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좋아한다’는 말에 안색이 변했다.전에도 좋아한다는 말에 심하게 뎄던 그녀였다. 하여 차가운 눈빛으로 매정하게 말했다.“이준혁 씨, 원했던 거는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건 그냥 생리적인 수요일 뿐이에요. 꼭 이준혁 씨여야 된다는 법은 없어요. 너무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이준혁은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몸은 이미 그대로 굳은 상태였다.마음에 마치 무수히 많은 바늘이 꽂힌 것처럼 너무 아팠다.그저 생리적인 수요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사랑에 결벽증이 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꼭 그가 아니어도 된다니,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니, 이건 그를 능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윤혜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윤혜인 외에 다른 여자는 없다는 걸 말이다.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차갑게 물었다.“그러면 이미 만족했으니까 나를 다시 뻥 차버리겠다는 거야?”윤혜인은 이준혁이 너무 질척거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원의 일을 아직 부탁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모질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나는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나 혼자 좋았던 것도 아니잖아요. 준혁 씨도 좋았잖아요. 아니에요?”이준혁은 가슴이 먹먹한 게 아팠다.‘좋았다라.’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좋았다니 그럼 한 번 더 하지 뭐.”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더니 윤혜인을 번쩍 안아 침대에 던졌다. 까만 눈동자는 음침하기 그지없었다.윤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준혁의 모습이 아주 예전에 봤던 모습과 겹쳤다. 지금 그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이준혁 씨, 내가 원해야만 가능해요.”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이준혁이 윤혜인의 손목을 꽉 잡고 침대에 눌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원하는 걸 얻는 사이라며? 나 지금 너 원해.”깜짝 놀란 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발길질했다.“나는 싫어요. 이준혁 씨
윤혜인이 한참 침대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아직 소원의 일을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이준혁이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다.소원이 육경한과 같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찾기는 쉬울 것 같았다.육경한이 병원에 가지 않은 것도 소원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병원에서 그런 상처를 보면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윤혜인은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준혁이 육경한은 소원을 해칠 리 없다고 한 말이 맞는 것 같았다.윤혜인이 도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육경한이 살만한 곳이 어딘지 조사해 보라고 말이다.이때 홍 아줌마가 올라와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했다.윤혜인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거울 앞에 마주 섰다가 흠칫 놀랐다.하얀 목덜미에 크고 작은 키스 마크들이 가득했다.이준혁은 마치 푸딩을 먹는 것처럼 정신없이 그녀의 목을 공략했던 것이다.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윤혜인은 착잡한 심정으로 옷장을 열어 복고풍 레이스 블라우스를 꺼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키스 마크는 가려지지 않았다.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윤혜인은 스카프를 꺼냈다. 그러자 뭔가 더 이상해 보였다.식탁으로 온 윤혜인은 곽아름을 안고 있는 남자를 보고 넋을 잃었다.이준혁이 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아까 분명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지금은 곽아름을 안고 고구마를 까주고 있었다.홍 아줌마는 윤혜인이 멀뚱하게 서 있자 이렇게 해명했다.“대표님이 아침 일찍 오셔서 아름이랑 아침 식사하겠다고 해서요.”식탁에 앉은 두 사람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다.곽아름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엄마, 빨리 와서 앉아요.”윤혜인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곽아름은 까놓은 고구마를 윤혜인에게 내밀며 활짝 웃었다.“엄마, 아빠가 까준 고구마인데 한 번 먹어봐요.”윤혜인은 아직 경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터라 이준혁을 힐끔 쳐다봤다.이준혁은 그런 윤혜인을 보지 않고 곽아름을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고구마만 계속 깠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
“아빠, 무슨 모기가 그렇게 커요? 아름이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본 적 있을 텐데?”“근데 왜 그렇게 크게 물었대요?”이준혁이 맞은편에 앉은 윤혜인을 힐끔 보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많이 배고팠나 보지.”“...”이 말에 윤혜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도대체 애한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5년 동안의 금욕 생활에 미쳐버린 건 이준혁뿐만이 아니었다.극락이 무엇인지 체험해 본 사람들이었기에 윤혜인도 처음엔 흐리멍덩했을지 몰라도 금단의 열매에 다시 손을 대니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갔다.이른 새벽, 이준혁의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힘들면... 나 물어... 알았지... 너 자신을 깨물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분명히 이준혁이 먼저 이렇게 말했다.곽아름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빠, 그러면 미리 배부르게 먹여요. 그래야 이렇게 힘껏 안물지.”이준혁이 곽아름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배부른게 뭔지 모르는 대왕 모기였다.이준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그래, 알았어.”윤혜인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마른기침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름아, 죽 먹어.”그러면서 이준혁을 매섭게 째려봤다.