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육연주는 소원을 한참 동안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육경한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소원은 표준적인 여우상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눈꼬리가 길며 은은한 직장인 화장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의 차림이었지만 어딘가 사람을 유혹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육연주는 웃으며 말했다.“삼촌,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숙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셨네요.”여자가 ‘숙모’라고 부르며 웃는 소리가 소원의 귀에 매우 거슬렸다.그녀는 육경한이 미소를 짓기 전에 반박했다.“그런 거 아닙니다.”그러자 육경한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육연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언니, 화내지 마세요. 삼촌이랑 농담한 것뿐이에요.”곧이어 그녀는 의자를 당기며 말했다.“삼촌,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앉아요.”육경한은 아무 말 없이 동의했고 소원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자리에 앉은 후, 육연주는 옆의 의자를 서현재에게 내밀며 말했다.“현재 씨, 앉아요.”서현재까지 앉자 네 명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육연주는 육경한과 마주해 앉았고 소원은 서현재와 마주 앉았다.이때, 향긋한 버섯 닭죽이 나왔다.그 냄새를 맡은 육연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겠다. 현재 씨, 우리도 이거 먹어요.”그러자 서현재는 냉담하게 말했다.“연주 씨 먹어요. 난 괜찮으니까.”“정말 안 먹어요? 현재 씨 저녁도 별로 안 먹었잖아요.”서현재는 냉정하게 말했다.“안 먹어요.”육연주는 서현재의 차가운 옆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마음과 약간의 수줍음을 느끼며 말했다.“그럼 우리 같이 한 그릇 먹을까요?”이 말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주 친밀해 보인다는 느낌을 주었다.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소원은 빠르게 서현재의 얼굴을 한 번 스캔했지만 죽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서현재의 냉정하고 섬세한
“너 예전에 나한테 매일 만들어주던 거 기억하지? 이 집 죽은 네가 만든 것만큼 맛있진 않지만 내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맛이야. 네가 없을 때 나 자주 여기 와서 먹었어.”그 얇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은 소원을 향한 육경한의 깊은 애정을 담고 있었다.한 여자를 매우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순간 드러난 것이다.육경한은 원래 말이 없었기에 육연주는 오늘 많은 비밀을 듣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놀라서 물었다.“삼촌, 언니랑 오랫동안 알고 지냈어요?”육경한은 차분하게 지시했다.“소원 언니라고 불러.”“소원 언니.”육연주는 입을 가리며 말했다.“이분이 바로 소원 언니셨구나...”‘삼촌이 10년 동안 사랑했다던 그 사람이잖아!’온 얼굴에 놀라움을 드러낸 채 육연주가 말했다.“드디어 삼촌을 이렇게 홀린 여성분을 보게 되었네요.”이 말에 현장에 있던 두 사람은 모두 심장이 흠칫했다.소원은 육연주가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만약 육경한이 그녀를 사랑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라면 그는 정말로 미친 사람이었다.죽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모든 사람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때문에 아무도 서현재가 주먹을 하도 꽉 쥔 탓에 손끝이 하얗게 변한 것을 보지 못했다.맑은 눈은 연기 속에서 흐려졌고 한 테이블의 거리가 그를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나누는 것 같았다.버섯 닭죽 냄새를 맡은 소원은 또다시 역겨워졌다.안색이 점점 나빠지고 손도 힘껏 뿌리치려 했다.그리고 그녀의 이 본능적인 거부 반응은 육경한의 검은 눈빛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육경한의 얼굴이 차가워질수록 그가 가진 치명적인 매력은 더욱 뚜렷해졌다.그런 사람들은 웃지 않을 때 더 매력적인 법이다.이 매력이 위험한 눈빛과 결합되면 서울 절반 이상의 여자를 매혹시킬 수 있다.지나가는 종업원들은 얼굴을 붉히며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잘생긴 남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육연주는 이런 시선에 익숙했다.육경한은 항상 매우 잘생겼다. 하지만 그 잘생김은 차가운 색이었다.너무 차가
솔직히 육경한 같은 잘생긴 삼촌을 두고 있다면 일반 남자들은 육연주의 눈에 들기가 어렵다.많은 재벌가 남자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는 아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직 서씨 가문에 막 돌아온 사생아 서현재에게만 마음을 빼앗겼다.모두가 서현재의 신분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서씨 가문은 명문가이지만 서현재는 서진태의 혼외 자식으로 신분이 매우 애매했다.서씨 가문의 현재 후계자, 즉 서현재의 형은 이미 마흔이 넘었는데 갑자기 스무 살 차이 나는 동생이 나타났으니 이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비록 그 형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서진태는 서현재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다.그렇게 한 연회에서 육연주는 서현재와 우연히 만났고 그 이후로 그녀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그녀는 육경한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서씨 가문에서는 바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의 만남을 제안했다.육연주는 서현재의 맑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좋아하는 마음이 솟구쳐올라 용기를 내어 숟가락을 들어 서현재에게 건넸다.“현재 씨, 한 번 먹어봐요.”서현재는 눈이 멍한 상태로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얼굴이 빨개진 채 육연주는 수줍게 숟가락을 그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현재 씨, 먹어보...”그러나 다음 순간.“팍!”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다!육연주는 손가락에 뭔가 맞은 느낌이 분명히 들었지만 믿기지 않는 눈으로 서현재를 바라보았다.‘현재 씨가 정말 내가 준 숟가락을 내친 거야?’그러나 여전히 육연주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서현재는 목젖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미안해요. 못 봤어요.”그제야 당황한 표정을 잠시 진정시키며 육연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이 소란스러운 광경이 육경한의 주의를 끌었다.“연주야, 무슨 일이야?”그는 육연주에게 물었지만 그 차가운 눈빛은 서현재를 바라보고 있었다.육연주는 웃으며 말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제가 숟가락을 제대로 못 잡아서 옷에 쏟았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아름다움을
