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은 가을 날씨에는 얇은 이불 하나를 덮는 게 춥지도 않고 아주 적정하다.마침 침대 머리맡의 조명이 두 번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꺼졌고 방안을 비추는 건 태블릿에서 나오는 화면 밝기뿐이었다.장하리는 예전에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아예 달랐다.그녀는 서주혁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어깨는 나란히 맞닿아 있었고 가느다란 그의 손가락과 한껏 솟은 핏줄은 자연스레 장하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순간 그녀의 입가에 과일 한 조각이 놓였다.장하리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그의 얼굴을 보았으나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안 먹어요?”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다.그녀는 감히 받아먹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쑤시개를 넘겨 쥐었다.서주혁은 다시 한 조각을 집어 들더니 태블릿 밝기를 빌려 정교하게 다듬어진 모양을 살펴보았다. 토끼였다.그는 입에 넣으면서 또 다른 과일을 집어 들었고 그 시각 장하리는 마침 손에 든 과일을 입에 넣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우린 왜 이혼을 한 거예요?”“쿨럭...”과일이 목에 걸린 그녀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서주혁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설마 제가 바람을 피웠나요?”아직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결혼했다면 절대 바람을 피울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사레에 걸려 말을 잇지 못한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었다.서주혁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그쪽이 바람을 피운 거예요?”살기를 띤 그의 말에 장하리는 더욱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둘 다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면 왜 이혼을 한 거지?서주혁은 장하리의 등을 두드리며 자연스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온화한 외모와 남을 배려하는 세심함, 심지어 눈치 빠른 모습으로 유추해 봤을 때 장하리는 바람을 피우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마지노선을 건드리는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라면 그는 용서할 생각이 있었다.“일 크게 만들지 말고 이왕이면 재결
제멋대로 이유를 단정한 후, 그는 계속하여 남은 영화를 다 보았고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 9시가 되었다.장하리가 이불을 젖히고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려고 몸을 움직이자 서주혁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다시 끌어당겼다.“오늘 밤은 같이 자요.”잠자리에 불만을 느끼는 원인은 몇 가지에 불과하다.첫째는 쌍방 혹은 어느 한쪽이 아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남자의 스킬이 부족한 경우다. 또한 시간이 짧으면 당연히 여자는 만족도가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이혼을 생각할 수도 있다.서주혁은 무자비할 정도로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기에 옵션을 전부 나열한 다음 이어서 하나씩 제외했다.그는 장하리를 품에 앉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이 불편한 듯 등을 돌렸다.서주혁이 누워만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하여 장하리는 서주혁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녀를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허리에 얹은 서주혁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온몸이 굳어졌다.잠옷 치마는 순식간에 걷혔고 장하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와 함께 얼굴 반쪽을 베개에 파묻었다.몇 분 후, 서주혁은 손끝을 적시는 촉촉함에 그녀가 잠자리에 흥미를 느끼지 못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는 한껏 달아오른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첫 번째 경우의 수를 배제했다.그럼 이제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스킬이 안 좋든지, 지속 시간이 짧다든지...장하리는 전전긍긍하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며칠 동안 피곤함에 쩔어 있었던 그녀는 서주혁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완전히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장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그 어떠한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벌써 일어난 건가?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씻으려고 욕실로 향했고 욕실 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는 서주혁과 마주쳤다. 마침 그는...쿵!깜짝 놀란 장하리는 화끈거리는 얼굴과 함께 재빨리 문을 닫은 후 서둘러 다른 방으로 향했다.두 시간
장하리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마침 고개를 돌려 피하려던 찰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피하지 마요. 내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거예요.”반박하고 싶었지만, 서주혁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고 장하리는 마치 덩굴에 얽힌 것처럼 전혀 숨을 쉴 수 없었다.마침내 말할 기회를 잡은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기울였다.“주혁 씨, 나중에 절 탓할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 당신은 절대... 먼저 입맞춤을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말하던 장하리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여자라면 누구나 뒤끝이 있고 투정 부리기 마련이다. 서주혁은 잠자리를 가질지언정 절대 키스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이성을 잃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런 찝찝한 키스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어쩌면 너무 창피한 일이다. 장하리는 매번 신경 쓰지 말자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그게 다짐처럼 되지는 않았다.“키스한 적이 없다고요?”