‘애한테 이상한 것만 가르쳐주네.’이준혁도 따라서 죽그릇을 들더니 호호 불어 곽아름에게 떠먹여 줬다.“아름이 착하지. 밥 많이 먹어야 모기한테 안 물린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이준혁이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곽아름만 계속 재잘재잘 말했고 윤혜인은 거기에 맞장구를 쳤다.이준혁은 아이를 달래는 건 참 잘했다. 매번 아름의 식사를 챙길 때마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먹는 게 눈에 보였다.이준혁은 아빠로서는 제격인 것 같았다.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윤혜인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위험한 생각은 애초부터 싹을 자르는 편이 좋다.뜬금없이 고개를 젓는 윤혜인을 보고 이준혁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 말에 맞은편이 조용해졌다.고개를 들어보니 이준혁은 이미 가고 없었다. 그대로 가버린 것이다.순간 윤혜인의 마음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서글펐다.마치 예전에 이준혁에게 무참히 버려지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바보같이 뭘 또 기대한 거야...’윤혜인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순간 정신을 차리고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이 한심했다.기대가 없어야 더 단단해질 수 있다.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쪽에서 경적이 들려왔다.반쯤 내려진 차창으로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그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안 타고 뭐 해?”윤혜인은 그가 갔다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사실 이준혁이 아까 그렇게 나간 건 차를 빼려고 나간 것이었다.윤혜인은 착잡한 눈빛으로 이준혁을 쳐다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차에 올랐다.가는 내내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윤혜인은 아직 아까 버려졌던 슬픔에 잠겨 있었다. 마음이 너무 뒤숭숭했다.이준혁은 우울해 보이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봤다. 윤혜인은 지금 온몸으로 이준혁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준혁의 마음도 따라서 우울해졌다.잘 보이려고 2시간을 공들여 시중했는데 결국 그녀는 서로 원하는 부분을 채우는 사이라고 말했다. 그가 만약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했다면 지금쯤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했을 것이다.이준혁은 오늘 윤혜인을 달래주지 않기로 했다. 결국 달래는 데 실패할 텐데 계속 들이대기도 그랬다....차가 한 별장 앞에 멈췄다.문 앞에 까만 슈트를 입은 보디가드가 지키고 있었다.윤혜인은 동떨어진 별장을 보며 그 별장이 소원을 가두는 감옥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입구에 도착하자 보디가드는 이준혁을 알아보고 그냥 들여보냈지만 처음 본 윤혜인을 보고는 몸수색하겠다고 했다.이에 이준혁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 보디가드를 쳐다보며 말했다.“내 사람이야.”이 말에 윤혜인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보디가드가 망설이는데 이준혁이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달래기 쉽다고?”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다른 여자를 달래본 적이 없어서 달래기 쉽다는 표준이 뭔지도 몰랐다.육경한이 말했다.“전에 임세희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도 혜인 씨는 별로 신경 안 쓰고 용서해 줬잖아. 그게 달래기 쉬운 게 아니면 뭐야?”이준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투로 물었다.“내가 임세희를 잘해줬다고?”이준혁은 아무런 정성도 힘도 들이지 않고 물질적인 만족만 주는 건 잘해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돈은 그에게 제일 가치 없는 물건이었다.오직 윤혜인만 지치지 않고 계속 달래줬지만 윤혜인은 그 마음을 몰라줬다. 그것도 모자라 그를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말했다.육경한은 뻣뻣해진 팔을 움직이며 덤덤하게 말했다.“나도 알아. 너한테 잘해준다는 의미가 뭔지. 그리고 물질적인 거를 제일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도 다 알아. 하지만 여자의 생각은 남자랑은 달라. 신경 쓴다는 건 좋은 일이야. 질투한다는 뜻이고 아직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이야. 말만 그렇게 해서 그렇지.”이 말에 이준혁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사실 윤혜인도 보이는 것만큼 매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질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마음과 반대로 말하는 건 있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창백한 육경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다 아는 사람이 왜 소원 씨랑은 그렇게 된 거야?”“상황이 다르다니까.”육경한은 씁쓸하게 웃었다.“내가 한 잘못은 되돌릴 수 없어.”육경한과 소씨 가문 사이에 있었던 비즈니스 경쟁과 거기에 사용한 수단을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육경한도 그렇게 자세히 말해줄 리가 없었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친구들이 깜짝 놀라긴 했다. 육경한과 관련된 일이라는 걸 모르긴 해도 말이다. 만약 정말 관련되어 있다면 이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이다.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경한아,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 노력해도 안 되면 그냥 놓아주는 게 맞아.”“소원
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주변을 살피더니 엿듣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지한 표정으로 윤혜인에게 귓속말했다.“작업실에 약 하나 보냈거든. 수령인에 네 이름을 적었다. 3일 뒤에 금오구 120번지 옆에 있는 골목에 있는 빨간 기와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전해줘.”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무슨 약이기에 이렇게 비밀스러운지 궁금했다. 그리고 윤혜인은 소원에게 남은 가족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전에 있던 친척들은 하나같이 흑심을 품고 소원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기 전에 건질만한 것들을 다 건지고 도망갔다.할머니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소원이 말했다.“혜인아. 이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돼. 이준혁 씨도 안 돼.”이준혁과 육경한은 친한 친구였기에 이준혁이 알면 유진은 숨어있을 곳이 없게 된다.