소원의 손은 점점 더 강하게 쥐어졌고 가슴속의 불쾌함도 점점 더 강해졌다. 육경한에게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육경한은 소원의 창백해진 손을 보며 한 마디씩 뱉었다.“사생아 주제에 우리 육씨 가문에 엮이려 하다니... 저 사람이 운이 좋은 거야.”“삼촌, 제발 작은 소리로 말해요!”육연주는 서현재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저 사람이 네 손발이 되어주는 게 넌 좋아?”육경한은 소원에게 갑작스레 물었다. 눈빛과 고개를 돌리는 동작, 말투 모두 소원에게 묻는 것이었다.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육연주가 곧 말을 하려는데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멈추고 말았다.“콜록콜록...”소원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차갑게 말했다.“그러게 왜 서둘러. 게임은 천천히 즐겨야지...”그는 이 말을 무슨 의미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웩...”소원이 갑자기 구역질을 하자 육경한의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했다.다음 순간, 소원은 토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육경한에게로 쏟아지고 말았다!버섯 조각과 닭고기가 전혀 소화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 토해 내지자 육경한의 얼굴에는 극도로 불쾌한 감이 드러났다.위가 매우 불편했는지라 소원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또 한 번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우웩...”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가리고 화장실로 달려갔다.육경한은 자신에게 묻은 죽 냄새를 맡으며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그때, 종업원이 다가와 말했다.“손님, 저희 가게에 응급처치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샤워하실 수 있습니다. 들어가셔서 옷을 갈아입으시겠어요?”그러자 육경한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종업원이 차에서 옷을 가져오는 동안 육경한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육연주도 함께 처치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한편 소원은 화장실에서 그 한 그릇의 버섯 닭고기 죽을 전부 토해냈다.그러나
이 말을 끝내자 주변 공기가 마치 죽은 듯이 정적에 휩싸였다.그러나 서현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날 신경쓰지 않는다고요? 누나가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거 나 다 알고 있어요.”그녀는 자신이 진심이 아닌 말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엄지손가락으로 검지의 손톱을 누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이 무의식적인 행동은 서현재의 미소가 더욱 환해지게 했다.그녀가 자신을 일부러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후, 서현재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소원은 깜짝 놀라며 서현재가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약간 붉어진 눈가로,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했다.“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알겠니? 나는 네 도움이 필요 없어!”그녀는 서현재가 왜 훌륭한 의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서씨 가문이라는 복잡한 곳으로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서현재의 신분에 대해 그녀도 전에 추측한 적이 있었다.그가 해외에 있을 때 항상 보디가드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그 보디가드들은 고액의 페이를 받는 보디가드였지만 서현재가 고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래서 누군가가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밖에 설명이 가능하지 않았다.그녀는 서씨 가문의 복잡한 상황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육연주가 최근 서씨 가문에 돌아온 사생아를 좋아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 사람이 서현재일 줄은 몰랐다.서씨 가문은 명성이 나빴고 내부는 거의 혼란 그 자체였다.그녀는 서현재처럼 맑은 사람은 오염되기를 바라지 않았다.“쓸모없는 짓 같은 거 안 해요!”서현재는 이곳이 얘기를 나눌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밤 12시, 예전 장소에서 기다릴게요.”그러자 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안 가.”하지만 서현재는 그녀의 거절과 상처에 익숙해진 듯 했다.“그럼 매일 밤 갈 거예요.”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소원을 뒤로하고 서현재가 또 입을 열었다.“방금 그 죽 안에 생
소원의 머릿속이 마치 청천벽력에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뭘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혼란스러운 생각들 때문에 그녀는 육경한이 강하게 키스하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붉고 촉촉한 입술은 치명적인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소원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어도 그 매력은 육경한에게 있어서 여전히 100%였다.그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갈망했다. 수많은 긴 밤,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 살아왔다.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농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녀를 용서했다.소원이 자신을 미워한다면 그는 그녀가 화를 풀게 두었고 소원이 상처를 주고자 하면 그는 심지어 칼을 건넬 수도 있었다.