서주혁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내가 그랬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장하리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졌고 서주혁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곧이어 그의 손끝이 장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여기에 입을 맞춘 적이 없다고요?”장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그의 손끝은 아래로 내려가 은밀한 곳에 닿았다.“여기는요?”서주혁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질문만 들어도 장하리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는 장하리의 반응을 보고 알아차렸다.“싫어하는 건 아니죠?”장하리의 몸은 진작에 그에게 적응했다. 예전에는 남자와 닿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지만 서주혁을 만나면서 스킨쉽의 짜릿함을 느꼈고 때로는 이성을 잃은 채 그에게 키스를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매번 거절당했다. 그러면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을 번쩍 차리기 일쑤였다.장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순간 서주혁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감쌌고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에 닿았다.두말할 것도 없이 뜨거운 입맞춤이 그녀를 덮쳤다.장하
반승제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향했고 말투에서는 짜증이 느껴졌다.“아직도 연락이 안 닿은 거야?”배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아직 자고 있나 봐.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어.”반승제가 막 화를 내려던 찰나 밖에서 장미가 걸어 들어왔다.“승제야, 설기웅 씨 왔어. 너랑 할 얘기가 있으시다네?”“안 만날래.”“연구 기지가 어딘지 알고 있대. 설인아 씨랑 결혼하겠다고 약속하면 알려준다는데 안 만날 거야?”그 말에 얼어붙은 반승제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의심했다.설기웅이 그곳을 알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반승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기웅을 만나러 나갔다.그 시각 설기웅은 홀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반승제를 보고선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설인아는 눈이 먼 채로 벙어리가 되었다. 감정 컨트롤이 안 되는 바람에 설씨 가문 전체는 어둠에 휩싸인 듯 우울한 분위기의 연속이었고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반승제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설인아는 줄곧 반승제의 이름만 외치고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반 대표님, 인아랑 결혼하면 연구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드릴게요.”반승제는 입가를 올리며 비웃었다.“그쪽이 연구 기지를 알고 있다고요?”“반 대표님이 우리 인아를 벙어리로 만들었죠? 하지만 괜찮아요, 전 연구기지에서 준 해독제를 얻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아를 완벽하게 회복할 거예요. 전에는 몇 시간마다 몸 전체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것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거든요. 이제 두 달만 지나면 목소리와 시력을 되찾을 거예요. 반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인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약이 연구기지에서 제공하는 해독제잖아요.”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설인아가 정말 회복한다면 분명 연구기지 사람들이 그녀를 도와줬을 것이다.장미가 내린 독은 성대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강한 독성을 갖고 있어 웬만해서는 회복이 안 되지만 연구기지의 사람들이 나선다면 상황이 달라진다.어찌 됐든 그 안에는 최고의 천재들만 모여있으니까.“인아가 회복 가
반승제는 대충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인지 눈치챘다.“그러니까 함께 제국으로 떠난 사모님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돌아온 사람은 나미선 씨 본인이라고 의심하는 거죠? 사건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럼 나미선 씨가 데려온 딸도 회장님의 딸이 아니라는 거네요? 그럼 사모님은 딸과 함께 사라진 건가요?”설의종은 고통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맞아.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든 줄 알고 엄청 큰 죄책감을 느꼈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진실을 알고 나니 등골이 오싹해지더라고. 조사를 시작하려고 움직였을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고 단서는 아예 찾을 수가 없었지. 우연히 BK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는데 그 조직이 어쩌면 미선이와 연결됐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어 지난 몇 년 동안 유심히 BK를 주목하고 있었어. 하지만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접근할 수조차 없어.”“그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거네요?”“몇 가지 단서가 있어. BK에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두 명 있거든? 한 명은 blood, 다른 한 명은 killer. 두 사람의 약자를 따서 BK인 거야. 그들은 조직 내에서도 높은 지위를 갖고 있고 평소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몰라. 내가 미스터 K랑 두 번 정도 만나봤는데, 그 사람은 귓불에 아주 작은 점이 있었어.”귓볼에 작은 점이 있다니?반승제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설의종은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보고선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그 두 사람의 신분은 아직도 미스터리야.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그중 한 명이 제원의 재벌가에 숨어있다는 거야. 그래서 막내아들을 시켜 재벌가 자제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건만 워낙 눈치가 없는 애라서 그런지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어. 나도 개인적으로 제원에 몇 번 가봤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만약 미선이의 실종이 BK와 관련됐다면 함께 사라진 딸도 이 조직이랑 엮인 게 분명해.
