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의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시신은 임시 영안실로 옮겨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온몸이 불에 타 사람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정도였고 스스로 음주 운전을 한 것이라고 밝혀졌다.CCTV에는 완전히 만취한 상태로 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이 찍혀있었고 누군가가 일부러 사고를 냈다기에는 전혀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온시환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밖에서 수소문하며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고선 자리를 떴다.때마침 진세운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시환아, 나 내일 점심에 휴가인데 술 마시러 올래?”진세운을 향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심지어 두 사람이 예전에 즐겨 먹던 간식을 사갈까 생각도 하고 있었다....침대에서 일어난 반승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는 어젯밤 설의종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혹시 다른 사람과 손잡은 적이 있으신가요? 사모님과 딸을 찾으려고 수년간 애를 썼다면 분명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셨을 텐데...”“진 의사를 찾은 적이 있어.”최근에 BK 직원을 미행하고 있었던 그는 힘든지 잔뜩 쉰 목소리로 답했다.“진 의사는 의술이 아주 훌륭하잖아, 플로리아 명문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고. 한동안 내 주치의를 담당한 적이 있어서 제원에 가게 된다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부탁했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네. 강력한 배후가 있는 게 틀림없어.”반승제는 손끝으로 창틀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러고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고 마침 장미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승제야, 건강 좀 신경 써. 며칠간 아예 쉬지도 못했잖아.”반승제는 말없이 창가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설씨 가문, 지하 격투장, 반씨 가문, 서씨 가문의 세력이 합쳐졌는데 그 막내딸을 찾지 못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아?”“이상하긴 하네. 의심되는 게 있어?”“누군가 일부러 내
미스터 K는 아무런 감정 변화 없이 그녀를 밀어냈다.“열나?”“네.”“아래층까지 부축해 줄게. 사람 시켜서 약 준비할 테니까 소파에서 쉬고 있어.”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의 부축을 받았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그에게 기댔다.그녀는 남자의 다른 특징들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미스터 K는 항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가져다주었고 그 느낌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하여 그녀는 자신이 지금 그에게 기대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미스터 K는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떨리는 손으로 성혜인을 살짝 밀어냈다. 그렇게 아래층까지 부축한 후 곧바로 003에게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성혜인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수면제도 주면 안 될까요? 요즘 불면증이 심해서 전혀 잠을 못 자고 있어요. 페노바르비탈 성분이 있으면 알러지가 심해져서 질식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종류로 부탁해요.”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은 허약하기 그지없었고 미스터 K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그는 성혜인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열이 심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곧장 옆에 있던 003에게 말을 건넸다.“수면제, 두 알도.”003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나갔다.하지만 002가 그 뒤에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방금 성혜인이 페노바르비탈에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걸 들었다. 그 말인즉 그 성분이 들어간 수면제를 건네주면 질식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002의 눈에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대가 없이 다리를 잃은 순 없다며 반드시 복수를 할 거라고 다짐했다.003은 약을 가지고 돌아오던 중 002에게 떠밀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분노에 눈이 먼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선 마지못해 설득했다.“저 때문에 다리를 잃어서 화나는 건 알지만 수령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어요.”넘어지는 바람에 약들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002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몸을 굽히더니 바닥에 쏟아
이 상황에 지속된다면 미스터 K가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성혜인은 그의 옷을 입고 가면을 가져와 얼굴에 썼다.그녀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일부러 높이가 있는 신발을 신었다.비록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이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분장을 해야만 한다.그녀는 재빨리 옷차림을 정리하고선 003이 다시 노크하려던 찰나에 문을 열었다.003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가면을 쓴 사람을 보고선 겁에 질린 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설의종 씨가 플로리아에 돌아갔고 지하 격투장까지 방문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반승제 씨와 손을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실 계획입니까?”성혜인은 문을 닫고선 말없이 003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003은 이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워낙 싸늘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설의종 씨가 이번에 저희 쪽이랑 싸우면서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성혜인은 아무 대답 없이 줄곧 앞으로 나아갔다.