그러나 그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녀의 전반 생애의 마음은 자신을 사랑하는 데 썼고 후반 생애는 자신을 미워하는 데 쓴다고 해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러나 그녀가 다른 남자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그는 L 국에 갔었다. 그녀가 한때 살았던 곳, 그녀가 새 삶을 시작한 곳이었다.그리고 그녀가 ‘SU'라는 가명으로 젊은 교수와 함께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주말에는 헤븐 비치를 산책하고 광장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함께 장을 보기도 했다.게다가 그들에게는 아이도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와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이웃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이를 거의 밖에 데리고 나오지 않았고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 아이는 매우 작고 여려서 세 살도 안 되어 보였다고 한다.그가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울 때, 소원은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함께 육경한을 속인 것이다.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육경한은 자기 머릿속의 고층 빌딩이 빠르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차가운 입술이 그녀를 강하게 침범할 때 소원은 마침내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힘껏 밀쳐내며 소리쳤다
몇 년 전부터 소원은 계획을 시작했다.다만 서현재의 등장과 그가 소원을 찾은 시점이 예상보다 빨랐다.그래도 괜찮았다. 육경한이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그녀에게는 기회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가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육경한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다른 사람과는 아이를 가질 수 있으면서 왜 나랑은 안 되는데? 다른 사람과는 연애할 수 있으면서 왜 나랑은 안 되는 거야?”소원은 그가 이런 말을 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육경한, 당신 정말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육경한은 순순히 인정했다.“응, 나 정신 나갔어. 안 그랬으면 어떻게 가짜인 너를 안고 5년 동안 잘 수 있었겠어?”소원이 역겨운 표정을 지은 것을 보고 육경한은 자존심에 크게 상처받았다.그는 그녀의 목을 움켜잡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소원, 네가 나를 속였잖아! 너라고 속였잖아!”“아니야. 그건 우연의 일치야.”소원은 그의 손목을 잡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미친놈, 정신병자, 변태, 나를 놔줘!”“그래, 난 미쳤어. 내가 미치지 않으면 네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맞지 않잖아!”육경한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소원, 우리 아이를 갖자.”소원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이윽고 육경한의 그녀의 셔츠를 벗기려 했다. 그의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했다.소원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소리쳤다.“육경한, 누가 너랑 아이를 가진다고 그래. 너 같은 짐승이랑...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셔츠 뒤의 단추를 잡아채며 아랑곳하지 않았다.“아이한테 잘해줄게. 우리 엄마가 여자 마음을 붙잡으려면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했어.”그는 소원을 좌석에 밀어 넣고 강하게 제압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간청했다.“소원아, 제발...”5년의 그리움과 고통이 한순간에 실체가 되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미친 듯이 그녀를 원했다.“비켜!”눈이 충혈된 채 소원은 그를 발로 차고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차 문이 열렸다.육경한의 비서인 소종이였다!그는 눈앞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고 놀라서 육경한을 안고 고통스럽게 외쳤다.“대표님!”그리고 소원은 여전히 그 말을 되뇌이며 혼란스러워했다.“나 사람을 죽였어...”소종은 소원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좌석에 세게 던졌다.그는 이 미친 여자에게 분노를 느끼며 그녀를 감옥에 보내고 싶어 했다.하지만 육경한이 어떤 상황에서도 소원을 보호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소종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소종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체포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요!”뒤이어 그는 육경한의 좌석을 평평하게 하고 소원을 뒷좌석에 앉히고 자신이 운전했다.좌석이 평평해지자 육경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항상 차가운 얼굴이 달빛에 더욱 창백해 보였고 정말로 죽은 것처럼 보였다.소원은 이렇게 연약한 육경한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그녀는 침착할 수 없었고 그가 숨을 쉬나 확인하려 했지만 손이 떨려서 할 수 없었다.깊은 밤의 고속도로는 고요했다.차 안의 죽음 같은 정적은 바깥보다 더 조용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채로 소원은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있었다. 그 난리 통 속에서 자신이 육경한을 찔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첫 순간, 그녀는 매우 당황했다.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고 가장 명확한 생각은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니 말이다.그들 사이에 얽혔던 일들과 집착, 증오가 그렇게 사라지길 바랐다.심지어 그녀는 그가 죽지 않았다면 다시 한번 그를 찔러서 죽게 할 생각도 했다.그러나 막상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육경한이 법의 심판을 받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계약 사기로 그녀의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때문에 단순히 죽는 것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된다.그렇지 않으면 소원이 이 냉혈한 육경한과 뭐가 다르겠는가?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끝내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
