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플로리아의 산속이다. 즉 언제든지 맹수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혹은 악의적인 의도를 품은 남자를 마주치는 순간 더 깊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면 잡혀가는 건 시간문제다. 미스터 K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에 넘어가면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는 거나 다름없다.성혜인은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어두운 산속으로 들어갔다.차는 길가에 버려졌고 그녀는 깔창을 뺀 후 한결 편안한 걸음걸이로 산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그녀는 도로에서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어쩌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사랑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반승제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고 기대감이 밀려와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해가 뜰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리자 어느새 체력이 바닥나고 기진맥진했지만 남은 이성이 그녀의 정신줄을 꽉 붙잡은 채 희망을 북돋아 주며 도시를 향해 달릴 원동력을 제공했다.몇개의 산과 길을 넘었는지 모를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린 그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섰고 그 과정이 무한 반복되면서 온몸이 상처로 뒤덮였다.아무리 이를 악물고 달린다 해도 도시는 그녀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산기슭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췄다.현기증이 났지만, 별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만약 지금의 체력 상태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호수 근처에 위치한 이 오두막은 200평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성혜인은 본인이 지금 미스터 K의 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003이 어젯밤 3시간 동안 운전했고, 또한 해가 뜰 때까지 쉴틈없이 달렸기에 지금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를 좀 먹어야만 했다.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던 문은 자동으로 열렸고 성혜인은 잔뜩 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계세요?”
진세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혜인 씨?”“맞아요! 저예요!”성혜인은 감격에 겨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걸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진 선생님이 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이분은 플로리아 명문가 출신이자 아주 높은 신분을 지닌 분이에요. 제가 설씨 가문의 주치의로 일하면서 운 좋게 이분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플로리아에 올 때마다 진찰을 봐주고 있어요.”“그러니까 이따가 다시 돌아간다는 말씀이네요?”“네.”“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승제 씨를 만나고 싶어서요.”“그럼 30분만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불안하던 마음이 진정된 성혜인은 배고픔이 밀려왔고 더 이상 뭔가를 사고할 여력조차 없었다.그녀는 조용하게 소파에 앉아 진세운이 어르신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방문이 닫히자 인자하던 어르신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흥미진진한 듯 진세운을 바라봤다.맞은 편에 무표정으로 서 있던 진세운은 진찰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따가 제가 데리고 갈게요. 같이 가실래요?”“도대체 계획이 뭐야?”“희망을 주고 그걸 완전히 짓밟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아세요? 그런 걸 겪고 나면 아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거예요. 어쩐지 요즘 따라 말을 너무 잘 듣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다만 그녀가 이렇게 큰 수를 쓸 줄은 몰랐다.똑똑하다.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다.어르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꼬듯이 말했다.“참 불쌍한 애야. 왜 하필 네 심기를 건드려서. 쯧쯧.”진세운은 그 말에 답하지 않 은채 묵묵히 진찰했고 검사를 마친 후 의료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마치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빵 하나를 먹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을 느꼈다.어젯밤 밤새도록 달린 그녀는 동서남
“아마 승제는 지금 바쁠 겁니다. 밀입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매사에 조심해야 하지요. 아마 원씨 가문의 원진이 마중 나갈 거예요.”“성혜인 씨는 원씨 가문에 대해 잘 모르시죠? 원씨 가문은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허락한 범위 내에서 상부를 도와 일을 합니다. 하기에 원씨 가문은 매우 은밀하다고 할 수 있어요. 현 가주인 원진은 병치레가 잦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비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승제가 미쳐 날뛰는 동안 백씨 가문과 원씨 가문의 화물을 가로채 원진과 백현문 두 사람의 미움을 크게 샀어요.”“그럼 원진이 승제 씨에게 복수할 거란 말인가요?”“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가 인사를 드렸으니 아마 빈정거리거나 말로 심기를 건드릴 순 있겠지만 약속한 일은 반드시 해줄 거예요.”성혜인이 안도하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제 친구 승제에 관한 일인데 당연히 도와줘야죠.”그는 운전에 집중하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뒷좌석에는 백발에 벽안인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지만 눈을 감고 뒷좌석에 기대어 잠든 척하고 있었다.그는 진세운이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알지 못했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차가 두 시간 넘게 달렸을 무렵 그제야 도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진세운이 성혜인에게 물었다.“플로리아에 친구는 있어요? 없으면 제 별장에서 승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됩니다.”“아, 감사합니다.”미스터 K에게 또 잡혀갈까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안전하게 진세운을 따르기로 했다.현재 성혜인은 제운시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그저 반승제가 플로리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진세운은 시내의 한 별장 앞을 향해 차를 몰았다.“안에 도우미도, 경호원도 있으니까 사는 데 불편한 점은 없을 거예요. 제 핸드폰을 드릴 테니 언제든 승제와 연락해요.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저에게 알려주면 됩니다.”진세운에 대한 인상이 한층 더 좋아졌다. 비록 전에 여러