윤혜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지해 보이는 소원의 표정에 이 일이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꼭 가져다줄게.”소원이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울먹이며 말했다.“혜인아, 고마워. 뭘 보든 놀라지 말고. 내가 앞으로 다 설명해 줄게.”“그래. 우리 사이에 뭔 인사야.”“갈 때 미행 조심해. 육경한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늦어서 4일이야. 그전에 꼭 할머니 손에 넘겨줘야 해. 그거 목숨 살리는 약이야...”소원은 모든 희망을 윤혜인에게 거는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뒤에 서 있기에 들킨다 해도 윤혜인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육경한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은 달랐다. 육경한 그 미친개는 무슨 짓이든 해낼 수 있다.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못했는데 집사가 소원을 찾아왔다.“소원 씨, 도련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소원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알았어요.”윤혜인은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소원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소원아, 내가 이준혁 씨한테 말해볼게. 네가 얼른 이곳을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육경한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앞으로 절대 서현재랑 절대 만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아니면 서현재 절대 가만 안 둬.”소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소원은 서현재가 서씨 가문으로 돌아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육경한이 그를 괴롭히기 전에 고민을 한 번 더 해볼 것이다.“설마 그 개자식이 서씨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육경한은 소원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는 소원의 턱을 으스러지게 잡고 힘껏 당겼다.“소원아, 네가 얕잡아보는 게 누군지 똑똑히 봐.”소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육경한, 너는 나 협박하는 거 빼고 할 일 없지? 달리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비열한 수단 쓰는 거 아니야?”육경한이 차갑게 웃었다.“어떤 방법이든 잘 먹히면 되지.”그는 비열한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쓰러져가던 유민 그룹을 지금의 강대한 모습으로 바꾸기까지, 성공의 비결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육씨 가문을 철저히 손아귀에 넣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지금은 그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소원을 남기려 한다. 육경한이 점찍은 여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나랑 현재는 말 그대로 그냥 친구야. 네가 더럽다고 다른 사람도 그런 건 아니야.”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사실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소원은 그를 원망하고 있긴 하지만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거짓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내 옆에만 있으면 절대 상처 주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어.”“좋은 소식?”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육경한, 지금 내게 좋은 소식이 뭔지 알아? 네가 우리 아빠 죽인 거, 그 대가를 치르는게 제일 좋은 소식이야.”육경한은 이미 이 말에 내성이라도 생긴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개자식이.소원이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내가 부서트리는 게 무섭지 않다면 얼마든지.”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모습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다.그는 소원을 꽉 잡고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난 안 무서워. 그러면 복수할 기회가 없어지는데 아쉽지 않아?”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육경한은 정말 제대로 미친 것 같았다.“...”“이런 짐승 새끼.”소원의 팔은 어느새 뻣뻣해졌지만 그래도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렇게 욕했다.육경한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지만 숨결은 이미 흐트러진 상태였다.“네 앞에서 짐승이 되는 건 개의치 않아.”“...”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소원은 육경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손바닥은 어느새 빨갛게 부어오른 상태였다.소원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다 못해 저렸고 입술도 너무 꽉 깨문 나머지 핏기가 없었다.소원은 육경한에게서 벗어나자마자 그의 상처를 꾹 눌렀다.육경한은 아파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아까 정점까지 치달았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해 힘들었는데 소원이 상처를 꾹 누르자 아프면서도 욕구가 해소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육경한, 너 너무 더러워.”육경한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 더 찔러. 이자 받는 셈 치고.”소원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손을 들어 육경한의 귀싸대기를 날리려는데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고 상처로 가져갔다.육경한은 소원의 손을 상처에 대고 꾹 눌렀다.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은 덤덤하면서도 매정해 보였다.“이 정도면 분이 좀 풀려?”육경한의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평온함 속에 파국이 연상되어 숨이 막혀왔다.상처가 갈라지며 피가 줄줄 새어 나와 소원의 손을 물들였다.소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정말... 미쳤어...”육경한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소원의 손을 붙잡고 계속 힘주어 눌렀다.마치 소원의 손을 금방 봉합한 상처로 밀어 넣어 심장이라도 꺼낼 것처럼 말이다.“나 증오한다며? 괴롭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고 표정조차 변화가 없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소종이 입을 열었다.