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주변을 살피더니 엿듣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지한 표정으로 윤혜인에게 귓속말했다.“작업실에 약 하나 보냈거든. 수령인에 네 이름을 적었다. 3일 뒤에 금오구 120번지 옆에 있는 골목에 있는 빨간 기와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전해줘.”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무슨 약이기에 이렇게 비밀스러운지 궁금했다. 그리고 윤혜인은 소원에게 남은 가족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전에 있던 친척들은 하나같이 흑심을 품고 소원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기 전에 건질만한 것들을 다 건지고 도망갔다.할머니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소원이 말했다.“혜인아. 이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돼. 이준혁 씨도 안 돼.”이준혁과 육경한은 친한 친구였기에 이준혁이 알면 유진은 숨어있을 곳이 없게 된다.윤혜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지해 보이는 소원의 표정에 이 일이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꼭 가져다줄게.”소원이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울먹이며 말했다.“혜인아, 고마워. 뭘 보든 놀라지 말고. 내가 앞으로 다 설명해 줄게.”“그래. 우리 사이에 뭔 인사야.”“갈 때 미행 조심해. 육경한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늦어서 4일이야. 그전에 꼭 할머니 손에 넘겨줘야 해. 그거 목숨 살리는 약이야...”소원은 모든 희망을 윤혜인에게 거는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뒤에 서 있기에 들킨다 해도 윤혜인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육경한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은 달랐다. 육경한 그 미친개는 무슨 짓이든 해낼 수 있다.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못했는데 집사가 소원을 찾아왔다.“소원 씨, 도련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소원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알았어요.”윤혜인은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소원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소원아, 내가 이준혁 씨한테 말해볼게. 네가 얼른 이곳을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육경한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앞으로 절대 서현재랑 절대 만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아니면 서현재 절대 가만 안 둬.”소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소원은 서현재가 서씨 가문으로 돌아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육경한이 그를 괴롭히기 전에 고민을 한 번 더 해볼 것이다.“설마 그 개자식이 서씨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육경한은 소원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는 소원의 턱을 으스러지게 잡고 힘껏 당겼다.“소원아, 네가 얕잡아보는 게 누군지 똑똑히 봐.”소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육경한, 너는 나 협박하는 거 빼고 할 일 없지? 달리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비열한 수단 쓰는 거 아니야?”육경한이 차갑게 웃었다.“어떤 방법이든 잘 먹히면 되지.”그는 비열한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쓰러져가던 유민 그룹을 지금의 강대한 모습으로 바꾸기까지, 성공의 비결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육씨 가문을 철저히 손아귀에 넣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지금은 그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소원을 남기려 한다. 육경한이 점찍은 여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나랑 현재는 말 그대로 그냥 친구야. 네가 더럽다고 다른 사람도 그런 건 아니야.”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사실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소원은 그를 원망하고 있긴 하지만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거짓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내 옆에만 있으면 절대 상처 주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어.”“좋은 소식?”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육경한, 지금 내게 좋은 소식이 뭔지 알아? 네가 우리 아빠 죽인 거, 그 대가를 치르는게 제일 좋은 소식이야.”육경한은 이미 이 말에 내성이라도 생긴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개자식이.소원이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내가 부서트리는 게 무섭지 않다면 얼마든지.”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모습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다.그는 소원을 꽉 잡고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난 안 무서워. 그러면 복수할 기회가 없어지는데 아쉽지 않아?”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육경한은 정말 제대로 미친 것 같았다.“...”“이런 짐승 새끼.”소원의 팔은 어느새 뻣뻣해졌지만 그래도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렇게 욕했다.육경한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지만 숨결은 이미 흐트러진 상태였다.“네 앞에서 짐승이 되는 건 개의치 않아.”“...”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소원은 육경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손바닥은 어느새 빨갛게 부어오른 상태였다.소원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다 못해 저렸고 입술도 너무 꽉 깨문 나머지 핏기가 없었다.소원은 육경한에게서 벗어나자마자 그의 상처를 꾹 눌렀다.육경한은 아파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아까 정점까지 치달았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해 힘들었는데 소원이 상처를 꾹 누르자 아프면서도 욕구가 해소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육경한, 너 너무 더러워.”