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방금 내가 그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어떻게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생각이 혜인 씨에 대한 것밖에 없지?’“내 생각에는 혜인 씨가 미리 심리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안 돼!”이준혁은 단호하게 말했다.“난 괜찮아. 혜인이가 걱정할 일 따위는 없게 할 거야.”김성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 그래도...”곧 김성훈은 자신의 입을 치며 속으로 자책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걸 후회하며 말이다.“됐어. 넌 분명 괜찮을 거야. 네 절친이 네가 그렇게 되는 걸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전화를 끊은 후, 주훈은 여전히 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준혁은 달밤 스튜디오의 빨간 로고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회사로 돌아가자.”갑자기 이준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원지민은 이씨 집안 고택으로 돌아와 울며 이준혁이 자신을 모함했다고 문현미에게 털어놓았다.문현미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걱정 마라. 나는 너를 백 퍼센트로 믿고 있어. 그러니 넌 내 옆에서 안심하고 지내. 네 배 속에 아이는 내가 인정하니까.”원지민은 이 말에 안심하며 문현미에게 더욱 충실해졌다.이제 문현미가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문현미의 불편한 다리를 바라보면서 원지민은 그날 그녀를 일부러 넘어뜨려 이준혁을 속여 데려오도록 한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문현미는 생각 없이 원지민을 믿었고 이준혁보다 훨씬 다루기 쉬웠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원지민은 문현미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그러자 원지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문현미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님, 약 드실 시간이 됐어요.”곧 문현미는 미소를 지으며 약을 받아 마셨고 원지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불을 정리해주었다.“편히 쉬세요.”말이 끝나자마자, 문현미는 언제나처럼 한순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원지민은 평온하게
모두가 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전에 본 적 없는 그런 기괴한 불길은 순식간에 사람을 완전히 태워버렸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함께 소멸된 것은 임호의 핸드폰도 포함되었다.감시 직원들은 경악하며 외쳤다.“즉시 보고해. 중요한 감시 대상이 병원에서 탈출했어.”특수 병원 안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반대편에서, 원지민은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듣고 임호가 죽었음을 확신했다.그리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말이다.원지민은 속이 시원해졌다.이제 그녀의 아이와 친자 확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마침내 원지민을 방해할 사람이 더 이상 없어진 것이다.원지민의 눈에 임호는 그저 한낱 개에 불과했다.말을 잘 들었다면 굳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겠지만 주인의 말을 거역한 개는 죽어 마땅했다.게다가 돈만 있으면 그런 개를 열 마리, 백 마리도 살 수 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변기 안에 던지고 특수 용액을 부었다.그러자 핸드폰을 순간적으로 녹아내려 하수구로 흘러내려 갔다.이제 원지민의 다음 단계는 명실상부한 이씨 집안 며느리가 되는 것이었다.원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그 여자가 사라지기만 하면... 준혁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주사기 때문에 날 더 거부할 수 없을 거야.’이내 그녀는 다시 다른 핸드폰을 꺼내어 한 번호를 눌렀다.“큰아버지, 사람 받으셨나요? 말씀하신 대로 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는 큰아버지에게 달렸습니다.”상대방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연히 준비는 끝났다.”원지민은 이마의 잔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원하는 건 이준혁뿐입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원지민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잠에 들었다.모퉁이에서 문현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에 숨겨둔 핸드폰을 꺼냈다.그녀는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고 그가 전화를 받자 입을 막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빨리 혜인이를 찾아야 해.”
원지민은 단지 이준혁을 혼란스럽게 하려 했을 뿐이었다. 문현미더러 이준혁에게는 임세희를 데려간 사람이 이천수라고 또한 이천수가 강제로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고 전하게 하려 했다.이때, 문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러자 원지민은 문현미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손톱을 그녀의 목동맥 위에서 스르륵 움직였다.“어머님,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안 가르쳐줘도 되겠죠?”문현미는 문을 열고 담담하게 말했다.“이 비서, 난 괜찮으니까 원지민이 떠났는지 확인해 봐요.”이 비서는 방안을 둘러본 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원지민이 있던 방으로 갔다.하지만 고택 안 어디에서도 원지민의 흔적을 찾지 못한 후, 그는 이준혁에게 보고했다.이준혁은 그에게 지시했다.“어머니를 잘 보호하고 고택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해.”어두운 밤, 이준혁은 별장에 도착했다.홍 아줌마와 아름이가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홍 아줌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혜인 씨가 저녁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오후에 전화가 와서 조금 늦을 거라고 했는데 방금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계속 연결되지 않아서 대표님을 찾으려던 참이었어요.”걱정으로 인해 홍 아줌마는 눈가가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대표님, 혜인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이곳은 이미 제가 사람을 시켜 다 점검하게 했고 바깥에도 사람을 배치해놨으니 아름이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세요.”홍 아줌마는 더욱 불안해졌다.이준혁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윤혜인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대표님, 경천 도련님께서 이미 귀국 중에 계십니다. 제발 우리 아가씨를 도와주세요.”이준혁은 냉정하게 말했다.“제가 꼭 찾아낼 거예요.”갑자기 계단 위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름이 맨발로 달려 나오며 울먹였다.“할머니, 할머니, 방금 엄마 꿈을 꿨어요...”그러자 홍 아줌마는 아름이를 안아주며 눈물을 삼켰다.“아름아, 엄마 곧 돌아올 거야.”아름이는 눈을 비비며 이준혁을 보고 억울한 듯
