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의 부탁을 받은 탓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고 주변 사람 그 누구도 놓치면 안 된다는 얘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온시환은 무심한 듯 진세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재빨리 오른쪽 귓불을 확인했다.다행히도 없었다.온시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로는 요즘 따라 진세운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세운은 수술할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가끔 담배를 피운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담배를 피우고 있고 그 자세도 매우 능숙했다.진세운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듯 천천히 담배를 피운 뒤 담배꽁초를 근처 휴지통에 버렸다.“시환아, 내가 준 멜라토닌은 먹었어?”“아직. 요즘 대본 쓰고 있어서 깊이 잠들면 안 돼. 영감이 떠오르면 밤새야 하거든. 이제 대본을 다 썼으니까 오늘 밤에는 푹 잘 수 있겠네.”“다행이네. 저녁에 푹 쉬어.”진세운의 부드러움은 반승제와 달랐다. 봄바람 같은 반승제와 달리 진세운은 매우 온화한 스타일이다.며칠간 대본을 쓰느라 피곤함이 극에 달했지만, 여전히 술자리를 잡았다.그는 한가로운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서주혁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상태에 오늘 본 흑백 초상화까지 더해지니 숨 막힐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그는 진세운의 어깨를 툭툭 친고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진세운은 제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술집에서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보낸 온시환은 곧바로 별장으로 돌아왔고 순간 침대 옆에 놓인 멜라토닌에 시선을 사로잡혔다.한 알을 꺼내 먹으려던 찰나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기억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의 반승제는 결혼을 강요받은 상태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룸에 모여 앉아 결혼할 상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가볍기로 소문났던 온시환은 곧장 룸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허풍을 떨었다.“내가 예전에 점쟁이를 만났거든? 내 코끝에 있는 점 보이지? 이게 풍류점이래.
약병을 건넨 뒤 그는 곧바로 당시 농담을 던졌던 재벌 2세를 찾아갔다.먼저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운전해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야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렇게 온시환은 모든 친구에게 전화를 돌린 끝에 그 사람이 지금 스카이웨어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과 10분 전에 자리를 떴다고 한다.온시환은 즉시 운전해 스카이웨어로 향했고 입구에 있는 경호원에게 그가 언제쯤 떠났는지 물어보려고 했다.“아마 10분 정도 지났을 겁니다. 전화 한 통을 받고선 혼자 나갔어요.”온시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로 사람을 시켜 CCTV를 돌려봤다.하지만 영상을 보기도 전에 재벌 2세의 가족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트럭에 치여서 죽었대요. 우리 아들이...”그 말을 들은 온시환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단순 사고일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계획 살인인 걸까?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순간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우연이라기엔 참 의심스럽다.그 시각 병원. 온시환에게서 약병을 건네받은 의사는 마침 성분 분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옆에 있던 동료가 진세운이 지금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세운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죠?”“잊었어요? 원장님이 지난달에 현장 실습을 준비했잖아요. 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의사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약병을 주머니에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진세운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고 현장에 있던 여의사들은 그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왜냐하면 의학을 배우는 사람 중에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두 시간 후에야 수업이 끝났다.진세운이 밖으로 나가자 그 의사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즉시 쫓아 나가 수술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진세운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고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의사 손에 들린 약병을 발견했다.의사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
재벌 2세의 집안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시신은 임시 영안실로 옮겨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온몸이 불에 타 사람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정도였고 스스로 음주 운전을 한 것이라고 밝혀졌다.CCTV에는 완전히 만취한 상태로 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이 찍혀있었고 누군가가 일부러 사고를 냈다기에는 전혀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온시환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밖에서 수소문하며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고선 자리를 떴다.때마침 진세운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시환아, 나 내일 점심에 휴가인데 술 마시러 올래?”진세운을 향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심지어 두 사람이 예전에 즐겨 먹던 간식을 사갈까 생각도 하고 있었다....침대에서 일어난 반승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는 어젯밤 설의종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혹시 다른 사람과 손잡은 적이 있으신가요? 사모님과 딸을 찾으려고 수년간 애를 썼다면 분명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셨을 텐데...”“진 의사를 찾은 적이 있어.”최근에 BK 직원을 미행하고 있었던 그는 힘든지 잔뜩 쉰 목소리로 답했다.“진 의사는 의술이 아주 훌륭하잖아, 플로리아 명문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고. 한동안 내 주치의를 담당한 적이 있어서 제원에 가게 된다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부탁했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네. 강력한 배후가 있는 게 틀림없어.”반승제는 손끝으로 창틀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러고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고 마침 장미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승제야, 건강 좀 신경 써. 며칠간 아예 쉬지도 못했잖아.”반승제는 말없이 창가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설씨 가문, 지하 격투장, 반씨 가문, 서씨 가문의 세력이 합쳐졌는데 그 막내딸을 찾지 못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아?”“이상하긴 하네. 의심되는 게 있어?”“누군가 일부러 내