육경한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 더 찔러. 이자 받는 셈 치고.”소원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손을 들어 육경한의 귀싸대기를 날리려는데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고 상처로 가져갔다.육경한은 소원의 손을 상처에 대고 꾹 눌렀다.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은 덤덤하면서도 매정해 보였다.“이 정도면 분이 좀 풀려?”육경한의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평온함 속에 파국이 연상되어 숨이 막혀왔다.상처가 갈라지며 피가 줄줄 새어 나와 소원의 손을 물들였다.소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정말... 미쳤어...”육경한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소원의 손을 붙잡고 계속 힘주어 눌렀다.마치 소원의 손을 금방 봉합한 상처로 밀어 넣어 심장이라도 꺼낼 것처럼 말이다.“나 증오한다며? 괴롭
소원은 퍽 의외라고 생각했다. 육경한이 소종을 벌주는 게 신기했다.소종은 그동안 육경한을 도와 많은 나쁜 짓을 했다. 그는 육경한에게 백 퍼센트 충성했다. 그리고 유민 그룹에서 소종은 두 번째로 꼽혔다.육경한은 소종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절대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벌주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벌을 세웠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소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소종 외에 그녀를 도둑처럼 경계할 사람은 없었다.소원은 밖에서 시간을 좀 끌다가 육경한의 방으로 돌아갔다.육경한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쉬고 있었다. 상처가 다시 덧나는 바람에 육경한의 입술을 갈라져 있었다. 얼굴도 하얗게 질린 게 뭔가 산 사람 같지 않았다.이마는 언제 부딪쳤는지 새끼손가락만 한 상처가 미간까지 쭉 이어진 게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처량한 모습이긴 했지만 육경한의 얼굴은 여전히 각진 게 잘생겼다.대학 시절부터 육경한은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았다. 집안으로 보나 외형으로 보나 우월하지 않은 게 없었다.육경한을 좋아하는 여자는 많았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그때는 소원이 먼저 육경한을 좋다고 따라다녔다. 소원은 그때 남자 친구에게 차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분이 매우 우울한 상태였다.한번 시도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자기도 무조건 다른 여자처럼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육경한은 학교에서도 유명인사였다. 학생회 회장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스펙까지 가미하자 더 반짝반짝 빛났다.의외로 육경한은 소원이 아무렇게나 유혹한 말에 넘어왔다.실험실에서 소원이 육경한에게 물었다.“회장님,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육경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졌다.소원은 찬란하게 웃으며 육경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 나는 여자 친구라고 해.”하지만 육경한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동작도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손을 들고 있던 소원이 너무 쪽팔려
육경한은 소원의 말투에서 원망을 느끼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나랑 있어. 일하지 말고. 원하는 거 모든 다 줄게.”소원이 육경한을 비웃더니 사발을 내려놓았다.“대표님, 전에도 같이 있어 주면 비용 짭짤하게 주셨는데 지금도 그러고 싶으신 거예요?”이 말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이 보기 드물게 어색해 보였다.육경한이 설명했다.“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소원은 여전히 웃었다.“나는 별반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내 느낌은 변한 적 없거든.”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일단은 이 화제를 넘기려 했다.“나 찔러서 다치게 했는데 좀 같이 있어 달라는 것도 안 돼?”“그냥 신고해.”소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네가 먼저 나를 침해하려 했잖아. 나는 정당방위 했을 뿐이야.”“고의가 아닌 건 맞지만 내가 죽기를 바랐잖아.”육경한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때 소원이 보여줬던 눈빛은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소원이 우스갯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웃었다.“육경한, 그걸 오늘에야 안 거야?”육경한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우습다는 듯 말했다.“아니, 알고 있었지. 근데 네가 살아있는 한 나도 죽기 싫어.”소원의 입가에 조롱의 미소가 걸렸다.“왜? 나랑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도는 선명했다.소원은 그런 육경한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소원은 가늘고 예쁜 손가락으로 육경한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낮게 웃으며 말했다.“육경한, 꿈도 꾸지 마. 살면서 한 번도 죄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죽어도 천국 갈 거야. 넌 아마도 지옥 가겠지.”소원은 잘생긴 육경한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증오가 가득 서린 눈빛은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길이 다르다고. 알아?”구슬처럼 예쁜 소원의 눈동자에는 역겨움과 증오가 가득 차올랐다. 그 눈빛이 육경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렇게 쉽게 휘둘