윤혜인의 힘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은빛으로 번뜩이는 단도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몸이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급한 나머지 그녀는 혀를 세게 깨물었다.“으...”고통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깨웠다.윤혜인은 온 힘을 다해 바닥에서 구르며 차가운 칼날을 피했다.“이 빌어먹을 년, 아직도 도망치려고 하는 거야?”임세희는 미친 듯한 표정으로 다시 달려들었고 칼은 다시 무섭게 내려 찍혔다.윤혜인은 몸을 옆으로 비틀며 피하려 했지만 칼끝이 빗나가 그녀의 팔을 찔렀고 순간 하얀 옷에 피가 스며들었다.임세희는 이미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칼을 들고 집요하게 쫓아오며 매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욕설을 퍼부었다.“이 빌어먹을 년,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상태로! 널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날카로운 칼끝이 바닥에 구멍을 하나씩 뚫었다.윤혜인은 끊임없이 구르며 피했고 다친 팔은 바닥에 핏자국을 남겼다.“쨍그랑...”칼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그러자 임세희는 아예 손으로 윤혜인의 다리를 잡아 거칠게 끌어당기고는 그녀의 머리를 잡아 기둥에 찍었다.“아!”머리가 기둥에 세게 부딪치며 윤혜인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이상하게도 임세희의 힘이 매우 강했다.일반적인 힘이 아닌, 비정상적인 힘이었다.윤혜인은 잠시 숨 돌릴 틈을 타, 기둥에 발을 대고 그 힘을 이용해 뒤로 공중제비를 하며 임세희의 뒤통수를 세게 걷어찼다.“으아악...”뒤통수가 기둥에 부딪히자 임세희는 비명을 질렀고 순간 피가 머리카락을 검붉게 물들였다.뒤통수는 매우 치명적인 부위라 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하지 않더라도 한동안 일어날 수 없을 터였다.이제야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지만 윤혜인의 예상과 다르게 임세희는 다시 일어났다.그녀의 회복력은 실로 놀라웠다.“몹쓸 년, 오늘 널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하하하하하!”임세희는 광기 어린 웃음을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손에 들고 있던 두피를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그러자 뚱뚱한 남자가 한 발로 그녀를 거칠게 차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젠장, 시끄럽다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모자를 쓴 키 큰 남자는 뚱뚱한 남자가 발길질을 멈추지 않자 즉시 제지하며 말했다.“그만해. 지금 죽이면 나중에 누가 책임질 건데.”뚱뚱한 남자는 그제야 멈추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낮게 욕했다.“젠장, 이 못생긴 거 보라고... 보기만 해도 역겹다. 더 보면 한동안 밥도 못 먹겠어.”모자를 쓴 키 큰 남자도 이내 역겨운 표정을 짓더니 모자를 벗어 임세희의 얼굴에 던지고 코를 막으며 말했다.“얼굴 좀 가려. 더럽고 냄새까지 지독하네.”임세희는 이미 몇 번이나 차인 탓에 더 이상 감히 소리치지 않았다.그러나 키 큰 남자는 발로 임세희를 한 번 더 차며 윤혜인을 가리켰다.“아직 죽일 때가 아니야. 우리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어?”두려움에 임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미친 사람도 겁에 질리면 순해진다는 말처럼, 임세희는 이제 지나치게 얌전해졌다.윤혜인은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건장한 두 남자와 미친 임세희가 함께 있는 상황이라, 윤혜인은 그들과 맞설 수 없었다.뚱뚱한 남자는 깨어난 윤혜인을 보자마자 눈빛을 번쩍였다.방금 그 추악한 임세희의 모습을 본 후, 아름다운 윤혜인을 보니 마치 눈이 씻긴 것 같았다.“이 여자 정말 예쁘게 생겼네.”뚱뚱한 남자가 말했다.“예쁘지. 그냥 보기만 해.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마.”키 큰 남자는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며 경고했다.“차가 오면 이 둘을 옮겨. 그럼 우리의 임무는 끝나는 거야.”윤혜인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자신과 임세희를 어딘가로 옮기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때, 뚱뚱한 남자가 중얼거렸다.“죽으면 아까운데...”그러자 키 큰 남자는 담배를 물고 피식 비웃었다.“입 다물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뚱뚱한 남자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뭐가 무서워
윤혜인을 차갑게 노려보는 임세희는 해골처럼 앙상한 얼굴에 이빨을 드러내며 매우 무섭게 웃고 있었다.“넌 죽어. 물론 너만 죽을 뿐이지. 난 이미 도망쳐 나왔으니까 새 삶을 시작할 거야.”임세희는 여전히 새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임무만 완수하면 비행기, 돈, 그리고 여권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말이다.그녀는 해외로 나가서 이 추악한 얼굴을 치료하고 평생 쓸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윤혜인은 임세희의 손을 막으며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이 사람들... 우리 둘 다 죽이려 한다는 거 전혀 못 들었어?”“어디서 날 속이려고... 수작 부리지 마!”임세희는 눈을 크게 뜨고 기괴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늘 죽을 사람은 너 하나야, 난 절대 죽지 않아! 이 사람들은 널 보내고 나면 나를 비행기에 태워 해외로 보내 줄 거야. 그러면 난 얼굴을 치료하고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윤혜인은 차분하게 말했다.“임세희, 넌 정말 꿈속에 살고 있구나? 방금 난 분명히 들었어. 우린 곧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될 거라고 했다고.”임세희는 여전히 믿지 않았지만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지금 넌 날 속이려는 거야...”윤혜인은 임세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아니 분명히 같이 들었으면서 왜 자동으로 그 말을 무시하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네.’하지만 그래도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잘 생각해 봐. 그 사람들이 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했어. 일거양득인 셈이지.”임세희는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뚱뚱한 남자가 정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윤혜인은 계속해서 말했다.“당신을 비행기에 태워 줄 거였다면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굴었겠어?”임세희의 머리 위에는 큰 상처가 있어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은 참혹할 정도로 끔찍했다.