소원은 소종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육경한 있나요?”“없습니다. 대표님은 회의 중이에요.”이어 소원이 말을 꺼내려 하자 소종이 말을 끊었다.“대표님은 지금 소원 씨가 저지른 일 수습하느라 바쁘십니다. 소원 씨, 지난번 결혼식에 용감히 난입했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대표님이 어떤 심정으로 소원 씨를 그곳에서 데려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서씨 가문과의 협력이 몇 건이나 엎어졌습니다. 물론 서씨 가문에서 먼저 끊은 건 아니에요. 대표님이 그 서씨를 못마땅해하셔서 직접 협상 테이블을 뒤엎었거든요. 뭐, 그때는 속 시원했지만 지금은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밤낮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다친 몸으로 말이죠.”소원은 소종이 이렇게 말이 많았던 적이 있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얘기만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육경한이 무슨 일을 하든 소원은 관심 없었다.서씨 가문의 테이블을 뒤엎든 말든 그건 소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씨 가문의 재산은 서현재에게 돌아갈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오히려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함부로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하지만 지금 소원의 머릿속은 오로지 유진이의 안위뿐이었다.유진이 안전한지가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소 비서님, 육경한한테 전화 좀 바꿔줄 수 없을까요? 정말 급한 일이 있습니다.”그러자 소종은 비웃듯 물었다.“대표님더러 일하다 말고 소원 씨 전화를 받으라는 말씀이세요?”소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정말 급한 일이에요...”하지만 소종은 또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소원 씨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는 이어서 말했다.“소원 씨가 대표님에게 연락해서 좋은 일로 이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연락하지 않아도 소원 씨와 관련된 일은 항상 문제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우리 대표님은 매번 소원 씨의 뒷수습을 하느라 애쓰시네요.”“이번
차에 탄 뒤, 소원은 다급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경원 별장으로 가 주세요.”경원 별장은 육경한의 대저택으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택시는 산기슭까지만 갈 수 있었는지라 운전기사가 말했다.“아가씨, 그 대저택은 우리 같은 택시가 올라갈 수 없게 막혀 있습니다. 혹시 위에서 허가를 받은 게 있으신가요? 그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들어가길 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자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어쩔 수 없네요.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셔야 할 것 같네요.”결국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요금을 지불한 후 차에서 내렸다.운전기사는 소원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또 어떤 남자한테 상처받고 찾아온 여자겠지.’이 산 중턱에는 몇몇 재벌 가문의 대저택들이 모여 있었기에 운전기사는 궁금했다.‘과연 어느 재벌 2세가 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게다가 저 산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텐데.’소원은 첫 번째 보안 초소에 도착했다.이곳은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지만 소원은 육경한 집의 출입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이 비밀번호는 과거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몰래 알려준 것이었다.혹시나 유진이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소원이 들어가지 못해 문제라도 생길까 봐 미리 대비해둔 것이다.그렇게 소원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는 꽤 긴 거리였다.체력이 약한 데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걸어가야 했기에 소원은 정말 힘들고 지쳤다.이런 대저택에서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집안 관리인들조차도 전용 차량을 이용했기에 두 발로 이동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40분 넘게 걸어가서야 소원은 경원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대저택의 정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소원은 문을
하지만 유진은 특별한 아이였고 아줌마는 몇 년 동안 유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유진에게는 할머니가 없었지만 유진은 늘 아줌마를 할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소원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답장했다.[아줌마, 유진이 목소리 너무 오래 못 들어서 그러는데 목소리 좀 들려줘요.]그쪽은 답장이 매우 빨랐다.[아가씨, 다음 기회에 몰래 녹음해 드릴게요. 다른 도우미들이 한눈을 팔아야지만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잘 지내고 있고 아가씨 얘기도 거의 안 꺼내고 있어요.]소원은 경거망동하기 싫어 더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아줌마의 마지막 한마디는 사실 매우 불필요한 말이었다. 아줌마는 소원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진이 이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얘기는 소원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도 너를 버렸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말과 같았고 소원에겐 무조건 자극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아줌마가 소원을 따라다닌 지도 어언 7년이었고 거의 가족처럼 힘든 일 궂은일 다 같이 했다. 아줌마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 어떤 약점도 없었고 누군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고 해서 유진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소원은 이것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7년 만에 갑자기 변할 일은 없었고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지금 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줌마는 예전의 아줌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만약 아줌마를 빼돌린 거라면 아줌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소원은 전에 육경한에게 유진은 아줌마 없이 안 된다고 말했고 육경한도 아줌마를 잘 챙겨주겠다고, 다른 시터가 있어도 아줌마가 홀대로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소원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한참 지나 그쪽에서 영상을 하나 더 보내왔다. 유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시곡을 외우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와. 우리 유진이