“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작은 도련님이 간신히 밝아졌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육경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소종의 말을 묵인하는 듯 말이다.이제 됐다 싶어 소종은 긴 숨을 내쉬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육경한이 이번에 얻은 상처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친 그가 이제는 소원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지금과 같이 냉정한 사람은 마음이 다치면 자신을 철저히 닫아버린다.육경한의 모습은 그야말로 심장이 죽은듯한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남자는 가장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이제 마음도 몸도 여기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붙잡는 건 양쪽 모두를 아프게 할 뿐이었다.소원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서현재 역시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육경한이 많이 참은 셈이었다.육경한이 물어보지 않았기에 소종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대신 육경한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여러 번 말을 해봤지만 소원은 전혀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진정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이었다.소종은 소원이 방민아가 유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유진의 상태를 더 꼼꼼히 살피고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방민아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다만 소종은 방민아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잠시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다.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야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방민아 씨가 과연 유진이를 자신의 자식처럼 대할 수 있을까? 자기 아이를 갖게 되면 유진이에 대한 태도가 변하진 않을까?’소종이 이런저런 생
소원은 방민아와 이런 복잡한 말싸움을 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연기를 하듯 감정을 숨기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방민아 씨, 아주머니를 만나볼 수는 없나요?”“그건... 방금 경한 씨한테 전화했잖아요? 경한 씨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소원 씨.”방민아는 곤란하고 미안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사실 소원이 대문 앞에서 보인 모든 행동을 방민아는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소원이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한 모습을 보며 방민아는 확신했다.이제 자신이 육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완전히 굳혔다고.방민아는 속으로 생각했다.‘다행히 연주의 말을 믿고 소원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어. 그냥 현명한 아내이자 자상한 엄마처럼 행동했더니 효과가 좋네. 경한 씨도 이제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어. 소원? 이제 별로 두려워할 존재도 아니지.’소원은 한숨을 삼키며 자세를 낮추어 물었다.“그럼... 유진이랑 통화라도 할 수 있을까요?”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방민아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소원 씨, 그건 저도 힘들 것 같네요. 경한 씨가 소원 씨가 유진이와 접촉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거절당한 소원은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했다.방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소원 씨, 제가 기회를 드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오늘 밤 일하러 가세요. 기분이 좋으면 유진이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죠.”이 말에 놀란 소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말인가요?”“그럼요.”방민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경한 씨가 없을 땐 이 육씨 가문내 일이 다 제 손에 달려 있으니까요.”소원은 방민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육경한은 집안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내부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좋아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하지만 유진이를 반드시 만나게 해줘야 해
소원은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렸지만 두 명의 건장한 보안요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보안요원은 그녀를 끌고 가면서 말했다.“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습니다. 저희는 월급 받는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누구도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제발 좀 협조해 주세요.”소원은 필사적으로 외쳤다.“제 아이가 위험해요! 경찰 부를 거예요, 경찰 부를 거라고요!”그러자 보안요원은 피식 비웃었다.“지금 농담하세요? 작은 도련님은 매일 베란다에서 뛰어놀 만큼 건강해 보이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혹시 망상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에요?”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안도했지만 마음속의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보안요원은 이어서 말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경찰이 이런 걸 받아주지도 않을 겁니다. 신고해 보세요. 아마 처음에 잡혀갈 사람은 그쪽일 겁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갈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도련님은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방민아 씨는 정말 좋은 새엄마예요. 얼마나 세심한지 매일 작은 도련님을 돌보러 오신다니까요.”소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방민아는 결혼 전까지는 유진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라면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지금 아주머니를 건드린 것도 육경한의 반응을 떠보는 일환이라 확신했다.