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주변을 살피더니 엿듣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지한 표정으로 윤혜인에게 귓속말했다.“작업실에 약 하나 보냈거든. 수령인에 네 이름을 적었다. 3일 뒤에 금오구 120번지 옆에 있는 골목에 있는 빨간 기와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전해줘.”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무슨 약이기에 이렇게 비밀스러운지 궁금했다. 그리고 윤혜인은 소원에게 남은 가족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전에 있던 친척들은 하나같이 흑심을 품고 소원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기 전에 건질만한 것들을 다 건지고 도망갔다.할머니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소원이 말했다.“혜인아. 이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돼. 이준혁 씨도 안 돼.”이준혁과 육경한은 친한 친구였기에 이준혁이 알면 유진은 숨어있을 곳이 없게 된다.윤혜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지해 보이는 소원의 표정에 이 일이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꼭 가져다줄게.”소원이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울먹이며 말했다.“혜인아, 고마워. 뭘 보든 놀라지 말고. 내가 앞으로 다 설명해 줄게.”“그래. 우리 사이에 뭔 인사야.”“갈 때 미행 조심해. 육경한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늦어서 4일이야. 그전에 꼭 할머니 손에 넘겨줘야 해. 그거 목숨 살리는 약이야...”소원은 모든 희망을 윤혜인에게 거는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뒤에 서 있기에 들킨다 해도 윤혜인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육경한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은 달랐다. 육경한 그 미친개는 무슨 짓이든 해낼 수 있다.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못했는데 집사가 소원을 찾아왔다.“소원 씨, 도련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소원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알았어요.”윤혜인은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소원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소원아, 내가 이준혁 씨한테 말해볼게. 네가 얼른 이곳을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육경한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앞으로 절대 서현재랑 절대 만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아니면 서현재 절대 가만 안 둬.”소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소원은 서현재가 서씨 가문으로 돌아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육경한이 그를 괴롭히기 전에 고민을 한 번 더 해볼 것이다.“설마 그 개자식이 서씨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육경한은 소원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는 소원의 턱을 으스러지게 잡고 힘껏 당겼다.“소원아, 네가 얕잡아보는 게 누군지 똑똑히 봐.”소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육경한, 너는 나 협박하는 거 빼고 할 일 없지? 달리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비열한 수단 쓰는 거 아니야?”육경한이 차갑게 웃었다.“어떤 방법이든 잘 먹히면 되지.”그는 비열한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쓰러져가던 유민 그룹을 지금의 강대한 모습으로 바꾸기까지, 성공의 비결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육씨 가문을 철저히 손아귀에 넣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지금은 그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소원을 남기려 한다. 육경한이 점찍은 여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나랑 현재는 말 그대로 그냥 친구야. 네가 더럽다고 다른 사람도 그런 건 아니야.”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사실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소원은 그를 원망하고 있긴 하지만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거짓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내 옆에만 있으면 절대 상처 주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어.”“좋은 소식?”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육경한, 지금 내게 좋은 소식이 뭔지 알아? 네가 우리 아빠 죽인 거, 그 대가를 치르는게 제일 좋은 소식이야.”육경한은 이미 이 말에 내성이라도 생긴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개자식이.소원이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내가 부서트리는 게 무섭지 않다면 얼마든지.”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모습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다.그는 소원을 꽉 잡고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난 안 무서워. 그러면 복수할 기회가 없어지는데 아쉽지 않아?”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육경한은 정말 제대로 미친 것 같았다.“...”“이런 짐승 새끼.”소원의 팔은 어느새 뻣뻣해졌지만 그래도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렇게 욕했다.육경한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지만 숨결은 이미 흐트러진 상태였다.“네 앞에서 짐승이 되는 건 개의치 않아.”“...”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소원은 육경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손바닥은 어느새 빨갛게 부어오른 상태였다.소원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다 못해 저렸고 입술도 너무 꽉 깨문 나머지 핏기가 없었다.소원은 육경한에게서 벗어나자마자 그의 상처를 꾹 눌렀다.육경한은 아파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아까 정점까지 치달았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해 힘들었는데 소원이 상처를 꾹 누르자 아프면서도 욕구가 해소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육경한, 너 너무 더러워.”