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든 돌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 정신이 나간 아들은 누군가에게 허리를 끌어안겨 뒤로 넘어졌다.그는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힘껏 땅에 내팽개쳤다.혜인은 그 사람이 바로 배남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세상에 자기 아들이 맞는 것을 보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어머니는 없었다. 아주머니는 즉시 배남준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해댔다.배남준은 남자를 상대하는 데에는 가차 없었지만, 여자를 상대로는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었는지, 별수 없이 아주머니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혜인은 이 상황을 보고, 급히 차창을 내려 그에게 소리쳤다. “남준 오빠, 그냥 내버려두세요!”아주머니는 혜인이 창문을 내리자,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래서 쏜살같이 달려들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그 모습에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로 아주머니를 끌어내 땅에 내동댕이쳤다.아주머니는 땅을 구르며 크게 울부짖었다. “아이고, 사람 목숨 귀중한 줄도 모르고 사람을 죽이려 드네!”배남준은 얼굴을 찌푸렸다.그는 이렇게 무식하게 떠들며 길바닥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때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땅에서 일어나 혜인을 노려보았다.“독한 년, 네가 신고했구나!”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조금 전 전화로 했어요.”아주머니는 분노에 몸이 덜덜 떨렸다.혜인이 부른 ‘언니’는 경찰을 부른 것이었다!어쩐지 계속 “응, 응” 거리기만 하더니, 경찰과 신호를 주고받고 있은 것이었다.아주머니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그녀와 아들은 여러 번 사기를 쳐왔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실패를 맛본 것이다.그들의 목표는 항상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였고, 아주머니는 이를 위해 어떤 차가 비싼 차인지 알아보는 공부까지 했다.게다가 대부분의 고급 외제 차 주인들은 이 정도 돈 때문에 번거롭게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아주머니는 독설
혜인도 그 말에 동의했다. 방금 일이 있고 난 뒤다. 혼자 이곳에 남아 기다리는 건 솔직히 무서웠다.그러나 둘이 한참 동안 기다려도 기사는 오지 않았다.혜인은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이 깨져서 켜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배남준의 휴대전화를 빌려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기사는 주소를 잘못 들어 엉뚱한 곳에 가버렸던 것이었다.혜인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당황해 있던 참이었다.기사에게 현재 위치를 물어보니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배남준은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입 모양으로 “내가 데려다줄게”라고 속삭였다.윤혜인은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고, 기사에게 다시 차를 집에 돌려놓으라고 지시했다.차에서 검은 가방을 꺼내고 배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죄송하지만 부탁 좀 할게요, 남준 오빠.”남준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도 이제 별다른 일 없으니까 괜찮아.”차에 탄 후, 혜인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큰길로 나오고, 혜인은 남준에게 적당한 곳에 세워 달라고 했다.“남준 오빠, 잠시만 다녀올게요.”그녀는 소원과 약속한 비밀을 잊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무리 배남준이라 하더라도, 지금 무엇을 하러 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배남준은 혜인에게 굳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곁에서 자신의 비상용 휴대전화를 꺼내 주며 말했다.“필요하면 전화해.”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혜인은 소원이 말한 골목길로 들어가, 붉은 벽돌집을 찾았다.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상당히 은밀한 곳이었다.마당 입구에 도착하자, 닭이 푸드덕 날아오르고 개가 울부짖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남자가 땅에 누운 아이를 질질 끌고 있는 것이었다.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악을 쓰며 말했다.“빌어먹을 늙은것들, 돈을 안 내놓으면 이 꼬맹이를 팔아먹을 거다!”노란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아이를 꼭 껴안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말했다.
