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5년간 원지민은 문현미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이준혁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았다.하지만 원지민은 맹목적이었다.‘난 다른 여자랑은 달라. 지금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도 다 윤혜인 그 빌어먹을 년 때문이야.’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말하는 말투에서도 전혀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협박은 아니지만 한 번만 더 그러면 이 말을 현실로 만들어줄게.”원지민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리해졌다. 이 말에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서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준혁아,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뭘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다 죄가 되는 거지…”이준혁이 단칼에 그 말을 잘라버렸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지. 단지 속이 훤히 보이는 너의 속내와 수단이 나는 역겨울 뿐이야.”순간 원지민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오랫동안 사랑한 남자가 지금 그녀를 역겹다고 말하고 있다. 역겹다니, 어떻게 그런 말까지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원지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준혁아, 우리 원씨 집안은 늘 변함없이 너를 선택했어. 한 번도…”그때 문이 열렸다.주훈이 밖에서 들어왔다.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지민이 내보내. 그리고 앞으로 병실 출입 제한해. 아무나 들여보내지 말고.”이준혁의 차갑고 매정한 말은 마치 철퇴처럼 원지민의 따귀를 후려쳤다. 원지민은 볼살이 찢긴 것처럼 너무 아팠다.원지민이 뭔가 덧붙이려는데 주훈이 손짓하며 기계적인 말투로 말했다.“원지민 씨, 이쪽입니다.”원지민은 조각상처럼 정교한 이준혁의 얼굴을 보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눈빛은 어딘가 원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결국 원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준혁, 내가 뭘 했든지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나를 이렇게 대한 거 꼭 후회하게 해줄게.’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원지민의 눈빛은 매서워졌다.순간 원지민은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려야지.
뒤를 따르던 남자도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경비한테 제지당했다.경비는 남자를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호텔의 손님이 아니시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경비가 사람을 가려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경비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정말 도시 면모를 손상하는 정도였다.남자는 아마도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세탁하지 않아 굳은 흑갈색으로 변해버렸으며 멀리서도 남자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남자의 턱수염은 길게 자랐으며 떡처럼 지저분하게 뭉쳐 있었다.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먼지가 가득했고 온몸에서 깨끗한 구석을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딱 봐도 오랫동안 길거리에서 방랑하던 방랑객 같아 보였다.경비에게 제지당하자, 방랑객은 불평을 늘어놓았다.“누가 나더러 손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저 손님 맞아요!”경비가 말했다.“손님이 맞으신다면 이름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세요. 제가 조회해 드리겠습니다.”“제 이름은 주산응이에요. 저의 조카딸이 방금 호텔 안으로 들어갔어요. 조카딸을 찾게 들여보내 주세요.”주산응은 저번에 인하마음의 돈을 사기 친 후, 이튿날에 바로 외국의 카지노에 가서 하루도 안 되는 사이에 5억을 전부 날려 먹었다.그 5억이란 돈은 주산응이 힘들게 사기 쳐서 얻은 돈이었다.이제 와서 한 푼도 남지 않자, 주산응은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이 환전하려는 돈을 움켜쥐고 냅다 도망쳤다.카지노의 경비는 하나같이 싸움 잘하는 놈들이라 주산응이 도망가게 놓아둘 리가 없었다.주산응이 잡힌 후, 카지노 사장은 그가 5억을 소비한 걸 봐서 그의 세 손가락만 잘랐다.그리고 주산응더러 차용증에 서명하게 해놓고 카지노에서 일을 시키면서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주산응은 카지노에서 3년 가까이 사람답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 마침내 어느 날 카지노 사장이 방심한 틈을 타서 그곳에서 도망쳤다.도망쳐 나온 후 주산응은 어선을 따라 바다 위에서 1년 동안 일했다. 그리