반승제의 부탁을 받은 탓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고 주변 사람 그 누구도 놓치면 안 된다는 얘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온시환은 무심한 듯 진세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재빨리 오른쪽 귓불을 확인했다.다행히도 없었다.온시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로는 요즘 따라 진세운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세운은 수술할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가끔 담배를 피운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담배를 피우고 있고 그 자세도 매우 능숙했다.진세운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듯 천천히 담배를 피운 뒤 담배꽁초를 근처 휴지통에 버렸다.“시환아, 내가 준 멜라토닌은 먹었어?”“아직. 요즘 대본 쓰고 있어서 깊이 잠들면 안 돼. 영감이 떠오르면 밤새야 하거든. 이제 대본을 다 썼으니까 오늘 밤에는 푹 잘 수 있겠네.”“다행이네. 저녁에 푹 쉬어.”진세운의 부드러움은 반승제와 달랐다. 봄바람 같은 반승제와 달리 진세운은 매우 온화한 스타일이다.며칠간 대본을 쓰느라 피곤함이 극에 달했지만, 여전히 술자리를 잡았다.그는 한가로운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서주혁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상태에 오늘 본 흑백 초상화까지 더해지니 숨 막힐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그는 진세운의 어깨를 툭툭 친고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진세운은 제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술집에서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보낸 온시환은 곧바로 별장으로 돌아왔고 순간 침대 옆에 놓인 멜라토닌에 시선을 사로잡혔다.한 알을 꺼내 먹으려던 찰나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기억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의 반승제는 결혼을 강요받은 상태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룸에 모여 앉아 결혼할 상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가볍기로 소문났던 온시환은 곧장 룸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허풍을 떨었다.“내가 예전에 점쟁이를 만났거든? 내 코끝에 있는 점 보이지? 이게 풍류점이래.
약병을 건넨 뒤 그는 곧바로 당시 농담을 던졌던 재벌 2세를 찾아갔다.먼저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운전해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야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렇게 온시환은 모든 친구에게 전화를 돌린 끝에 그 사람이 지금 스카이웨어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과 10분 전에 자리를 떴다고 한다.온시환은 즉시 운전해 스카이웨어로 향했고 입구에 있는 경호원에게 그가 언제쯤 떠났는지 물어보려고 했다.“아마 10분 정도 지났을 겁니다. 전화 한 통을 받고선 혼자 나갔어요.”온시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로 사람을 시켜 CCTV를 돌려봤다.하지만 영상을 보기도 전에 재벌 2세의 가족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트럭에 치여서 죽었대요. 우리 아들이...”그 말을 들은 온시환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단순 사고일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계획 살인인 걸까?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순간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우연이라기엔 참 의심스럽다.그 시각 병원. 온시환에게서 약병을 건네받은 의사는 마침 성분 분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옆에 있던 동료가 진세운이 지금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세운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죠?”“잊었어요? 원장님이 지난달에 현장 실습을 준비했잖아요. 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의사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약병을 주머니에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진세운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고 현장에 있던 여의사들은 그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왜냐하면 의학을 배우는 사람 중에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두 시간 후에야 수업이 끝났다.진세운이 밖으로 나가자 그 의사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즉시 쫓아 나가 수술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진세운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고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의사 손에 들린 약병을 발견했다.의사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
재벌 2세의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시신은 임시 영안실로 옮겨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온몸이 불에 타 사람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정도였고 스스로 음주 운전을 한 것이라고 밝혀졌다.CCTV에는 완전히 만취한 상태로 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이 찍혀있었고 누군가가 일부러 사고를 냈다기에는 전혀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온시환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밖에서 수소문하며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고선 자리를 떴다.때마침 진세운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시환아, 나 내일 점심에 휴가인데 술 마시러 올래?”진세운을 향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심지어 두 사람이 예전에 즐겨 먹던 간식을 사갈까 생각도 하고 있었다....침대에서 일어난 반승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는 어젯밤 설의종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혹시 다른 사람과 손잡은 적이 있으신가요? 사모님과 딸을 찾으려고 수년간 애를 썼다면 분명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셨을 텐데...”“진 의사를 찾은 적이 있어.”최근에 BK 직원을 미행하고 있었던 그는 힘든지 잔뜩 쉰 목소리로 답했다.“진 의사는 의술이 아주 훌륭하잖아, 플로리아 명문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고. 한동안 내 주치의를 담당한 적이 있어서 제원에 가게 된다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부탁했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네. 강력한 배후가 있는 게 틀림없어.”반승제는 손끝으로 창틀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러고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고 마침 장미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승제야, 건강 좀 신경 써. 며칠간 아예 쉬지도 못했잖아.”반승제는 말없이 창가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설씨 가문, 지하 격투장, 반씨 가문, 서씨 가문의 세력이 합쳐졌는데 그 막내딸을 찾지 못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아?”“이상하긴 하네. 의심되는 게 있어?”“누군가 일부러 내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이전에는 연승혁의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원아정 한 명뿐이었다. 