육경한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 더 찔러. 이자 받는 셈 치고.”소원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손을 들어 육경한의 귀싸대기를 날리려는데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고 상처로 가져갔다.육경한은 소원의 손을 상처에 대고 꾹 눌렀다.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은 덤덤하면서도 매정해 보였다.“이 정도면 분이 좀 풀려?”육경한의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평온함 속에 파국이 연상되어 숨이 막혀왔다.상처가 갈라지며 피가 줄줄 새어 나와 소원의 손을 물들였다.소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정말... 미쳤어...”육경한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소원의 손을 붙잡고 계속 힘주어 눌렀다.마치 소원의 손을 금방 봉합한 상처로 밀어 넣어 심장이라도 꺼낼 것처럼 말이다.“나 증오한다며? 괴롭
소원은 퍽 의외라고 생각했다. 육경한이 소종을 벌주는 게 신기했다.소종은 그동안 육경한을 도와 많은 나쁜 짓을 했다. 그는 육경한에게 백 퍼센트 충성했다. 그리고 유민 그룹에서 소종은 두 번째로 꼽혔다.육경한은 소종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절대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벌주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벌을 세웠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소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소종 외에 그녀를 도둑처럼 경계할 사람은 없었다.소원은 밖에서 시간을 좀 끌다가 육경한의 방으로 돌아갔다.육경한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쉬고 있었다. 상처가 다시 덧나는 바람에 육경한의 입술을 갈라져 있었다. 얼굴도 하얗게 질린 게 뭔가 산 사람 같지 않았다.이마는 언제 부딪쳤는지 새끼손가락만 한 상처가 미간까지 쭉 이어진 게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처량한 모습이긴 했지만 육경한의 얼굴은 여전히 각진 게 잘생겼다.대학 시절부터 육경한은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았다. 집안으로 보나 외형으로 보나 우월하지 않은 게 없었다.육경한을 좋아하는 여자는 많았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그때는 소원이 먼저 육경한을 좋다고 따라다녔다. 소원은 그때 남자 친구에게 차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분이 매우 우울한 상태였다.한번 시도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자기도 무조건 다른 여자처럼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육경한은 학교에서도 유명인사였다. 학생회 회장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스펙까지 가미하자 더 반짝반짝 빛났다.의외로 육경한은 소원이 아무렇게나 유혹한 말에 넘어왔다.실험실에서 소원이 육경한에게 물었다.“회장님,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육경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졌다.소원은 찬란하게 웃으며 육경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 나는 여자 친구라고 해.”하지만 육경한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동작도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손을 들고 있던 소원이 너무 쪽팔려
육경한은 소원의 말투에서 원망을 느끼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나랑 있어. 일하지 말고. 원하는 거 모든 다 줄게.”소원이 육경한을 비웃더니 사발을 내려놓았다.“대표님, 전에도 같이 있어 주면 비용 짭짤하게 주셨는데 지금도 그러고 싶으신 거예요?”이 말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이 보기 드물게 어색해 보였다.육경한이 설명했다.“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소원은 여전히 웃었다.“나는 별반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내 느낌은 변한 적 없거든.”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일단은 이 화제를 넘기려 했다.“나 찔러서 다치게 했는데 좀 같이 있어 달라는 것도 안 돼?”“그냥 신고해.”소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네가 먼저 나를 침해하려 했잖아. 나는 정당방위 했을 뿐이야.”“고의가 아닌 건 맞지만 내가 죽기를 바랐잖아.”육경한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때 소원이 보여줬던 눈빛은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소원이 우스갯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웃었다.“육경한, 그걸 오늘에야 안 거야?”육경한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우습다는 듯 말했다.“아니, 알고 있었지. 근데 네가 살아있는 한 나도 죽기 싫어.”소원의 입가에 조롱의 미소가 걸렸다.“왜? 나랑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도는 선명했다.소원은 그런 육경한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소원은 가늘고 예쁜 손가락으로 육경한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낮게 웃으며 말했다.“육경한, 꿈도 꾸지 마. 살면서 한 번도 죄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죽어도 천국 갈 거야. 넌 아마도 지옥 가겠지.”소원은 잘생긴 육경한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증오가 가득 서린 눈빛은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길이 다르다고. 알아?”구슬처럼 예쁜 소원의 눈동자에는 역겨움과 증오가 가득 차올랐다. 그 눈빛이 육경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렇게 쉽게 휘둘