“…”윤혜인은 성실하게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혀 절했다.“우선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점용한 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달밤의 모든 작품은 제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설계한 적 없기에 절대로 표절 작품이 아닙니다.”윤혜인은 당당한 표정으로 대범하게 대응했으며 전혀 소심하고 감추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이미 대부분 사람의 생각을 바뀌게 했다.그러고 나서 윤혜인은 또 디자인 원고와 마지막 집필 시간을 증거로 삼아 일일이 보여주었다.“계승이라는 시리즈는 제가 연수할 때부터 초안을 작성했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북성 엔터 대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 덕분에 제가 과감하게 ‘계승’ 시리즈를 북성 축제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의 디자인 원고가 왜 드림 작업실의 의상과 겹치는 지는--”윤혜인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앞줄로 튀어나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당신 왜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 당신 표절한 거 맞잖아요. 저에게 표절했다는 증거가 있어요!”구지윤이 무대 위로 올라오려고 했는데 윤혜인은 그녀를 막았다.윤혜인은 밑에 있는 여자를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증거가 있습니까?”그 여자는 득의양양하며 말했다.“저는 드림 작업실의 직원인데 당신 작업실의 직원이 사적으로 저희를 찾아와서 아무리 비싼 돈을 주더라도 그 옷을 사 가겠다고 했는데 증거를 인멸하려고 그런 짓을 한 거 맞잖아요!”이렇게 말하면서 그 여자는 구지윤이 드림 작업실의 직원과 그 옷을 사겠다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꺼냈다. 심지어 그들의 계좌 이체 명세를 큰 종이에 프린트한 것도 꺼내 보였다.현장에 있는 기자들이 촬영하는데 편리하도록 말이다.순식간에 기자들은 난리가 났고 너도나도 질문을 제기했다.“곽혜인 씨, 이 일이 사실입니까?”“곽혜인 씨, 왜 5배 되는 가격으로 낡은 디자인을 사드린 겁니까? 증거를 인멸하려던 것이
윤혜인이 이 말을 할 때 원지민은 바로 직전에 현장에 들어왔다.이 이름을 듣자, 원지민은 낯 색이 확 변했다!‘이 보잘것없는 여자가 윤아름의 딸이라고?’예전에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던 때부터, 윤아름은 상류 사회의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상류 사회에서 윤아름이라는 이름은 전설과 같았다.윤아름은 아주 복잡한 옛 그림을 짧디짧은 반달 만에 자신의 작품에 수놓은 적이 있었다!그런데 다가 관건은 윤아름의 정교한 솜씨는 아무도 뛰어넘을 수 없었다.어린 나이에 윤아름은 이미 천재 디자이너라는 칭호를 얻었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여왕도 러브콜을 보내서 윤아름더러 자신의 스페셜 드레스를 주문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었다.윤아름은 한때 성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윤아름은 은퇴 선언을 발표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이에 국내외에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근 20년 가까이 아무도 윤아름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그녀가 절에 숙녀로 들어갔다는 소문,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다...그러나 이런 소문들은 다 인증되지 않았다!원지민이 윤아름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은 윤아름이 자신의 작은 삼촌인 원진우와 남모르는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현장에 있는 기자들은 더 야단법석이었다.기자들 중에 윤아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지금 갑자기 윤아름의 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워했다!그들은 오늘 자기들이 헛되이 오지 않았으며 빅뉴스 하나를 건졌다고 생각했다.‘유명 디자이너의 딸, 얼마나 좋은 화젯거리가 되겠어!’기자들이 너도나도 질문 방향을 전환하는 걸 들은 원지민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고 입술 색도 조금 창백해졌다.‘이 여자, 왜 하필 윤아름의 딸이야!’윤씨 가문은 남청에 뿌리박고 살았으며 원씨 가문 못지않게 대단한 가문이었지만 내부에서 싸움이 잦았다.윤아름은 윤씨 가문의 큰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큰댁은 번창하지 못했고 윤아름의 부모님도 교
임세희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으니, 원지민은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했다.원지민은 방민아를 눈여겨보며 그녀를 괜찮은 후보로 여겼다.“방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이렇게 긴밀하게 협력하니, 민아 씨와 경한 씨의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죠...”방민아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원지민의 팔짱을 끼며 수줍게 웃었다.“그럼, 지민 씨가 이씨 가문 사모님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죠.”원지민은 태연하게 방민아의 말장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발표회를 열지 않는다면 원지민은 이준혁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을 하루라도 더 유지할 수 있었다.게다가, 원지민이 갖고 있는 카드는 이것뿐이 아니었다.‘준혁 씨가 나와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니, 꿈도 꾸지 마!’방민아는 계속 미래를 꿈꾸며 원지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기뻐하며 말했다.“너무 좋아요. 이제 결혼하면 저희 남편들이 서로 친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도 절친잖아요. 같이 신혼여행을 가도 되겠네요.”원지민이 줄곧 답이 없자 방민아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원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보고 방민아는 놀라서 물었다.“지민 씨, 왜 울어요?”