성혜인이 별장 밖에 서서 서성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별장 내부는 풍경이 좋았다. 이곳은 거창하고 큰 별장이 아니라 노인들이 살만한 아늑한 스타일의 별장이었다.천천히 숨을 내쉰 성혜인이 열쇠로 별장 문을 여니 안에는 도우미 몇 명이 청소하고 있었다.성혜인을 본 그들은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이어서 청소했다.온종일 이동한 성혜인은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그녀가 도우미에게 물었다.“혹시 옷 몇 벌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음식도 준비해 주세요. 배고파서요.”“아가씨, 사장님께서 이미 분부하셨습니다. 위층으로 모실게요.”성혜인은 진세운이 세심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위층에 도착한 그녀는 편안하게 샤워했고 몸에 채찍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반승제가 본다면 무조건 가슴 아파할 것이다.그러나 특별한 약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이상 채찍 자국은 예전처럼 빨리 낫지 않았다.손끝으로 채찍이 남긴 자국들을 만지며 성혜인은 문득 자신과 미스터 K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다른 세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신기한 약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통증은 증폭시키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고작 며칠이면 되었다.성혜인은 더 이상 그곳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승제와 빨리 만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반승제와 만나면 그녀는 그곳으로 가는 노선을 알려주고 함께 미스터 K가 살고 있는 그 별장으로 갈 것이다.BKS에 있어서 그 별장은 분명 중요할 것이고 002나 003과 같은 핵심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반승제와 통화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 중요한 소식들을 알려줄 것이다.성혜인은 아직도 그 길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후에도 피곤함은 여전했고 동시에 배도 고파져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고 나서야 성혜인은 소파에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임지연을 다시 찾기만 하
반승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반승제에게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목숨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란걸.이것이 바로 반승제가 노린 부분이었다.그는 원진을 향해 환히 웃으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하며 입을 열었다.“원진 씨, 배가 참 편하고 좋네요. 행복하겠어요.”그의 빈정거림에 원진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군자라도 이러한 반승제를 앞에 놓고 보면 화낼 만했다. 원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춤에 찬 칼을 향해 손을 더듬었다.그러나 바로 이때, 곁에 서 있던 경호원이 겁에 질린 채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사장님, 아가씨께서 방금 전화가 와서 언제 도착하시는지 묻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고 싶답니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의 한없이 차갑던 표정이 삽시간에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환한 미소만이 자리 잡았다.“전해. 3일이면 도착한다고.”배를 두 번, 비행기를 한 번. 긴 여정이니 집에 도착하는 데에 3일은 족히 걸렸다.“네. 아가씨께서 몸조심하랍니다.”이에 원진이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의자에 편히 기대어 있던 반승제가 그의 놀라운 모습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보았다. 잘못 본 것 같았다.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이 인자한 웃음이라니.제원에서 원씨 가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원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피하고 싶어 했다. 백현문이 백씨 가문의 후대를 모두 죽이려 했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원진은 그보다도 더한 인물이었다. 원진은 자신의 친부모를 모두 죽이고, 가족의 목숨까지 모두 앗아가서야 가문의 일인자가 된 사람이다.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씨 가문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원진의 계략으로 인한 포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침 그 자리에 원진의 부모가 있었고, 마침 집안의 중요한 직위를 가
서주혁이 있는 별장은 제원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배가 이곳 기슭에 세운 것은 서주혁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이어 배에서 내려 마중 나온 차에 올라탔다.별장에 도착한 이후 그는 혼자 걸어 들어갔다.방 키를 건네주는 원진의 표정으로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키를 빼앗아 갔다.원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늘 여러 번이나 손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반승제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별장의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반승제는 위층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러나 혼수상태인 서주혁이 있어야 할 방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주혁 씨... 아, 저 정말 이제 힘들어요.”