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어둑어둑한 게 윤혜인은 밤에 번개가 치며 비가 올까 걱정스러웠다.차 안에서 에어컨을 켜는 것도 가능하지만 얇은 담요 같은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게다가 이준혁은 건강이 좋지 않기에 차 안에서 자는 것은 더 좋지 않을 것이다.저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어떻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저 사람 걱정을 다 하고 있지?’그래서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며 말했다.“그게... 돌아가요. 나도 이제 잘게요.”이내 그녀는 커튼을 닫으려고 했지만 이준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소리야. 초인종까지 눌러야 해?”놀란 윤혜인이 차 쪽을 다시 보았지만 그는 이미 없었다.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는 이미 대문 앞에 서 있었다.“어떻게 들어왔어요?”윤혜인은 놀라서 물었다.별장의 대문은 얼굴 인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리 등록된 사람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었다.“아름이가 등록해줬어.”이준혁이 대답했다.‘이 배신자...’윤혜인은 속으로 생각했다.곧이어 이준혁이 그녀에게 말했다.“문 열어줘.”“알았어요.”윤혜인은 후회했지만 이미 말을 뱉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윤혜인은 털 슬리퍼를 신고 조심스럽게 카펫 위를 걸어 내려가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달빛 아래서 더욱 빛나는 것이 보였다.윤혜인의 심장은 잠시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항상 이 잘생긴 얼굴에 매료되는 자신을 질책했다.“들어와요.”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려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이준혁은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윤혜인은 연한 색의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레이스가 가장자리에 장식되어 있었다. 발에는 하얀 털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갓 세수를 마친 작은 얼굴은 깨끗하고 예뻤고 그녀의 몸은 분홍빛을 띠며 매력적이었다.그러자 우수 깊은 눈빛으로 이준혁이 말했다.“예뻐.”“뭐라고요?”윤혜인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자 이준혁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잠옷 너한테 잘
이준혁의 건조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다시 강하게 깍지를 끼웠다.갑작스러운 손깍지에 윤혜인의 심장은 마치 작은 사슴이 뛰는 것처럼 요동쳤다.‘쿵쾅쿵쾅’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한참 후에야 윤혜인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당신...”그때, 이준혁은 얼굴을 숙이더니 그 입술로 그녀의 귀 끝을 스쳐 지나가고 침도 꿀꺽 삼켰다.“홍 아줌마... 또 나왔어요.”정말로 문소리가 다시 들렸다.홍 아줌마는 주방 불을 끄지 않은 것을 잊고 나와서 불을 끄고 있었다.그러나 이준혁은 여전히 입술을 그녀의 귀 끝에 대고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귀를 부드럽게 덮었다.윤혜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 열은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그녀의 분홍빛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이준혁이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귀 끝에 입술을 가볍게 대자 별안간 찌릿찌릿한 아픔이 몰려왔다.윤혜인은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애썼다.‘방금 날 문 건가...’문이 닫히는 순간, 윤혜인의 귀는 여전히 찌릿찌릿했고 그녀는 눈이 촉촉해진 채로 그를 바라봤다.“당신, 당신...”“왜 그래?”이준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윤혜인은 말을 더듬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자신을 물었는지 묻는다는 건 너무 민망한 일이었다.만약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면 그녀는 소위 말하는 자기도취에 빠진 것은 아니냐며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입술을 깨문 윤혜인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정말?”이준혁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윤혜인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이준혁은 무심하게 말했다.“심장이 좀 빠르게 뛰는 것 같던데.”윤혜인은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무시했다.‘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가요.”그녀는 화난 듯이 말했다.하지만 한 발자국을 내디딘 순간,
공기가 점점 희박해지는 느낌이라 윤혜인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다행히 이준혁은 계속 그녀의 발을 주시하며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의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윤혜인은 갑자기 이준혁이 처음으로 자신의 발에 약을 발라준 기억이 떠올랐다.매번 그렇게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해주었고 조금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았다.이준혁은 약을 다 바르고 나서 그녀의 발목을 마사지해주었다.삔 것이 심하지 않아서 잘 처치하면 내일이면 나을 것이다.이준혁은 여전히 그녀의 발을 바라보았고 윤혜인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다 됐어요?”그녀가 물었다.“응, 다 됐어.”이준혁은 그녀의 발에 거즈를 붙여서 오염을 방지했다.이제 손을 놓아도 되는데 그는 놓기 싫었다.원래는 청결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모든 원칙이 무너졌다.계속해서 윤혜인의 발을 잡고 싶었다.이준혁이 손을 놓자마자 윤혜인은 말했다.“손 씻고 와요.”그 말에 이준혁은 실소했다. 자신은 전혀 꺼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먼저 꺼리니 말이다.그가 손을 씻고 돌아온 뒤, 윤혜인이 말했다.“3층에 있는 오빠 방에서 자요. 발소리 조용히 하고요.”“알았어.”이준혁이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만약 새 소식이 들려오면...”그러자 윤혜인은 급하게 말했다.“아니다. 그냥 여기서 자요.”이준혁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여기서 자라고?”“그래요, 소원이의 소식은 바로 알고 싶어요.”비록 이준혁이 소원에게는 아마 아무 일이 없을거라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마’라는 가능성이었지 확신이 아니었다.육경한은 예전부터 미친 짓을 많이 해왔던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은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육경한의 친구 아닌가. 정말 어떤 미친 짓을 한다 해도 이준혁이 윤혜인에게 사실대로 말해줄지 역시 알 수 없었다.결론적으로 그녀는 이준혁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리고 그 점을 파악한 이준혁은 마음이 아팠다.윤혜인은 그를 향해 말했다.“침대랑 이불 가져와요. 나