원지민은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봐 겁난 듯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내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나가요...”원지민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방민아는 원지민의 팔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가 저에게 알려주지 않는 건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민아 씨, 제가 민아 씨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원지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민아 씨, 그만 물어봐요...”“안 돼요!”방민아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누가 지민 씨를 괴롭혔어요? 말해봐요. 제가 대신 혼내 줄게요!”원지민은 입술이 창백하게 변하며, 몹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제가 방금 만난 그 여자는 사실 준혁 씨의 전 와이프예요.”“이준혁 씨의 전 와이프라고요?”방
방민아는 의문스러웠다.“저랑 관련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원지민은 유유히 말했다.“곽윤혜 씨는 경한 씨의 첫사랑과 절친이에요.”방민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진아연 씨... 말하는 거죠?”육경한이 대외로 밝혔던 여자는 진아연뿐이었다. 그래서 방민아는 무의식적으로 진아연이 곧 육경한의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다.원지민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진아연 씨는 아니에요. 사실 경한 씨의 첫사랑은 예전 소씨 집안의 따님인데, 경한 씨와 그의 첫사랑 두 사람은 동창이기도 하고 소꿉친구이기도 해요...”“소씨 집안?”방민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몰락하면서 대표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는 그 소씨 집안 말인가요?”“맞아요. 그 소씨 집안 아가씨도 지금 서울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경한 씨와 아직 연락하는 것 같아요...”원지민은 마음이 놓이지 않은 듯 방민아에게 당부했다.“민아 씨도 조심하세요. 절친인 이 두 여자는 보통이 아니에요. 부리는 수가 정말 대단해요...”방민아는 그제야 육경한이 왜 얼굴 한번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쁜지 알았다.순간, 방민아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매섭게 얘기했다.“이 천한 년들, 너무 재수 없네요. 제가 사람을 찾아서 한바탕 혼내 줘야겠어요!”원지민은 방민아의 분노를 눈여겨보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올리더니 바로 방민아를 위로하는 척했다.“민아 씨, 흥분하지 말아요. 제가 민아 씨에게 얘기했다는 걸 경한 씨가 알면, 저도 준혁 씨 앞에서 곤란해져요...”방민아는 시원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전 어리석지 않아요. 지민 씨가 알려줬다는 걸 말하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기자회견 현장 쪽을 바라보며 분분하게 말했다.“남의 남자를 꼬시는 천한 년을 절대로 가만두어서는 안 돼요...”한편, 기자회견 현장에서, 그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여자는 여전히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기자들이 질문하는 동안, 아무도 표절에 대해 묻지 않자 그녀는 선 자리에서 불만스럽게 몇 마디 외쳤다.그러나 아무도 그 여자의
순간 현장은 적막에 잠겼다.행패를 부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한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싶었다.윤아름이 은퇴한 이상 윤혜인의 말 몇마디로 그녀가 윤아름의 딸이라는 걸 단정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역시나 기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그러게요. 일방적인 주장만 듣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그럼 윤 선생님이 만드신 윤씨 자수법을 시켜보는 건 어떨까요? 그 자수법은 따님만 전수받았다고 들었어요.”“그러게요.”한편, 여자가 온전히 깽판을 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걸 눈치챈 윤혜인은 매니저 도지훈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인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번 보여드리죠.”곧이어 스태프들이 도구를 챙겨오고 그 위에 천을 펼쳐놓은 다음 옆에 실과 바늘을 내려놓았다.그러자 모두가 흥분하기 시작했다.윤씨 자수법이 유명한 이유는 바늘과 실을 끊지 않고 단 번에 수를 놓는 것 때문이었다.베이스로 쓰는 실을 정한 뒤 다른 컬러의 실을 사용할 때는 특별한 묘한 기법을 사용해 실을 끊지 않고 수를 사용하는 기묘한 수법인 윤씨 자수법은 한때 윤아름이 자수를 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 비법을 알아내지 못했었다.태연하게 의자에 앉은 윤혜인이 드디어 바늘을 들었다. 가는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수의 밑그림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정교한 스킬에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가 더해져 보는 이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자수는 재미없는 취미라는 선입견과 달리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그 누구도 자수에 담긴 비법을 보아내지 못했다.그리고 30분도 되지 않아 아름다운 새끼 봉황이 천 위에 담겼다. 전체적인 모습부터 표정까지 말 그대로 예술 작품이었다.특히 그 빛이 담긴 그 눈은 어느 쪽에서 보든 확실한 걸작이었다.20년만에 다시 보는 윤씨 자수법 작품에 다들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그리고 윤혜인의 하얗고 가는 손을 바라보는 순간,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저
