어르신이다.그 어르신은 검은색 평상복을 입은 채 위엄 있게 구지한을 보고 있었다.구지한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에 구지한에게 질책을 받았던 한 남자가 이때가 기회다 싶어 바로 어르신의 화를 돋우기 시작했다.“할아버지, 주인 도장을 얼른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요? 구지한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까 봐 걱정되네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어르신의 날카로운 눈빛이 구지한을 향했다.“주인 도장은 어떻게 했느냐?”구지한은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지만, 그것은 전혀 눈에 띄는 웃음기가 아니었다.“할아버지, 제가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주인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습니다.”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한 그러하다.게다가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는 단지 주인 도장을 가지고 구 씨 집안에서 도망쳤을 뿐, 구 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이는 일단 중대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그의 말에 어르신의 얼굴색은 금세 어두워졌고 옆에 서 있는 반승제를 바라보았다.반승제가 사칭한 그 인물은 속을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말수가 적기 때문에 그도 굳이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그가 성혜인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 또한, 이 검은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이틀 안에 구 씨네 가문에 물건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이 바로 그 거래를 진행하는 날이다.반승제는 그 사람에게 물건의 위치를
그가 자리를 떠나자 그곳에는 반승제와 구지한만 남았다.구 씨 어르신 구창모는 신중한 사람이라 어젯밤에 반승제가 사는 집 밖에서 부하들더러 지키게 했다.말이 지켜주는 것이지, 그건 사실 감시였다. 어쨌든 구창모가 원하는 것은 그 약이었으니 말이다.약이 없어진 것을 안 뒤로 마음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반승제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문이 닫히자 구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반승제, 언제쯤 손 쓸 예정이야?”반승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몇 시간 후면 밖에도 어두워질 것이다.그는 그를 쫓고 있는 무리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고 전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그 무리가 누구의 세력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건 바로 K이다.K의 세력이 이곳에 침투할 줄은 몰랐지만, K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폭탄 한 방으로 섬 전체를 폭파했을 텐데, 굳이 자기 사람을 애써 섬 안으로 들여보내 죽을 지경까지 다다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오늘 밤, K 쪽 사람들은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하지만 구창모 쪽에도 많은 사람이 있다. 그때 가서 양측이 싸우는 틈을 타 구지한을 데리고 성혜인을 찾으러 갈 예정이다.구지한은 본인의 물음에 반승제가 대답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때를 기다렸다.두 시간 뒤,구창모가 로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똑바로 앉은 채 자신의 유능한 조수 쪽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한번 가보거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총소리가 더욱 강렬하게 들려왔다.“어르신, 제가 지켜드릴 테니 얼른 여기를 떠나셔야 합니다.”그러자 구창모의 얼굴색이 일그러졌다.‘그놈들이 또 왔단 말인가? 젠장, 대체 누구의 세력인 거야! 감히 중섬에서 난리를 피워?’“일단 사람을 시켜 지한이를 데리고 내섬으로 돌아가. 나는 다른 가문들과 이야기 좀 나눠야겠어. 같이 뭉쳐서 이 외부세력을 물리쳐야 할 거 아니야?”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