윤혜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 다가오지 마요.”꺽다리가 담배를 하나 물더니 느긋하게 말했다.“따먹고 싶어서 그러죠. 근데 시간이 없네요? 흐흐. 아쉬워라...”쾅.굉음과 함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졌다.윤혜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임세희가 뒤에 숨어있는 걸 발견하고 일부러 남자의 집중력을 자기에게로 돌린 것이었다.“조심해요. 밖에 남은 사람 있는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임세희는 돌을 다시 주워들었다.퍽. 퍽. 퍽.그렇게 연속으로 일고여덟 번을 더 내리쳤다. 남자의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졌다.“아악.”윤혜인이 비명을 지르더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임세희의 상태는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남자는 이미 죽었지만 임세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쳤다.이때 뚱보가 안으로 들어왔다.“형님. 차 도착했습니다.”하지만 꺽다리는 보이지 않고 임세희가 잔디 더미에 앉아 바보처럼 웃는 것만 보였다.뚱보는 안으로 걸어가며 욕설을 퍼부었다.“못생긴 년. 비켜. 우리 형, 형님...”뚱보는 한참 버벅거리다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더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러다 갑자기 괴성을 쏟아냈다.“형, 형님.”바닥에는 형님이 아니라 사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헤헤, 불러.”임세희가 뚱보를 돌아보며 웃었다.“왜 형님이라고 안 해?”다리에 힘이 풀린 뚱보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연신 뒷걸음질 쳤다.뚱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오지 마. 오지 마. 이 못생긴 년. 괴물 같은...”“아악.”그러다 이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임세희의 입에는 어느새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낯가죽이 물려있었다.“아악...”뚱보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감싸 쥐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임세희가 헤헤 웃으며 마구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이제 너도 못생겨졌어. 나를 못생겼다고 욕하더니 넌 이제 못생긴 돼지인걸?”임세희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정말 이성을 완전
임세희가 잠깐 고민했지만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기만 할 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윤혜인은 의심할 만한 상대를 말했다.“당신을 구한 사람 원지민이 보낸 사람 맞지?”임세희가 멈칫했다.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비록 원지민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자기를 구한 사람이 원지민의 보디가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그 골목에서 그녀에게 약을 탄 가면 쓴 남자였다.윤혜인은 그제야 모든 걸 알아채고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원지민 맞지? 그 여자 당신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나를 해치려는 거야. 당신은 죽어서도 원지민의 희생양이 될 뿐이라고.”임세희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헛소리하지 마. 그냥 나 속이려는 거잖아.”임세희는 원지민과 척을 진 적이 없었다.원지민이 이준혁의 약혼녀를 자처하긴 했지만 임세희에겐 늘 온화했다.그때 이준혁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원지민이 업무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많은 편의를 봐줬다.“그걸 좀 생각해 보지 그래? 원지민이 왜 그렇게 큰 위험을 무릅쓰고 너를 구했겠어? 무슨 이득이 있다고?”윤혜인이 차갑게 말했다.“아까 두 사람이 하는 말 너도 들었지? 너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거야. 원지민은 항상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시키지.”임세희는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마치 윤혜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임세희에게 도리를 알려주려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끌려는 것이었다.미친 여자와 도리를 따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임세희가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임세희는 이미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 한사람 더 죽인다고 뭐가 달라질까?윤혜인은 이미 문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임세희가 한눈판 사이 윤혜인은 밖으로 달려 나가 문을 꽉 잡고는 아까 바닥에서 주웠던 몽둥이를 문고리에 끼워 넣었다.무슨 상황인지 알아챈 임세희는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윤혜인은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