순간 당황한 여자가 바로 도망치려 했지만 다른 형사가 그녀의 앞을 마아섰다.“뭐야.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난 억울해.”난리통에 여자의 선글라스와 마스크가 벗겨지자 도지훈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정말 북성 엔터에서 혜인이 누나 험담을 하다 해고된 그 여자잖아?”“누나, 저 여자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도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방금 전 윤혜인이 그의 귓가에 한 말이 바로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이었다.성준이 확보한 CCTV 영상에 의하면 바로 저 여자가 축제 드레스를 보관하는 탈의실에 몰라 들어가 다른 스튜디오에 판매했고 그 과정에 드림 작업실에 들켜 표절 논란까지 일어났었다.‘아마 해고된 걸로 앙심을 품고 여기까지 와서 난리를 피운 거겠지. 엄마의 작품을 고가에 매입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걸 거야. 뭐, 경찰 조사에서 밝혀지겠지.’“입가에 점이 있거든.”평소 관찰력이 뛰어난 윤혜인은 한 번 스쳐지난 사람이라도 그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천재적인 스킬에 그녀를 바라보는 도지훈의 눈동자가 존경심으로 반짝였다.‘정말 볼 때마다 놀랍다니까.’보디가드들의 경호를 받아 무대에서 내려온 윤혜인은 배남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현장을 나섰다. 무례한 질문과 촬영을 막기 위해 내내 윤혜인의 앞을 지키는 모습에 다들 그가 윤혜인의 남자친구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피해 윤혜인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호텔 밖, 검은색 벤이 길가에 멈춰 있다.그리고 그 차에는 그림과 같은 옆모습을 자랑하는 남자가 앉아있다. 태블릿으로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던 이준혁은 실시간 댓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진짜 너무 잘 어울려요!”“너무 젠틀하잖아. 저 손 좀 봐.”“딸이 진짜 미인이네. 윤 선생님도 미인이시긴 했지. 역시 유전자의 힘이란!”사람들 앞에서 반짝이는 윤혜인의 모습은 5년 전과 같은 사람이라 보기 힘들 정도였다.‘윤혜인의 어머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
소원은 소종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육경한 있나요?”“없습니다. 대표님은 회의 중이에요.”이어 소원이 말을 꺼내려 하자 소종이 말을 끊었다.“대표님은 지금 소원 씨가 저지른 일 수습하느라 바쁘십니다. 소원 씨, 지난번 결혼식에 용감히 난입했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대표님이 어떤 심정으로 소원 씨를 그곳에서 데려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서씨 가문과의 협력이 몇 건이나 엎어졌습니다. 물론 서씨 가문에서 먼저 끊은 건 아니에요. 대표님이 그 서씨를 못마땅해하셔서 직접 협상 테이블을 뒤엎었거든요. 뭐, 그때는 속 시원했지만 지금은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밤낮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다친 몸으로 말이죠.”소원은 소종이 이렇게 말이 많았던 적이 있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얘기만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육경한이 무슨 일을 하든 소원은 관심 없었다.서씨 가문의 테이블을 뒤엎든 말든 그건 소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씨 가문의 재산은 서현재에게 돌아갈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오히려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함부로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하지만 지금 소원의 머릿속은 오로지 유진이의 안위뿐이었다.유진이 안전한지가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소 비서님, 육경한한테 전화 좀 바꿔줄 수 없을까요? 정말 급한 일이 있습니다.”그러자 소종은 비웃듯 물었다.“대표님더러 일하다 말고 소원 씨 전화를 받으라는 말씀이세요?”소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정말 급한 일이에요...”하지만 소종은 또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소원 씨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는 이어서 말했다.“소원 씨가 대표님에게 연락해서 좋은 일로 이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연락하지 않아도 소원 씨와 관련된 일은 항상 문제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우리 대표님은 매번 소원 씨의 뒷수습을 하느라 애쓰시네요.”“이번