육경한이 아주머니의 병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유진이의 위험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아니, 육경한이 아주머니를 걱정하더라도 방민아의 속셈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이 모든 것은 소원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사란 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의 가능성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갑자기 소원이 크게 외쳤다.“방민아 씨! 나와요! 방민아 씨, 당장 나와요!”보안요원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소원은 두 보안요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대문 앞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며 계속 외쳤다.“방민아 씨! 방민아 씨!”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소원은 일부러 유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혹여 유진이가 자극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유진이는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소원은 아이의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신중했다.소원은 입을 열어 크게 외쳤다.“백씨 아주머니! 백씨 아주머니, 계세요?”몇 번 부르지 않았는데 보안요원이 달려와 그녀를 막았다.“여기서 이렇게 소리치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주거 지역이에요. 계속 그러시면 강제로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보안요원의 말투는 점점 공손함을 잃어가고 있었다.상대가 까다로운 사람이든 아니든 겁낼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행동을 보니 그녀가 육 대표님과 친분이 깊을 리는 없어 보였다.만약 친분이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테고 육경한이 이미 문을 열어줬을 것이다.그러나 소원은 보안요원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말했다.“오늘은 반드시 아주머니를 만나야 합니다. 아주머니 이름 부르는 게 싫다면 백해란 아주머니가 여기 계신지만 확인해 주시면 돼요. 확인만 해 주면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보안요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런 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는 저택 안에 들어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렇게 계속 소리 지르시면 지금 당장 내보낼 겁니다.”보안요원의 태도는 한층 강경해졌고 소원은 이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아주머니와 연락이 끊겼어요. 걱정돼서 왔습니다. 오늘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하면 저는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 그쪽들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렇게 하죠. 아주머니가 계신지 확인하고 그분이 저에게 전화만 주시면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어때요?”소원의 이 말은 어느 정도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타협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보안요원들은 상황을 재빨리 판단해야 했다.안으로 들어가 관리인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건 큰일이 아니었지만 이 여자를 억지로 끌어내렸다가 경찰에 신고라도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
소원은 소종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육경한 있나요?”“없습니다. 대표님은 회의 중이에요.”이어 소원이 말을 꺼내려 하자 소종이 말을 끊었다.“대표님은 지금 소원 씨가 저지른 일 수습하느라 바쁘십니다. 소원 씨, 지난번 결혼식에 용감히 난입했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대표님이 어떤 심정으로 소원 씨를 그곳에서 데려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서씨 가문과의 협력이 몇 건이나 엎어졌습니다. 물론 서씨 가문에서 먼저 끊은 건 아니에요. 대표님이 그 서씨를 못마땅해하셔서 직접 협상 테이블을 뒤엎었거든요. 뭐, 그때는 속 시원했지만 지금은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밤낮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다친 몸으로 말이죠.”소원은 소종이 이렇게 말이 많았던 적이 있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얘기만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육경한이 무슨 일을 하든 소원은 관심 없었다.서씨 가문의 테이블을 뒤엎든 말든 그건 소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씨 가문의 재산은 서현재에게 돌아갈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오히려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함부로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하지만 지금 소원의 머릿속은 오로지 유진이의 안위뿐이었다.유진이 안전한지가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소 비서님, 육경한한테 전화 좀 바꿔줄 수 없을까요? 정말 급한 일이 있습니다.”그러자 소종은 비웃듯 물었다.“대표님더러 일하다 말고 소원 씨 전화를 받으라는 말씀이세요?”소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정말 급한 일이에요...”하지만 소종은 또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소원 씨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는 이어서 말했다.“소원 씨가 대표님에게 연락해서 좋은 일로 이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연락하지 않아도 소원 씨와 관련된 일은 항상 문제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우리 대표님은 매번 소원 씨의 뒷수습을 하느라 애쓰시네요.”“이번