미스터 K는 아무런 감정 변화 없이 그녀를 밀어냈다.“열나?”“네.”“아래층까지 부축해 줄게. 사람 시켜서 약 준비할 테니까 소파에서 쉬고 있어.”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의 부축을 받았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그에게 기댔다.그녀는 남자의 다른 특징들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미스터 K는 항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가져다주었고 그 느낌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하여 그녀는 자신이 지금 그에게 기대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미스터 K는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떨리는 손으로 성혜인을 살짝 밀어냈다. 그렇게 아래층까지 부축한 후 곧바로 003에게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성혜인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수면제도 주면 안 될까요? 요즘 불면증이 심해서 전혀 잠을 못 자고 있어요. 페노바르비탈 성분이 있으면 알러지가 심해져서 질식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종류로 부탁해요.”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은 허약하기 그지없었고 미스터 K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그는 성혜인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열이 심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곧장 옆에 있던 003에게 말을 건넸다.“수면제, 두 알도.”003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나갔다.하지만 002가 그 뒤에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방금 성혜인이 페노바르비탈에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걸 들었다. 그 말인즉 그 성분이 들어간 수면제를 건네주면 질식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002의 눈에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대가 없이 다리를 잃은 순 없다며 반드시 복수를 할 거라고 다짐했다.003은 약을 가지고 돌아오던 중 002에게 떠밀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분노에 눈이 먼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선 마지못해 설득했다.“저 때문에 다리를 잃어서 화나는 건 알지만 수령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어요.”넘어지는 바람에 약들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002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몸을 굽히더니 바닥에 쏟아
이 상황에 지속된다면 미스터 K가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성혜인은 그의 옷을 입고 가면을 가져와 얼굴에 썼다.그녀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일부러 높이가 있는 신발을 신었다.비록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이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분장을 해야만 한다.그녀는 재빨리 옷차림을 정리하고선 003이 다시 노크하려던 찰나에 문을 열었다.003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가면을 쓴 사람을 보고선 겁에 질린 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설의종 씨가 플로리아에 돌아갔고 지하 격투장까지 방문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반승제 씨와 손을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실 계획입니까?”성혜인은 문을 닫고선 말없이 003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003은 이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워낙 싸늘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설의종 씨가 이번에 저희 쪽이랑 싸우면서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성혜인은 아무 대답 없이 줄곧 앞으로 나아갔다.“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지금 설씨 가문에 다녀오실 생각인 거죠?”003은 성혜인의 계획을 적중했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문을 열고 밖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003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그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어찔할 방법이 없었기에 여느 때와 같이 차에 올라타 운전했다.성혜인은 겉으로 냉정한 척 연기했지만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고 어느새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성혜인은 미스터 K가 너무 빨리 깨어날까 봐 걱정되었고, 누군가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차리진 않을 까 전전긍긍했다. 한편으로는 경호원이 길을 터주지 않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걱정과 달리 003이 앞에서 운전한 덕분에 그 누구도 다가와서 묻지 않았다.어느새 차는 산 아래에 이르렀고 철문을 지날 때쯤에는 온몸의 피가 들끓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미스터 K인 척하는 이 계획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는데 오늘은 운 좋게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차는 산을 에워싸는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성혜인에게 속았다는 걸 눈치챈 듯 003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계획인지 훤히 알고 있는 게 미심쩍었는데 알고 보니 성혜인의 시력은 이미 회복된 지 오래였다.어차피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003은 무의식적으로 경계 태세를 늦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맞아요. 시력은 진작에 회복했으니까 그쪽이 절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죠? 