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황에 지속된다면 미스터 K가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성혜인은 그의 옷을 입고 가면을 가져와 얼굴에 썼다.그녀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일부러 높이가 있는 신발을 신었다.비록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이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분장을 해야만 한다.그녀는 재빨리 옷차림을 정리하고선 003이 다시 노크하려던 찰나에 문을 열었다.003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가면을 쓴 사람을 보고선 겁에 질린 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설의종 씨가 플로리아에 돌아갔고 지하 격투장까지 방문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반승제 씨와 손을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실 계획입니까?”성혜인은 문을 닫고선 말없이 003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003은 이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워낙 싸늘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설의종 씨가 이번에 저희 쪽이랑 싸우면서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성혜인은 아무 대답 없이 줄곧 앞으로 나아갔다.“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지금 설씨 가문에 다녀오실 생각인 거죠?”003은 성혜인의 계획을 적중했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문을 열고 밖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003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그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어찔할 방법이 없었기에 여느 때와 같이 차에 올라타 운전했다.성혜인은 겉으로 냉정한 척 연기했지만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고 어느새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성혜인은 미스터 K가 너무 빨리 깨어날까 봐 걱정되었고, 누군가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차리진 않을 까 전전긍긍했다. 한편으로는 경호원이 길을 터주지 않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걱정과 달리 003이 앞에서 운전한 덕분에 그 누구도 다가와서 묻지 않았다.어느새 차는 산 아래에 이르렀고 철문을 지날 때쯤에는 온몸의 피가 들끓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미스터 K인 척하는 이 계획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는데 오늘은 운 좋게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차는 산을 에워싸는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성혜인에게 속았다는 걸 눈치챈 듯 003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계획인지 훤히 알고 있는 게 미심쩍었는데 알고 보니 성혜인의 시력은 이미 회복된 지 오래였다.어차피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003은 무의식적으로 경계 태세를 늦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맞아요. 시력은 진작에 회복했으니까 그쪽이 절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죠? 그래도 고마워요. 그쪽이 내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니까 002도 걸려들었거든요. 두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액셀을 밟고 곧장 이곳을 떠났다.003은 002에 비해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성혜인의 모습을 마주할 때는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기 일쑤였다.심지어 길가에 내팽개쳐있을 땐 분노와 수치심마저 밀려왔다. 남에게 조롱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003은 자신이 무시당하던 사람에게 된통 크게 당했다.002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눈이 먼 성혜인을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002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경쟁자의 다리를 망쳤으니 수장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거나 다름없었고 이제 방법을 생각해 성혜인만 제거한다면 수장의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마침 오늘 밤이 그 절호의 기회였다. 002가 종이봉투에 수면제 몇 알을 더 넣은 걸 알아차렸을 땐 어쩌면 이건 성혜인이 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연히 성혜인도 뭔가를 얻어야만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스터 K의 방문을 열기 전까지는.문을 열자 눈에 띄게 마른 사람이 나타났고 그 순간 성혜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생각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비록 완벽한 계획이었지만 003의 협조가 없다면 성혜인은 절대 이 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때마침 003도 자신만의 목적이 있었기에 일부러 설의종을 들먹이며 플로리아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밑판을 깔았다. 그래야만 성혜인이 순조롭게 차에 탈 수 있으니까.하
여기는 플로리아의 산속이다. 즉 언제든지 맹수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혹은 악의적인 의도를 품은 남자를 마주치는 순간 더 깊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면 잡혀가는 건 시간문제다. 미스터 K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에 넘어가면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는 거나 다름없다.성혜인은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어두운 산속으로 들어갔다.차는 길가에 버려졌고 그녀는 깔창을 뺀 후 한결 편안한 걸음걸이로 산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그녀는 도로에서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어쩌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사랑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반승제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고 기대감이 밀려와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해가 뜰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리자 어느새 체력이 바닥나고 기진맥진했지만 남은 이성이 그녀의 정신줄을 꽉 붙잡은 채 희망을 북돋아 주며 도시를 향해 달릴 원동력을 제공했다.몇개의 산과 길을 넘었는지 모를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린 그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섰고 그 과정이 무한 반복되면서 온몸이 상처로 뒤덮였다.아무리 이를 악물고 달린다 해도 도시는 그녀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산기슭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췄다.현기증이 났지만, 별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만약 지금의 체력 상태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호수 근처에 위치한 이 오두막은 200평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성혜인은 본인이 지금 미스터 K의 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003이 어젯밤 3시간 동안 운전했고, 또한 해가 뜰 때까지 쉴틈없이 달렸기에 지금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를 좀 먹어야만 했다.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던 문은 자동으로 열렸고 성혜인은 잔뜩 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계세요?”