아줌마가 보낸 건 유진의 근황 사진이었다. 옷도 계절에 맞춰 입었고 얼굴도 발그스름한 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소원은 약간 게걸스럽게 사진 속 유진을 바라봤다. 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유진을 보면 육경한이 떠올라 유진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유진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육경한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감정이 섞여 있으니 소원은 정서가 안정적인 엄마가 될 수 없었다.심리상담 주치의는 소원에게 유진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소원이 테스트를 통과해 아이 앞에서 정서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소원은 그 말에 따랐다.떨어져 지낼 때면 소원은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매번 새로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그 어떤 디테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봤다.소원은 아줌마가 보내온 사진을 부드럽고 따듯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육경한이 아이를 잘 돌볼 수만 있다면 양육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저 이렇게 뒤에서 유진의 성장을 지켜보며 유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가끔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유진은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소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에 소원은 유진이 새로운 가정을 더 좋아해 정서가 불안정한 엄마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며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이제 멀리서 유진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유진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별수 없이 손을 놔야 할 것이다.소원은 유진을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개체로 보며 유진을 존중하고 유진의 모든 생각을 존중했다. 사진을 조금 더 보고싶어 유진의 귀여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의도치 않게 사진의 아랫부분이 확대되었다. 소원의 얼굴을 보고싶어 다시 위로 올리려던 소원이 눈을 무언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유진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 방민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사진을 찍더니 아이를 육씨 저택으로 보내주고는 시터가 아이를 씻기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육경한에게 답장했다.“경한 씨, 미안해요. 유진이랑 놀아주느라 핸드폰 확인을 못 했네요. 씻기고 침대에 눕히니 이제 조금 확인할 시간이 나네요. 내게 가정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방민아는 유진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육경한에게 보내주더니 시터에게 눈치를 주자 시터가 방민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방민아는 CCTV가 없는 사각지대로 가서 이렇게 물었다.“그 아줌마 요 며칠 좀 어때요?”방민아가 물은 아줌마는 전에 소원이 유진을 보살펴달라고 위탁한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유진에게 진심이었기에 절대 유진을 해치지 않았고 돈으로 매수될 사람도 아니었다.하여 방민아는 그 아줌마가 먹는 식수와 음식에 다른 사람은 쉽게 발견하지 못할 미량의 독을 탔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다 더는 유진을 보살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방민아가 제일 좋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도 여전히 무슨 질병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했다.아줌마는 소원의 위탁을 받았는지라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옆에 꼭 붙어있으려 했다. 유진은 이제 아줌마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소원 못지않게 유진을 챙기고 보호했다.방민아는 아줌마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자 유진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별장 뒤에 있는 창고에서 지내게 했고 사람과 의사를 보내 아줌마를 보살폈기에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소종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보고할 때면 늘 방민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시터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아마 다음 달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방민아의 눈빛이 살짝 빛나더니 웃으며