차에 탄 뒤, 소원은 다급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경원 별장으로 가 주세요.”경원 별장은 육경한의 대저택으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택시는 산기슭까지만 갈 수 있었는지라 운전기사가 말했다.“아가씨, 그 대저택은 우리 같은 택시가 올라갈 수 없게 막혀 있습니다. 혹시 위에서 허가를 받은 게 있으신가요? 그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들어가길 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자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어쩔 수 없네요.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셔야 할 것 같네요.”결국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요금을 지불한 후 차에서 내렸다.운전기사는 소원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또 어떤 남자한테 상처받고 찾아온 여자겠지.’이 산 중턱에는 몇몇 재벌 가문의 대저택들이 모여 있었기에 운전기사는 궁금했다.‘과연 어느 재벌 2세가 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게다가 저 산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텐데.’소원은 첫 번째 보안 초소에 도착했다.이곳은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지만 소원은 육경한 집의 출입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이 비밀번호는 과거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몰래 알려준 것이었다.혹시나 유진이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소원이 들어가지 못해 문제라도 생길까 봐 미리 대비해둔 것이다.그렇게 소원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는 꽤 긴 거리였다.체력이 약한 데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걸어가야 했기에 소원은 정말 힘들고 지쳤다.이런 대저택에서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집안 관리인들조차도 전용 차량을 이용했기에 두 발로 이동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40분 넘게 걸어가서야 소원은 경원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대저택의 정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소원은 문을
하지만 유진은 특별한 아이였고 아줌마는 몇 년 동안 유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유진에게는 할머니가 없었지만 유진은 늘 아줌마를 할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소원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답장했다.[아줌마, 유진이 목소리 너무 오래 못 들어서 그러는데 목소리 좀 들려줘요.]그쪽은 답장이 매우 빨랐다.[아가씨, 다음 기회에 몰래 녹음해 드릴게요. 다른 도우미들이 한눈을 팔아야지만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잘 지내고 있고 아가씨 얘기도 거의 안 꺼내고 있어요.]소원은 경거망동하기 싫어 더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아줌마의 마지막 한마디는 사실 매우 불필요한 말이었다. 아줌마는 소원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진이 이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얘기는 소원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도 너를 버렸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말과 같았고 소원에겐 무조건 자극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아줌마가 소원을 따라다닌 지도 어언 7년이었고 거의 가족처럼 힘든 일 궂은일 다 같이 했다. 아줌마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 어떤 약점도 없었고 누군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고 해서 유진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소원은 이것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7년 만에 갑자기 변할 일은 없었고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지금 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줌마는 예전의 아줌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만약 아줌마를 빼돌린 거라면 아줌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소원은 전에 육경한에게 유진은 아줌마 없이 안 된다고 말했고 육경한도 아줌마를 잘 챙겨주겠다고, 다른 시터가 있어도 아줌마가 홀대로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소원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한참 지나 그쪽에서 영상을 하나 더 보내왔다. 유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시곡을 외우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와. 우리 유진이
아줌마가 보낸 건 유진의 근황 사진이었다. 옷도 계절에 맞춰 입었고 얼굴도 발그스름한 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소원은 약간 게걸스럽게 사진 속 유진을 바라봤다. 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유진을 보면 육경한이 떠올라 유진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유진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육경한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감정이 섞여 있으니 소원은 정서가 안정적인 엄마가 될 수 없었다.심리상담 주치의는 소원에게 유진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소원이 테스트를 통과해 아이 앞에서 정서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소원은 그 말에 따랐다.떨어져 지낼 때면 소원은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매번 새로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그 어떤 디테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봤다.