“조금만 있으면 돼요.”장하리의 이마는 땀범벅이었다. 서주혁이 퍼붓는 키스에 숨이 막혔고 그녀는 익사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서주혁은 그녀가 제원에서 가져온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비록 그가 평소에 입던 정장보다는 재질이 좋지 않았지만 그가 입으니 용모가 더 돋보이는 듯했다.장하리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므로 전부 그의 손에 의지하고 있었다.방의 문이 열려있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별장 전체에 그들을 제외하면 외부인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빨리해 줘요. 정말 못 견디겠으니까.”“그럼 이혼 얘기 또 꺼낼 거예요?”장하리는 침묵했다. 지금 서주혁은 사고에 대한 여파로 기억을 잃었고 장하리와 이혼 얘기가 오가는 사이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장하리가 이 관계를 부인하면 그는 장하리가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깔고 타이르듯 말했다.“안 해요. 안 할게요.”이 무렵, 반승제는 문밖 복도에서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금방 서주혁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안도했었다. 그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부상이 거의 나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치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주혁에게 무엇이라도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고생스럽게 달려온 건데, 서주혁은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마 반승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주혁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대표님, 주혁 씨가 많이 다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어요. 그래서...”장하리는 목까지 빨개져 마치 삶아진 새우 같았다.서주혁이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저 사람이 해칠까 봐 그래요?”장하리는 온몸에 열이 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꼭 쥐었다.반승제는 심란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주혁이 먼저 올라가라고 해요. 따로 할 말이 있어요.”장하리가 얼른 서주혁의 손을 잡았다.“주혁 씨, 대표님은 주혁 씨의 가장 친한 친구시고 주혁 씨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먼저 올라가요.”서주혁은 내키지 않았다.이 소위 말하는 친구라는 녀석의 생김새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꼈다.그러나 이 며칠간 장하리를 밤마다 괴롭혀 왔으니 바람피울 생각은 절대 못 할 것이다.서주혁은 일어나 그녀의 입에 입맞춤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장하리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더 숙였고 손바닥은 땀투성이였다.“대표님, 할 말이 무엇입니까?”장하리는 반승제가 자신과 서주혁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주혁이 올라가는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관계는 하되 마음은 주지 마요. 주혁이는 절대 그쪽 사랑할 수 없으니까.”그의 말에 장하리의 몸이 굳어졌다. 얼굴의 핏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이 며칠간 서주혁에게 안겨서 관계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에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서주혁이 자신에게 이리 대하는 것은 모두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을.그러나 점점 현혹되었다.그녀는 자신을 미워했으므로 마음을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자기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고, 지금
모두 사실이었다. 이 오해의 심각성을 확실히 상기시켜 주어야만 나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장하리는 마치 혈도가 찍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반승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서주혁과의 옛날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무표정으로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었다.생리적인 면에서의 도움을 제외하고 서주혁이 장하리와 함께 한 이유는 단지 그녀가 속궁합이 잘 맞는 상대였기 때문이다.이는 서주혁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 말이었다.서주혁은 다른 여자와는 관계를 맺은 적도, 맺으려고 시도를 한 적도 없었다. 여자에 대한 혐오가 뼛속 깊이 새겨졌으니까.그러나 장하리가 자발적으로 침대에 오름으로써 그의 전례를 깨뜨렸다. 그는 관계를 맺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이미 해버린 김에 성욕 해결용으로 여러 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것이 서주혁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굳이 장하리에게 착한 척, 다정한 척할 필요가 있겠는가.소파에 몸이 뻣뻣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을 무렵, 서주혁이 내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요?”흐린 안색에 서주혁이 걱정했다.장하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주혁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울긋불긋한 예쁜 자국들이 드러났다.서주혁이 오동통하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보고 참지 못하고 또 뽀뽀하려 했다. 그러나 장하리가 급히 막는 바람에 손바닥과 입술이 닿았다.“주혁 씨, 저 이제 피곤해요.”하지만 그의 키스는 이미 파고들어 와 부드럽게,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처럼 한순간에 장하리를 함락시켰다.그가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면 장하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키스를 퍼붓다 짭짤한 맛이 느껴져 그가 몸을 일으켰다.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엾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하리 씨, 왜 그래요.”한참을 망설이던 장하리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에 서주혁이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