유진이 처음 왔을 땐 정말 말 그대로 고슴도치 같았고 평소 그를 보살펴주던 시터와 아줌마 외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봤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변화라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육경한의 눈동자가 깊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종은 최근 방민아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유진을 보살피던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계속 휴가를 내고 쉬는 중이라 방민아가 매일 육씨 저택으로 가서 유진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덕분에 유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육씨 저택은 유진이 올 때부터 데려온 아줌마 외에 전문적인 시터 두 명을 따로 들였기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칠 걱정도 없었다.“방민아 씨 아이를 꽤 잘 다루는 것 같아요. 가정 심리 주치의도 작은 도련님 진료를 보고는 진보가 크다며 매우 만족해하셨거든요.”소종의 말에 육경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방민아가 요 며칠 보낸 안부 문자를 확인했다. 많이 보낸 건 아니었고 하루에 한두 개 정도, 그것도 다 육경한의 몸을 걱정하는 문자지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유진의 사진도 틈틈이 보내왔다. 유진이 진흙을 가지고 노는 사진, 책을 보는 사진,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사진, 그리고 밥 먹는 사진까지... 진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긴 했다.육경한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장을 보냈다....한편, 차 안에 있는 유진은 얌전하고 부드럽던 아까와는 달리 방민아를 살짝 무서워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모, 나랑 약속했잖아요. 말도 잘하고 행동도 예쁘게 하면 엄마 보여주겠다고.”방민아도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훈계했다.“조금 더 노력해야지. 아빠가 진짜 만족해야만 엄마 볼 수 있어.”유진은 금세 김이 빠졌다. 원래도 내향적인 성격이었기에 아까 그 연기가 살짝 버거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했다.왜냐하면 방민아가 육경한을 아빠라고 부르고 아빠와 몇 마디 대화해 아빠를 기쁘게 해주면
육경한은 방민아의 유도가 유진의 반감을 살까 봐 입을 열려는데 유진이 한발 빨랐다.“몸은 좀 나아졌어요?”나지막한 목소리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유진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빠.”이 말에 병실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방금... 뭐라고?”육경한은 믿을 수가 없어 큰소리로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 최대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이 착하지... 다시 한번 말해봐.”육경한이 흥분하자 유진이 살짝 놀랐는지 머리를 방민아 뒤로 숨기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방민아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유진과 눈을 맞추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아, 우리 아까 한 말 다시 아빠한테 들려주는 게 어떨까?”유진이 방민아와 육경한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린 채 이렇게 말했다.“많이 좋아졌요? 아빠.”이 목소리는 전보다 컸고 전보다 뚜렷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상처가 찢어져 너무 아팠지만 육경한은 꾹 참으며 유진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유진아... 아빠 괜찮아.”육경한에겐 머리를 만져주는 게 그가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어릴 때 육경한의 아버지가 육경한을 격려할 때도 머리를 쓰다듬어줬기에 육경한에겐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일종의 인정이자 칭찬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육경한은 자기 자신을 꼭꼭 싸맨 상태였고 괴물로 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원한에 사로잡힌 육경한은 가족 간의 사랑이나 윤리 도덕은 안중에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유진이 아빠라고 부르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소리는 그동안 육경한이 저지른 수많은 죄를 씻어내리는 천사의 목소리와 같아 육경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작게 기침했다.“민아 씨, 여기 아이가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에요. 일단 유진이 데리고 돌아가요.”“그래요. 경한 씨. 몸조리 잘해요. 국 좀 가져왔는데 이따 챙겨 먹어요.”방민아가 테이블에 놓인
육경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창백했고 입술 색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종은 육경한이 문 쪽을 보며 멍때리는 걸 발견했다. 육경한이 멍때리는 건 아주 드문 장면이었기에 소종은 순간 그런 육경한이 마음이 아팠지만 육경한이 실망할까 봐 어색하게 부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어제 병원에 같이 왔다가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 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집에 가서 쉬는 게 맞을 것 같더라고요.”소종의 말은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흐릿한 게 맥이 없었다. 그래도 소종은 음울해 보이는 육경한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대표님, 소원 씨 그래도 많이 감사해하더라고요. 그때 그 산길에서도 목숨 걸고 대표님을 끌어올린 걸 보면...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됐어. 너 나가.”육경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원이 어떤 태도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10번, 100번을 더 구해도 소원은 전혀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소원이 육경한에 대한 원한은 육경한을 깊숙한 지옥에 빠트려도 모자랄 정도의 그런 원한이었다.게다가 산길에서 만약 소원이 육경한을 알아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소원이 육경한을 해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살려야 하는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소원은 늘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육경한을 죽일 듯이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한 육경한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을 테고 육경한을 살리면 그런 자신이 밉겠지만 살리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소원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육경한은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이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엮일 때마다 서로 힘들어했지만 육경한은 소원을 아직 놓아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