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라 힘껏 그를 밀쳐냈다. 하지만 육경한이 손목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소원도 더는 육경한의 인내심에 도전하지 않았다. 상처를 덧내는 일은 한 번은 있어도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아니면 육경한의 성격에 무조건 그녀보다 더 강하게 나올 것이다.소씨 가문을 위해 복수하려면 무모하게 나가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더라도 값진 싸움이 되어야 한다.소원이 더는 발버둥 치지 않자 육경한은 소원의 뒤통수를 꽉 부여잡고 더 가까이 당겼다.키스는 뜨거우면서도 열렬했다.육경한은 자신의 온도로 소원의 분노를 녹여주려 했다.그는 그녀가 굴복하는 모습이 좋았다.그러면서도 더는 그를 도발하지 않은 그녀의 총명함에 몰래 감탄했다.아니면 정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육경한의 눈썹에 난 상처는 어딘가 흉측해 보였다. 다년간 헬스로 다져진 탄탄한 팔은 소원을 쥐고 흔드는 데 충분했다.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소원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져서야 육경한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구슬처럼 예쁜 소원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육경한은 그저 한번 힐끔 쳐다봤을 뿐인데도 가슴이 욱신거렸다.소원이 상처 주는 말을 내뱉기 전에 육경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회사 간다며? 가기 전에 일단 이자부터 좀 받을게.”소원이 멈칫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여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줄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소원은 육경한이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조금이라니? 설마 끝도 없이 받을 생각인가? 어림도 없지.’소원이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닦아내듯 입술을 마구 닦으며 화냈다.“앞으로 한 번만 더 함부로 손대봐. 체면이고 뭐고 없어.”육경한이 웃으며 말했다.“기대할게.”육경한은 체면을 주지 않아야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만한 인내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원을 앞에 두고 참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말문이 막혔다. 더는 이 변태 같은 놈과 말을 섞기가 싫었다.자
소원은 육경한이 마음이라도 바꿀까 봐 온몸으로 경계했다.“이랬다저랬다하는 건 남자로서 할 짓이 못 되는 거 알지?”육경한은 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남자인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소원은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고 더는 참을 수 없어 욕설을 퍼부었다.“넌 정말 저질이야.”그러더니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육경한은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소원은 별장 앞채를 지나가다가 바닥에 꿇어있는 소종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는 마치 먼지라도 털어주듯 소종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그런 소종을 비웃었다.“비서님, 육경한이 비서님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소종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그에 반해 소원은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소종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말로 소종이 육경한을 조금이라도 미워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마음이 갈라서야 기회가 생기게 된다.그리고 소종도 그렇게 억울한 건 아니었다.소원은 별장에서 나오자마자 바깥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육경한이 준비한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소원의 옆엔 육경한의 수하도 함께했다.떠나기 전 소원은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별장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소종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열쇠 하나가 몸에서 툭 떨어졌다.그가 잊어버린 그 열쇠였다. 소종은 그 열쇠를 주워 들어 다시 주머니에 던져넣었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육경한은 침대에 기대 있었고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소종이 들어오자 육경한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가져갔어?”소종이 고개를 끄덕였다.육경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내려가 봐.”방안은 정적이 흘렀다.육경한은 하얀 벽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소원아, 나 실망하게 하지 마.’...윤혜인은 육경한의 별장에서 나오고 나서부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옆에서 운전하
“...”‘이 남자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윤혜인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가 언제 준혁 씨의 아이를 낳겠다고 했어요? 저를 빨리 내려주세요.”시간이 지나기 전에 윤혜인은 얼른 약을 먹으려고 했다.윤혜인은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준혁의 큰 손바닥에 손목이 잡힌 채 그에게 갑작스럽게 끌려가는 바람에 이준혁의 가슴에 박았다.윤혜인은 자신의 머리가 철벽처럼 딱딱한 가슴에 박은 것 같아 화가 나서 남자를 노려보았다.“준혁 씨, 뭐 하는 거예요?”이준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윤혜인을 주시하며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눈빛이 조금 위험하게 느껴져 경계하면서 물었다.“준혁 씨 도대체 왜 그래요?”윤혜인의 눈빛을 보자 이준혁은 가슴이 미어지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매우 묻고 싶었다. ‘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누구의 아이를 낳고 싶은 건데!’그러나 너무 사납게 굴면 그녀가 미워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준혁은 자신의 강한 소유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그러고 난 후, 이준혁은 천천히 윤혜인의 손목을 놓아주더니 어두워진 잘생긴 얼굴로 말했다.“내가 갈게.”“...”이준혁은 약국에 가서 두 가지 약을 샀다.하나는 특효약이었고 하나는 비타민이었다.윤혜인은 줄곧 몸이 허약해서 예전에 의사 선생님도 그녀한테 피임약은 몸에 안 좋으니 먹지 말라고 당부했었다.그래서 이준혁은 윤혜인이 피임 특효약을 먹지 않았으면 했다.게다가 아침에 시간이 없어서 두 사람은 한 번만 했기에 이준혁은 그렇게 쉽게 임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차에 돌아온 후 이준혁은 물컵을 꺼내 온수를 따르고 나서 또 약을 꺼내 윤혜인에게 건넸다.약과 물을 건네받은 윤혜인은 마음이 따뜻해 나는 것만 같아서 이준혁에게 말을 건넸다.“고마워요.”이준혁은 비록 정말 터프할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자상할 때도 많았다.말랑말랑한 윤혜인의 감사 인사 한마디에 이준혁의 우울했던 기분은 순간 온데간데없이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