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랑이 화제를 돌린 다음 식사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계속되었다. 나눈 얘기라고는 가벼운 일상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기분 상할 화제가 다시 시작되면 모두 일제히 다른 말을 했다.점심밥을 먹고 나서 단유혁은 두 사람을 호텔에 데려다 주리고 했다. 비행기 시간은 내일 오전이었는데, 오늘은 오후 내내 실컷 자고 저녁에 잠깐 나가서 놀 예정이었다.이에 관해 강하랑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노는 것을 거절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호텔로 가는 길 그녀는 장난스레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차에서 단이혁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방비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파리가 주변에서 윙윙거리면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빨리 들어가서 쉬자. 로비에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큰형이 부탁한 일 있어서 공장에 잠깐 가봐야 해.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올게.”강하랑은 이제야 단유혁이 내릴 기미 없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금도 그는 안전 벨트도 풀지 않고 있었다.먼저 차에서 내린 그녀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운전 조심하고 저녁에 봐요.”“응, 저녁에 봐.”...황소연과 함께 호텔 로비에 들어선 다음 강하랑은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않
강하랑이 태연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남자가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가 그녀에게 화를 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번마다 겉보기에만 무서웠지 실질적인 위협은 가하지 않았다. 그가 여자를 때릴 정도로 막돼먹은 사람도 아니었다.남자의 분노는 그냥 얼굴에만 드러나 있었다. 표정이 무서운 것 외의 다른 행동은 보다시피 나타나지 않았다.담이 작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의 기세에 겁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졌거나, 담이 큰 사람이라면 절대 무서워할 리가 없다.강하랑은 이제 익
강하랑은 커튼도 치지 않은 채 숙면을 취했다. 화물선에서 낮잠 잘 때 햇빛을 그대로 만끽하던 것이 습관으로 남은 것이다.조지와 얘기를 나누고 위층에 올라간 그녀는 두꺼운 커튼을 절반만 닫았다. 남은 절반은 얇은 레이스 커튼으로 막았다. 이렇게 하면 방안이 밤처럼 어둡지도, 잠들지 못할 정도로 환하지도 않았다.맞춤한 환경에서 잠든 그녀는 꿈도 꾸지 않고 잤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바람에 흩날리는 얇은 커튼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그녀는 급하게 일어나지 않고 창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저 사람이 네가 만난다고 했던 친구야? 너 어떻게 여기에도 친구가 있어?”호텔에 들어가면서 단유혁이 물었다. 그는 일부러 조지가 있는 쪽을 보지 않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강하랑은 숨김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연바다 쪽 사람이에요. LC그룹에 문제가 생겼는지 시어스에 돌아갈 생각이던데, 나도 데려가려고 저래요.”만약 국내였다면 연바다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일단 그녀가 돌아간다면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비를 보탤 것이기 때문이다.연바다는 이제 연성태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한 번 뒤통수 친 사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단유혁을 향해 웃어 보였다.단유혁은 그녀를 한참 빤히 보다가 살풋 웃었다.“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좋고.”그는 강하랑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할 말을 끝낸 뒤 소파 위에 있던 노트북을 챙기곤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시간도 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내일 아침 비행기라는 거 잊지 말고 일찍 일어나. 난 내 방으로 이만 돌아가서 쉴게.”“응, 가요.”강하랑은 손을 휘저으며 그를 배웅했다.단유혁이 가고 나니 방안은 조금 허전했다.강하랑은 걸음을 옮겨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시선을 떨구자마자 차
“소연 언니한테 다른 차에 타라고 하길 잘했네요. 안 그랬으면 지금 이 속도라면 언니는 분명 겁먹고 있었을 거예요.”차는 이미 번화한 도시 길거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주위인 사람이 가득했기에 속도도 점차 줄였다.강하랑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자신들과 사뭇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추우면 내복을 껴입는 국내와 달리 이곳의 사람들은 상의는 패딩이었지만 하의는 반바지였다. 꼭 상체와 하체의 계절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그런 사람들과 달리 점포 사장들의 옷차림은 지역 느낌이 물씬 났다.예쁜 자수
어젯밤에 봤던 국내의 번화가와는 환경이 달랐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지역 특색을 아주 잘 살려내고 있었다.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거대한 광장도 있었고 분수대 근처엔 하얀 비둘기가 엄청 많았다. 길거리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술가들을 둘러싸고 앉아 구경했다. 공연이 끝나자 자그마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 동전을 건넸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다음 곡을 연주하기를 기다렸다.거대한 원형 분수대 뒤에는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성당이었다.제일 가운데엔 커다란 분침이 천천히 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