원아정과는 단순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던 거라서 그녀와의 경험은 그저 상쾌함만 느껴졌고 내면의 만족감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지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연승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피부를 만지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기대어 있는 공지민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연승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공지민이 다 씻은 후 옆에 있던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침대에 누운 공지민은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연승혁은 욕구를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무해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고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이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쓰다듬을 때 공지민은 가끔 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승혁은 더욱 불타올랐지만 그녀가 현재 아픈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연승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고 공지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후 그한테 물었다.“오빠, 우리 정말 약혼한 사이에요?”그녀의 질문에 연승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공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요.”연승혁이 그녀의 목을 힘껏 깨물자 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연승혁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순수해 보여? 오늘 밤, 네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줄게.”공지민의 볼이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연승혁은 그냥 말해본 거였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그가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연승혁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고 자신이 지금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흔적을 하나하나 남길 적마다 그의 이성은 사라졌고 오늘 밤만은 그녀
공지민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은 온시환이 차를 세워둔 위치였다.오후부터 그녀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온시환이라는 걸 알았다. 온시환은 열 몇 시간 동안 은밀한 곳에 숨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지민은 연승혁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연승혁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차로 돌아간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덮어줬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공지민을 안고 안방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악몽을 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가지 마요.”“날 괴롭히지 마요.”그런 공지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중간에 공지민이 눈을 떴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도우미가 몸보신하는 죽을 들고 오면서 물었다.“도련님, 제가 지민 씨 먹여드릴까요?”연승혁은 손을 들어 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제가 할게요.”도우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연승혁은 공지민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지민아, 얼른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너 지금 열도 나고 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공지민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오빠 돌아왔네요.”연승혁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한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공지민은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근데 또다시 나갈 건가요?”연승혁은 늦어도 날이 밝은 후 일 보러 다시 나가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민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고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그렇다고 이상우를 불러 공지민의 기억을 되돌리고 온시환 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만 해도 연승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한테 죽을 먹여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염정아는
염정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지민은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그다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회가 끝나갈 무렵 염정아는 갑자기 공지민한테 다가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지민 언니,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공지민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눈이 따가워졌다.염정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경찰을 따라 다시 들어갔다.홀로 남은 공지민은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는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서 문 앞까지 나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복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마침 연승혁의 전화가 걸려 와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공지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연승혁은 드디어 도망간 사람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어 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공지민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거였다.“나 지금 경찰서에요. 내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오빠, 나 걔랑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고등학교 때 우린 둘 다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근데 우리를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연승혁은 그녀들을 괴롭힌 사람이 이미 죽은 원아정이란 걸 알고 있었다.그가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공지민이 울기 시작했다.“오빠, 보고 싶어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 연승혁의 심장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원래는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러 가야 했지만 그녀가 걱정되어 조종사한테 목적지를 바꾸라고 말했다.“우린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추적하라고 해.”조종사는 조금 놀랐다. 보스가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고 이제 겨우 단서를 얻었는데 제국으로 돌아간다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