소원은 아줌마가 보내온 사진을 부드럽고 따듯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육경한이 아이를 잘 돌볼 수만 있다면 양육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저 이렇게 뒤에서 유진의 성장을 지켜보며 유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가끔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유진은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소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에 소원은 유진이 새로운 가정을 더 좋아해 정서가 불안정한 엄마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며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이제 멀리서 유진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유진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별수 없이 손을 놔야 할 것이다.소원은 유진을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개체로 보며 유진을 존중하고 유진의 모든 생각을 존중했다. 사진을 조금 더 보고싶어 유진의 귀여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의도치 않게 사진의 아랫부분이 확대되었다. 소원의 얼굴을 보고싶어 다시 위로 올리려던 소원이 눈을 무언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유진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 방민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사진을 찍더니 아이를 육씨 저택으로 보내주고는 시터가 아이를 씻기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육경한에게 답장했다.“경한 씨, 미안해요. 유진이랑 놀아주느라 핸드폰 확인을 못 했네요. 씻기고 침대에 눕히니 이제 조금 확인할 시간이 나네요. 내게 가정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방민아는 유진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육경한에게 보내주더니 시터에게 눈치를 주자 시터가 방민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방민아는 CCTV가 없는 사각지대로 가서 이렇게 물었다.“그 아줌마 요 며칠 좀 어때요?”방민아가 물은 아줌마는 전에 소원이 유진을 보살펴달라고 위탁한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유진에게 진심이었기에 절대 유진을 해치지 않았고 돈으로 매수될 사람도 아니었다.하여 방민아는 그 아줌마가 먹는 식수와 음식에 다른 사람은 쉽게 발견하지 못할 미량의 독을 탔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다 더는 유진을 보살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방민아가 제일 좋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도 여전히 무슨 질병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했다.아줌마는 소원의 위탁을 받았는지라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옆에 꼭 붙어있으려 했다. 유진은 이제 아줌마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소원 못지않게 유진을 챙기고 보호했다.방민아는 아줌마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자 유진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별장 뒤에 있는 창고에서 지내게 했고 사람과 의사를 보내 아줌마를 보살폈기에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소종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보고할 때면 늘 방민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시터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아마 다음 달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방민아의 눈빛이 살짝 빛나더니 웃으며
유진이 처음 왔을 땐 정말 말 그대로 고슴도치 같았고 평소 그를 보살펴주던 시터와 아줌마 외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봤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변화라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육경한의 눈동자가 깊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종은 최근 방민아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유진을 보살피던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계속 휴가를 내고 쉬는 중이라 방민아가 매일 육씨 저택으로 가서 유진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덕분에 유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육씨 저택은 유진이 올 때부터 데려온 아줌마 외에 전문적인 시터 두 명을 따로 들였기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칠 걱정도 없었다.“방민아 씨 아이를 꽤 잘 다루는 것 같아요. 가정 심리 주치의도 작은 도련님 진료를 보고는 진보가 크다며 매우 만족해하셨거든요.”소종의 말에 육경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방민아가 요 며칠 보낸 안부 문자를 확인했다. 많이 보낸 건 아니었고 하루에 한두 개 정도, 그것도 다 육경한의 몸을 걱정하는 문자지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유진의 사진도 틈틈이 보내왔다. 유진이 진흙을 가지고 노는 사진, 책을 보는 사진,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사진, 그리고 밥 먹는 사진까지... 진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긴 했다.육경한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장을 보냈다....한편, 차 안에 있는 유진은 얌전하고 부드럽던 아까와는 달리 방민아를 살짝 무서워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모, 나랑 약속했잖아요. 말도 잘하고 행동도 예쁘게 하면 엄마 보여주겠다고.”방민아도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훈계했다.“조금 더 노력해야지. 아빠가 진짜 만족해야만 엄마 볼 수 있어.”유진은 금세 김이 빠졌다. 원래도 내향적인 성격이었기에 아까 그 연기가 살짝 버거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했다.왜냐하면 방민아가 육경한을 아빠라고 부르고 아빠와 몇 마디 대화해 아빠를 기쁘게 해주면