윤혜인은 온 힘을 다해 발로 힘껏 밟았다.아주머니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여전히 그녀를 놓지 않고 꽉 붙잡고 있었다.윤혜인은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하고 아이와 함께 있는 이모님의 귀에 대고 말했다.“앞쪽 교차로에 차가 있어요!”그 말을 마치고 나서, 이모님과 어린 남자아이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러자 이모님은 빠르게 반응하며 아이를 안고 달아나기 시작했다.이를 가만둘 수 없었던 둘째는 발걸음을 옮겨 그들을 뒤따라갔다.아주머니는 뒤에서 크게 소리쳤다.“둘째야, 빨리 와서 날 도와줘! 이 여자가 네 형을 잡아넣었어!”둘째는 이 말을 듣자마자 추격을 멈추고 대문을 잠갔다.윤혜인은 아주머니를 떼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무겁게 발을 내리찍었다.아주머니는 아파서 이를 갈며 울부짖었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둘째야, 빨리 와! 이렇게 예쁜 여자는 놓치면 안 되지. 네 형이 나오면 이제 이 여자를 네 형 아내로 삼을 거야!”차마 믿을 수 없는 말에 윤혜인은 경악했다.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둘째는 그제야 진지하게 윤혜인을 살펴보았다.‘정말 좀 예쁜데? 분홍빛이 도는 게... 꼭 신선한 복숭아처럼 생겼어.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튀어나올 것 같아.’윤혜인은 그가 음흉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긴장했다.곧이어 남자는 뒤에서 접근해 윤혜인의 허리를 움켜잡고 꽉 눌렀다.그런 다음 그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엄마, 먼저 가서 그 여편네랑 아이 찾아봐요. 난 여기서 좀 즐기고 있을 테니까!”둘째와 그의 엄마, 그리고 형은 늘 고정적인 거처가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그래서인지 진즉 결혼할 나이가 되었어도 아내를 구하지 못했다.가끔 ‘홍등가'에서 욕망을 해결하곤 했지만 그런 여자는 눈앞의 윤혜인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손에 넣기 힘든 여자를 탐하는 거야말로 재밌지!’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였다.‘우리 첫째한테 남겨 주려고 했던 여자인데...’둘째는 조금 비뚤어졌지만 지능은 정상
둘째는 머리가 몹시 아프고 아랫배는 죽을 것처럼 아팠다.그는 자신이 이렇게 한 여자의 손에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윤혜인은 배남준의 예비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를 마쳤다.그녀는 남자가 다쳤다는 것을 확신했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경찰에 맡기려고 했다.하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으며 소리쳤다.“이 더러운 년, 너 같은 것들은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어!”항상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 탓인지 그의 욕은 윤혜인이 들어본 적 없는 아주 저속하고 역겨운 것이었다.그는 더욱더 심한 말을 내뱉었다.“네 엄마도 너 같은 것을 낳았으니 더러운 년일 거야. 내가 네 엄마까지 같이...”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 문 앞에서 냉소를 지으며 바닥에 있는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그리고는 이내 남자의 얼굴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퍽!”둘째는 얼굴에 빗자루를 맞고 코피를 쏟았다.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지만 그는 차마 일어서지는 못하고 윤혜인에게 다가가면서 계속 욕을 했다.“이 더러운 년, 감히 날 때려? 내가 오늘 너 가만 안 둬...”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윤혜인의 그의 다섯 손가락을 강하게 밟고 있는 것이었다.“아아아!”남자는 고통 속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그러자 윤혜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네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너를 교육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내가 그 더러운 입 씻어줄게.”말을 마치고 그녀는 옆에 있는 걸레통에서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걸레를 집어 들었다.걸레의 물은 더럽다 못해 흙이 섞여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세균이 가득했다.둘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윤혜인은 그를 더 강하게 눌렀다.걸레 머리는 둥글고 많은 면직물이 묶여 있어 보통 사람의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그러나 윤혜인은 억지로 그것을 남자의 입에 밀어 넣었고 마침내 그가 그 더러운 물을 삼켰다.곧이어 윤혜인이 걸레를 빼내자 둘째는 얼굴이 검게 변
윤혜인은 남자를 뒤집어놓고 걸레통을 들어 그의 입을 벌려 강제로 물을 부었다.“꿀꺽꿀꺽... 안 돼... 꿀꺽꿀꺽...”그때 대문에서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혜인아!”배남준은 얼굴에 다급한 표정을 하고 들어와 윤혜인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잔뜩 긴장한 듯한 목소리였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조금 전 그는 윤혜인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하는 이모님의 설명을 들었다.그러고 나서 그는 이모님과 아이에게 차 안에서 절대 나오지도, 문을 열어주지도 말라고 부탁한 뒤, 자신은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윤혜인은 배남준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머쓱하게 말했다.“오빠, 나 괜찮아요.”배남준은 그제야 윤혜인이 손에 더러운 물통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괜찮다니 다행이다.”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는 물을 많이 마셔 숨을 고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그는 비참하게 신음하며 말했다.“감히 날 밟아...”배남준은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며 눈빛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동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그는 일어나서 윤혜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 여긴 경찰에게 맡기고.”“네.”곧이어 윤혜인이 더러운 물통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밖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들!”방금 도망쳤던 아주머니가 아이와 이모님을 찾으려고 했으나 차 문을 열지 못해 다시 돌아와 둘째 아들을 찾는 것이었다.하지만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그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우리 첫째, 둘째 아들 모두 이년 때문에 다쳤다고?!’아주머니는 분노에 차서 옆에 있던 철삽을 집어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이 나쁜 년놈들아, 감히 대낮에 내 아들을 해쳐? 죽여버리고 말 거야!”긴박한 순간이었다.반사적으로 배남준은 윤혜인을 자신의 뒤로 숨겨 보호하려고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그를 밀어내고 더러운 물통을 들어 아주머니에게 쏟아부었다.“쾅!”물이 눈에 들어가 앞이 안 보였던 아주머니는 두 사