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라 힘껏 그를 밀쳐냈다. 하지만 육경한이 손목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소원도 더는 육경한의 인내심에 도전하지 않았다. 상처를 덧내는 일은 한 번은 있어도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아니면 육경한의 성격에 무조건 그녀보다 더 강하게 나올 것이다.소씨 가문을 위해 복수하려면 무모하게 나가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더라도 값진 싸움이 되어야 한다.소원이 더는 발버둥 치지 않자 육경한은 소원의 뒤통수를 꽉 부여잡고 더 가까이 당겼다.키스는 뜨거우면서도 열렬했다.육경한은 자신의 온도로 소원의 분노를 녹여주려 했다.그는 그녀가 굴복하는 모습이 좋았다.그러면서도 더는 그를 도발하지 않은 그녀의 총명함에 몰래 감탄했다.아니면 정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육경한의 눈썹에 난 상처는 어딘가 흉측해 보였다. 다년간 헬스로 다져진 탄탄한 팔은 소원을 쥐고 흔드는 데 충분했다.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소원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져서야 육경한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구슬처럼 예쁜 소원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육경한은 그저 한번 힐끔 쳐다봤을 뿐인데도 가슴이 욱신거렸다.소원이 상처 주는 말을 내뱉기 전에 육경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회사 간다며? 가기 전에 일단 이자부터 좀 받을게.”소원이 멈칫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여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줄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소원은 육경한이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조금이라니? 설마 끝도 없이 받을 생각인가? 어림도 없지.’소원이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닦아내듯 입술을 마구 닦으며 화냈다.“앞으로 한 번만 더 함부로 손대봐. 체면이고 뭐고 없어.”육경한이 웃으며 말했다.“기대할게.”육경한은 체면을 주지 않아야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만한 인내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원을 앞에 두고 참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말문이 막혔다. 더는 이 변태 같은 놈과 말을 섞기가 싫었다.자
소원은 육경한이 마음이라도 바꿀까 봐 온몸으로 경계했다.“이랬다저랬다하는 건 남자로서 할 짓이 못 되는 거 알지?”육경한은 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남자인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소원은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고 더는 참을 수 없어 욕설을 퍼부었다.“넌 정말 저질이야.”그러더니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육경한은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소원은 별장 앞채를 지나가다가 바닥에 꿇어있는 소종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는 마치 먼지라도 털어주듯 소종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그런 소종을 비웃었다.“비서님, 육경한이 비서님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소종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그에 반해 소원은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소종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말로 소종이 육경한을 조금이라도 미워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마음이 갈라서야 기회가 생기게 된다.그리고 소종도 그렇게 억울한 건 아니었다.소원은 별장에서 나오자마자 바깥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육경한이 준비한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소원의 옆엔 육경한의 수하도 함께했다.떠나기 전 소원은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별장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소종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열쇠 하나가 몸에서 툭 떨어졌다.그가 잊어버린 그 열쇠였다. 소종은 그 열쇠를 주워 들어 다시 주머니에 던져넣었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육경한은 침대에 기대 있었고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소종이 들어오자 육경한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가져갔어?”소종이 고개를 끄덕였다.육경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내려가 봐.”방안은 정적이 흘렀다.육경한은 하얀 벽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소원아, 나 실망하게 하지 마.’...윤혜인은 육경한의 별장에서 나오고 나서부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옆에서 운전하
“...”‘이 남자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윤혜인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가 언제 준혁 씨의 아이를 낳겠다고 했어요? 저를 빨리 내려주세요.”시간이 지나기 전에 윤혜인은 얼른 약을 먹으려고 했다.윤혜인은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준혁의 큰 손바닥에 손목이 잡힌 채 그에게 갑작스럽게 끌려가는 바람에 이준혁의 가슴에 박았다.윤혜인은 자신의 머리가 철벽처럼 딱딱한 가슴에 박은 것 같아 화가 나서 남자를 노려보았다.“준혁 씨, 뭐 하는 거예요?”이준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윤혜인을 주시하며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눈빛이 조금 위험하게 느껴져 경계하면서 물었다.“준혁 씨 도대체 왜 그래요?”윤혜인의 눈빛을 보자 이준혁은 가슴이 미어지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매우 묻고 싶었다. ‘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누구의 아이를 낳고 싶은 건데!’그러나 너무 사납게 굴면 그녀가 미워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준혁은 자신의 강한 소유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그러고 난 후, 이준혁은 천천히 윤혜인의 손목을 놓아주더니 어두워진 잘생긴 얼굴로 말했다.“내가 갈게.”“...”이준혁은 약국에 가서 두 가지 약을 샀다.하나는 특효약이었고 하나는 비타민이었다.윤혜인은 줄곧 몸이 허약해서 예전에 의사 선생님도 그녀한테 피임약은 몸에 안 좋으니 먹지 말라고 당부했었다.그래서 이준혁은 윤혜인이 피임 특효약을 먹지 않았으면 했다.게다가 아침에 시간이 없어서 두 사람은 한 번만 했기에 이준혁은 그렇게 쉽게 임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차에 돌아온 후 이준혁은 물컵을 꺼내 온수를 따르고 나서 또 약을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약과 물을 건네받은 윤혜인은 마음이 따뜻해 나는 것만 같아서 이준혁에게 말을 건넸다.“고마워요.”이준혁은 비록 정말 터프할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자상할 때도 많았다.말랑말랑한 윤혜인의 감사 인사 한마디에 이준혁의 우울했던 기분은 순간 온데간데없이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