“잘 자.”이준혁은 그녀의 살짝 떨리는 속눈썹을 보며 눈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그가 내뿜는 따뜻한 목소리에 윤혜인의 가슴이 간질거렸다.“네.”그녀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이준혁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녀는 정말로 피곤했는지 금방 잠들었다.침실 안은 따뜻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서호 별장 밖에는 한층 더 서늘하고 무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멀리서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보였고 창문은 반쯤 내려가 있었다.차 안에서는 한 남자가 반쪽짜리 백색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왼손에는 순수한 검정색 가죽 장갑을 낀 채 낯선 기기를 들고 이준혁의 침실을 바라보고 있었다.이 기기는 얇은 커튼을 통과하여 안의 사람들의 행동을 볼 수 있었다.방 안에서 두 사람이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본 후, 남자는 가죽 장갑을 천천히 내렸다.곧이어.쨍그랑!남자가 손으로 창문을 부숴버린 것이었다. 가죽 장갑에는 유리 조각이 박혔고 운전자는 놀라서 외쳤다.“도련님!”남자는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장갑을 벗어 던졌다.손에는 피가 흥건했다.창백하고도 차가운 피부에는 이미 여러 개의 흉터가 교차해 있어 매우 무서웠다.하지만 그는 상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장갑을 끼었다.운전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남자의 얇은 입술이 움직였다.“가자.”차가 출발했다.남자는 2층 침실의 창문을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그러고는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 없이 말했다.“모두 내 것이야.”...따뜻한 침실 안에서 이준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그를 너무 믿고 있었다.이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했다.윤혜인은 단잠에 빠져있었고 그 부드러운 몸은 마치 독약처럼 중독성이 있었다.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하지만 이준혁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신뢰를 깨지 않기로 다짐했다.이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5년을
윤혜인은 정신이 혼미했다.이준혁의 몸이 그녀 위에 얹혀 있는 상황이 너무나도 야릇했다.특히 지금은 퍼런 대낮이 아닌가!그는 윤혜인의 눈을 바라보며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자세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가 팔로 지탱하며 몸을 가볍게 얹은 덕에 무겁지 않았고 단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윤혜인은 그의 팔에 얼굴이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그래서 이준혁의 얼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잠옷은 이러한 자세로 인해 넥라인이 넓게 열려 있어 복근과 근육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별이 빛나는 하늘을 장식한 것처럼 완벽했다. 윤혜인은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그의 쇄골을 바라보며 말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곧이어 아래로 시선을 돌린 이준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드러운 ‘풍경’이었다.그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윤혜인은 잠시 멍해졌다.‘이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니? 그냥 우연히 입술이 닿은 것뿐인데... 자기 입술이 뭐 그렇게 귀한가?!’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러면 어쩔 건데요.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은 팔에 힘을 풀며 3분의 2쯤 훅 내려와 그녀와 밀착되게 했다.그러고는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촉촉한 그 뜨거운 입술을 목적으로 하여 내려갔다.아무 예고도 없이, 그는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윤혜인은 천지가 뒤바뀌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남자의 무언의 침입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그의 긴 몸은 그녀에게 밀착되어 몸에 스며드는 기세로 윤혜인을 사로잡았다.윤혜인은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무엇을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이준혁의 무례한 입맞춤을 받아들여야 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유혹하자 윤혜인의 몸은 마치 물처럼 부드러워졌다.그 손이 갑자기 강하게 쥐어지면서 전기 충격
이준혁이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이제 더는 못 참겠어.”5년 동안 금욕 생활을 했고 지금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더는 성인군자가 되기 어려울 것 같았다.이준혁이 얼마나 그녀를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윤혜인도 결국 이준혁의 미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 되었다.이준혁은 다시 고개를 숙여 윤혜인의 볼과 귓불과 쇄골에 키스했다. 지나간 곳마다 키스 자국이 꽃처럼 피어났다.윤혜인은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메말랐던 몸에 숨겨져 있던 깊은 욕망이 끓어올랐다.이준혁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최대한 인내하며 참아내는 것 같았다.“혜인아, 너도 원하잖아. 나 속일 생각하지 마. 솔직히 아까 좋았잖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불에 달구기라도 한 듯 갈라져 있었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볼에서 귓불까지 사과처럼 빨개진 상태였다.