진세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혜인 씨?”“맞아요! 저예요!”성혜인은 감격에 겨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걸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진 선생님이 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이분은 플로리아 명문가 출신이자 아주 높은 신분을 지닌 분이에요. 제가 설씨 가문의 주치의로 일하면서 운 좋게 이분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플로리아에 올 때마다 진찰을 봐주고 있어요.”“그러니까 이따가 다시 돌아간다는 말씀이네요?”“네.”“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승제 씨를 만나고 싶어서요.”“그럼 30분만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불안하던 마음이 진정된 성혜인은 배고픔이 밀려왔고 더 이상 뭔가를 사고할 여력조차 없었다.그녀는 조용하게 소파에 앉아 진세운이 어르신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방문이 닫히자 인자하던 어르신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흥미진진한 듯 진세운을 바라봤다.맞은 편에 무표정으로 서 있던 진세운은 진찰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따가 제가 데리고 갈게요. 같이 가실래요?”“도대체 계획이 뭐야?”“희망을 주고 그걸 완전히 짓밟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아세요? 그런 걸 겪고 나면 아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거예요. 어쩐지 요즘 따라 말을 너무 잘 듣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다만 그녀가 이렇게 큰 수를 쓸 줄은 몰랐다.똑똑하다.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다.어르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꼬듯이 말했다.“참 불쌍한 애야. 왜 하필 네 심기를 건드려서. 쯧쯧.”진세운은 그 말에 답하지 않 은채 묵묵히 진찰했고 검사를 마친 후 의료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마치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빵 하나를 먹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을 느꼈다.어젯밤 밤새도록 달린 그녀는 동서남
“아마 승제는 지금 바쁠 겁니다. 밀입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매사에 조심해야 하지요. 아마 원씨 가문의 원진이 마중 나갈 거예요.”“성혜인 씨는 원씨 가문에 대해 잘 모르시죠? 원씨 가문은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허락한 범위 내에서 상부를 도와 일을 합니다. 하기에 원씨 가문은 매우 은밀하다고 할 수 있어요. 현 가주인 원진은 병치레가 잦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비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승제가 미쳐 날뛰는 동안 백씨 가문과 원씨 가문의 화물을 가로채 원진과 백현문 두 사람의 미움을 크게 샀어요.”“그럼 원진이 승제 씨에게 복수할 거란 말인가요?”“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가 인사를 드렸으니 아마 빈정거리거나 말로 심기를 건드릴 순 있겠지만 약속한 일은 반드시 해줄 거예요.”성혜인이 안도하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제 친구 승제에 관한 일인데 당연히 도와줘야죠.”그는 운전에 집중하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뒷좌석에는 백발에 벽안인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지만 눈을 감고 뒷좌석에 기대어 잠든 척하고 있었다.그는 진세운이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알지 못했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차가 두 시간 넘게 달렸을 무렵 그제야 도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진세운이 성혜인에게 물었다.“플로리아에 친구는 있어요? 없으면 제 별장에서 승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됩니다.”“아, 감사합니다.”미스터 K에게 또 잡혀갈까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안전하게 진세운을 따르기로 했다.현재 성혜인은 제운시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그저 반승제가 플로리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진세운은 시내의 한 별장 앞을 향해 차를 몰았다.“안에 도우미도, 경호원도 있으니까 사는 데 불편한 점은 없을 거예요. 제 핸드폰을 드릴 테니 언제든 승제와 연락해요.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저에게 알려주면 됩니다.”진세운에 대한 인상이 한층 더 좋아졌다. 비록 전에 여러
성혜인이 별장 밖에 서서 서성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별장 내부는 풍경이 좋았다. 이곳은 거창하고 큰 별장이 아니라 노인들이 살만한 아늑한 스타일의 별장이었다.천천히 숨을 내쉰 성혜인이 열쇠로 별장 문을 여니 안에는 도우미 몇 명이 청소하고 있었다.성혜인을 본 그들은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이어서 청소했다.온종일 이동한 성혜인은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그녀가 도우미에게 물었다.“혹시 옷 몇 벌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음식도 준비해 주세요. 배고파서요.”“아가씨, 사장님께서 이미 분부하셨습니다. 위층으로 모실게요.”성혜인은 진세운이 세심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네, 고마워요.”위층에 도착한 그녀는 편안하게 샤워했고 몸에 채찍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반승제가 본다면 무조건 가슴 아파할 것이다.그러나 특별한 약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 이상 채찍 자국은 예전처럼 빨리 낫지 않았다.손끝으로 채찍이 남긴 자국들을 만지며 성혜인은 문득 자신과 미스터 K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다른 세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신기한 약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통증은 증폭시키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고작 며칠이면 되었다.