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유성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본가의 오래된 전기 시스템은 진작 번개를 이기지 못하고 정전됐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베란다를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었다.창밖의 희미한 빛이 방안을 비추자 연유성은 그나마 방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강하랑은 이불 안에 몸을 숨긴 채 우렛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흠칫 떨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편히 잠든 모습은 아니었다.“강하랑...”연유성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들어 올렸다. 강하랑이 그대로 질식사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불 안의 상황을 목격한 순간 그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강하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유성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자신의 곁에 눕힐 기세로 말이다.어느덧 창밖의 우렛소리가 잦아들고 빗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연유성은 몸을 비스듬히 기운 채 강하랑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녀의 흉터를 차마 계속 볼 수가 없어서 손을 뻗어 셔츠를 올려줬다.따듯한 손길이 어깨에 닿은 순간 강하랑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에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뭐 하는 짓이에요?!”연유성의 손은 아직도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대로 강하랑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연유성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못 믿겠으면 여기 좀 봐봐. 네가 지내던 방이잖아? 여기에는 나쁜 사람이 없어.”강하랑은 연유성의 말에 따라 주변을 빙 둘러봤다. 그리고 잔뜩 힘을 줬던 몸에 드디어 힘을 약간 풀었다. 하지만 경계 태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보다는 나아졌을 뿐이다.“내가 지내던 방...”강하랑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연유성의 말을 반복하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연유성도 약간은 마음을 놓으면서 말했다.“그래, 네가 지내던 방. 나쁜 사람은 없어, 너를 때릴 사람
연유성은 그대로 침대 아래에 떨어졌다. 다행히 그가 어젯밤 펴놓은 이불이 있었던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잔 데다가 깜짝 놀란 그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어젯밤 일어났던 일을 인지하지 못한 강하랑은 당당하게 언성을 높였다.“연유성, 너 진짜 미쳤어? 바닥에서 못 자겠으면 그냥 말하지, 왜 몰래 기어 올라와?”연유성은 고개를 들어 강하랑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기어 올라갔다고? 강하랑, 너 또 필름 끊겼냐?”화가 났던 연유성은 강하랑과 말도 섞기 싫어서 그냥 욕실에 들어가 버렸다.
“오른손 조심하라고 했지. 혹시 손을 절단하고 싶은 거면 그냥 못 들은 거로 하고.”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강하랑은 연유성의 오른손을 잡고 내렸다. 그러고는 서랍을 힐끗 보다가 청색 넥타이를 꺼냈다.“이거로 해.”연유성의 정장은 아주 기본적인 디자인의 정장이었다. 그래서 넥타이도 화려한 것이 아닌 기본적인 것이 어울렸다.연유성은 강하랑이 고른 넥타이를 살짝 만져봤다. 그리고 촉감이 꽤 좋아서 흔쾌히 받아 들었다. 하지만 곧장 강하랑에게 다시 건네줬다.강하랑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왜?”“오른손 조
욕실 문 앞에 있었던 강하랑은 그대로 경직되었다.그녀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물건을 정리하던 연유성을 멈칫하게 했다.연유성이 그 얇디얇은 ‘잠옷'을 들고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랑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그래도 경직된 강하랑은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연유성은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에 든 물건을 확인했고 이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는 그제야 강하랑이 왜 어제 그렇게 새 잠옷을 요구했는지 이해가 갔다.‘어머니는 왜
온서애는 강하랑의 말에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넌 애가, 저런 자식 편을 들어주긴 뭘 들어줘.”식탁에 앉아 있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어둡게 깔린 시선으로 강하랑을 빤히 보았다. 그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강하랑에게 딱히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강하랑도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그냥 솔직히 말할게요. 아주머니, 전...”그녀는 뜸을 들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에 꺼냈다.“전 아주머니께서 연유성한테 그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뭐가 어떻게 되었든 연유성은 아주머니 친아들이잖아요. 아주
그가 두렵지 않았던 강하랑은 같이 빤히 쳐다보았다.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분명 어젯밤엔 그렇게 인내심 있게 대하곤 왜 갑자기 원수를 보듯 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말이다. 그녀가 방금 온서애에게 한 말에도 그에게 실수가 되는 말이 전혀 없었다.다만 강하랑은 바로 무시를 했다. 여하간에 어차피 그와는 각자 다른 길을 갈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연유성을 그녀를 싫어하든 말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말한 대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녀를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