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그녀도 원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어진 감정은 수치, 깊은 수치였다.이준혁에게 반응하는 몸이 너무 싫었다.이준혁은 윤혜인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키스했다.“혜인아, 나한테 맡겨. 더 편안해지게 해줄게...”그는 이렇게 말하며 윤혜인의 손목을 잡아 베갯머리로 올렸다. 차가운 입술로 귓불을 살짝 핥더니 그대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윤혜인은 이제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이준혁의 말처럼 그녀는 이미 극락을 느끼고 있었다.순간 윤혜인은 마음이 꽉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로서의 만족이었다.이런 일로 모든 걸 잠시 잊는 듯한 쾌락을 얻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그동안의 애증은 잠시 내려두고 원초적인 본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끝나고 나니 윤혜인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움직이기조차 싫었다.힘을 쓰는 사람은 분명 그녀가 아닌데 말이다. 이준혁이 전적으로 시중을 들면서 보듬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래도 몸 위로 타이어가 짓누르고
아쉽게도 이준혁은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친근하게 그녀의 코끝을 쓸어내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러더니 윤혜인을 번쩍 들어 올려 욕실로 향했다.“어...”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내려줘요.”두 사람은 지금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윤혜인은 어디를 만지든 이상한 것 같아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내가 씻는 거 도와줄게.”이준혁은 샤워 타올을 세면대에 잘 펴놓더니 이내 물을 내렸다. 그러고는 윤혜인을 욕조에 내려주었다.윤혜인은 자기가 이준혁의 불쌍한 척에 속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특히 그쪽 체력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좋았다.윤혜인은 욕조에서 반신욕을 즐기며 이준혁이 들락날락하는 걸 지켜보다가 아예 눈을 감았다.차라리 보지 않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샤워가 끝나자 이준혁은 다시 그녀를 침대로 안아다 줬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시트를 바꿨다는 것에 놀랐다.깔끔하고 나른한 시트에서 잠에 든다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이준혁이 부드럽게 말했다.“좀 자. 나도 샤워하고 올게.”한 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는 게 이준혁의 습관인지라 어제 올 때 이미 옷을 가지고 온 상태였다.윤혜인은 욕조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듣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이준혁이 분명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그녀가 자기를 받아들였다고 말이다.이준혁이 옷을 입고 나왔을 때는 윤혜인도 차분함을 되찾은 뒤였다.“준혁 씨, 나 할 말 있어요.”이준혁은 윤혜인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안 좋은 예감에 흥분이 반쯤 사라졌다.그는 까만 눈동자를 아래로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그래. 말해 봐.”“아까는 그냥 서로 필요한 걸 가져갔을 뿐이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이준혁이 고개를 들더니 상처받은 눈빛으로 되물었다.“상처?”윤혜인도 이 말이 나쁜 년이나 하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도 아까 일어난 일이 일시적인 충동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었다.구별이 안 된다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이 관계
윤혜인은 ‘좋아한다’는 말에 안색이 변했다.전에도 좋아한다는 말에 심하게 뎄던 그녀였다. 하여 차가운 눈빛으로 매정하게 말했다.“이준혁 씨, 원했던 거는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그냥 생리적인 수요일 뿐이에요. 꼭 이준혁 씨여야 된다는 법은 없어요. 너무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이준혁은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몸은 이미 그대로 굳은 상태였다.마음에 마치 무수히 많은 바늘이 꽂힌 것처럼 너무 아팠다.그저 생리적인 수요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사랑에 결벽증이 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꼭 그가 아니어도 된다니,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니, 이건 그를 능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윤혜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윤혜인 외에 다른 여자는 없다는 걸 말이다.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이미 만족했으니까 나를 다시 뻥 차버리겠다는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이 너무 질척거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원의 일을 아직 부탁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모질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나는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나 혼자 좋았던 것도 아니잖아요. 준혁 씨도 좋았잖아요. 아니에요?”이준혁은 가슴이 먹먹한 게 아팠다.‘좋았다라.’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좋았다니 그럼 한 번 더 하지 뭐.”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더니 윤혜인을 번쩍 안아 침대에 던졌다. 까만 눈동자는 음침하기 그지없었다.윤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준혁의 모습이 아주 예전에 봤던 모습과 겹쳤다. 지금 그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이준혁 씨, 내가 원해야만 가능해요.”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이준혁이 윤혜인의 손목을 꽉 잡고 침대에 눌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원하는 걸 얻는 사이라며? 나 지금 너 원해.”깜짝 놀란 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발길질했다.“나는 싫어요. 이준혁 씨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