성혜인은 더 이상 그곳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승제와 빨리 만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반승제와 만나면 그녀는 그곳으로 가는 노선을 알려주고 함께 미스터 K가 살고 있는 그 별장으로 갈 것이다.BKS에 있어서 그 별장은 분명 중요할 것이고 002나 003과 같은 핵심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반승제와 통화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 중요한 소식들을 알려줄 것이다.성혜인은 아직도 그 길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후에도 피곤함은 여전했고 동시에 배도 고파져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고 나서야 성혜인은 소파에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임지연을 다시 찾기만 하
반승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반승제에게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목숨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란걸.이것이 바로 반승제가 노린 부분이었다.그는 원진을 향해 환히 웃으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하며 입을 열었다.“원진 씨, 배가 참 편하고 좋네요. 행복하겠어요.”그의 빈정거림에 원진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군자라도 이러한 반승제를 앞에 놓고 보면 화낼 만했다. 원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춤에 찬 칼을 향해 손을 더듬었다.그러나 바로 이때, 곁에 서 있던 경호원이 겁에 질린 채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사장님, 아가씨께서 방금 전화가 와서 언제 도착하시는지 묻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고 싶답니다.”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의 한없이 차갑던 표정이 삽시간에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환한 미소만이 자리 잡았다.“전해. 3일이면 도착한다고.”배를 두 번, 비행기를 한 번. 긴 여정이니 집에 도착하는 데에 3일은 족히 걸렸다.“네. 아가씨께서 몸조심하랍니다.”이에 원진이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의자에 편히 기대어 있던 반승제가 그의 놀라운 모습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보았다. 잘못 본 것 같았다.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이 인자한 웃음이라니.제원에서 원씨 가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원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피하고 싶어 했다. 백현문이 백씨 가문의 후대를 모두 죽이려 했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원진은 그보다도 더한 인물이었다. 원진은 자신의 친부모를 모두 죽이고, 가족의 목숨까지 모두 앗아가서야 가문의 일인자가 된 사람이다.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씨 가문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원진의 계략으로 인한 포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침 그 자리에 원진의 부모가 있었고, 마침 집안의 중요한 직위를 가
서주혁이 있는 별장은 제원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배가 이곳 기슭에 세운 것은 서주혁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이어 배에서 내려 마중 나온 차에 올라탔다.별장에 도착한 이후 그는 혼자 걸어 들어갔다.방 키를 건네주는 원진의 표정으로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키를 빼앗아 갔다.원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늘 여러 번이나 손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반승제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별장의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반승제는 위층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러나 혼수상태인 서주혁이 있어야 할 방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주혁 씨... 아, 저 정말 이제 힘들어요.”“조금만 있으면 돼요.”장하리의 이마는 땀범벅이었다. 서주혁이 퍼붓는 키스에 숨이 막혔고 그녀는 익사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서주혁은 그녀가 제원에서 가져온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비록 그가 평소에 입던 정장보다는 재질이 좋지 않았지만 그가 입으니 용모가 더 돋보이는 듯했다.장하리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므로 전부 그의 손에 의지하고 있었다.방의 문이 열려있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별장 전체에 그들을 제외하면 외부인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빨리해 줘요. 정말 못 견디겠으니까.”“그럼 이혼 얘기 또 꺼낼 거예요?”장하리는 침묵했다. 지금 서주혁은 사고에 대한 여파로 기억을 잃었고 장하리와 이혼 얘기가 오가는 사이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장하리가 이 관계를 부인하면 그는 장하리가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깔고 타이르듯 말했다.“안 해요. 안 할게요.”이 무렵, 반승제는 문밖 복도에서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금방 서주혁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안도했었다. 그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부상이 거의 나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