그래도 고마워요. 그쪽이 내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니까 002도 걸려들었거든요. 두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액셀을 밟고 곧장 이곳을 떠났다.003은 002에 비해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성혜인의 모습을 마주할 때는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기 일쑤였다.심지어 길가에 내팽개쳐있을 땐 분노와 수치심마저 밀려왔다. 남에게 조롱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003은 자신이 무시당하던 사람에게 된통 크게 당했다.002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눈이 먼 성혜인을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002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경쟁자의 다리를 망쳤으니 수장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거나 다름없었고 이제 방법을 생각해 성혜인만 제거한다면 수장의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마침 오늘 밤이 그 절호의 기회였다. 002가 종이봉투에 수면제 몇 알을 더 넣은 걸 알아차렸을 땐 어쩌면 이건 성혜인이 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연히 성혜인도 뭔가를 얻어야만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스터 K의 방문을 열기 전까지는.문을 열자 눈에 띄게 마른 사람이 나타났고 그 순간 성혜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생각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비록 완벽한 계획이었지만 003의 협조가 없다면 성혜인은 절대 이 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때마침 003도 자신만의 목적이 있었기에 일부러 설의종을 들먹이며 플로리아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밑판을 깔았다. 그래야만 성혜인이 순조롭게 차에 탈 수 있으니까.하
여기는 플로리아의 산속이다. 즉 언제든지 맹수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혹은 악의적인 의도를 품은 남자를 마주치는 순간 더 깊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면 잡혀가는 건 시간문제다. 미스터 K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에 넘어가면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없는 거나 다름없다.성혜인은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어두운 산속으로 들어갔다.차는 길가에 버려졌고 그녀는 깔창을 뺀 후 한결 편안한 걸음걸이로 산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그녀는 도로에서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어쩌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사랑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반승제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고 기대감이 밀려와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해가 뜰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리자 어느새 체력이 바닥나고 기진맥진했지만 남은 이성이 그녀의 정신줄을 꽉 붙잡은 채 희망을 북돋아 주며 도시를 향해 달릴 원동력을 제공했다.몇개의 산과 길을 넘었는지 모를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린 그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섰고 그 과정이 무한 반복되면서 온몸이 상처로 뒤덮였다.아무리 이를 악물고 달린다 해도 도시는 그녀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산기슭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췄다.현기증이 났지만, 별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만약 지금의 체력 상태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호수 근처에 위치한 이 오두막은 200평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성혜인은 본인이 지금 미스터 K의 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003이 어젯밤 3시간 동안 운전했고, 또한 해가 뜰 때까지 쉴틈없이 달렸기에 지금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를 좀 먹어야만 했다.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던 문은 자동으로 열렸고 성혜인은 잔뜩 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계세요?”
진세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혜인 씨?”“맞아요! 저예요!”성혜인은 감격에 겨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걸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진 선생님이 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이분은 플로리아 명문가 출신이자 아주 높은 신분을 지닌 분이에요. 제가 설씨 가문의 주치의로 일하면서 운 좋게 이분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플로리아에 올 때마다 진찰을 봐주고 있어요.”“그러니까 이따가 다시 돌아간다는 말씀이네요?”“네.”“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승제 씨를 만나고 싶어서요.”“그럼 30분만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불안하던 마음이 진정된 성혜인은 배고픔이 밀려왔고 더 이상 뭔가를 사고할 여력조차 없었다.그녀는 조용하게 소파에 앉아 진세운이 어르신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방문이 닫히자 인자하던 어르신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흥미진진한 듯 진세운을 바라봤다.맞은 편에 무표정으로 서 있던 진세운은 진찰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따가 제가 데리고 갈게요. 같이 가실래요?”“도대체 계획이 뭐야?”“희망을 주고 그걸 완전히 짓밟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아세요? 그런 걸 겪고 나면 아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거예요. 어쩐지 요즘 따라 말을 너무 잘 듣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다만 그녀가 이렇게 큰 수를 쓸 줄은 몰랐다.똑똑하다.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다.어르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꼬듯이 말했다.“참 불쌍한 애야. 왜 하필 네 심기를 건드려서. 쯧쯧.”진세운은 그 말에 답하지 않 은채 묵묵히 진찰했고 검사를 마친 후 의료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마치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빵 하나를 먹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을 느꼈다.어젯밤 밤새도록 달린 그녀는 동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