경험이 풍부했던 이모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좀 이따 해열제 먹으면 돼요. 유진이는 몸이 약해서 병원에 가면 오히려 감염되기 쉽거든요.”얼마 후, 그들은 호텔에 도착했다. 이모님은 유진이에게 마스크와 야구 모자를 씌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윤혜인은 눈에 띄지 않도록 큰 스위트룸을 잡고 이모님과 함께 들어갔다.배남준은 약국에 약을 사러 갔다.유진이의 고열은 좀처럼 내리지 않았지만 이모님은 병원에 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그녀는 유진이가 고열로 병원에 갔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하는 수 없이 윤혜인은 두려움에 떨며 이모님과 함께 유진이를 간호했다.밤이 깊어지자 유진이의 열은 조금씩 내려갔고 그들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이모님은 윤혜인에게 잠시 쉬라고 권했다.곧이어 밖으로 나온 윤혜인은 배남준이 여전히 떠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남준 오빠, 신세를 너무 많이 졌네요.”배남준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나 졸리지도 않아. 넌 잠 좀 자둬. 내가 내일 아침에 운전해서 데려다줄게.”집 문제에 관해서 윤혜인은 이미 곽경천에게 맡겨둔 뒤였다.그가 서울 외곽에 많은 집들을 소유하고 있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을 찾는데 비교적 수월할 테니 말이다.윤혜인은 소원이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육경한은 미친 사람이었고 유진이를 발견하면 아이를 협박할 가능성이 있었다.그렇다. 육경한은 혈연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윤혜인은 너무 피곤했지만 늦은 시간에 배남준을 보내기 역시 어려웠다.하지만 배남준은 신사적으로 눈치껏 옷을 챙기며 말했다.“옆방에 예약해놨으니까 필요하면 불러.”그리고 나가기 전,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맞다, 네가 찾아달라고 했던 사람.”배남준은 핸드폰에서 사진을 꺼내 윤혜인에게 보여주었다.“이 사람 맞지?”사진 속 남자는 음산한 표정으로 늑대
전화기 속에서 다시 침묵이 흘렀다.윤혜인은 오늘 밤 이준혁이 이상하게 군다고 느끼며 멍하게 있었다.그래서 뭐라 물어보려는 찰나, 안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유진이가 기침을 하는 소리인 것 같았다.그러자 윤혜인은 깜짝 놀라 수화기를 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만 쉬어야겠어요. 무슨 할 말 있으면 내일 해요.”그러고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뚜뚜뚜...”끊임없이 울리는 바쁜 신호음이 마치 한 곡의 노래처럼 그를 조롱하는 듯했다.이준혁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회의를 일찍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혜인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안절부절못하며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는데... 혜인이의 행방을 알고 금오구에 찾아온 것도 그리 좋은 결정은 아니었던 거야.’조금 전까지 그는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윤혜인과 배남준이 함께 호텔에 있는 건 단지 일이 있어서일 거라고.배남준이 약 봉투를 들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준혁은 심지어 윤혜인이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차에 앉아 윤혜인의 전화를 기다리기로 했다.윤혜인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전화를 받기 전까지도 이준혁은 자신을 타이르고 있었다.윤혜인이 배남준과 함께 있다고만 말해준다면 그저 윤혜인을 믿겠다고, 괜히 질투하지 말고 그녀를 화나게 하지 말자며 말이다.하지만 윤혜인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모르는 사람’이라니.이준혁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놓았다.“돌아가자.”주훈은 놀라며 물었다.“대표님, 돌아가자고요?”그는 윤혜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기에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주훈은 이준혁이 회의를 줄이고 남청에서 서울로 다시 서울에서 금오구로 급히 돌아오며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직 윤혜인을 한 번 보기 위해서 말이다.‘왜
윤혜인은 잠시 생각한 후 이준혁에게 문자를 보냈다.[나 돌아왔어요.]문자를 보내고 나서 그녀는 도지훈에게 채소 슈퍼마켓에 잠시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어제 하지 못했던 저녁 식사 준비를 오늘로써 보충하려는 것이었다.슈퍼마켓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고르고 나서야 그들은 모든 재료를 구입했다.집에 돌아온 후, 그녀는 주방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직접 손질하고 세심하게 준비했다.모든 준비가 끝난 후, 윤혜인은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아무런 답장이 없었다.그러자 윤혜인은 조금 실망감을 느꼈다.‘정말 바쁜가 보네...’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준혁이 회의 중일까 봐 망설였다.그렇게 곰곰이 생각 끝에 윤혜인은 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혜인 씨, 무슨 일인가요?”“주 비서님, 준혁 씨... 지금 바쁜가요?”“네,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입니다. 전해드릴 말씀이 있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오늘 저녁 잊지 말고 저녁 식사에 오라고 전해주세요.”주훈은 사무실에서 이준혁이 코트를 들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주저하며 말했다.“혜인 씨, 대표님께서 오늘 밤에는 늦게까지 바쁘실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윤혜인은 주훈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괜찮아요. 기다릴게요.”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아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윤혜인은 말했다.“주 비서님, 그럼 일 보세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주훈은 급히 이준혁을 따라가 헐떡이며 말했다.“사모...”그러나 이준혁의 차가운 안색을 보고 주훈은 즉시 말을 바꿨다.“혜인 씨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이준혁은 그 말을 들었지만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비로소 그는 감정을 드러냈다.윤혜인이 이준혁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은 단지 그의 호의에 대한 보답이었다.우스운 것은 이준혁이 그 일로 기뻐했었다는 것이다.‘나도 참... 어리석어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