육경한은 방민아의 유도가 유진의 반감을 살까 봐 입을 열려는데 유진이 한발 빨랐다.“몸은 좀 나아졌어요?”나지막한 목소리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유진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빠.”이 말에 병실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방금... 뭐라고?”육경한은 믿을 수가 없어 큰소리로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 최대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이 착하지... 다시 한번 말해봐.”육경한이 흥분하자 유진이 살짝 놀랐는지 머리를 방민아 뒤로 숨기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방민아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유진과 눈을 맞추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아, 우리 아까 한 말 다시 아빠한테 들려주는 게 어떨까?”유진이 방민아와 육경한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린 채 이렇게 말했다.“많이 좋아졌요? 아빠.”이 목소리는 전보다 컸고 전보다 뚜렷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상처가 찢어져 너무 아팠지만 육경한은 꾹 참으며 유진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유진아... 아빠 괜찮아.”육경한에겐 머리를 만져주는 게 그가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어릴 때 육경한의 아버지가 육경한을 격려할 때도 머리를 쓰다듬어줬기에 육경한에겐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일종의 인정이자 칭찬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육경한은 자기 자신을 꼭꼭 싸맨 상태였고 괴물로 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원한에 사로잡힌 육경한은 가족 간의 사랑이나 윤리 도덕은 안중에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유진이 아빠라고 부르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소리는 그동안 육경한이 저지른 수많은 죄를 씻어내리는 천사의 목소리와 같아 육경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작게 기침했다.“민아 씨, 여기 아이가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에요. 일단 유진이 데리고 돌아가요.”“그래요. 경한 씨. 몸조리 잘해요. 국 좀 가져왔는데 이따 챙겨 먹어요.”방민아가 테이블에 놓인
육경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창백했고 입술 색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종은 육경한이 문 쪽을 보며 멍때리는 걸 발견했다. 육경한이 멍때리는 건 아주 드문 장면이었기에 소종은 순간 그런 육경한이 마음이 아팠지만 육경한이 실망할까 봐 어색하게 부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어제 병원에 같이 왔다가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 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집에 가서 쉬는 게 맞을 것 같더라고요.”소종의 말은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흐릿한 게 맥이 없었다. 그래도 소종은 음울해 보이는 육경한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대표님, 소원 씨 그래도 많이 감사해하더라고요. 그때 그 산길에서도 목숨 걸고 대표님을 끌어올린 걸 보면...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됐어. 너 나가.”육경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원이 어떤 태도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10번, 100번을 더 구해도 소원은 전혀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소원이 육경한에 대한 원한은 육경한을 깊숙한 지옥에 빠트려도 모자랄 정도의 그런 원한이었다.게다가 산길에서 만약 소원이 육경한을 알아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소원이 육경한을 해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살려야 하는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소원은 늘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육경한을 죽일 듯이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한 육경한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을 테고 육경한을 살리면 그런 자신이 밉겠지만 살리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소원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육경한은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이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엮일 때마다 서로 힘들어했지만 육경한은 소원을 아직 놓아주기