차에 탄 뒤, 소원은 다급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경원 별장으로 가 주세요.”경원 별장은 육경한의 대저택으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택시는 산기슭까지만 갈 수 있었는지라 운전기사가 말했다.“아가씨, 그 대저택은 우리 같은 택시가 올라갈 수 없게 막혀 있습니다. 혹시 위에서 허가를 받은 게 있으신가요? 그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들어가길 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자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어쩔 수 없네요.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셔야 할 것 같네요.”결국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요금을 지불한 후 차에서 내렸다.운전기사는 소원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또 어떤 남자한테 상처받고 찾아온 여자겠지.’이 산 중턱에는 몇몇 재벌 가문의 대저택들이 모여 있었기에 운전기사는 궁금했다.‘과연 어느 재벌 2세가 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게다가 저 산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텐데.’소원은 첫 번째 보안 초소에 도착했다.이곳은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지만 소원은 육경한 집의 출입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이 비밀번호는 과거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몰래 알려준 것이었다.혹시나 유진이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소원이 들어가지 못해 문제라도 생길까 봐 미리 대비해둔 것이다.그렇게 소원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는 꽤 긴 거리였다.체력이 약한 데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걸어가야 했기에 소원은 정말 힘들고 지쳤다.이런 대저택에서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집안 관리인들조차도 전용 차량을 이용했기에 두 발로 이동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40분 넘게 걸어가서야 소원은 경원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대저택의 정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소원은 문을
하지만 유진은 특별한 아이였고 아줌마는 몇 년 동안 유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유진에게는 할머니가 없었지만 유진은 늘 아줌마를 할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소원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답장했다.[아줌마, 유진이 목소리 너무 오래 못 들어서 그러는데 목소리 좀 들려줘요.]그쪽은 답장이 매우 빨랐다.[아가씨, 다음 기회에 몰래 녹음해 드릴게요. 다른 도우미들이 한눈을 팔아야지만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잘 지내고 있고 아가씨 얘기도 거의 안 꺼내고 있어요.]소원은 경거망동하기 싫어 더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아줌마의 마지막 한마디는 사실 매우 불필요한 말이었다. 아줌마는 소원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진이 이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얘기는 소원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도 너를 버렸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말과 같았고 소원에겐 무조건 자극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아줌마가 소원을 따라다닌 지도 어언 7년이었고 거의 가족처럼 힘든 일 궂은일 다 같이 했다. 아줌마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 어떤 약점도 없었고 누군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고 해서 유진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소원은 이것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7년 만에 갑자기 변할 일은 없었고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지금 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줌마는 예전의 아줌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만약 아줌마를 빼돌린 거라면 아줌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소원은 전에 육경한에게 유진은 아줌마 없이 안 된다고 말했고 육경한도 아줌마를 잘 챙겨주겠다고, 다른 시터가 있어도 아줌마가 홀대로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소원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한참 지나 그쪽에서 영상을 하나 더 보내왔다. 유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시곡을 외우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와. 우리 유진이
아줌마가 보낸 건 유진의 근황 사진이었다. 옷도 계절에 맞춰 입었고 얼굴도 발그스름한 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소원은 약간 게걸스럽게 사진 속 유진을 바라봤다. 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유진을 보면 육경한이 떠올라 유진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유진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육경한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감정이 섞여 있으니 소원은 정서가 안정적인 엄마가 될 수 없었다.심리상담 주치의는 소원에게 유진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소원이 테스트를 통과해 아이 앞에서 정서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소원은 그 말에 따랐다.떨어져 지낼 때면 소원은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매번 새로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그 어떤 디테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봤다.소원은 아줌마가 보내온 사진을 부드럽고 따듯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육경한이 아이를 잘 돌볼 수만 있다면 양육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저 이렇게 뒤에서 유진의 성장을 지켜보며 유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가끔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유진은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소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에 소원은 유진이 새로운 가정을 더 좋아해 정서가 불안정한 엄마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며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이제 멀리서 유진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유진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별수 없이 손을 놔야 할 것이다.소원은 유진을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개체로 보며 유진을 존중하고 유진의 모든 생각을 존중했다. 사진을 조금 더 보고싶어 유진의 귀여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의도치 않게 사진의 아랫부분이 확대되었다. 소원의 얼굴을 보고싶어 다시 위로 올리려던 소원이 눈을 무언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