“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지금 설씨 가문에 다녀오실 생각인 거죠?”003은 성혜인의 계획을 적중했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문을 열고 밖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003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그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어찔할 방법이 없었기에 여느 때와 같이 차에 올라타 운전했다.성혜인은 겉으로 냉정한 척 연기했지만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고 어느새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성혜인은 미스터 K가 너무 빨리 깨어날까 봐 걱정되었고, 누군가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차리진 않을 까 전전긍긍했다. 한편으로는 경호원이 길을 터주지 않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걱정과 달리 003이 앞에서 운전한 덕분에 그 누구도 다가와서 묻지 않았다.어느새 차는 산 아래에 이르렀고 철문을 지날 때쯤에는 온몸의 피가 들끓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미스터 K인 척하는 이 계획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는데 오늘은 운 좋게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차는 산을 에워싸는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성혜인에게 속았다는 걸 눈치챈 듯 003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계획인지 훤히 알고 있는 게 미심쩍었는데 알고 보니 성혜인의 시력은 이미 회복된 지 오래였다.어차피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003은 무의식적으로 경계 태세를 늦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맞아요. 시력은 진작에 회복했으니까 그쪽이 절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죠? 그래도 고마워요. 그쪽이 내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니까 002도 걸려들었거든요. 두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액셀을 밟고 곧장 이곳을 떠났다.003은 002에 비해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성혜인의 모습을 마주할 때는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기 일쑤였다.심지어 길가에 내팽개쳐있을 땐 분노와 수치심마저 밀려왔다. 남에게 조롱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003은 자신이 무시당하던 사람에게 된통 크게 당했다.002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눈이 먼 성혜인을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002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경쟁자의 다리를 망쳤으니 수장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거나 다름없었고 이제 방법을 생각해 성혜인만 제거한다면 수장의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마침 오늘 밤이 그 절호의 기회였다. 002가 종이봉투에 수면제 몇 알을 더 넣은 걸 알아차렸을 땐 어쩌면 이건 성혜인이 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연히 성혜인도 뭔가를 얻어야만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스터 K의 방문을 열기 전까지는.문을 열자 눈에 띄게 마른 사람이 나타났고 그 순간 성혜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생각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비록 완벽한 계획이었지만 003의 협조가 없다면 성혜인은 절대 이 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때마침 003도 자신만의 목적이 있었기에 일부러 설의종을 들먹이며 플로리아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밑판을 깔았다. 그래야만 성혜인이 순조롭게 차에 탈 수 있으니까.하
여기는 플로리아의 산속이다. 즉 언제든지 맹수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혹은 악의적인 의도를 품은 남자를 마주치는 순간 더 깊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면 잡혀가는 건 시간문제다. 미스터 K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에 넘어가면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는 거나 다름없다.성혜인은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어두운 산속으로 들어갔다.차는 길가에 버려졌고 그녀는 깔창을 뺀 후 한결 편안한 걸음걸이로 산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그녀는 도로에서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어쩌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사랑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반승제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고 기대감이 밀려와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해가 뜰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리자 어느새 체력이 바닥나고 기진맥진했지만 남은 이성이 그녀의 정신줄을 꽉 붙잡은 채 희망을 북돋아 주며 도시를 향해 달릴 원동력을 제공했다.몇개의 산과 길을 넘었는지 모를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린 그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섰고 그 과정이 무한 반복되면서 온몸이 상처로 뒤덮였다.아무리 이를 악물고 달린다 해도 도시는 그녀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산기슭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췄다.현기증이 났지만, 별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만약 지금의 체력 상태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호수 근처에 위치한 이 오두막은 200평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성혜인은 본인이 지금 미스터 K의 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003이 어젯밤 3시간 동안 운전했고, 또한 해가 뜰 때까지 쉴틈없이 달렸기에 지금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를 좀 먹어야만 했다.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던 문은 자동으로 열렸고 성혜인은 잔뜩 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계세요?”
진세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혜인 씨?”“맞아요! 저예요!”성혜인은 감격에 겨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걸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진 선생님이 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이분은 플로리아 명문가 출신이자 아주 높은 신분을 지닌 분이에요. 제가 설씨 가문의 주치의로 일하면서 운 좋게 이분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플로리아에 올 때마다 진찰을 봐주고 있어요.”“그러니까 이따가 다시 돌아간다는 말씀이네요?”“네.”“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승제 씨를 만나고 싶어서요.”“그럼 30분만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불안하던 마음이 진정된 성혜인은 배고픔이 밀려왔고 더 이상 뭔가를 사고할 여력조차 없었다.그녀는 조용하게 소파에 앉아 진세운이 어르신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방문이 닫히자 인자하던 어르신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흥미진진한 듯 진세운을 바라봤다.맞은 편에 무표정으로 서 있던 진세운은 진찰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따가 제가 데리고 갈게요. 같이 가실래요?”“도대체 계획이 뭐야?”“희망을 주고 그걸 완전히 짓밟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아세요? 그런 걸 겪고 나면 아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거예요. 어쩐지 요즘 따라 말을 너무 잘 듣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다만 그녀가 이렇게 큰 수를 쓸 줄은 몰랐다.똑똑하다.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다.어르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꼬듯이 말했다.“참 불쌍한 애야. 왜 하필 네 심기를 건드려서. 쯧쯧.”진세운은 그 말에 답하지 않 은채 묵묵히 진찰했고 검사를 마친 후 의료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마치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빵 하나를 먹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을 느꼈다.어젯밤 밤새도록 달린 그녀는 동서남
“아마 승제는 지금 바쁠 겁니다. 밀입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매사에 조심해야 하지요. 아마 원씨 가문의 원진이 마중 나갈 거예요.”“성혜인 씨는 원씨 가문에 대해 잘 모르시죠? 원씨 가문은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허락한 범위 내에서 상부를 도와 일을 합니다. 하기에 원씨 가문은 매우 은밀하다고 할 수 있어요. 현 가주인 원진은 병치레가 잦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비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승제가 미쳐 날뛰는 동안 백씨 가문과 원씨 가문의 화물을 가로채 원진과 백현문 두 사람의 미움을 크게 샀어요.”“그럼 원진이 승제 씨에게 복수할 거란 말인가요?”“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가 인사를 드렸으니 아마 빈정거리거나 말로 심기를 건드릴 순 있겠지만 약속한 일은 반드시 해줄 거예요.”성혜인이 안도하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제 친구 승제에 관한 일인데 당연히 도와줘야죠.”그는 운전에 집중하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뒷좌석에는 백발에 벽안인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지만 눈을 감고 뒷좌석에 기대어 잠든 척하고 있었다.그는 진세운이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알지 못했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차가 두 시간 넘게 달렸을 무렵 그제야 도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진세운이 성혜인에게 물었다.“플로리아에 친구는 있어요? 없으면 제 별장에서 승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됩니다.”“아, 감사합니다.”미스터 K에게 또 잡혀갈까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안전하게 진세운을 따르기로 했다.현재 성혜인은 제운시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그저 반승제가 플로리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진세운은 시내의 한 별장 앞을 향해 차를 몰았다.“안에 도우미도, 경호원도 있으니까 사는 데 불편한 점은 없을 거예요. 제 핸드폰을 드릴 테니 언제든 승제와 연락해요.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저에게 알려주면 됩니다.”진세운에 대한 인상이 한층 더 좋아졌다. 비록 전에 여러
성혜인이 별장 밖에 서서 서성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별장 내부는 풍경이 좋았다. 이곳은 거창하고 큰 별장이 아니라 노인들이 살만한 아늑한 스타일의 별장이었다.천천히 숨을 내쉰 성혜인이 열쇠로 별장 문을 여니 안에는 도우미 몇 명이 청소하고 있었다.성혜인을 본 그들은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이어서 청소했다.온종일 이동한 성혜인은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그녀가 도우미에게 물었다.“혹시 옷 몇 벌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음식도 준비해 주세요. 배고파서요.”“아가씨, 사장님께서 이미 분부하셨습니다. 위층으로 모실게요.”성혜인은 진세운이 세심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위층에 도착한 그녀는 편안하게 샤워했고 몸에 채찍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반승제가 본다면 무조건 가슴 아파할 것이다.그러나 특별한 약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이상 채찍 자국은 예전처럼 빨리 낫지 않았다.손끝으로 채찍이 남긴 자국들을 만지며 성혜인은 문득 자신과 미스터 K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다른 세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신기한 약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통증은 증폭시키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고작 며칠이면 되었다.성혜인은 더 이상 그곳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승제와 빨리 만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반승제와 만나면 그녀는 그곳으로 가는 노선을 알려주고 함께 미스터 K가 살고 있는 그 별장으로 갈 것이다.BKS에 있어서 그 별장은 분명 중요할 것이고 002나 003과 같은 핵심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반승제와 통화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 중요한 소식들을 알려줄 것이다.성혜인은 아직도 그 길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후에도 피곤함은 여전했고 동시에 배도 고파져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고 나서야 성혜인은 소파에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임지연을 다시 찾기만 하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